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하는 성령 (행 4:32-5:11)
자원하는 심령? (자발적인 마음?과 율법 지키기?)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행 4:32, 개역)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4:33, 개역)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4:34, 개역)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 4:35, 개역)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6, 개역)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행 4:37, 개역)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5:1, 개역)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 5:2, 개역)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 5:3,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개역)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 5:5, 개역)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 5:6, 개역)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 5:7, 개역)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 5: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 5:9,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행 5:10, 개역)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행 5:11, 개역)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인간이 과연 자발적일까?
인간이 하는 생각은 자신의 생각일까? 아니면 타인의 생각이 덮쳐져서 나오는 생각일까?
인간에게 자발적인 마음이 있다면 구지 그 마음을 가지고 시험해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이지 않다면 누구든지 그 마음을 가지고서 장난질 칠수가 있다.
유혹이 그렇다.
유혹이란 자발성에 대해서 우습게 여기고 언제든지 농락하는 자세이다.
그 앞에서 자발성은 아주 입에 담을수 없을 정도로 미끄러져 이보다 더 굴욕적일수가 없을 정도로 갈기 갈기 찢어버린다.
다시는 일어설수 없도록 완벽한 발가벗겨버리는 것이다.
이런 유혹을 거쳐서 자발적인 마음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행함이라는 원인의 결과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발성이 유발시킨 자발성의 자작극일 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자원하는 심령이 없다고 했다.
그 자원하는 심령은 상한심령이다. 곧 사랑이다.
인간의 마음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그리고 율법을 알아버린 이상
자발적으로 상한심령이 될려는 마음은 더더욱 추호도 없이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가득채우도록 되어 있다.
이 자원하는 심령이 없다니
과연 울고불고 할 정도로
금식(육체의 에너지 원은 차단 단절하고)
회개(육체 자체를 찢어버리고)
기도 부르짖음(자신이 철저하게 갇혀버렸다는 그래서 다급하게 빠져나오지 못하면 한시라도 살수 없다는 그 급박성에 놓였다는 심각성)
을 무엇이 아쉬워서 외칠수가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왕이라는 위치와 풍요와 더 이상 올라갈 높이가 없는 가장 높은 곳인데
구지 밑바닥으로 바닥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소욕한 것으로부터 마음을 다 빼앗겨 소욕을 당해버린 판국인데
어떻게 그 소욕으로부터 벗어날수가 있다는 말인가?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인데?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호 6:6, 개역)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마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히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히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히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자원하는 이 자발성으로써 모든 것을 마다 하고
죽음이라는 바닥
불 속이라는 저주
물 속이라는 심판 속에 들어갈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상한 마음이 과연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 상한마음과는 더더욱 멀어졌으면 멀어졌지,
율법을 지키는 괜찮은 나 자신의 매력에 자아도취될 뿐이지,
예수 잘 믿는 나에게 몰입될 뿐이지 그것을 마다하고 죽고자 할수가 있는가?
율법이 나의 대상물이 된 이상 죽기는커녕 우상화된 기념비가 나를 장악해버려 의기양양해 질 뿐이다.
그 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겁탈이라는 계류이다.(십자가의 흔적, 상한심령의 흔적, 예수의 흔적 (갈 6:17))
바로 자원하는 심령이 없다 라는 것을 자원하는 심령으로부터 발각당하는 것이다.
상한 심령이 없다 라는 것을 상한심령으로부터 발각당하는 것이다.(다윗이 꺽으신 뼈로)
약속이 없다 라는 것을 약속으로부터 발각당하는 것이다.(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로부터)
사랑이 없다 라는 것을 사랑으로부터 발각당하는 것이다.(베드로가 닭울음으로부터)
믿음이 없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부터 발각당하는 것이다.(아브라함이 이삭으로부터)
이런 [~ 에게서] 족보는 육의 족보를 웃사스럽게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
부정한 짐승을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인해서 살려내듯이
십자가는 이런 모순의 스캔들을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외친다.
이 부끄러운 십자가를 과연 떳떳하게 자랑하고 기뻐할 수가 있느냐 라는 것이다.
이 상한심령을 기뻐할수 있느냐 라는 점이다.
소금이 과연 녹지 않고 어떻게 썩지 않게 할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상한심령으로부터 썩지 않음을 당했기에
그 소금의 기능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소금이 아니라, 썩어 있는 죄인의 자리에 비로소 소금때문에 놓이게 된다.
즉 소금의 위치가 아니라
그 상한심령으로부터 고침받는 긍휼의 대상에 놓이는 원수의 자리이다.
그 불의한 자리를 소금이 창조해 낸 자리이다.
십자가가 만들어낸 자리인 죄인의 자리를 새창조한 것이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죄인의 자리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들어갈 자 없다.
누가 타인의 죄악을 다 뒤짚어 쓸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넉넉하고 기쁘게 이스라엘의 죄악을 혼자 감당하고
스스로 십자가로 돌진하는 자가 있다.
그 이름을 이제 만방에 외치는 것이다.
곧 소욕에 관한 문제이다.
오늘 본문은 소욕에 관한 문제를 말하고 있다.
인간이 과연 소욕한것인지? 아니면 소욕이 인간을 소욕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소유물과 인간 자신을 일치화 시킬려는 것에서
이 둘을 떨어뜨려 보고, 단절시켜서 그 차이가 있는지를 가려보는 것이다.
간격을 벌려보면 알 것이다. 과연 일치하는지 아니면 이질적인지?
이런 소유물과의 격리 조치가 상한심령인 자원하는 심령에서 촉발이 된다.
인간이란 원래 아무리 혼자있기를 좋아하는 은둔형 외톨이라 할지라도
외롭게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혼자 별종처럼 도드라지게 모든 사회성 심지어 가족성을 외면하면서까지
독자적으로 살겠다는 것은 이미 그 독자성 조차도 사회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자발적 독자성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회가 허용하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도드라지게 남들과 다르게 유별나게 톡하고 튀어나오기를 싫어한다.
죽어도 같이 묻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기능에 옷도 문화도 심지어 음식조차도 유행이라는 흐름에 따라
자신도 맞추어지길 바라지 그 흐름에 동떨어져지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니 소욕이 나를 소욕하는 것이지 내가 그 소욕을 소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졸지에 세상이라는 흐름 속에 새로운 흐름이 세상의 역류로써 작용해서
조그마한 무리 속에 시간과 장소를 장악하듯이 성령이 역사하게 되었다.
그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세상의 흐름속에서 역류하고 있는지
(행 4:32, 개역)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라고 전제를 깔고 있다.
과연 이 본문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특히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하루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이 본문의 말씀이 과연 믿겨질 이야기인가? 아니면 말도 안되는 그야말로 종교마약과 같은 헛소리인가?
백이면 백 이 본문을 가지고서 사기를 친 목사(종교인)들이 어디 한 둘인가 말이다.
또 속아 넘어간 자들이 과연 이 말씀을 제대로 믿어서 속은 것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사기 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을 나타내는가 하는 점이다.
얼마전에 그것이 알고싶다 라는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창기십자가의 비밀] 라는 제목으로 이단종교를 다루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종교가 또 기독교가 또 가장 정통적이라고 하는 곳도 사실상 다 같은 내용의 실상이다.
더더욱 이 본문은 그러하다. 자기 사적인 영역의 사적재산을 일체 허용이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 이 본문을 가지고서 얼마나 사기를 칠것이 아닌가?
심지어 세계역사속에서 이 본문으로 공산당이 이용을 해서 지금까지 그 사상에 젖어있는자들이 많이 있다. 공동재산을 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대로 사기를 치고 있고
종교는 종교대로 사기를 치고 있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대로 사기를 치고 있다.
이것이 세상 흐름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는 결국은 성이라는 잉여성으로 귀결이 된다.
여기에 사회주의 조차도 이 여성성을 잉여로 보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해결방안이다고 생각하고 있다(기관없는신체-생명이라는 여성성으로 자본주의의 흐름에 역흐름을 주장).
문제는 이런 흐름과 전혀 무관하게 이 본문은
이 본문을 가지고 사기를 치든 말든 전혀 다른 묵시의 흐름으로써 이런 역사성이라는 소유를 치고서 다른 소유를 증거하고 있다.
아니 무관한게 아니라 그런 흐름을 배경으로 깔고서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니리아와 삽비라가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자신들도 덩달아 재산을 바치겠다고 나선다.
흐름을 타보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고 있는데 나도 그까짖거 못하겠는가?
남들이 하니 나도 하지 라고 이 흐름을 휴행타듯이 타 볼려고 하다가
가능성의 흐름이 아님을 불가능성으로써 단절이 된다.
죽었다는 것이 이 본문에 심각성을 말하는게 아니다.
거짓영들은 이 죽음을 가지고 공포를 조장하고 또 사기를 친다.
죽음이 심각한게 아니라,
단절을 개방화 할려는 것에 대한 심각성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는데
왜 그것이 심각한게 아니라
생명나무에 대한 단절을 부랴 부랴 마치 따먹을줄 알았다고 철거하는가 하는 점이다.
생명나무의 차단성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얼마나 접속을 하고팠으면, 구원의 길을 가고팠으면 ...
마치 그럴줄알았다고 바랬다는냥 따먹자 마자 철수시키고 그 단절성을 겹겹으로 무장하는
그 은폐성이 선악과를 개방하는 모습과는 너무 너무 정반대의 모습이다.
그래서 다른 대안이 바벨탑 건립이요, 가인의 제사요, 인간 손으로 짖는 성전외에는 달리 핍절을 채울 길이 없다.
다른 일치성을 추구할 길이 없다. 오로지 일치성 만이 결핍을 채우는 길이 되고만 것이다.
인간은 죽음마저도 단절이 아닌 개방으로써 뚫어버린다면 죽음도 별거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정도로 개방적이다.
그러나 개방이 아닌 그 어떤 것도 뚫을수 없는 단절성 겹겹으로 은폐된 생명나무라는 불가능성이라는 죽음이 문제가 아닌 이 단절 그 자체가 문제임이 그 심각성을 더하는 것이다.
죽음이 죽음 그대로의 값어치를 하도록 만들어버리신다.
정녕 죽으리라. 그 어떤 인간의 죽음도 채울수 없는 죽음이다.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 축에도 끼이질 못할 뿐이다.
죽음조차도 단절일 뿐이다. 일치성이 될수 없다.
여기에 또 미쁘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되는 말씀이 있다.
(행 4:34, 개역)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 4:35, 개역)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핍절 이라는 단어이다.
결핍이 없다. 부족함이 없다. 시험듬이 없다. 생활이 어려움이 없다. 궁핍한 자가 없다 라는 뜻이다.
즉 미쁘다. 믿음직스럽다. 든든하다. 안정감이 넘치다. 퐁요롭다. 넉넉하다 라는 의미이다.
결국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그들 가운데에서는 차별 차이성이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니 얼마나 간단하고 참쉽죠 라는 의미이지 않겠는가?
(막산다 라는 자유가 언제 의미가 부각이 되는가? 절대로 막살지 못하는 마귀와의 대립에서 그 차이성이 부각이 된다. 얼마나 막살면 징계가 자녀에게 부각이 되는가? 그것도 역시 사생아와의 대조에서 부각이 된다. 아벨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가 없이는 설명할 길이 없다.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반드시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도드라진 차이가 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왜 이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쉽게말해서 성령이 임하니 협곡도 골짜기도 또 움푹파인 웅덩이도 깍이고 매워진바 되어 평준화가 되는 평평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소욕이다.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3, 개역)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 3:7, 개역)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즉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의 상한심령을 채우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카페트 깔 듯이 깔아버리는
이 땅에 예수님의 마음을 쏟아붓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육체의 눈에 보이는 육의 소욕에서는 그저 이 풍요로움과 넉넉함
인정이 넘치고 재산을 나누는 정말로 마음만 통하면 한번쯤은 시도해 볼만한 잃어버린 어릴적 고향의 푸근함을 실천해 보고픈 것이다.
차갑고 냉냉한 현대사회에서 이런 대안은 그야말로 생명처럼 다가오는 유혹이다.
상처받은자를 찾아서 더욱더 사기를 치는 곳이 오늘날 종교이듯이
종교 속에서도 더욱더 애정이 넘치는 공동체를 찾아서 찾아나서는 자들이 어디 한둘일까?
아나리아와 삽비라는 그 풍요에 그 넉넉함에 같이 누리고팠을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듯이 같이 재산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개방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단절성이 없이 했다는 점이다,
즉 이 말은 자신이 원인이 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정작 단절성으로서의 생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든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본문은 그 자신이 원인이 되지 않는 성령의 원인이 되어서 나타난 현상에
인간이 원인이 되는 행위가 개입이 될수 없다는 취지에서
아나리아와 삽비라는 배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나리아와 삽비라가 사기를 친 것에 의해서
그들이 손해 보는 것이 전혀 없다.
전재산 2조를 바쳤는데 거기서 다시 100억을 빼돌렸다고 해서 그들이 죽은게 아니다.
또 남들이 피해 보는 것도 없다. 어차피 없었던 빈자리였는데 어떤 액수든 0 제로였고,
아무리 마이너스 통장도 제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 유무로 좌우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죄를 다루게 되듯이, 죄를 잘 다루다가 아차 실수로 죄를 놓치는 바램에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죄가 인간을 다룬다. 여기에 아나리아와 삽비라는 죄가 덮쳐져서
이 성령의 소욕에 반대되는 육의 소욕을 보여주는 모습으로써 동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아니리아와 삽비라처럼 이런 죽음을 당연히 마땅히 격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우리 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음은 성령의 소욕이 나의 육의 소욕보다 강해서 더 앞서서 이 본문으로 우리를 지적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으로 남에게 지적할수 있는 입장이 전혀 못된다.
이 본문의 내용은 그야말로 남 지적은커녕 우리 자신이 당연히 말려들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써 제대로 우리의 속마음을 찌르고 있다.
대뜸 우리는 이 불가능성에, 이 단절성에
어쩌라는 말이냐?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그래되면 아무도 구원 못받겠네? 라는 말이 절로 나와야 한다.
맞다.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으로 계속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복음의 세계이다.
우리는 아나리아 삽비라처럼 지적을 당해야 한다. 그 속에 살아남은자들이 그들의 행위가 정당해서 살아남은게 아니다.
우리는 오해하기를 지적받는 사귐의 관계 보다.
자꾸 어떤 행동을 취해서 저런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자 라는 취지로 어떤 행동을 할려고 한다.
거기에 거짓선지자들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거짓영들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이 한 부부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베드로는 너무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치 뒤짚어 씌우는냥 마땅한 죽음을 가시화 시킨다.
이것은 사단에 대한 차이성으로써 성령을 언급하는 것이지
인간 자체에 대한 징벌이 아니다.
인간은 그저 두 영역에서의 배치시키는대로 배치될뿐인 장기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소욕을 애매모호하고 흐릿하게 할려는 마귀의 소욕에 대한 상대적인 성령의 소욕을
분명하고 또렷하고 명료하게 차이내는 것이다.
(행 5:11, 개역)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만약 오늘날 교회가 교인 재산을 등쳐먹기 위한 목사들의 사기술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으로 인해서 오늘날 교회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면
그 교회를 과연 다닐려고 할 것일까?
광야교회는 매일 매일 8명씩 죽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단 한명만 남겨놓고 다 죽여버린다.
장정 60만명 가정의 가장이 60만명이니 곱하기 3해서 180만명 여분을 더해 대략 200만명이
매일 매일 죽어나가 약 40년 38년 만에 다 죽게 됨으로써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진입하게 되니
과연 이런 교회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누락됨으로써 교회의 머리를 보여주는 교회
이런 살벌하기 짝이 없는 교회를 과연 누가 운영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이스라엘의 운영을 입으로는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놓고서는
자신의 왕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한답시고 율법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철떡같이 맞다고 여겼던 다윗에게
죄악이 덮치니
다윗은 갑자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되는
급작스럽기 짝이 없는 악마의 성노리개가 된다.
다윗에게 마귀의 소욕이 잉태되게 되니 죄악을 낳아 우리야 장군을 철저한 간계속에서 죽여버리고
그 죽음을 덮어버리고자 이름없이 아기를 회개와 금식과 눈물로 카바할려고 했다.
자기가 자신의 구원의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해온 모든 신앙이 그런 일에 동원이 될 줄이야?
베드로 또한 그랬다. 자신의 멋들어진 방패막과 구원의 보증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도바울은 또 어떤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모든 사활을 건 당사자가 아닌가?
이런 자본주의(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다윗임을
이스라엘 왕 조차도 별수 없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시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그런 다윗에게 불가능성이 덮쳤다. 사귐이 덮쳐버렸다.
다윗 쪽에서 이룬 업적과 앞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단절된다.
오로지 다윗에게 덮쳐지는 외부에서 행해지는 은혜로만 다윗은 인도함을 받게 된다.
더러운 똥물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도록 되어 있고
못땐 정치짖으로 순박하기 짝이 없는 믿음의 사람을 죽여라 하면 죽여야 하는 짖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다윗은 어떤 인간의 해석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은밀한 존재가 된다.
은폐된 자가 된다.
다윗에게는 애초부터 자원하는 심령이 없었다. 그 부재성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결한 우리야 라는 정결한 짐승의 죽음으로 인해
그 우리야의 피가 부정한 짐승 다윗에게 발려짐으로써 비로소
그 희생제사로 인해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이 없음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심령이 있는양
행함으로 밀어붙였다. 회개로 금식으로 울부짖는 기도로 말이다.
그러나 단절 되었다. 이 단절성이 명료해 졌다.
이 단절성이야 말로 다윗은 긍휼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고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만약에 일을 했다고 여겼다면 그는 그 결핍을 채울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 결핍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영원히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닌 모호하고 의문만이 넘쳐서 그 간격이 점점점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비로소 알았다. 주님의 자작극임을
주께서 내 주께 벌리신 일임을
그 결과로 자신은 그 시치프스 저주와 같은 올무에서 도리어 벗어났음을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부당하기 짝이 없는 스캔들 부정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이 없다 라는 것을 외쳤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이 외부에서만이 옴에서 자신이 당첨되었다고 당당하게 외친다.
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와 모순을 자신이 말려들었고 자신이 뒤로 빼돌림당했다고 뻔뻔하게 외친다.
이 두 소욕을 자신의 신체에서 둘 다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율법의 저주에서 말려들어 도저히 빠져나올수가 없는 갇혀버림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 불가능한 성령으로 인한 단절이
죄인에게 부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사귐의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한 것에 대한 삯으로 그 댓가로 인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만들기로 인해서 주어진 은혜로 인해
그 막힌 담이 뻥 하고 뚫혀버렸다.
무슨 수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수가 있다는 말인가?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나에게 귀결되는 이유로 인해
막힌 담은 더더욱 높이 세워질 뿐인데?
이 두 소욕에 낑겨서 그 경계선에서 양쪽세계의 진위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다윗이다.
자원하는 성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심령이 있다고 착각했던 다윗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주장과도 똑같이 성령이 도와주면 뭐든지 할수 있다고
근육을 비로소 움직일수 있다고 여겼던 다윗
그러나 정작 단절성만 뼈져리게 느꼈다.
사적인 영역이 아닌 평준화된 보편적인 세계는
그런 사적인 독자적 소욕으로써의 성령은 없다.
인간들이 가능하다고 꾸며낸 성령이다.
오늘 본문처럼 원인없이 그저 단절로써만 일하시는 성령이 주체가 된 성령이 진짜 성령이다.
육의 소욕을 누락시키지 못하는 성령은 성령이 아니다.
아나리아와 삽비라를 죽이지 못하는 성령은 가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성령은 가짜다. 즉사 시켜도 할 말 없는 것이 죄인이다.
인간의 소욕 즉 잘 믿어보겠다는 소욕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만들어 보겠다는 소욕
믿음의 자손을 믿음의 자손 답게 해 보겠다는 소욕
남들은 다 타락해도 나와 나의 교회만큼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소욕
이 모든 육의 소욕을
철저하게 단절 시킬줄 모르는 성령은 가짜다. 반드시 소멸 시켜버린다.
보란 듯이 성령이 소욕은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같이 만들어 버린다.
이 모순의 간격을 무슨수로 좁히랴?
죄인 되게 만드시는 성령의 소욕 뿐이다.
죄인만이 회개하는 영을 받는 것이다.
왜 일급살인자로 다윗을 모세를 베드로를 바울을 만드는 것일까?
왜 도둑놈으로 마귀로 원수로 만들어 버릴까?
의인에게는 구원자의 피가 필요가 없다.
회개의 자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내 회개가 아닌 주님의 회개를 보라고.
이 울긋불긋 쏟아나고 움푹파인 골짜리를 천차만별로 굴곡져있는 인생사를
단숨에 쫘아악 매끈하게 다듬질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일소에 말소시키는
붉은 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 뿐이다.
예수님만이 나를 죄인 만들고 원수로 만드신다.
그 앞에서 어떤 소욕도 무능하기 짝이 없도록 하시는 성령
이 성령께서 자원해서 우리의 죄악을 밀어붙인다.
성령께서 주체가 되어 자원해서 우리를 죄인만드심은
회개라는 심판 속에서 구원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만을 홀로 높이시기 위함이다.
인간이 피를 높이겠다는 심뽀는 결국은 자기자랑으로만 남을 뿐이지
때려죽어도 장자를 내어놓지 않는다.
상한심령(자원하는 영)을 내어놓을수가 없다.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막살았으면 막내어놓을까?
따라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유케 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얼마나 막살지 못했으면 다시 빼돌렸겠는가?
단절성을 모르기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죽어도 상관없기에 막살고
죽으면 안되기에 막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자원하는 영을 받은바 대로 표출되어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그릇이다.
긍휼을 받았으면 긍휼의 그릇으로(막사는 자)
진노를 받았으면 진노의 그릇으로(막살지 못하는 자)
토기장이의 마음대로 하는 권한 때문에 ...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 이 상한심령을 아무도 원치 않았습니다.
아무도 구하지도 않는 이 상한심령을 선물로써 주시는 주님
이 자원하는 심령이 없어서 상한심령이 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마땅히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시험에서 건져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님의 탄식을 들려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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