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치 못할 이름 (행 4:1-12)

버린 돌과 머릿돌이 되는 이름


(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행 4:1, 개역)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행 4:2, 개역)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 개역)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행 4:4, 개역)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 4:5, 개역)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 4:6, 개역)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행 4:7, 개역)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행 4:8, 개역)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 4:9, 개역)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 4:10, 개역)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십자가는 그냥 인간세계에 툭 던져져서 이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식으로
인간들의 신앙의 대상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결국 인간 자체에 대한 배제성입니다.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은 확정적인 겁니다.
이것 보다 더 확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 자신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왜 선조의 잘못을 계속 연장선상에 두느냐 라고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겠노라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따라가겠다고 선언을 합니다만
그런 인간의 원인의 결과로 성령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 되는 겁니다.
졸지에 인간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만 할 테니까요.
고맙게도 유대인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현대는 고맙게도 그것을 교회가 잘 보여줍니다.
교회를 재미있게 관찰해 보면
도통 예수님이 주가 되신 적이 없는 교회들 뿐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잘 굴러갑니다.
그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위의 본문이 놀랍게도 오늘날로 치면 교회에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교회에서 누구를 가두고
누구의 이름을 외치지 말라고 하고
누구의 이름을 외치니 그 입을 막고자 하는 겁니다.

이단세력들이 그런다고요?
천만의 말씀
정통신앙을 추구하는 핵심입니다.
예루살렘입니다.
딴데는 다 타락해도 이곳 만큼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정통보수로 무장한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예루살렘을 핵심으로써 거들내 버립니다.

외딴 곳은 사실상 예루살렘을 위한 따까리 일 뿐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건축물로써 건축자와 정념(짝꿍)을 이룸으로써 건축자가 누구냐 라는 것을 의미하는 유물 공간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구원의 문이라는 바벨탑이 맨손으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그 당시의 최고의 기술이 작용이 됩니다.
역청과 벽돌 이것은 잇고 잇고 하는 인간의 역사성을 반영합니다.
동일하게 최고의 신앙, 최고의 신학, 최고의 믿음, 최고의 지혜가 역여져서 구원의 문이 제작됩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잇고(역사) 잇고(역사)의 인간의 열심과 충성이 반영됨으로써 유지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이 이 예수의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메시아를 맞이할 건축물로써 자리잡게 되는데
마치 인간의 부활을 꿈꾸는 애굽나라의 피라미드와 같은 식입니다. 태양의 아들의 부활 말입니다.

왜 이 이름을 거부하는 것일까요? 자신들의 죄악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살인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으로 출발하는 복음인데 이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이름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생산력으로 출발하겠다는 겁니다. 행함이 그렇고 단절이 아닌 개방이 그렇고, 근육운동이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가능성에서 출발하여 생산해 내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런식입니다. 메시아를 맞이하는 부활할 인간으로써 건축물들이 세워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부활을 맞이는 하는 겁니다.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런데 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자 너희가 죽였던 그 예수의 이름이 다시 떠돌기 시작합니다.

골치 아픕니다. 부활장치가 졸지에 지장을 받게 되는 겁니다.
잇고 잇고 잇는 장치가 자꾸 뚝뚝뚝 끊어질 판국에 놓여지는 겁니다.

바벨탑처럼 하늘까지 닿아야 하는 계단을 만들어야 부활이 성취가 되는데
부활장치가 건설되는데 자꾸 지장이 생기는 방해꾼들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가장 큰 손실을 막기 위해서 피라미드를 지을려면 노예 곧 사람의 손이 필요 합니다.
역청과 벽돌이 있다는 말은
그것을 누가 만들며 누가 쌓으며 누가 잇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사람이 쌓아야 올려지며 세워지는 겁니다.
사람의 손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로봇으로 만들면 되지?
그 로봇도 결국 인간이 설계해서 제작되는 겁니다.
(다윗도 기여이 만들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재료를 다 준비했습니다. 솔로몬 성전 황금성전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은 그 성전 부수고야 말아버립니다. 꾸중물에서 출발하지 않고 기여이 깨끗한 물에서 생산하겠다는 그 발상에 온 마귀를 다 집어넣고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예루살렘을 놓고 각축전쟁이 벌어지듯이
사람의 손으로 짓고자 하는 세력에 그 노예들을 모조다 빼다가 해방시켜버리는 자유가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교회를 짖나요? 노예가 없는데?

이거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짖는데
메시아를 맞이할 집을 짖는데
구원의 장치를 짖는데
인간의 부활을 세우는데?

정작 인간을 빼버리고 누락시켜 버리면 누가 그 건축물을 짖게 되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그 예루살렘(구원 장치-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해마다 한번 모이는 그 성전)을 놓고 주님은 다른 예루살렘을 건축해 버립니다. 이중성전이 되는 식입니다. 예루살렘의 이중 중첩성 말입니다.

전에는 예루살렘을 인간이 건축했는데 건축함에 있어서 쓸모없는 돌은 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반드시 버려야 인간과 예루살렘 성전은 짝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건축자는 새로운 건축물을 짖는데 있어서쓸모없다고 버린 그 돌을 가지고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시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지금 시편에서 건축자들이 버리지 않는 골라 골라 좋은 돌만을 골라 골라서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성에서 나오는 행함인데

믿음으로 짖는 예루살렘은 거기에다가 차이성 곧 거룩성으로써
건축자들이 버린 돌만을 가지고서 짓는데 딱 하나의 돌만 그것도 잃어버린 돌만 버림받은 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써 지금 예루살렘은 이 십자가 사건의 재현을 위해서 말려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 반드시 말려들어야 합니다. 모든 예언의 말씀의 조건을 가장 잘 맞도록 조건지어진 입장에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결국 인간들은 이 예루살렘을 엉뚱하게 조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새건축자가 나타나서 그 예루살렘을 타파 회파하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짖는데
재료가 틀립니다. 건축자도 틀립니다.
차이가 나더라 말입니다.
얼마나 구별 구분이 되는지
전과 후가 다릅니다.
전에 지었던 예루살렘 재료는 인간들의 신앙으로 똘똘 뭉친 역청인 충성 봉사 율법지킴 등등입니다. 그것이 역청과 벽돌이 되어서 신앙기술로써 자리잡아서 건축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르고 고른 좋은 돌과 좋은 재료이겠습니까?

그런데 후에 짖는 예루살렘 건축의 재료는 바로 그렇게 짖겠다고 해서 골라 골라 구별 차이난다고 버렸던 그 버린 돌로써 새예루살렘을 짖는겁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약속성취를 위해(여호와 하나님이 일부러 재촉을 하시지요) 그렇게 심열을 다 기울어서 막판 뒤짚기로 드디어 이스마엘을 낳아 약속을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님 앞에서는 그게 통하지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스마엘을 놓겠다고 나서는 순간 제명이 된 그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서
약속을 성취한다는 겁니다.

그 잃어버린 단절성이 뭘까요?

짝꿍은 아무나 되는게 아닙니다.

그 잃어버린 짝꿍이란 불임여성 본처 사라입니다.

아니 열국의 아버지를 지 혼자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열국의 어머니와 함께 해야지?
그런데 열국의 어무이를 빼놓고 아무리 불임여성이라도 그렇지 순풍 순풍 아기를 잘 생산하는 하갈을 집어넣을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열국의 어무이인 이 사래가 불임여성인데 우찌 이 약속을 성취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나올 수밖에 없는 최선책이 바로 하갈을 투입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생산력을 확보해서 약속성취를 보여줄수가 있었던 겁니다.

인간이 볼때는 누구라도 이해하고 넘어가줄수가 있습니다. 아니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말이죠.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은 땡 틀렸습니다 라고 안 받아주시는 겁니다.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니 건축자로써 좋은 골라 골라서 건축했으면 된 문제인데 왜 안되냐 라는 겁니다.

버린 돌이 있다는 겁니다.

뭘 버렸는데요?

이 행함을 유도하고서 이 행함을 거부하는 단절성으로써 차이성으로써 배경을 깔고 믿음이 등장하는 겁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입니다.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겁니다. 사람 미칩니다. 이것 인간에게서 나올수 없는데 이것도 행하라 라고 보챕니다.

의로움이란 그냥 독불장군처럼 의로운게 아니라 차이나는 의로움입니다. 절대로 독자적인 의로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죄와 동반되어서 그 차이성으로써의 의로움이 의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만들어 낼 재간이 없는 겁니다. 내가 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구는 악해져야 함으로써 그 차이성으로써의 의 이라는 겁니다.

인자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자함의 대표성이 바로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탕감함으로써 용서를 했는데 그 용서 받은자의 용서무시를 제대로 심판하는 용서야 말로 용서이다 라는 겁니다. 이거 무슨 살벌하기 짝이 없는 용서이니 말이죠.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는 용서는 결국 없는 겁니다. 도리어 심판 받는 것이 용서인 겁니다.

신 곧 믿음도 동일합니다. 얼마나 멋진 믿음으로써 믿음 좋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어야 믿음이 되는 것인데 믿음은커녕 쭐꾸덩 미끄러지는 모습으로 들통이 나야 비로소 믿음이 된다고 하시니 그것이 왜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자들아 라고 책망받는 그 관계성이 졸지에 믿음이 되는 겁니다. 결국 신앙교리 지식 등등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라고 예수님의 믿음을 재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간들끼리 유통되는 믿음은 오히려 저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 가장 악랄하기 짝이 없는 이단성이겠지요. 타락성이 믿음이 되니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꼬물을 먹고 삽니다.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주인을 높이는게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 자 아닙니까? 도리어 유대인처럼 주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인의 재산을 축내는게 아니라 주님의 재산을 늘려주는 자가 믿음이 좋은자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대립성으로써의 차이가 믿음이라를 일방적인 해석이 예수님으로부터 넘어오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아브라함은 넘어오는 믿음을 본 겁니다. 또 그 믿음을 죽여야 하는 그 차이성에 도저히 건널수 없는 간격을 느껴버립니다. 그 간격을 더욱더 벌려버리는 믿음 말입니다.

나는 분명 비웃었는데 그 비웃음을 재료로 삼아서 약속을 이룬 겁니다.
비웃음으로써 웃음이라는 약속을 성취하신 겁니다.

그것도 도저히 나올수 없는 생명이 죽음 속에서 말입니다.

결국 비웃음에서 웃음
죽음 속에서 생명  이 조건을 갖추는 것이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게 덮쳐진 은혜였씁니다.

이 은혜가 의와 인과 신을 행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아브라함을 졸지에 받게 된 겁니다.
그렇다가 그가 소유할 유익이 있습니까?
도이러 아브라함은 이 의와 인과 신에 의해 소유당해 버리는 겁니다.

일일이 물을 퍼 담아서 늘 갈증나는 목을 축이는 물을 소유물로 삼아야 하는 그 피곤한 인생을
도리어 물이 사마리아 여인을 소유해 버리니 더 이상 물 길러 올 필요가 없는
영생수의 소유물이 되는 겁니다.
밤마다 몰래 따라와서 도저히 알수 없는 성경말씀의 비밀을 캐내고 연구할려는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과 차이나게 비밀을 따로 챙길필요가 없이 도리어 비밀에 소유당해 버리니 사마리아 여인은 졸지에 비밀이 되고 말아버린 겁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이 된 겁니다.

자 이렇듯 예루살렘은 이 두 진영의 경계선으로써 나누어지면서
두 세계를 보여줍니다,

분명 여호와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마저도 건축물(부동산)이 아닌 인물을 보여주는 누락되고 배제당하고 잃어버리는 모습으로써 작용이 되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성령이 와서 새로운 해석이 덮쳐지니 예루살렘은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단절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도 또한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전으로써의 교회인 성도는 이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단절성이 절대로 되지 않는 선택성으로 돋보이는 인물이나 권세나 유물등과의 차이성으로써 부곽이 되는 겁니다.

(시 118:16, 개역)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시 118:17, 개역)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 118:18, 개역)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시 118:19, 개역)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8:20, 개역)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 118:21, 개역)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시 118:23, 개역)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 118:24, 개역)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5, 개역)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 118:26, 개역)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7, 개역)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시 118:28, 개역)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 118:29,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문이란 그냥 문짝 달린 건축물에 있는 문이 아닙니다.

바벨탑을 짖고자 했던 악령이 들린 자들의 문도 그런 취지의 문이 아닙니다.
은혜를 입지 않아서 심판 속에 놓인자들이 만들고자 했던 구원의 문은
결국 상대적인 문이였던 겁니다.

심판의 홍수에 대비한 심판과 차이나는 문인 겁니다.
심판이라는 죽음과 저주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 곧 통로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 바벨탑은 이름 그대로 구원의 통로인 문입니다.

이 문을 그들은 제작을 하고팠던 겁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문 제작이 어떻게 제작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놈들 이라고 진노하시는 주님은 왜 또 그들의 되도 않는 짖에 맞짱구 쳐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리어 그래 그래 고따위 사고방식을 너희만 가지지 말고 더더욱 퍼트리라고 더더욱 활성화 시키라고 언어를 깨뜨려서 수평화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평생 역사 대대로 구원의 문을 제작하는데 온 사활을 걸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퍼져 퍼져 잇고 잇고 해서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도 이런 사고방식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결국 주님이 이런 사고방식을 수평화 하시는 작업은
더더욱 은혜와의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방식인 겁니다.

어디 이것 뿐이겠습니까?

여호와의 문이 졸지에 창작물이 되는 문이 아니라
인물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새로운 건축자가 새롭게 짖는 건축물은 예수님이라는 여호와의 문입니다.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반드시 건축자들에게 버림받는 돌로써 취급받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차이로써 다시 버림받은 돌로써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 두 불가능한 조건을 둘 다 갖추는 식입니다.

(행 4:2, 개역)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10, 개역)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두 구절에서 저는 너무 너무 낯설은 부분이

죽음과 부활입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떠들어대는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죽음입니다.
즉 모든 교회로부터 저주 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하죠. 모든 인간들로부터 미움받았다는 겁니다.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죽음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과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저주가 다 동원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보험처리해서 보상한것도 아닌 도리어 그 행위가 의롭다 라고 높이 추켜세움받는 식입니다.
(도리어 성령을 비로소 받아야 어찌할꼬 라고 그 사건을 돌이키지 아무도 그 십자가를 돌이켜 생각하는 자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운운하지 십자가 자체를 도저히 떠올릴수가 없습니다. 영화제작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때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부활만을 외치는 교회에서는 십자가는 잊어버린적 오래입니다.)

이런 죽음을 받은 겁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도리어 확장 되는 식입니다.
참재미있게도 인간들이 외치는 부활은 십자가 제발 좀 그만 말해라 라고 십자가를 잊어버리자 라는 식의 부활입니다. 죄인의 확장으로써의 부활이 아니라, 의인의 확장으로써의 부활이니 빨리 빨리 십자가를 제거하자 라는 식의 부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를 용서 답게 하기 위해서 일만달란트비유에서 그 용서받은자를 심판해 버립니다. 이것이 용서의 확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용서의 확장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심판해 버리면 용서가 단절되는 것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인간의 행함에서의 잇기의 방식과(육의 소유)
성령의 단절로써만 일하는 방식(성령의 소유)과의 차이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입니다.사람의 일인 육의 소유 육의 일은 이 단절성을 추구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을 단절로써만 일합니다. 도리어 육의 일을 못하십니다. 죄를 짖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모조리 건축자들이 버린돌로써 취급하는 방식인
단절성 곧 잃어버림 누락 배제의 방식만으로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선악은 용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던간에 거기에 개입하고픈 겁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반드시 자신들이 그 일을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지금 본문에서 또 그 십자가 사건이 재현됩니다.
아니 부활했으면 더 이상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지 말아야되는 것 아닙니까?
성화론자들 말대로, 정통 개혁주의자들 말대로 더 이상 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벌어지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재에도 계속해서 그 십자가 사건은 멈춘적이 없습니다.

인간을 누락시키고자 하시는 성령의 활동과
그것을 저지 시키고 반드시 인간이 참여하고픈 그 욕망은 끝까지 원수지간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바로 그 충돌 현장에서 이 십자가의 복음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 현장에서 실재상황이 되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을 죽여버림으로써 모든 사건을 평정시켜버렸습니다.
쉽게 쉽게 사건을 마무리 지은게 아닙니다.
최고의 수사관 최고의 법관 최고의 감시기관과 기술을 총 동원해서 겨우 겨우 사건을 마무리 지어버렸습니다.

아니 그런데 또 다시 발생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최고의 수사관과 법적기관 거기에 동원된 최고의 기술은 무용지물이 된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무용지물이 된 겁니다.

오히려 처음때 예수님이 죽기전 살아있을 때 보다 더 심하게 활성화 되어버린 겁니다.

예루살렘(교회)은 더더욱 예수님 살아계실적 보다 위협적인 공격을 받게 됩니다.
누락되어야 할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더욱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증거되어야할 재료로써 활용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밉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만은 제발 말썽 피우지 말라고 예수님을 죽여서 조져버렸는데
이것은 도리어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어 얹은 듯이 더더욱 그 이름이 퍼지는 겁니다.

그래서 잡아 가둡니다. 그 이름을 싫어하는 예루살렘임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이름이 더욱더 퍼지게 되니
이것은 뭐 갈구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무엇이 신기한가 보니

(행 4:1, 개역)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행 4:2, 개역)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 개역)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행 4:4, 개역)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막상 죽일려고 하니까 항상 지래 겁을 먹는 것이
저들 세력이 늘 숫자를 의식한다는 겁니다.

(행 4:4, 개역)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행 4:9, 개역)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행 4:14, 개역)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행 4:16, 개역)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 4:22, 개역)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여기도 나오고 저기도 나오고 이 구절에도 나오는데
항상 성령님의 일하심이 뭔가 경계선에 놓이게 되니까
그 상황에서 이래 저래 눈치는 보는 자들이 오히려 저쪽이 되는 겁니다.

분명 정치적인 상황이 저들이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인 상황이 아무리 유리한 쪽으로 만들었어도 도리어 자신들이 애매한 입장에만 놓이도록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의 기능입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데?

애굽왕 바로왕이 이 말 한마디 때문에

뭐 누구라꼬? 그래 기다려봐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려줄게 라고 당하는
이름이라는 기능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이런 상황에 놓여진 겁니다. 종교적인 노예들이 술술술 빠져나가니까
그 이름을 막아볼려고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거부하는 겁니다.

오 그래? 너 십자가의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지? 그래 내가 알려줄게 라고

정치적으로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하다가
괜히 엉뚱하게 걸려들게되는 꼴이 되게 만드는 겁니다.

거침없는 이름 이요 지붕뚫고 이름 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성을 뻥뻥뻥 뚫어버립니다.
예루살렘이 지금 공간적인 의미에서 인물로 옮겨지는 누락되어져야할 입장에 놓인 재료라면
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활을 걸고 있는 인간들도
같은 처지에 놓여진 이 이름의 기능에 말려들게 되는 상황입니다.

주의 이름의 짝궁노릇으로 작용하는 기능인 겁니다.
창세전부터 그렇게 작동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보같이 예루살렘이 자기들 뜻대로 움직여줄줄 알았던 겁니다.
예루살렘이 배신 때릴 줄이야 말이죠.
교회가 배신 때릴 줄이야 말이죠.

그래서 이 이름 때문에 예루살렘은 소모품으로 작용하고
이 예루살렘을 흐트려 놓아서 그 기점으로
세상 구석 구석에 똑같은 예루살렘이 격었던 그 내용들이 예수의 이름 때문에 작동했던 그 기능을 구석 구석 퍼져서 작용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예루살렘이 배뇨기관처럼 작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생산기관처럼 작용하길 바라는 인간의 바램은 다 실패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죽음과 접촉으로써 시작하지 않고, 광야로써 출발하지 않고 자꾸 생산기관인 에덴동산으로 꾸며서 출발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저주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물에 빠뜨림으로 출발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것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자꾸 생명에서 출발할려고 합니다.정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의 해체되는 과정을 다 격어야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이 왜 거짓인지를 봐야 차이를 볼 것 아니겠습니까?
거룩이 뭔지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갈길로 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증식시키는 생산물로써 작용케 됨은

저런 과정을 다 거침으로써 남이 아닌 우리가 버렸기에
그 버린돌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또 남이 아닌 우리가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참으로 모순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단절성이 소통이 될까요?
성령이 아니고서야 소통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정작 이 성령이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인한 해석은 일만달란트 탕감비유가 용서 때문에 심판한다는 겁니다.
용서만 남기면 된다는 겁니다. 왜 용서 받은자가 왜 생산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결론은 용서는 남았는데 용서 받은자는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상하죠? 용서 받은자가 남아버리면 용서는 정작 누락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납득이 됩니까? 납득이?

지금 본문에 예루살렘이 인물을 외치도록 예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을 외치고 예루살렘은 누락이 됩니다.

인물만 남겨지고 예루살렘은 초토화 됩니다.
그러라고 예루살렘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교회가 있어야 예수님을 외칠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교회는 없어도 됩니다 라고 외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포기해야 예수님만 남습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거 뭐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십자가와 교회는 양립불가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누락되기 위한 소모품은 우리의 기능이요 예루살렘의 기능이요 그림자들의 기능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라져야 할 기능입니다.
도리어 보이지 않는 분을 드러내고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같이 양립하고자 하니까
누락되지 않을려고 하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성령만이 제대로 우리를 단절 시킬수가 있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자신을 누락 시킬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자기가 용서하는 꼴인데? 그게 무슨 용서이겠습니까?

방금 어머니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구약에서는 조금만 거룩하지 못해도 다 죽여버리네?
조금만 율법 안 지켜도 가차없이 다 죽여 버리네?
와카노?

제가 이래 답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능은 자신들이 율법 지키냐 안 지키냐로 말하는게 아니라
율법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거룩합니다 라고
이 거룩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키든 안 지키든 다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신약은 어떨까요?
더 율법 강화입니다.
놀랍게도 교회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소모품으로 작용합니다.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는 말씀 지키든 안 지키든, 교회 충성봉사하든 말든, 믿음 좋든 말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단절 되는 방식으로만 말이죠.
결국 구약이나 신약이나 결국은 예수님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작용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에 바보같이 자기 구원을 염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을 약속을 자꾸 자신의 손으로 성취해 볼려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입니다. 이미 성취되었고 다 이루었기에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 단절성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름으로써 예루살렘이 누락 되었다고 외치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 때문에 예루살렘은 그 기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해서 사는 인간들의 육체적 시각은
예수님의 이름과 무관한 예루살렘만을 고집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와 무관한 예루살렘만 고집하고 있기에
지금 이 누락되는 것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이 이름만은 예루살렘에 퍼지지 않기를 바라고
예루살렘이 해체 단절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저 예루살렘은 잇기 잇기 개방 화해 평강 평강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예루살렘의 평강을 위해
예루살렘을 해체하는 누락하는 단절시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부하게 되니
도리어 예루살렘 평강을 누리는게 아니라. 더더욱 해체가 더욱더 빨라지게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 되고 만겁니다.

도통 이 주의 이름의 기능을 막을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러 가야한다는 그 기능을 막을려다가
도리어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처럼
이 이름에 도리어 말려들을 판국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이 사람의 이름으로 가득차게 되어버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영웅들로 채워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해체 되는 것이 아니라 부흥된다고 하는 거죠.
마침 어제 어머니께서 하박국을 읽다가 부흥케 해달라는 그 부분을 보고 웃으시면서
제가 대뜸 주님이 부흥케 되면 나는 쇠하게 된다는 의미인데
바보들같이 거꾸로 해석해서 자신들이 부흥케 해달라고 착각한다고
정작 빨리 빨리 심판내려달라는 소리인데

(합 3: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주님이 흥하면 우리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의 기능이요
우리의 은사입니다.

그는 흥해야만 하고 우리는 쇠하여야 하는 은사 곧 성령의 기능을
자꾸 같이 흥하는 양립으로 보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흥하는 겁니다.

주의 다 이루심만이 보이니까 말이죠.

예루살렘이 지금 본문에서 그러합니다.

주의 다 이루심만 보기위해서
인간들의 손에서 다루어진 예루살렘은 이제 그 거품을 다 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덕지 덕지 인간 보기 좋으라고 붙여놓은 인테리어들이 그 허상 그 우상들이
이제 바닥까지 치면서 다 뜯겨지고 본래의 앙상한 시체덩어리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모습으로써 뜯겨지는 겁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이 예언 성취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 해체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 해체가 아니면 예루살렘의 기능은 인간들의 장난에서만 놀아나는 겁니다.
교회의 기능은 인간들의 장난에서만 놀아나는 겁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머리되심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매일 매일 해체해 버리십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동전처럼
해체 되어 다시 모인 그 다이나믹한 역동적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지
인간들의 충성 솜씨나? 믿음 솜씨나? 섬김 솜씨가
교회의 머리를 보여주고 누락되는 기능으로 자리잡을수가 없습니다.
머리 없는 교회의 모습을 껍데기로 갖추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머리 되신 예수님을 늘 해체하고 다시 모으시는 겁니다.

여기에 지금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위기의식을 느끼는 겁니다.

이 낯설은 이름 앞에서

여호와의 문은 나 예루살렘이 아니요 예수님이 여호와의 문이다 라고
자기를 부인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 교회가 있을까요?

없다면 너무 너무 다행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만 쳐다보겠지요.
있다면 골치 아픕니다. 그 기능을 못 수행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할까요?
차라이 없다고 보시고 지금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처럼 이 이름에 위기위식을 느끼는 것이 낫습니다.

얼마나 낯설었으면 위기감을 느끼겠습니까?
함부로 대했던 그 이름
교회에 다니면 수도 없이 듣는 이름
그러나 단 한번도 그 이름은 살아꿈틀거리는 실제성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정작 그 이름이 나를 죽일려고 달려들때야 비로소 그 이름으로부터 위협을 격게 될 겁니다.

예루살렘을 해체함으로써 새예루살렘의 실체를 보여주시는 그 이름 앞에

우리는 내가 박살나듯이 이 예루살렘을 보게 될 겁니다.
나의 행함이 역사가 되길 바랬던 것이 이 공간이라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중첩이 되어서
시간과 공간은 해체작업에 의해서 예수님께로 귀결되고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락 되어도 상관없는 그 이름 앞에서 새예루살렘이 되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여호와의 문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이 불가능한 일을 성령께서 부지런히 지금도 쉬지않고 실행하십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하시고자 부지런히 성령의 탄식으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시기케 할 수가 없사오니
이 십자가의 흔적을 매일 매일 마음판에 새겨주시옵소서

주의 이름만 남기도 모두다 누락케 만드시는 그 이름 앞에 무릎꿇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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