시기케 하는 복음 (행 5:12-26)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바른) 『당신은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두고, 도장같이 팔에 남겨 두세요. 참으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며, 질투는 스올같이 잔혹하고, 그 불꽃은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여호와의 불 같습니다.』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아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아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아 8:6, 킹흠정)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무덤같이 잔인하니 그것의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아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아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아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아,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아 8:6, 가톨릭)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3, 개역)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11:15, 개역)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6, 개역)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행 5:12, 개역)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행 5:13, 개역)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행 5:14, 개역)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행 5:15, 개역)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행 5:16, 개역)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행 5:17, 개역)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행 5:18, 개역)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행 5:19, 개역)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행 5:20, 개역)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행 5:21, 개역)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행 5:22, 개역)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행 5:23, 개역)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행 5:24, 개역)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행 5:25, 개역)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행 5:26, 개역)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서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 함이러라』
복음의 구조는 항상 차이의 반복이다.
지난 시간에 성령충만이 넉넉하게 넘치는 가운데
졸지에 육의 개입이 과연 성령이라는 선물 속에 들어갈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성령개방인가? 성령근육운동인가? 하는 점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또렷하게 하기 위해서 단절성이 부각이 된다.
개방을 외치는 인간에게
참예와 화합 연합을 외치는 인간에게
정작 세례라는 단절(할례:심판)로써 더욱더 성령의 역사를 풍성하게 증식 확장 미쁘게 넘친다.
아무나 그 풍성함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을 단절로써 더욱더 부각시키는 것이다.(일만달란트 용서의 임금 비유)
희소가치성을 간격벌리기로써 희소화 시키듯이 말이다.
아무나 참여할 수가 없다. 종말잔치가 그러하다고 했다.
(임금이 아들혼인잔치를 벌리는 비유에서 졸지에 피비린내나는 살육과 살생의 현장으로 드러난데 그 단절(살생 살육)이 혼인잔치 다움을 극대화 시킨다.)
더욱더 영광을 받는 것이다.
뭐가 아쉬워서 영광 못 받을 일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럼으로 성령이 충만한 이 사건에서 악령이 여기에 그 성령의 충만함의 확정을, 명료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악령이 들어간 자가 왜 성령 충만에서 배제됨이 마땅한가를 보여줌으로써
성령이라는 선물은 예수님의 죽음의 풍요함으로써 주어지는 선물이다.
선물 받는자가 아닌 선물 주시는 자를 더 높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무조건이다.
여기에 애굽왕과 애굽의 군사의 강퍅함이 동원이 되어야 그 영광이 빛을 발하듯이...
결국 시기하고 투기하고 질투할 줄 모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아닌 것을 허용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 뿐이지
다른 통로로써 허용하는 것이 없다.
그 십자가의 피 용서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이 죽음은 철저한 단절이다.
저주이다. 지독한 미움받으심이다. 심판받으심이다.
그 증거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를 싫어한 바였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 어떤 누구도 얼굴 한번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은 싫어버린바 됨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소통이다.
그런데 얼굴을 돌려 버리는 것은 소통하기 싫다 단절 뿐이다 라는 선언이다.
우리가 그를 싫어해서 얼굴을 돌려서 단절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인자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
그 원인이 지난 시간에 악령이라고 했다.
그 악령은 그 어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있다.
그 악령을 들키는 자가 바로 은혜받은자이다.
다윗이 그래서 정직한 영, 순전한 마음이 없다 라고 했다.
그 마음을 들키도록 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피 사건이다.
피 만이 우리 속에 있는 악령을 지적할 수가 있다.
물론 같이 지적 당할 수밖에 없다.
암덩어리가 나를 숙주로 삼아서 나를 먹이로 삼는데 있어서
암덩어리만 지적 받을수가 없다. 그 암덩어리의 먹이인 나도 함께 지적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단절성 때문에 아나리아와 삽비라는 그 단절성을 지적받는다.
이것이 아나리아와 삽비라만의 문제인가?
다윗 만의 문제인가?
십자가란 보편적인 문제이다.
내 구원을 챙길수가 없음이 이 보편적인 십자가 사건 앞에서 더욱더 명확해 진다.
도리어 우리는 십자가 로부터 갈기 갈기 찢겨져야만 한다.
암제거 이다.
때론 죽을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십자가가 나를 손댄 이상 암을 손대겠다는 취지이다.
그 십자가만 옳았으면 된 것이다.
그 십자가가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고 투기하지 않는다는 그 십자가는 가짜이다.
내 속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너무 너무 당당하다.
나를 손대겠다는 것이다.
그 손대는 것은 회피하겠다고
다윗은 회개를 함으로써 회피할려고 했고
금식을 함으로써 회피할려고 했고
눈물기도를 함으로써 외면할려고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가로막음으로써 외면할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너를 장악한 숙주가 된 모습임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어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가?
그랬던 그 베드로가 아나리아와 삽비라를 무참하게 죽여버린다.
베드로는 사람이 아니무이다.
사도이다.
사도란 기능이다. 십자가의 징후이다. 메신져이다. 그 기능에 인간은 초코파이 정으로 넘어갈수 있는 것이 없다.
어차피 못 막는다. 도리어 그 기능을 더욱더 또렷하게 보여주도록 되어 있기에
외면해 본들 더욱더 명료해질 뿐이다.
내가 명료한게 아니라 기능(기계)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즉 거룩하다. 차이가 난다.
모호한 내가 그 명료한 기계(기능을 수행하는)를 막을길이 없다. 기계는 생산 즉 결과만을 도출시키도록만 되어있다.
예수님의 주의 기능은 십자가의 죽음을 반드시 생산해 내었듯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이 하나님의 일에 반드시 사람의 일이 차이나야만 하는 이유로 동원이 된다.
오늘 본문은 다시 아나리아 삽비라의 죽음으로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보여준다.
마치 주고 받고 주고 받고 하는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식이다.
늘 대조적인 구조로써 한번은 성령의 소욕 사건이, 그 다음은 그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사람의 일인 육의 소욕이, 다시 그 다음 사건은 그 육의 소욕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의 일이, 늘 이런 구조로써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에 성령 충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게 되니
이거 뭐 감당이 불감당이다.
믿는자들이 더욱더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 늘어났다는 증거가 다시 그 다음 사건인 육의 소욕이 시기하는 사건으로써 등장하기 때문에 또다시 명료해진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을 옥에 가둔다.
복음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인 인간의 모습인가? 육의 소욕이 겨우 하는 짖이 옥에 가두고 죽이고 입을 막고 차단하면 차단된다고 여기는 모습이 육의 소욕이다.
여기에 보란 듯이 그 옥에 갇혀진 사도들이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옥 자체를 그 감옥 자체를 성령이 충만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이 장소라는 공간 즉 시간을 저장하는 메모리저장 공간을 성전을 특화화 하듯이
그 반대로 감옥이라는 공간을 징벌의, 저주의 장소로 특화화 곧 법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해서 과연 저주의 장소가 되느냐 하는 점이다.
이 버릇은 바벨탑을 만들어 구원의 장소로 만들 듯,이런 육의 소욕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이 육의 소욕을 깔고서 대조적으로 반드시 대조적으로 그 장소를 축복의 장소로 성령의 소욕으로 만들어 버리신다.
반대로 성전이라고 움켜쥐고 있는 축복의 장소는 졸지에 저주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아뿔사 팔을 어긋맞게 할 줄이야!.
결국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지는 그 소욕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공간에 가두고 고립시키면 그것이 고립이 되어 썩게 되는 줄 알고 있다.
그런 인지가 바로 시간에서 비롯된다. 시간이라는 역사를 통해 습관해 된 모습을 여전히 성령의 소욕에서도 개입하면 그렇게 되는줄 알고 있다.
그 인식이 바로 지난 시간에 했던 아나리아와 삽비라의 사고방식이였다.
마귀가 장악한 인간의 모습이다.
성령의 소욕에 마저도 개입할려는 것이다.
여기에 단절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아니 단절 자체에 뛰어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초코파이 정으로까지 가로막을려고 했던 베드로의 손을 뿌리치고 죽음에 뛰어든다.
저주에 뛰어든다. 심판에 뛰어든다. 종말에 뛰어든다.
곧 단절에 뛰어드는 것이다.
절대로 넘어올수 없는 그 간격을 극대극으로 벌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단절에 뛰어듬으로써 모든 것은 전복이 된다.
삶이 죽음이 되고
죽음이 삶이 되어버린다.
이 십자가를 새창조하신 것이다.
질투를 창조한 것이다.
시기를 창조한 것이다.
나를 미워할 줄 모르는 십자가는 가짜다.
나를 지옥 보낼줄 모르는 십자가는 가짜다.
그 복음을 대제사장과 서기관 앞에 들이대면서 반드시 그들이 시기케 만들어 버린다.
복음이 앞장서서 말이다.
복음이 그들을 피해다니면서 도망치면서 재수없게 걸려서 시기와 미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들이 그럴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쳐들어가서 그들 코 앞에서 시기케 만드는 십자가 사건을 재현 확장 증식이 된다.
예수님을 죽일 때 보다 더 격렬한 충돌로써
이거 뭐 한 사람 죽일 때 보다 더 골치아프게 작용하는 것이다.
제대로 정곡을 찌른 것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뻗어나간다.
도통 막을 길이 없다.
가두어도 죽여도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 붓기만 될 뿐이다.
맹렬한 불을
저들도 감당 못할뿐더러
베드로도 사도들도 감당이 불감당이다.
베드로 죽여도 무용지물인 맹렬한 불이다.
임의로 부는 바람을 잡겠다는 짖처럼 그 손이 허망해 짐과 똑같다.
감옥이 그들의 안식처가 되고
죽음이 그들의 평안이 되며
저주가 그들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성령의 소욕을 무슨 수로 객관화 하며, 개방적으로 만들며, 근육키워서 포착하며,
지식을 쌓아서 나의 소유로 삼을수 있다는 말인가?
단절이 단절 답게 하기 위해 도리어 소유 당할 뿐이다.
그 소유를 보기 위해서
더욱더 원수의 자리에 놓여질 뿐이다.
원수가 발등상에 앉기까지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우리가 그 발 아래에 놓여지기 까지
주의 오른팔은 오른팔 값을 하시고자 죄인을 찾아헤맨다.
죄인 중이 괴수를 찾아 발 아래 두신다.
그런데 정작 사도들이 발 아래에 놓여지는 바 된다.
그러나 정작 사도들을 잡아 미끼로 문 그들이 같이 발아래에 놓이게 된다.
당황하고 이리저리 안절부절해 하는 쪽은 덮썩 미끼를 문 쪽이다.
사도들을 잡아 발아래 심판대에 두었는데
정작 그들이 미끼를 문 그들이 발아래 놓여지게 되었으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역전의 막장 드라마인가?
사도들을 시기케 미움 속으로 집어넣었는데
도리어 시기를 받아 미움 속으로 들어가게 될 판국이니 이 얼마나 싫어버린바 되었을까?
복음을 시기하다가 도리어 복음에 시기 당하는 것이다.
그 메신져 선물보따리 택배꾼이 바로 사도들이다.
갈구어도 소요없다. 감당이 불감당이다.
복음을 실어 나르는 짜장면(십자가) 배달꾼이다. 그 통로를 차단한다고 취소되는 복음은 없다.
취소될 리가 없음을 직시하라고 그 단절을 격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시기심이 더 큰지?
인간의 시기심은 기껏 자기해체 해탈의 경지에 이루어 보겠다는 심뽀 뿐이다.
그 사심을 다수화 한다고 객관화 되는게 아니다.
보편적 시기심이 바로 십자가다. 그 시기심을 보편화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제 인간의 모든 영역 구석 구석이 주의 목전에 놓였다.
주의 발등상에 놓인바 되었다.
지옥도 피해가지 못한다.
주의 주 되심이 이 십자가로 지옥까지도 보편화됨에
십자가의 영광은 이 시기로 투기로 맹렬히 타오른다.
지옥불도 감당치 못하는 질투의 불이다.
자 이것이 핵심이다.
왜 사랑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투기를 하는가?
왜 십자가는 시기케 하고 질투하고 투기를 하는 것일까?
바로 마귀를 거치라는 것이다.
사랑은 마귀 앞에서 약올리듯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귀 보는 앞에서 사랑이어야 사랑답다.
마귀가 싫어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시기케 하는 사랑이어야만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랑이다.
다윗은 마귀를 거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기사랑에 시험든다.
그래서 그 다윗을 단절시키고자 다윗을 분절 즉 쪼개어버린다.
갈기갈기 쪼개어진 다윗은
마귀가 쳐 놓은 이 올무를 넘어보라는 것이다. 넘지도 못하면서 무슨수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동산 중앙에 벌거벗은 여인을 선악과처럼 놓여져 있으니 그 시험 그 유혹 넘어서보라는 것이다.
이 욕심이 잉태하니 연달아 죄를 낳아 죄가 장성한다.
우리야 장군의 여호와 전쟁에만 몰두되어 있는 그 믿음을 과연 시기하지 않을수 있느냐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 욕심을 무슨수로 자기스스로 덮어서 구원을 여전히 유지할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야 장군을 죽도록 해서 그는 여전히 믿음 좋은 사람이였고 그러나 죽었고 나는 살아 있어서 믿음 좋은자로써 여전히 남고 그의 아내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죄가 장성하니 사망을 낳은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이스라엘의 왕다움은커녕 십계명 하나 어기니(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연달아서 십계명이 다윗에게 덮쳐져서 1계명 2계명 연달아 뻥뻥뻥 어기지 않으면 안되도록 몰아붙인다.
그렇게 성공하고 나니(누가 성공했나? 다윗이? 천만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 다윗을 죄인 만드는데 성공) 이제는 아이를 죽이신다. 아이 내 놔라, 장자 내 놔라, 다윗이라는 신체 자체가 애굽의 성곽처럼 10가지 재앙에 공격당한다. 마지막 장자 재앙처럼 내 놔라 아들 내놔라.
뭐 아이도 못 내어 놓으면서 예수님을 사랑해?
예수님 나빠요? 예수님이 뭐 식인 제사 받는 분입니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요구하십니까?
차라리 날 죽이세요 날 죽여? 제발 이 아이만은! 아무잘못 없는 이 아이만은!
상하고 썩어문들어지는 마음이 비로소 예수님의 죽음 앞에 마중 나오게 된다.
여기에 다윗(아브라함)은 비로소 무너진다.
회개도 소용없는 단절
눈물도 소용없는 단절
금식도 소용없는 단절
제사도 번제도 믿음도 행함도 소용없는 단절의 십자가
다윗(아브라함)의 무너짐도 소용없는 단절
다윗 쪽에서 사랑하겠다는 것은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사랑하겠다는 것과 같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를 드렸다 라고 하셨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마귀도 못 넘으면서 사랑하겠다는 것은
마귀가 시기치도 못하는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는 가짜사랑이다.
닭 울음 3번도 못 넘어서면서? 사랑하겠다고?
뭐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무슨수로 이 3번이라는 3일의 간격을 넘어설 것인가?
그 단절의 간격인 죽음의 3일 말이다.예수님께서 넘어오심이다.
아예 못 넘도록 감히 그 막힌 담 앞에서 한계만이 나오록 하신다.
아니 아예 못 넘어설줄 알고 미리 준비하신 여디디야로 넘어오신다.
마귀를 거치지 않고 넘어갈려는 사랑이 가짜임을 지적당함으로써 사랑을 제대로 보여주신다.
마귀가 시기케 하는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넘어오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마귀가 무시함으로써
마귀가 시기치도 않는 사랑인
개방 사랑, 성화 사랑, 근육 사랑, 행함 사랑으로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다.
아직까지도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다가갈려고 하는가?
마귀도 못 이기는 주제에
마귀란 못 이기도록 하신 주님의 뜻인데?
바로 이런 사랑으로 가득찬 자들이
감옥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진짜 사랑을, 마귀가 시기하는 사랑을 가두어 버렸다.
갇혀버린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졸지에 그 감옥이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
감옥이라고 죽음이라고 만들어 버린 마귀를 시기케 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하겠다는 가짜 사랑은 마귀도 시기케 못할뿐더러
감옥을 사랑의 장소로 만들줄도 모른다.
지옥도 저주도 사랑으로 만들줄도 모르면서
마귀도 거치지 않으면서 율법을 거치겠다는 꼴이다.
다윗은 이 지적을 받는다. 사랑으로부터 지적을 받아야 가짜사랑인 자신이 들통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의 목전에서 항상 죄 밖에 없었음을 말이다.
그래서 마귀까지 동원시키시는 주님의 일에 감사할 뿐이다.
마귀 보는 앞에서 마귀가 죽도록 시기하는 그 사랑을 마귀보란 듯이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무리 채워도 소용없다. 감사하게도 지식도 주님이 하신것이요.
지식을 주신 그 관계처럼 그 내용도 가득 가득 채우시는 관계가 바로 십자가에서 맺어진다.
(모든 지식은 위장이다 라고 라캉이 말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역사를 반성하면서 여호와의 지식을 채웠던가? 그러나 정작 어리석은 지혜(지식)이 오니 바로 정죄하고 심판해 버린다. 지식이 인물일줄 그것도 싫어버린바 된 인물일줄 누가 알았던 가? 십자가라는 할례 곧 마음판의 할례보다, 손으로 하는 할례만을 철저하게 했듯이 이들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철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는 지식을 무시해 버렸다. 바로 이 십자가는 그런 인간의 죄악을 건드리면서 오기에 참지식이요 참지혜되는 인물이다. 오직 죽음으로 걸고서 넘어오시는 사랑이다.)
죽도록 사랑하시는 것이다.
죽음으로 공포를 조장해서 사도들과 복음을 막을려고 했는데
도리어 죽음이라는 공포를 두려워 하는 자들이 대제사장과 성전종사자가 되어버렸다.
(행 5:26, 개역)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서서 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 함이러라』
감옥에서 벗어나서 도망을 쳤다면 더욱더 다이나믹하게 쫏는자가 나타나서 또 그 다음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서 도망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듯이
도리어 안방을 차지하듯이 더 자유롭고 더 당당하게 주님과의 사귐에 놓여지듯이
(행 5:25, 개역)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주 안에, 말씀 안에 놓이게 되니
두려워 떠는 것은 도리어 감옥에 가둔자들이 떨게 된다.
다니엘을 불에 넣으니까 타죽는 쪽은 불 속에 들어간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불 밖에서 다니엘을 불 속에 집어넣은 자들이 타죽는
불 바깥이 도리어 두려워 떨고
불 속에서는 춤추고 노래하고 신나게 막살고 놀고 기뻐하며 웃음꽃이 넘쳐난다.
이유는 딱 하나이다.
마귀만이 시기하는 예수님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과 함께 하심이다.
이 함께하심 때문에
이 사귐 때문에
도리어 바깥에서 시기와 질투와 투기가 넘쳐난다.
복음만이 마귀를 시기한다.
또 역시 마귀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시기한다.
이 두 소욕의 싸움의 충돌에
그 경계선에 다윗이 놓여졌듯이
우리도 놓여지게 된다.
지금 주님은 성령을 받은 자들을 마귀보란 듯이 마귀 코 앞에 놓이게 하신다.
진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얼마나 사랑이 죽음의 불 지옥의 불 보다 더 강한 시기의 불로써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반드시 마귀 앞에서 보이신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 속에 있던 마귀도 쫏겨나고
우리 또한 이 사랑에 혀를 내 두를 정도로
아 주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군요 라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사랑 축에도 못듬을
오로지 주님께서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셨음을
마귀가 시기하는 그 사랑의 값을 명료하게 보여주신다.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그 사랑 마저도 꺽어버릴 정도로
마귀도 못 막는 사랑을
우리는 건방지게 성령으로 외칠수가 있다.
우리야 장군도 고의적으로 죽이고(다윗)
스데반 집사도 고의적으로 죽이고(사도바울)
예수님도 아주 아주 고의로 죽였던(성령받은 성도)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뻔뻔스럽게 주의 사랑을이 십자가의 사랑을 당당하게 외칠수가 있는가?
그것도 마귀 보란 듯이 말이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하신다.
우리가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숙제이다.
우리는 그저 그 현장에서 지적당하듯이
다윗이 원수가 되어 발등상에 놓여지듯
우리는 마귀들에게 송사 당해 발등상에 놓여지듯 지적당하면서
주의 오른팔이 함께하심을
주님의 넘어오심으로 보게 된다.
이 넘어오심 때문에 반드시 원수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솔로몬 재판, 십자가의 심판)
우리가 볼 것은 마귀도 아니요 나 자신의 맹세도 아니요
그 쓰잘데 없는 나의 믿음도 아니요
나의 참음도 아니요
나의 울음 기도 금식 봉사 찬양도 아닌
오로지 마귀만이 시기하는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 만을 바랄 뿐이다.
개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도 먹고 산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멍멍이 개가 되어서 비로소 마귀의 시기를 받게 된다.
십자가의 심판의 칼날에 두동강이 나야할 마귀의 송사물로써
이런 마땅히 저주받아야할 죄인조차도,
그 새카맣고 먹보다더 더 검은 죄악의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는
그 예수님의 믿음만을 보기 위해, 주의 사랑이 넘어오심을 보기 위해,
막힌 담을 헐고 넘어오시는 휘장을 찢고 넘어오시는 그 거룩 때문에,
반드시 죽음에 놓여지도록 되어 있다.
주님의 사랑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왕에게 함께하시지 않으시고
왜 개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실까?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어리석은 십자가의 사랑의 놀라움을 알길이 없도록 단절 시켰기 때문이다.
그 단절이 유일한 사랑인 함께하심(성령세례)이다. 십자가의 영광이다.
성도를 매일 매일 죽이시는 주님
매일 매일 감옥에 가두어 버리시는 주님
매일 매일 마귀의 송사로 저주 속에 놓이게 하시는 주님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속에 넘치도록 베푸시는 배려다.
과연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지옥의 불 보다 잔혹스러운 질투의 불을 보여주시고자
주님은 무모스럽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돌파 하신다.
주님! 세상이 시기하는 사랑을 우리가 원치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내가 만족하는 사랑만을 원했던 그런 우상에 우리가 빠져있습니다.
그 허구를 구원을 뿔로 뚫어주시고
마귀만이 시기하는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의 화목제물만 쳐다보게 하소서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신 그 진짜 사랑만이
나 라는 허구에서 벗어날 수 있사오니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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