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터치(노다지) 성령 (행 4:11-31)
접근 불가 성령 (단절로서의 성령)
(행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3, 개역)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 4:14, 개역)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행 4:15, 개역)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행 4:16, 개역)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 4:17, 개역)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 4:18, 개역)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4:19, 개역)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20, 개역)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 4:21, 개역)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행 4:22, 개역)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행 4:23, 개역)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행 4:24, 개역)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행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 4:27, 개역)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 4:28, 개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9, 개역)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 4:30, 개역)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31, 개역)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선물이란 선물을 받는 자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자를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선물이라는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결국 선물을 일종의 약속이요 편지라고 보면
그 편지가 주체가 누구인가를, 발신자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편지는 또는 사신은 또는 메신져는 하나의 빈껍데기 역할로써 부재성이 부각이 됩니다.
분명히 빈자리 임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를 빈 껍데기를 그 부재성을 무시했다가는
그 무시한 값을 톡톡히 함으로써 그 편지라는 빈종이에 담긴 의미가 졸지에 감히 감당할수 없는 의미로써 자리잡게 됩니다.
(종말잔치 비유)
(마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개역)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개역)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지금 베드로는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그 빈자리에 성령이라는 선물이 떡 하니 자리잡게 되니
베드로 조차도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그리고 감히 감당할 수가 없는 사도라는 직분을 기능으로써 발휘하는 하나의 메신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원해서도 아니요, 또 하고픈 말을 자유롭게 하고파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위에서 누르는 리모콘에 조정 당하듯이 자신도 모르게 감히 내 뱉을수가 없는 말을 내 뱉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지금 베드로를 하나의 문제꺼리로 삼아버립니다.
저 베드로가 없다고 여겨버리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텐데
베드로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저 베드로만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진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걸려들고 말려드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를 뒤에서 다루고 있는 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이 의식하는 베드로는 점점점 그들의 무의식을 자극해 버리는 하나의 공포로써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이런 방식은 율법을 줘서 그 율법을 왜 못 지키냐고 다구치면서
공포로 자리잡게 되는데
다들 공포에 자리잡게 되는데 있어서 유일하게 예외적인 사람이 하나의 껍데기 빈자리로써 딱 돌출시키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을,
죽기가 무서워 사망의 종노릇하는 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게 되는
맞물려서 작용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게 바로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입니다.
그 이전에는 바로 이 여성성입니다.
육체는 여자의 후손을 감당치 못하도록 되어 있기에
언제는 내 뼈 중의 뼈와 살중의 살이라고 해놓고서는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책임전가케 되는 겁니다.
사건의 시간적인 순서로 파헤쳐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계시 곧 약속의 차원에서 파헤쳐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야 그 원인인 마귀를 잡아내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말했듯이 시간적인 순서로써 율법과 성전의 기능을 의식하던 자들이
시간의 반대로 계시 곧 약속의 차원에서 거꾸로 성전이 세워지니까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버려야 할 판국에 놓여있는 가인의 제사만 한 꼴인데
지금 새로운 성전인 아벨의 제사가 왔다면
그 아벨의 제사에 올인하면 됨에도 불구하고
때려죽어도 못 놓는 것은 회개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에서는 회개의 달인들이
아벨의 제사에서는 아무리 회개를 할려고 해도 안되는 이유가
가인의 제사를 손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회개요.
신앙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요.(대표적인 아브라함 지난시간에 언급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사랑이요(바요나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매우 매우 잘 아십니다 라고 왕뻔뻔스럽게 화답)
율법을 포기하는 것이 율법완성이요(다윗에게 여디디야가 넘어옴, 막먹기를 탐하고, 막포도주 술을 퍼 먹고, 막 춤을 추는 죄인의 친구가 됨)
성전을 포기하는 것이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임(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세우겠다. 아니 몇십년의 역사가 있는데? 그 역사를 포기하라고? 뭐 3일? 이 3일을 무슨 수로 건너리요?)금식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금식이요.
예배(제사)를 포기하는 것이 예배요(아벨 제사 ? 가인의 제사와 대비된)
안식일 지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안식일이요.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성령의 탄식이요.
나를 포기하는 것이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세계인 묵시의 마당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곧 성령을 포기하는 것이 임의로 부는 바람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왜 자꾸 바람을 잡아야 하느냐 말이죠. 도로 잡혀야 할 판국인데
그러니 맘대로 사시길 바랍니다.
막 살아라 라는 뜻은 상대적인 겁니다. 성령이 임의로 부는 바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막 살지 말아라 라고 자꾸 가르치러 들려는 사람들의 특징이
자꾸 성령을 포착할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바로 이 성령에 대한 해석에서 딱 도드라지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들의 성령을 가만히 들어보면
완전 인간 쫄따구입니다.
이런 이런 좋은일 선한일 말씀에 맞는 행동을 했다면 성령이 함께해주신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개방도 하고 근육운동도 하고
앞으로는 쪽팔리지 않는 삶을 살수 있다고 우깁니다.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성화론자들 대부분이 그러하고 개혁주의도 그러하고
바리새인들도 그러합니다.
철학을 공부해보면 어떻게 해서든 인간에게 희망을 줄려고 다 죽어가는 자들에게마저도 삶의 끈을 놓치 않는 희망으로 채우고자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지혜를 펼칩니다.
또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정말 정말 쥐뿔도 아무것도 모르는게 인간임을 깨닫게 해 줄정도로 지혜롭기 짝이 없는 것이 철학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했습니다. 말 함부로 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도록 남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태도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들의 성령론을 건드려야 하는 겁니다.
사라질 영광도 무지 무지 영광스러웠을 정도로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감히 건드렸다가는 사단이 날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드려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러니 저들에 비교 차이나도록 일부러 반대되는 행동만을 할 수밖에 없도록
베드로 껍데기는 저들에게 던져지는 겁니다. 베드로도 감당못하는 판국이니
저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베드로 백번 죽여도 소용없습니다. 또 일어나서 또 다시 다가올테니까요?
그렇다면 베드로 쪽에 문제있느냐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내 쪽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단절성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으니까 바로 기뻐서 막 춤추는게 아닙니다.
어찌할꼬 가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가 먼저 툭 튀어나옵니다.
즉 제대로 찔렸다는 겁니다.
뭐에 찔렸는데요??
내가 찔러 죽였던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저주인 사랑에
내가 도로 찔렸다는 겁니다. 사랑에 제대로 찔렸다는 겁니다.
제목을 노터치 라고 했는데
이 어원이 노다지 황금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언어가 웃기게도 무지 오래 전에 형성되었다고 역사화 시키지만 정작 알고보면 사건에 의한 겁니다.
황금에 손 대지 말라고 노 터치 라는 그 단절성이 졸지에 노다지로 바뀌어서 황금을 뜻하는 의미가 된 겁니다.
아무나 손 댈수 없다는 겁니다. 노 터치, 인간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 그야말로 막사는 막가는 막가파 성령인 임의로 자유로 부는 바람이다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만드는 인간 교리의 성령론을 건드리는, 불가능한 성령입니다.
이 단절성과 거리감이 없다면 그게 무슨 성령입니까?
베드로가 외쳤죠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딱 하나 뿐이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라고 말이죠. 그 이름을 운반하는 분이 그 당사자 성령입니다.
그런데 정작 앉은뱅이는 일어날 마음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냥 돈을 바랬던 겁니다.
이미 습관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또 아무도 그런 기적을 베풀자가 없기에
그저 갇혀버린 포로된 입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분명히 일어나서 춤추고 노래하고픈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일어나야 하고 춤춰야하고 막먹고 막마시고 막노래 부르지 않으면 안되는
바란 적도 없던 성령을 받은 겁니다.
이것이 단절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
이것이 개방이 된 겁니까? 아니지요 더 간격이 벌어진 겁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율법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다 죽여버리더라고 구약에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는 더 심하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율법은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징후입니다. 실체를 말하기 위한 징후 말이죠.
이 징후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다 죽여버립니다.
다 죽여버리고서도 또 그 속에 살아남은자를 통해서 더더욱 율법을 강화합니다.
신약에서 산상수훈이 그러합니다. 율법강화입니다.
그런데 건방지게 감히 율법을 지키고 있어요 이제는 징후가 끝났고 실체가 왔는데?
그 실체는 율법강화로써 몇배나 더 무섭게 여겨야 하는데
얼마나 실체를 무시했으면, 율법을 지키느냐 말이죠.
일점 일획도 폐할수 없는 율법으로 인한 사랑이 왔는데, 율법 완성이 왔는데,
그 율법의 실체를 무시하는 바람에 율법이라는 의문의 증서를 섬겨버리는 겁니다.
실체를 무시해버리고 그림자를 자꾸 더 붙잡는 바람에 예수님까지 죽여버립니다.
과연 율법을 사랑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해서 지켰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숨겨진 죄를 자신도 몰랐던 그 죄를 들키면서 그 사랑에 사로잡혀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해야, 예수님의 믿음이 넘어오는 겁니다.
포기했는데 안 넘어오면 어쩔래?
어쩌기는 뭘 어째요
아니면 말고죠.
우와 저래 무책임한 말이 어디있노?
아니 왜 인간이 책임져야 합니까?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살아있는 분이 책임져야 할 숙제인데?
여기서 갭이 점점점 벌어지는 겁니다. 그 간격을 좁힐수가 없는 겁니다.
이 내용이 철학에도 나오는 수법이고요
바리새인도 알고 있는 수법이라서 예수님에게까지 써먹는 수법입니다.
포기했는데 안 넘어 오면 어쩔래?
포기 자체가 넘어오기 때문에 포기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포기한 조건으로써 넘어온다고 여기는 방식은
결국 인간들이 가능한, 가능성으로써 회개입니다.
그런 회개는 자꾸 옷만 찢을려고 하는 보이는 회개
보일려고 하는 기도
보일려고 하는 금식밖에 안되는 겁니다.
행함이 되는 회개가 무슨 회개입니까?
불가능한 회개가 회개이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죄 입니다.
상대적으로써의 회개이지 독자적인 회개란 있을수 없습니다.
회개 기도 금식 안식일지키기 주일성수 십일조 이 모든 것이
죽음과 연계된 겁니다.
죽는척 하는게 아니라
죽음가까이 가는게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당하는 실제상황입니다.
죽음이 아니면 다 가짜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오겠지요.
죽으면 다 허사인데 그럼 뻔하지뭐 다 가짜요 거짓인데 뭘
허사이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되도않는 회개 들이댈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회개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회개에 빠져버린 놈은
자기 회개가 옳은줄 알고 굳게 믿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자는 자신의 회개가 상대적이 될수 없는 자기 사적인 영역이요
그 사적인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성전에서 두 사람중 세리와 비교해서 자신이 행한 행함의 회개를 의미화 두는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예수님의 회개가 넘어오길 바라는 아벨의 제사가 졸지에 덮쳐버린 겁니다.
상대적인 회개에 예수님의 회개와 자신을 비교했던 겁니다.
다윗이 비로소 그 차이를 알고 그 간격을 쭉 벌려버린 겁니다.
그렇게 되니 율법강화가 되는 사랑이 넘어오게 되고
율법의 의문은 찢어져서 그 간격이 점점점 더 벌어지도록 쭈욱 잡아 찢어버리는 겁니다.
즉 자신을 비로소 원수의 자리에 두고
주의 오른손에 모든 것을 맞겨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 여부에 더 이상 시시비비를 걸 이유가 사라진 겁니다.
여기에 이 성령이 벌리는 사건에
마귀가 비로소 등장하게 됩니다.
원수의 자리에 놓이게 되니 비로소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원수의 자리에 놓이게 되니
마귀가 비로소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마귀가 발악을 하더라 말입니다.
(행 4:20, 개역)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저들은 한 인물과 그 인물과 연관된 사람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이름이 이 악마의 세계와 연관되어서 벌어진 십자가 사건을 계속 가시화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건 이미 지나갔다 라고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들 아니 사실상 모든 기독교라는 종교가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인간 구원용으로 이해 되는 사람들은 다 이런식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사람들 구원할려고 십자가를 외치는데 환장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십자가를 이 세상의 심판용으로써 이 땅에 부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붓는 겁니다.
가인에게 계속해서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아벨의 죽음을 계속해서 묻는것처럼
아벨의 피를 계속해서 이 땅에 붓는 겁니다. 가인이 가는 곳 마다 졸졸졸 따라다니는 겁니다.
가인을 영접했다가는 그가 흘린 아벨의 피 까지도 책임을 져야할 판국입니다.
그러니 가인이 표를 요청한 겁니다. 가인의 성향을 확대 재생산한 거죠.
그러니 라멕까지 덩달다 까불어댑니다. 가인에게는 벌이 7배인데 자신에게는 77배 라고?
얼마나 아벨의 피를 제대로 부었으면 그 결과가 제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라멕의 노래가 그러합니다. 심판을 제대로 부었다는 겁니다.
그 일을 지금 베드로가 십자가를 이 땅에 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이 라멕처럼 반응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역사가 수천년 수만년이 된다 해본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어딜 가질 않습니다.
인간은 여기서 한치도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밉상 받아도 마땅한 겁니다.
밉상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심판을 땅에 붓고 있는데 당연히 미워해야지요.
안미워하는 위인이 없을 정도로 명료하고 또렷합니다.
자 이 사건을 베드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수가 있을까요?
지금 베드로도 감당이 불감당일 정도로 당하는 판국인데?
베드로 당하는 판국에 다들 왜 우리가 이 사건에 말려드느냐라고 빠질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사건만 이렇게 벌어지는게 아닙니다.
이 사건에 상대적으로 세상들도 맞물려서 진행이 됩니다.
역사란 묵시의 마당터입니다.
십자가의 심판을 땅에 부으면 땅이라는 마당이 가만히 있지 않고
라멕을 양산하듯이
역사가 반응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행 4:25, 개역)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 4:26, 개역)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 4:27, 개역)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행 4:28, 개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 4:29, 개역)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 4:30, 개역)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31, 개역)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조용하게 교회하나 세워서 죽을때까지 복음을 오순도순 나누다가 천국가겠다는 것이 소박한 목사들의 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구원용십자가가 아니라
심판용 십자가는 자꾸 뭔가를 역습니다.예수님의 죽음이 열방 그리고 세상의 군왕, 관원들, 점점점 구체적으로 헤롯이 언급이 되고
빌라도가 역이며, 거기에 또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합동까지도 세세히 언급한다는 것은그것들 하나 하나가 허트로 쓰는 것이 아니라반드시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는데 귀중한 재료로서 작용이 된다는 겁니다.
(행 4:28, 개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래서 성령행전을 초반부까지 보면 볼수록
출애굽의 양상처럼
출 세상 출 인생
출 이스라엘
출 기독교 라는 방식으로
출애굽의 확장 증식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애굽왕은 더더욱 강퍅해야만 하고
애굽 군사들은 열받아서 반드시 쓰러지지 말고 끝까지 따라붙어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그 모습처럼
오늘 본문도 그러하다 라는 겁니다.
더더욱 차이성만을 부각시키는데 동원이 되는 재료가 되니까 말이죠.
베드로도 두 말 할 것 없이 재료로서 작용할 뿐입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러니 양발차기로써 우리는 그 심판이 징계로써 다가오는 사랑이기에
그 심판 없이는 구원을 못 보는 겁니다.
마귀 없이 어떻게 내 구원만 딸랑 챙길려고 하겠습니까?
마귀의 진멸됨이 있어서 화평이 평화가 있는 겁니다.
그들의 미움이 없이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대적인 편파적 편애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자작극입니다.
한쪽을 강퍅케 함이 없이는
다른 한 쪽의 긍휼함이 없는 겁니다.
(상대적인 막살기라는 의미는 마치 유월절 어린양을 막 뜯어먹고(=허리에 띠 띠고, 손에 지팡이 잡고, 신발 신고 급히먹듯) 상대적으로 저 반대편에서는 막울어버리는 대조적인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나타날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겁니다.)
베드로는 덩달아 바빠졌습니다.
리모콘을 열심히 누르시는 주님에 의해서
이리 배치되고 저리 배치되어서
한편으로는 애굽왕을 걍퍅케 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써 모세처럼 약올려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히브리 노예(처음자리)들을 긍휼케 여기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용서를 외쳐야 하듯이
이 이중성을 실시하는 겁니다.
버린 돌로써 구색을 갖추고
머릿 돌로써 조건을 갖추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처럼 말입니다.
그 이름이 이런 일들을 펼치시는 겁니다.
손에도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이름이
분명이 부재성임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고 또렷하게 살아서 역사하심은
그 어떤 다른 이름보다
더 또렷하게 마음판에 새깁니다.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예수님!! 주의 이름을 주께서 높이시는 그 십자가의 능력 앞에서
매일 매일 펼쳐지는 십자가의 피 사건이
이 땅에 부어져서
땅이 진동하는 그 피의 울부짖음을 듣게 하소서
이 아무도 원치 않는 십자가를 외치도록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고
이 아무도 원치 않는 이름
다른 이름을 주신적이 없는
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고
이 땅에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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