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숙주(대상물) 새이스라엘
십자가의 새창조물(계류 간지 탁란 맞교환물 팔을 어긋맞게 하심)
(찢고 씹고 밟고 찌르고 쪼개고 검문검색 감찰 대상물인 십자가의 숙주가 된 새이스라엘)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행 3:12, 개역)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개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개역)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개역)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6, 개역)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7,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행 3:18,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 3:19,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20, 개역)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1, 개역)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2, 개역)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행 3:23, 개역)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3:24, 개역)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 3:25, 개역)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 3:26, 개역)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의 해체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해체란 곧 잃어버림입니다.
이 잃어버림이 없이는 다시 되찾음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은 바로 자기부인 곧 누락입니다.
기능이 처음자리로써의 이스라엘인데
육체가 된 이스라엘은 이 처음자리를 상실한 겁니다.
우리라고 해서 별 해법이 있느냐? 없다고 했습니다.
외부의 핍박과 내부의 유혹 또는 그 반대로 외부의 유혹과 내부의 핍박을 당해낼 재간이 인간에게도 없고 이스라엘에게도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성령이 다루시어야할 문제입니다.
처음자리가 다루어야할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능은 잉여로써 잉여 스스로가 기능 스스로가 기능을 치는, 잉여를 침으로써 빈자리를 매끈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원수됨으로써 피라는 외부의 긍휼을 맞이할 자리를 성령께서 마련하시는 겁니다. 기도할 줄도 모르는 자에게 성령의 탄식이회개 할 줄 모르고 옷만 찢는 자에게 성령의 단절케 하심이
금식할 줄도 모르는 금식자랑 하는 자에게 성령의 육체 해체 하심이(성령소욕)
이런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아예 우리의 믿음을 행함을 차단함으로써
오직 성령으로써만 일하심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쳐다볼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입니다.
보이지 않는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은 성령으로부터의 활동을 선물로 받게 되면
이제 눈에 보이는 권력과 눈에 가시화된 존재들은 본인 당사자를 포함해서 전혀 의미 없는 겁니다.
허상이요 안개와 같은 풀들입니다.
보이는 것을 위하여 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할 수 밖에 없는 성령이 함께하심입니다.
(마 6:18, 개역)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골 1:16, 개역)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스라엘을 해체하는 그 자리에서 새이스라엘을 되찾으시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화 된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출 애굽 하듯이 출 이스라엘을 감행하시는 겁니다.
저는 새롭게 사도행전을 1,2,3을 보면서 완전 출애굽과 동일한 양상임을 보게 된 것을 언급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결국 출애굽을 감행하자는 출이스라엘을 선언한 겁니다.
즉 육체 육화된 이스라엘 탈출 엑소더스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습니다. 허락하라. 그래서 세례를 베푸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하십니다.
새로운 출 육체를 선언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상관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만나를 먹었던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썩습니다. 유일하게 땅에서 나지 않는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썩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실상을 말하기 위해서 누락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만나가 썩지 않는 양식으로써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림자세계에서 갇혀서 빠져나올수 없다 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 안의 세계에 들어갈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살과 피를 생산하기 위해
인간의 죄악을 규정하시고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예수 안의 세계를 완성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는 우리를 죄인으로 새롭게 만드는 유일하게 예정된 주님의 믿음이 이룬 불씽히 여겨주심, 용서, 되찾는 능력입니다.이 십자가 때문에 졸지에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규정됩니다. 율법으로 규정된 죄인 개념이 더 이상 아닙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규정하는 새로운 죄인만들기를 실행하시는 겁니다.
율법을 바르기 위함이 아니라, 피를 바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새이스라엘은 이제 십자가의 숙주로써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율법의 숙주로써의 이스라엘은 완성도 되지도 않는 의문의 증서의 숙주로써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만을 낳았습니다만 죄인이 아닌 더더욱 의인화 되어버린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습니다,
십자가 자신만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늘 새롭게 죄인으로 매일 매일 새로운 죄인이 되도록
십자가의 피 사랑을 완성했습니다. 미흡함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늘 수시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십자가의 영광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숙주로써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녀된 기쁨입니다.
성도를 죽이시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다시 살리시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매일 매일 해체하시고 다시 성령으로만 모으시는 겁니다.
마치 애굽을 이스라엘이 증식되기 위한 탁란으로 삼았듯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증식케 하기위한 탁란으로 삼으시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
점령 당하는 기쁨만을 누리도록 되어 있는 인생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부든 외부든 핍박받는 즐거움
목베임 당하는 기쁨
어디를 가든 밉상당하는 감사만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이 아무리 권력을 쥐고서 쥐락 펴락하여도
그것들이 허상임을 밝히고자 우리를 미끼로 삼으시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이 우상임을 밝히시는 성령의 활동에 우리는 매일 매일 잃어버림을 당했다고 다시 되찾음을 당하는 일만 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결국 성령은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마귀만을 상대로 활동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의 단절케 하심으로 인해서
세상에 구경꺼리가 되고 미말에 된 찌끄레기가 되어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진자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만 비추이도록 되어 있지만
바로 그것이 넉넉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그 넉넉함 때문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운명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십자가의 확대입니다.
십자가는 멈춰지지 않았던 겁니다.
인간들이 고안해낸 구원장치들 속에서 십자가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립니다,
예수님을 우리 보란 듯이 해체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셨던 그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죽인 그 예수를 다시 살려내시사
남이 아닌 우리가 죽였던 우리들의 주로써 다시 세우시사 모든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겁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여전히 계속 매일 매일 반복하시고 멈추지 않고 증식하시는 일을 성령을 통해서 실행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 구원만 챙길려고 하는
저 육적인 이스라엘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춰지지 않는 것은
자기부인할수 없는 인간을
자기부인 조차도 자랑꺼리로 장난으로 삼는 이스라엘을
쪼개고 쪼개고 단절과 누락을 통해서
심판 속에서 불 속에서 끄집어 내어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회복이 아니라십자가의 사랑을 새창조 하기 위해서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의 장치들을 다 불 속에 집어 넣어버리는
그래서 그런 선지자(성령 입은자)를 배치시키고 투입시키는 겁니다.선지자가 하는 일은 결국 십자가 사건의 확대 재생산 증폭입니다.
다른 은혜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잉여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심판을 이 땅에 부어버리는 것이 선지자들이 할 일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회복시키는 양상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마치 애굽에 심판을 때려붓는 가운데 따로 뒤로 빼돌리는 방식으로써
한 쪽은 예수님의 피가 어린양의 피가 발리는 방식입니다.
성령을 받은자는 불 속에서 피 발림 받듯이
비로소 이 상황이 왜 벌어지는지를 보게 되는 겁니다.
항상 사도들의 발언의 전제된 표현이
너희가 죽인 예수 라고 증거 합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 라는 표현에서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이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성령 뿐이다는 겁니다.
과거 출애굽 당시에는 공간이동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얽매인 상태에서
그림자 같은 하나의 체스쳐처럼 작용이 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오히려 아주 구체적인 현실이요 실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우리에게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공간 이동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된 겁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 출애굽때 다 해본 겁니다.
그림자로써 실상을 드러내기 위한 모형으로써 이미 다 해본 육체들이기에 더 이상 먹혀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과거에 발로 밟았던 그 공간과 그 시간적 흐름을
바로 몸으로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나의 몸 자체를 애굽으로 또는 육적이스라엘로써 해체시키고
다시 나의 몸 자체를 성령의 전으로써 활용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숙주 로써 말이죠. 어린양의 피를 나타내기 위한 숙주로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이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드러내는 몸입니다.
그 피가, 그 십자가의 피가. 몸 구석 구석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케 되어서
십자가를 드러내는데에만 활용을 하시는 겁니다.
아파도 십자가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몸이요
기뻐도 슬퍼도 죽어도 심지어 죄를 지어도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몸이 되어버린 겁니다.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드러낼려는 행함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억지로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뭐를 하든 다 죄일 뿐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율법에 얽매인 육을 자랑하는데 귀결이 됩니다.
의도적으로 할 필요가 없이 저절로 십자가의 피를 드러내는 몸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사세요. 임의로 부는 바람을 우리가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 마음대로 우리 몸을 마음대로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피를 드러내는데 사용하시는 겁니다.,
누가 의도적으로 구경꺼리 찌끄래기가 될려고 하겠습니까?
원치 않는 사단의 가시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박을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던 길로만 인도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피의 영광인 십자가로만 귀결 될 수 밖에 없도록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용서 받는 성령의 소욕에 잠식 당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숙주이니 어쩔수가 없습니다.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십자가만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왜 나를 쳐다보느냐 나를 쳐다볼 필요가 없다.
그럼 누구를 볼까요?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제시하는 겁니다.
불가능한 그 누구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왜 불가능한가 하면
바로 너희가 죽인 자이기에 과연 보이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을 보라 라는 겁니다.
여기에 뭔가 얽여야 한다는 겁니다.
죽여 없애버린 그 분이 언급이 되어야 하고, 그 없애버렸기에 보이지도 않기에, 불가능하기에 볼수 없는데 보이게 하시는 성령을 언급하는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성령 받는다는 것이 마치 결핍 채우는 종교에서 말하는 동질 일치성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죽여버려서 없어져 버려서 보이는 것이 불가능한 그 분을 보이도록 하시는 성령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은 인간의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는 기능이 일단 아니다는 것이 전제된 겁니다.
바로 그것이 단절성입니다. 일치성의 반대입니다.
이 단절성이 얼마나 무시 무시한 겁니까?
아나리아 삽비라의 죽음도 이 단절성을 일치성으로 착각한 겁니다.
성령은 지금 너희가 죽인 예수를 다시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공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번 시간에 니 장자 내놔라 내 독생자 내놓을께 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소리를 하는 기독교 교회는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해야 돈을 끌어모을수 있기에 감히 이런 소리를 했다가는 교회에서 쫏겨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장사해야하는데 왜 복음을 외치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너의 장자를 내 놔라 나의 독생자 내 놓을께 라는 말이
바로 성령께서 늘 매일 매일 외치는 겁니다.
성령의 외침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장자 내놔라 나의 독생자 내어놓을께 라는 소리에
아브라함은 상한심령이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준비하신 독생자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기뻐한 겁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의 장자를 내놔라 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너의 믿음이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에서 배운 버릇이다는 겁니다.
그 단절을 선언한 것이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인 겁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랑하사 아낌없이 내어주사 화목제로 삼으신 겁니다.
다른 것으로 화목할 길이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도 진노만을 더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눈을 뜰수가 없었던 겁니다. 비로소 주님께서 마련하신 화목제물로써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배려가 아니면 눈을 뜰수가 없습니다.
바로 차이성입니다. 단절성입니다. 이 차이성 단절성이 아니면(결별성) 쉼도 없이 자신의 장자를 바칠 수밖에 없는 진노를 더하는 짖만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도 없으면서 왜 제사를 드리냐 말이죠.
없다는 부재성. 단절성. 차이성을
너의 제사와 나의 제사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과의 차이를 통해 똑똑히 비교해 보라 라는 겁니다.
그 차이성이 덮치면 다시는 드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제대로 직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유롭습니다.
성령에 맡겨진바 되어
성령 마음대로 다루시게 되는 겁니다.
짖 밟아 버리든
부요에 처하든
가난에 처하든
무조건 십자가로만 귀결되는 그 일을 성령께서 실행하시는 겁니다.
그런 십자가의 숙주가 된 몸이 된 겁니다.
이루 말로 다 할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혼이 나가버리는 그 단절 속에서도
그 심판 속에서도 그 진노 속에서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넉넉하게 승리하는 겁니다.
그 어떤 칼도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고난 속으로 죽음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안 믿을꺼 뻔하기에
또 믿어 봤자 육적인 믿음의 습관 즉 종교성 때문에 억지로 참기만 할 뿐이기에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외치는 베드로도 결국은 다 죽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도 복음이 스스로 살아서 꿈틀 꿈틀 거려 이 땅에
이 이방인에게 왔다는 것은
우리 좋으라고 온게 아닙니다.
빨리 빨리 허리 업 탈출하라고 물건너 바다건너서 온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이다는 겁니다.
왜 너가 그 속에 있느냐?
맞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런데 빠져나올길이 없습니다.
저들과 다를바 없는 악마세계의 숙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력으로 예수 이름을 부를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가만히 못 있겠다는 겁니다.
건져낼자 건져내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해서 십자가의 피 발린 것이 아닙니다.
차이나게 보여주신 성령 때문에
비로소 악마의 세계에 갇혀 버렸고
이 악마의 세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저들과 동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인해서 건져달라는 외침을 차이성을 보여주심 때문에 외치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외침은 나는 마귀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죽이는 세계에 빠져 갇혀 나올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를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수술칼이 되어 나의 눈을 새롭게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먼저 내가 악마 원수였고
그런 원수인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옳았다 라는 것을
알고보니 십자가가 역으로 쳐들어와서 벌린 사건이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를 원수 만들었던 겁니다.
이 놀라운 지혜 앞에 나의 그 어떤 해석은 무조건 선악해석일 뿐이고 그 엉터리 해석을 손놓게 만드시는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만드심에 감사케 하심이 너무 너무 놀랍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마귀 취급 당해도 그것조차도 십자가 벌리신 피의 지혜임을 감사히 여기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이니
나 또한 그런 세상에 동조했던 자였으니 입이 천개라도 부인 못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 곧 무한 잉여로써 무한 유예의 선물에 의함은
십자가를 위해 태어났었어야만 했던 은혜였음을 사랑이였음을
심판 속에서 저주 속에서 진노 속에서 확연히 또렷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죽이는 세상권력과 예민하기 짝이 없는 종교의 힘들과
거기에 너희들 까지 동조되어서 작용된 힘들이 왜 작용했는지 제대로 또렷히 증거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벌린 자작극으로써 우리를 회개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행 3:26, 개역)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악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 숙제가 아니라
성령님 자신의 숙제임을 너희에게 제대로 보여주시겠다는 자신의 피력입니다.
이 확정에 놓여진 성령을 선물 받은자는
다윗의 고백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사함을 받은자는 행복하다는
모든 것을 다 받은자라고
그래서 더 이상 끊을자 없기에
이제 마음대로 멋대로 막 살도록 자유를 주시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은 성령 마음대로 넉넉하게 우리를 막 환란과 곤고함과 핍박과 칼과 죽음에 막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얼마나 넉넉하면 그렇게 막 집어넣으실까요?
유대인도 맛 보도 못한 다 이루심 넉넉한 승리 때문에
하루 하루 매일 매일 하루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에 놓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영광을 누리는 겁니다.
성령께서 얼마나 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십자가를 과연 누가 멈출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 몸에 늘, 우리 주변에 늘 수시로 터지는 이 십자가의 증식 확장을 누릴수 있다는 것이 증인으로써 행복입니다.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 늘 눈에 보이는 권세에 겁을 먹는 평생을 겁쟁이로 사는 우리입니다.
특히 저는 겁이 많은 겁쟁이일 뿐입니다.
그런 겁쟁이에게도 매일 매일 성령을 선물하시고
감히 겁도 없이 십자가를 알게 하시니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해체시켜 주시옵소서
폭파된 파편으로써 다시 일으킨 십자가의 군사로써
주님의 넉넉한 승리에 매일 매일 찢겨짐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끊을수 없는 그 넉넉한 주의 사랑으로
이 악마세상에서 어서 건져주시옵소서
이 육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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