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앉는 배(종말) 속에서의 생명
원수에게 먼저 먹이시는 살과 피(쓴 나물 고난의 잔)
(고전 11:25, 개역)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6, 개역)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행 3:16, 개역)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3:17,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행 3:18,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 3:19,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20, 개역)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1, 개역)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 3:22, 개역)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행 3:23, 개역)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3:24, 개역)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행 3:25, 개역)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행 3:26, 개역)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캬 제목 멋있지 않습니까?
누가 쓴 글의 문구를 옮겨 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까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인간은 남이 구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의미도 결국은 나에게로 귀결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마저도 누락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누락 당했던 베드로가 지금 이 본문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제발 누락 당하세요 라는 겁니다.
누락 당해 보시면
구원이란 나에게로 귀결이 되면 안된다는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예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왜죠? 궁금해요? 궁금하면 9원 내세요.
왜 예수님만 구원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그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름의 기능입니다.
내가 버린 이름이기에 그 기능에 걸려든 겁니다.
그 이름이 자신을 버린 원수를 도리어 살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겁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일까요?
모든 피조물은 어떻구요? 그들도 회복 되어야 하지 않나요?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닌 만유의 회복을 위한다면
결국 예수님만 구원 받으면 된 겁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것 없습니다.
우리 구원요?
여러분 우리 구원 받지 맙시다.
인간들의 입에서 나오는 특히 교회에서 외치는 구원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 구원은 받지 맙시다. 종교마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고자하는 그런 구원은 너무 너무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의문의 흐릿한 겁니다. 점점점 더 등쳐먹히는 사기술에 놀아나는
그래서 인간 구원을 고착화 시키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것이
성경교리가 되고 신학이 되고 성경지식이 되는 겁니다.
놀랍게도 그런 교리와 신학과 지식을 알면 알수록 주님과의 관계인 사귐 곧 징계가, 심판과 진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자신의 구원이 점점점 더 정당화를 가지게 되는 노동(열심,행함)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 노동은 결국 피 앞에서 무효화 될 뿐인데, 그 때에 그 열심히 도리어 원한과 가책이 되는 겁니다.
죄책감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가인의 제사는 졸지에 노동이 되어버렸기에 원한이 되고 마는 겁니다.
탕자비유의 맏아들이 그러했습니다.
노동보다 마음 든든한 확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땀으로 힘써서 세운 그 기념비가
떼구르르 굴러온 모퉁이 돌 앞에서는 와르르 허물어 질 뿐인데
그 공든탑이 무너질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비로소 원한 가득한 모습으로써 그 박힌돌을 뽑는 굴러운 돌을 향한 살인의지를
발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이 결국 이 세상의 모습을 반영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생각해 보세요. 애굽의 왕은 그야말로 자나깨나 국가의 번영과 국민을 배불리 먹일수 있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그런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는다고 자꾸 듣도 보도 못한 듣보잡 여호와 라는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그 사건이
여간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노동을 위해서 라도 충분히 허용을 할 의도가 있는 겁니다.
전혀 강팍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민주주의적 방식과 같은 배려 속에서도
자꾸 머리 위로 기어 올라 오는 정치화 되는 문제로 자꾸 발전한다는 겁니다.
마치 애굽왕 바로의 개인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애굽 자체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겁니다,
단순한 한 개인을 시비거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무의식)을 아주 아주 구체적으로 건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겁니다.
제사 드려라 라는 것은 결국 이런 의도입니다.
십계명을 지켜라 라는 것도 결국 이런 의도입니다.
이런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악을 건드리지 않은채 십계명을 지키는 행동만을 요구한다면
전혀 전혀 십자가 사건을 발생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실상 십계명 지키라는 명령 자체가 행함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아무도 건드린적 없는 그 악을 건드리기 위해서 투입되는 것이 바로 십계명인 겁니다.
자 그러면 더더욱 가면 갈수록 명령과 다르게 위선은 더더욱 회칠한 무덤처럼
화 인침 받은 딱딱해져 버린 양심처럼
율법의 올무에 제대로 걸려들게 된 겁니다.
(딤전 4:2, 개역)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율법이 지키라고 해서 율법을 지켰는데
율법아 나 율법 지켰지 라고 그동안 인증샷을 무지 무지 많이 받아 왔는데
막판에 율법이 배신을 때리는 겁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인 겁니다.
그러나 그 배신이 바로 감사요 은혜가 되는 겁니다.
율법이 배신 때리지 않는다면 예정된 십자가의 사건을 이해할 리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왜 인간을 단절시키는 의도의 목적으로 성령을 약속하셔서 선물로 주신다는 취지를 알길이 없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그저 돕는 자로. 밧데리 충전용으로 말하는 성화론의 대가들이 하는 말에 기가막혀 버린 겁니다. 그래 놓고 늘 굴러온 돌이 박힌돌 뽑는다는 그 말을 흘림으로써 그 불안감을 그들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멀쩡한 배를 구멍을 뻥뻥 뚫어버립니다.
인생이라는 배에 구멍을 뚫어보니
그 동안 가치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 구멍을 막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구멍 뚫어 주신 그 십자가가 고마운 겁니다.
풍랑을 일으켜서 배를 뒤짚어 주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책망 받지 않는 고상한 나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풍랑을 일으켜 주심으로써 내 믿음이라고 고이 고이 쌓아올린 것들이
그 풍랑앞에서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할 수 없다는 겁니다.
빨리 빨리 이런 무용지물을 빨리 들켜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위선이 빨리 바닥나서 들켜 버려야
주님의 세계에 눈을 돌리지
않그러면 아직 남아있는 위선 마일리지로 버텨본들
어차피 털려 버릴 것 버티기로 남아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빨리 빨리 바닥나서 그 바닥의 허상을 들켜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은 개인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다루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가 그 바닥을 빨리 빨리 들통이 나 버리는 겁니다.
10가지 원망을(실제로 14번 이상일 겁니다.) 받아낼 때 까지 주님은 광야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드디어 10가지 원망을 받아내고서는
왜 저 10가지 재앙으로 심판받아 초토화 된 애굽과 비교해서
아직도 우리는 심판받지 않는가?
오히려 들켜버린 그 관계에 놀라버리는 겁니다.
정말 정말 광야 40년 하루 하루가 매일 매일 기적이였던 겁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죽음 속을 거닐었던 겁니다.
애굽이 거닐지 못했던 심판 속을 진노 속을 그들은 거닐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잘나서? 이뻐서? 아닙니다.
무지 무지 많이 봐 주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 구멍을 뻥뻥 뚫어도 되는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서슴없이 수용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옳았군요 라고 말이죠.
그 십자가의 작용 때문에
나는 매일 매일 틀려도 상관이 없는 거군요 라는 겁니다,
나는 반드시 틀려야만 한다는 겁니다.
(행 3:18,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십자가가 이렇게 자작극을 펼친거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 속의 악마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제대로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십자가 용서의 피에 대한 거부 의사를 드디어 표출하게 되는 겁니다.
그만큼 의사가 제대로 환자의 암을 제대로 건드렸다는 겁니다.
자신의 숙주로써 삼아버린 그 밥이 끊쳐질 판국이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상대한게 아니라
우리 속의 죄를 상대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것을 미리 아셨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의견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만 된 일 이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개입해 보세요
인간을 숙주로 삼은 마귀가 그 계획을 알게 되면
그게 무슨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계획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를 배제 시키시고 누락 시키시고 단절 시키는 그 차단이
너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결국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범사가 감사 뿐입니다.
예수 안에는 뭐든지 예가 되고 아니요 함이 없는 겁니다.
(고후 1:16, 개역)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고후 1:17, 개역)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고후 1:18, 개역)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고후 1:19, 개역)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고후 1:20, 개역)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또 이래 말하니까 긍정의 힘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긍정의 힘 빅 띵크 큰 생각 으로 사기를 치는 종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말하는 긍정이 긍정인지 아니지 그들의 긍정을 박살내어 보십시오
당장 장사 망쳐버린다고 쫏아낼겁니다.
안 속을 것 같죠. 한국 교회 100%가 다 넘어간 겁니다.
아니다 안그런 교회도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긍정인 것 같죠?
그거 모호한 소리요 남을 또 속이는 꼴입니다.
아무도 없다 100% 이다 라고 여기셔야
비로소 예수님만 쳐다보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조금이라도 소망이 있다면
왜 구지 예수님을 쳐다 보겠습니까?
누가 봐도 확실한 풍랑이요 배를 제대로 뒤짚어 엎어버려야
희망 제로 이어야 100% 주여 죽게 되었나이다 라고 해야
비로소 자신의 믿음도 그 풍랑 앞에서 쥐뿔도 아닌 가짜임을 보게 되어야
주님을 제대로 보는 겁니다.
주님의 책망이 의미 있는 겁니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구지 필요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죠.
결국 책망받는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인
확실한 사랑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하고 또렷한게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또렷한고 하니 마귀가 에게 에게 너는 맨날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아버지 한테서 도망 못치니? 라는 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독자적인 사생아만이 할수 있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제대로된 관계성 확실한 사귐이기 때문에 시비거는 겁니다.
징계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던 겁니다.
우리가요? 아니요 먼저 예수님을 거쳐서 봅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실했기에
십자가에서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원수인 우리에게 내어주셨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관계를 깨뜨릴려고 달려들었다가
도리어 확실한 그 관계를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통해서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양자 삼으심으로써 고아 같은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는 자녀에게만 있는 징계가 우리에게도 부어지는 겁니다.
물론 아프죠 저같은 엄살많은 한심스러운 육체를 가진 저는 얼마나 엄살을 피며 오바액션을 하는지?
그래도 그것이 고아가 아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확실합니까?
율법 지키고 행하는 것 보다 그 모호한 것보다
더 확실한 사랑은 십자가의 심판 뿐인 겁니다.
(고전 11:32, 개역)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히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개역)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7, 개역)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개역)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개역)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이 관계 때문에 징계가 도저히 낙심 안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낙심되어 되어 뒤돌아 서 버릴려고 하는 순간에
그 사랑을 확정 시키시는 겁니다.
오히려 징계가 없는 사생아들에게 당당하게 하십니다. 그 당사자도 그렇게 나올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아이고 너는 징계 받았구나 죽어라 자살해라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아이고 너가 더 불쌍하구나 징계가 없으니 너는 내어버린바 되었구나
이 징계가 사랑의 확정인줄 모르느냐?
이거 뭐 도리어 적반하장이 된 겁니다.
징계가 없는 자가 도리어 눈빛이 불안해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늘 수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겁니다.
사도된 증거로써 매맞은 그것도 거의 죽다시피한 그 매맞음을 사도의 증거로써 내밀 때
오로지 성령께서만 홀로 사도로 세운 사도바울을
12제자 사도들 앞에서 성령이 사도바울을 들이내밀 때
사도직에 대한 의문을
무슨 수로 판단하고 무슨 근거로 확정할까요?
성령으로 알려주시면 아주 아주 간단할 것을?
캬 이 문제 보통 문제 아니지 않겠습니까?
사람까지 성령을 통해서 죽여본(아니리아 삽비라) 베드로가
이 사도바울을 무슨 근거로 예수님을 죽인 이 사도바울을 사도로써
그 어떤 근거도 없이 접촉점도 없이 사도로 수긍할수 있게씁니까?
가장 어리석은 지혜 뿐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나 십자가에 의해 밟혔다.
라는 표식입니다.
그게 맞은 증거입니다.
만약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알았다면 그 보다 더 큰 대접과 환대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더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들은 등에 그런 채찍자국이 없습니다.
매맞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를 죽인 그 당사자가 오히려 더 십자가의 예수를 증거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겁니까? 아니면 도리어 과거를 물으면 제자들은 과연 떳떳할까요?
지금 현재 십자가가 벌리는 현재의 문제 실제상황입니까?
과거가, 스데반을 죽였던, 나사렛 예수를 핍박하던 그 일들이 실제상황입니까?
얼마나 조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일소에 말소 시켜버리는 것이 바로
징계 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가장 부끄러운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귀한테 마저 자랑꺼리가 되는 유일한 관계성은
징계 뿐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더 이상 문제 꺼리 조차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이 진두지휘하는냥 굴러온 돌이 박힌돌 뽑는냥 행동하는 분위기 때문에 파들이 생겨났지만
그것또한 일소에 말소 시켜 버리는
죽는 마당에 무슨 의미가 되는냥
죽음 속으로 뛰어드는 복음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는 것에 매진함으로써
전혀 다른 양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결국 징계 속이 아니면
언제든지 깨어지는 관계일 뿐이다는 겁니다.
징계 만이 야들야들하게 부드럽게 말랑말랑하게 그 흐름이 유순하게 흐르는 겁니다.
그런데 다 같이 징계(심판 저주 진노) 속에 있지 않는 자는 언제든지 딱딱하게 변해서 튕겨나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늘 수시로 성령께서는 충돌을 시켜서 그 흐름을 말랑말랑 쫄깃 쫄깃 수타면처엄 매일 매일 치시는 겁니다.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엇따 정신 파냐 라는 겁니다.
다 같이 매 맞은 흔적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문제꺼리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수시로 성령께서는 징계를 부으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 낙심하고 싶으시다면 주님의 죽으심이 그저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면
그때 낙심하십시오. 그것이 덮쳤다면 낙심하지 말라고 주변에서 아무리 말해도 그때야 진짜 제대로 반드시 낙심 하십시오.
자 그렇기 때문에 관계성입니다.
내가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관계성에 놓여진 겁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잃어버린바 되는 징계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자 아무도 없습니다.
칼로? 지옥으로? 마귀로? 없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게도 없습니다.
원수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가 확정시킨 관계입니다.
내가 외면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관계입니다.
마귀도 못 끊는데 제가 무슨 수로 끊을수 있겠습니까?
외부에서 확정시켜 버린 관계성인 사귐입니다.
이 사귐이라는 관계성을 오히려 주님 쪽에서 눈치없게도 마귀보란 듯이 자랑하고 떠벌리시는 겁니다.
나의 자녀를 징계했다고 말이죠.
캬 이게 진짜 관계이다는 증거를 주님 쪽에서 당당하게 외치신 겁니다.
과연 끊을수 있는놈 있으면 덤벼라 라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아예 싸움을 붙이십니다 붙여
마귀 앞에서 말이죠.
그러니 주님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욥이 주님 와카십니까?
마귀와 주님의 내기 장기에 왜 저를 거시는 겁니까?
주님의 믿음은 숨겨놓은 비밀의 카드 때문에 당당해 하시는 겁니다.
마귀에게 없는 카드입니다.
그 카드를 내밀려고 일부러 희생안타로 욥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욥이 미리 알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예상 못한 징계가 저들 보란 듯이 덮쳐 올 때
아이고 아이고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콱 죽어뿌라 라고
주변의 가깝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버릴정도로
그 어느것 하나 가까이 둘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완벽한 풍랑입니다.
제대로 된 저주입니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도대체 뭘 원하십니까? 케보이?
저에게서 원하시는게 뭡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빈털터리 인데 ? 그래도 빼앗을 것 있으시면 다 가지고 가세요. 차라리 이 목숨 마저도 가지고 가세요.
살인자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자는 놓아주지 않습니다.
도대체 뭘 원하는가 말이죠? 케 보이
미치고 답답해 기가막혀 버리는 겁니다.
살인자가 원하는 것을 내어 놓을때까지 계속해서 뺑뺑이 돌립니다.
도대체 뭘 원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그 심판자는 장자의 목숨을 내어 놓으라는 겁니다.
계속 뺑뺑이 돌다가 도통 답을 낼수도 없는 판국에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녀를 내어 놓습니다.
그제서야 도둑놈으로 몰린 시험에서 패쓰 하는 겁니다.
이 장자의 죽음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어놓으라는 겁니다.‘
이것 없이는 통과하는 법이 없습니다.
목숨까지 내어 놓아도 사랑 없이는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이 미래에서 덮쳐 욥에게 임하자
비로소 욥은 입을 함구 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음에
자신의 머리에 재를 뿌리고 얼굴을 쳐박고
낫게 해 달라는 그 고통의 외침이
그가 징계를 받는 그 앞에 내밀 고통꺼리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징계를 보니 내가 받는 징계는 징계 축에도 못드는 겁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심의 유쾌케 되는 날이 나의 유쾌한 날은 유쾌 축에도 못끼는 겁니다.
(행 3:19,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20, 개역)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21, 개역)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이스라엘의 회복 따위가
나 개인의 구원 따위가
내 가족의 회복 따위가
내 육체의 회복 따위가
만유를 회복케 하는 예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심 앞에서는
감히 내밀어 볼 카드 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사도된 증거로써 말도 안되는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매맞은 등더리의 채찍자국을 사도의 증거랍시고 내민다고 했을 때
말도 안된다고 다들 거부해야 마땅한데
이상하게 말도 안되게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나도 나도
나도 매맞았어
너도 맞았니?
응 나도 아빠 한테 매 맞았어
같은 아빠네
우리 아빠는 십자가로 매 때리셨어 여기봐봐 여기 맞았잖아
라고
저마다 매맞은 자국을 내밀어 대니
그 심각했던 상황이 일소에 말소 되는 겁니다.
설교든
복음증거든
결국 이것 밖에 내밀 것 없습니다.
누구를 설득시켜 납득케 하는 것도 모호할 뿐입니다.전도 몇 명 했다는 모호한 것들도 자랑 기념비 세워 본들 모래 위해 집을 짖는
풍랑 앞에서의 나가떨어져 산산 조각날 배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해 받으심으로써 너희가 돌이키게 된 회개가 임했다고 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징계 받으심을 외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복음증거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 받으심을 증거해야 복음 아닐까요?
그게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외치는 내용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이 바로 거짓증거 거짓사도들입니다.
관계성은 오로지 징계(매맞음 심판 진노 저주 단절 결별)뿐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되는 관계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 뿐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우리를 악에서 벗어남을 입게한 관계임을
이 보다 더 또렷하고 확정적인 것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뭐 성화? 되도않는 모호한 소리로 또 뺑뺑이 돌려 진빼서 돈뜯어먹는 앵벌이 수법?
또 뭐?
거듭남의 비밀?
다들 구원의 탐욕을 부추길 뿐인 마약의 아이디어들 뿐입니다.
징계(십자가)만이 이들과의 차이성으로 갈라놓습니다.
다른 거리두기는 없습니다,
도저히 끊을수 없는 사랑 말입니다.
(갈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 6:16, 개역)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8, 개역)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제발 행함 같은 것으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십자가의 흔적이 없는 인간에게 귀결되는 것들은 거짓증거일 뿐이다. 라고 말이죠.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주님의 징계받으심을 외쳤습니다.
그가 징계 받음 앞에서 우리는 성화나 할례나 무할례나 인간이 되도않는 가능성의 것들을 내밀때에 또 그것으로 그런 쓰레기 똥 덩 어 리 배설물로 자신들을 치장을 할때에
징계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의 흔적? 믿음으로 매 맞어 봤어?믿음으로 칼 맞아 봤어?
믿음으로 톱으로 켜여 봤어?믿음으로 죽은자와 방불케 되어 봤어?
믿음으로 애굽의 장자 다 죽여 봤어?
믿음으로 홍해 안 빠지고 건너봤어?(애굽군사 홍해 빠뜨려 죽여봤어?)
믿음으로 여리고성 무너뜨려 봤어?
믿음으로 거짓말해서 멸망안당해 봤어?
믿음으로 도살장에 끌려 가봤어?
믿음으로 악형을 받아봤어?
믿음으로 희롱 채찍질 결박 감옥에 갇힘 돌 맞기 칼 맞기 유린 당해 봤어?
믿음으로 궁핍 가난 학대 미움 무시 환란 받아 봤어?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
이거 뭐 자랑꺼리가 전혀 될수 없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고
이런 믿음의 선배들 앞에서 오히려 더 부끄럽게 만드시니 원
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자는 갈굴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말려들 뿐이게 하시는 흔적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확정적인 사랑의 흔적인
그 징계를
그 십자가의 심판을
관계성으로써 끊어지지 않게 확정하신 겁니다.
어느 정도로 또렷하고 명료한지
진짜로 십자가의 심판 속에 넣으심으로써 확정하시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랑 우찌 증거할꼬?
징계의 불에 디일때에만, 입술에 숯불이 닿아 앗 뜨거 하고 외치듯이 외칠 수밖에 없는 외침입니다.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히 12:1, 개역)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 12:2, 개역)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개역)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1:32, 개역)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 11:33, 개역)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4, 개역)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 11:35, 개역)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36, 개역)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개역)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9, 개역)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개역)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주님 !! 범죄자인 우리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 !
그 놀라운 탄식으로 우리가 그 기도를 들을수 있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었음을 알게 하소서
자녀에게 징계하심으로 낙심치 않게 하소서.
그 어떤 누구도 피해자가 없는 악마의 세상에서
오로지 주님만이 징계받으신 그 사랑의 세계를
가해자인 우리에게 부으신 십자가로 우리의 허물을 뻥뻥 뚫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늘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갈 뿐이오니
그 십자가의 흔적으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정케 하심을 매일 매일 알려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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