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해체와 언약 (행 3:1-16)
(행 3:1, 개역)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개역)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개역)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개역)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개역)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개역)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개역)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개역)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개역)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1, 개역)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 3:12, 개역)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개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개역)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개역)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6, 개역)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위한 겁니다.
창조주가 의미를 부여할때에만 피조물은 거기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기계인 겁니다.
리모콘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티비가 켜지면 우찌 되겠습니까?
그것은 더 이상 기계 라고 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공상과학 영화를 보면 인간들이 항상 공포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있는데
자신이 만든 로봇이나 자신이 창작물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때
그 독자적인 존재와 싸워야만 하는, 그리고 반드시 이기고야만 마는 그런 내용을 수도없이
영화나 문화 속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공적인 자유로운 독자적인 로봇은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 창조자를 넘어설려고 하고
인간은 자신의 창작물의 도전에 절대로 질수 없는 반드시 싸워 이겨야만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것은 로봇이 창작되어서 생겨난 문제가 아닙니다.
일종의 평행이론처럼 쌍둥이인 자신의 분신, 인간의 분신으로써의 로봇이 생겨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이 자신의 자식을 낳음으로써 이런 문제는 늘 발생하는 바입니다.
놀랍게도 성경 전체가 이미 이런 내용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쌍둥이 형제는 또 어떤가요?
쌍둥이 뿐만이 아니라, 형제지간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이미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 쪽을 굴복 시키는 구조입니다.
로봇의 등장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로봇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심지어 창세전에도 이런 양상인 겁니다.
그러니 종결 지어야지요.
자 이런 배경을 깔고서 등장하는 특이한 존재들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마치 유령과 같아서 이것이 이스라엘이다 라고 규정하고 고착시켜버리면
어느새 이스라엘이 아닌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특이성이 없는 껍데기일 뿐인,
누가 봐도 에이 저게 무슨 이스라엘이냐 라고 부정해 버리는 식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기능 자체가 빈자리로써 미끄러지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이스라엘로 앉지를 못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오로지 기능으로만 그것도 특이한 기능으로만 이스라엘이지
아무리 껍데기로,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인 다윗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해도 그렇게 태어났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육체일 뿐입니다.
육이라는 껍데기가 아무리 민족적인, 육적 이스라엘의 껍질을 갖추어도 소용이 없듯이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기능이 뭡니까? 이 기능이 이스라엘이라고 규정하기에
이 기능이 없으면 기능 스스로가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을 배척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스스로를 빈자리로 만드는 기능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다 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태어났다면 꿈에도 몰랐겠지요. 지금 현재 저들처럼 말이죠.
지금의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을 갖추기 위해 힘쓰는 그야말로 언약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인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가지고 정통적인 구원론 선택론에 충실하며 다 잘 믿고 있는 판국에 저들과 다를바 없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2000년 전에 세례요한이 외친 너희가 속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지 말라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신다 라는 말씀이 얼마나 아브라함 자손에게서는 정말 정말 비웃음꺼리가 될 수밖에 없는 말도 안되는 소리이겠습니까?
(마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것은 하늘이 규정한 겁니다. 하나님이 규정한 거룩한 법과 같은 것을 무슨수로 거역 거부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스스로가 어기는 꼴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뭐 장자권을 달라고? 니가 장자권을 소유해도 변함없는 것이 하늘이 규정한 순서인데?
형 [에서]는 장자권을 무시했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규정앞에서 비로소 야곱을 죽일려고 합니다.
도망쳐야죠 뭐.
이런 예정론을 예수님은 무참하게 짖 밟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인간을 위한 장자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께요.
이스라엘이란 예정론으로 철저하게 무장하다가, 자신의 선택론 구원으로 무장하다가,
아니면 하나님의 유일신론으로 무장하다가,
도리어 진짜 예정 앞에서 무참히 짖밟히는 해체되는 기능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좋은 방패막이를 놓칠수가 없는 겁니다. 전부를 걸었는데 말이죠. 가장 애지중지한 예수라는 장난감을 말이죠. 대상이 되어버린 예수를 빼앗길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예수를 거부하고 자꾸 십자가로 죽으러 가십니다. 일체 예수 우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 정과 육체와 탐심(우상)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설마 예수가 자기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겠지? 안 속습니다. 도리어 예수님한테 배신 당해야 나의 죄악이 사기치는 거짓이 우상화시킬려는 탐심이 들통나는 겁니다.)
왜 해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래서 해체해야만 하는 겁니다. 자꾸 딴거 만들어 조작해 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살아 계심만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발 좀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하지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기능을 이루신 겁니다.
(마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결국 예수님이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목격하는 증인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구색만 갖추고자 순종이 아닌 제사에 빠져버린 겁니다.
물론 이래 말해 본들 순종이나 제사나 같은 행함의 문제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순종과 제사는 같은 의미인 겁니다.
아무리 차이를 둘려고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 구별화 시킬려고 해도
종교꾼들의 최면 속에서가 아닌
어떤 누구나 봐도 제사나 순종은 별반 차이가 없는 의미인 겁니다.
기록상 다르게 되어 있다 보니 종교꾼들은 어떻게든 차이를 둬서 의미를 또 구색적으로 갖추는 겁니다.
쉽게 말할께요.
순종이나 제사나 뭐가 다릅니까?
그냥 제사나 ! 더 나은 제사나 , 그게 그거지 뭐가 다릅니까?
더 낫다 라는 기준은 누구 입맛에 맞느냐 라는 겁니다.
외치는 사람마다 모조리 더 나은 제사를 드리라고 결국 인간이 해석을 하는 판국인데!!
자 이렇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미 용어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그것도 다른 것이 아닌 성경으로 사기를 치기 때문에
설마 성경가지고 사기칠 리가 있겠어?
자신들도 성경 가지고 있겠다.
성경 구절 제시해 버리면
어 맞네 라고 다들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도록
오히려 성경말씀이 부추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 인간이 하기 나름이네 라는 것이
도리어 더욱더 선명해 지는 겁니다.
근육 쓰기 나름이고
인간이 개방하기 나름인 셈인 겁니다.
바로 이런 곡해를 깔아 버리는 것인 성경 말씀이기에
이스라엘이 여기에 말려드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자신들의 육적인 생각과 성경과 딱 맞아 떨어지니
이스라엘은 더욱더 순종으로 포장된 제사에 몰입하게 되고
더욱더 육적으로 빠져들게 되는게
더욱더 육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그들에게서는 더욱더 순종으로 매진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더욱더 번제에 빠져드는 것이
그들에게서는 더욱더 인애와 자비로 몰입하는 거라고,
더 나은 제사로 몰입하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것들은 행함에서 행함으로
즉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하는 차원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십계명을 준다고 해도 너끈하게 이들은 다 지키고야 마는 것이겠죠.
그러나 성경 그 어떤 말씀도 지킬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조리다 불가능 뿐입니다.
십계명은 지키라고 주는게 아니라
못지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도 못지킨다는 것은 제일 먼저 이스라엘에게 먼저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기능은 이 불가능성에 접촉된 접붙임 당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분명히 못 지켰습니다. 맞습니다. 못지킨 것 맞습니다. 사기치고 거짓부렁 하면 안됩니다.
분명히 못 지키는데 누가 다 지켜버린 겁니다. 그 다 지켜버린 그 완료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접붙임 당함으로 여긴바 된 상태가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즉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서 말도 안되는 일이 성취되었다는 겁니다.
(샬롬 처럼 간밤에 여호와의 얼굴을 봤다면 당연히 타 죽어야 하듯이 죽어야 하는데 안죽었다는 그 불가능성은
여호와께서 무지 무지 봐 주셨다는 배려요 긍휼히 여기심 때문인 겁니다. 그 불가능성이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내가 다 지켰습니다 라고 사기를 치는게 아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원래 타죽어야 하는데 안타죽는것이 이상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왜 더 나은 제사에, 순종에 접촉이 되었는지
도대체 누가 다 이룬 것인지? 그 분이 다 이루심에 저 이스라엘은 그저 접붙임 당한 것 뿐입니다 라고
보이지도 않는 유령과 같은 그 분에게 자꾸 의미를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자기에게로 귀결되는 것을 부정 부인 당하는, 성령이 간섭이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쳐다봅니다.
이스라엘도 보기에 자신 밖에 보이지 않고 정작 다 이루신 분은 숨어버리시고
감추인바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졸지에 불가능해져 버린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보이는 분을 바로 옆에 있는냥 증거하는 증인으로써
본대로 들은바대로 바로 옆에 있는 이 분이 다 이루셨다는 소리를 외쳐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졸지에 화가나서 어떻게 안보이는데 보이는냥 말하냐 라고
손가락질과 비방과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겁니다.
이것은 아예 외부인들 이방인이 그런 것이고
반대로 내부인들은 아이고 너가 잘해서 그런거지
겸손해서 또 예수님께 영광들리는구나 그래 그래 그런 겸손때문에라도 너는 우리들의 왕이 되어야 한다 라고 내부인들은 유혹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로써 반드시 격게 되는 겁니다.
외부인들은 다짜고짜 돌삐 들어서 쳐죽일려고 하는 핍박을 가하게 되니,
핍박안받고자 증인의 목격담을 철회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 없었던 거로 해 버리지 뭐.
증인됨의 포기를 세상이 협학하는 겁니다.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너의 증인이 되어라 라는 겁니다.
반면에 내부인들은 다짜고짜 유혹해서 겸손하다꼬, 믿음좋다꼬,
우리 중에서 너가 제일 낫따고,
그러니까 너가 우리 중에 제일 겸손하니까 왕으로 세워져야 한다꼬,
그래놓고 홀라당 다 벗겨먹을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내가 너의 편 되어 줄께 너도 우리 편이 되어 주어야 해. 꼭 꼭 약속해. 라는 식입니다.
여기에 대부분 이스라엘은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안 넘어가는 사람이, 이스라엘이 없을 정도 입니다.
이런식으로 이스라엘이 넘어가버리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속이는 식입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버렸으니까 너도 별수 없지 너도 넘어가버려
어쩔수 없는거야 그냥 넘어가
자 이런 내용을 제가 적고 있지만
제가 적은 이런 내용들을 이스라엘이 얼마나 똑똑한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 압니다. 다 알기 때문에 그냥 자신들이 속아넘어간 대로 결국은 자신들도 이스라엘을 속여 버리는 겁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물들어 버렸다고. 그러니 너도 별수 없이 물들수 밖에 없는거야.
구조야 구조, 너가 말한대로 구조니까 너도 별수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버려 라는 식입니다.
맞습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난 절대로 안 넘어 갈 거야 ! 저런 유혹자들의 유혹에 안 넘어갈 거야
라고 다짐을 해도 소용이 진짜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가능입니다. 그러니 만들어 조작해 내는 것들이 그저 가능한 것들로만 가득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조작물에 자녀들이 철저하게 속아넘어가면서 그 가능한 조작물 가짜를 붙잡고 우상을 붙잡고
철저하게 행함과 근육과 개방을 외치면서 완벽하게 살아갔던 겁니다.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단 한 개라도 어긋남이 없는 완벽한 것을 요구하면서 닥달내고
이스라엘은 그런 것을 만들어 낼 재간이 없고
그래서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한 것들이 우상을 조각해 낸 겁니다.
남이 아닌 이스라엘에 우상들이 이렇게 가득한 겁니다.
지금 우리라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는줄 아십니까? 어쩔수가 없습니다.
이미 마음에 탐심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우상으로 가득차 있는 겁니다.
위에서 닥달내면서 다구치지 않았다면 구지 만들어 내거나 조작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못살게 굴 정도로 다구치니 에이 모르겠다 그거라도 그냥 내어놓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 같으면 그 가능한 것들을 후딱 만들어 내어놓으면 당연히 박살이 납니다.
박살 나면 또 만들어 냅니다. 달리 방안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또 박살 냅니다.
그래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 마다 방울을 흔들어서 살았니 죽었니 확인하고 난 뒤에
제사장의 시체를 끌어내는 겁니다.
다른 방안이 없으니 뭐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제사장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한 시절이였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만성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습관이 되어버리고 반복이 되풀이 되었으니 말이죠.
그러면 후 세대에 가면 갈수록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전 세대는 그저 그것 밖에 물려줄 것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라고 용감하게 나서서 밝히 말해줄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시체 끌어내리는 습관적인 반복이 멈춰버린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멈출 의향도 없고 그런 재간도 없습니다.
주님 쪽에서 멈춰 버린 겁니다.
멈춰 버리면 그런 취지를 또 알까요?
멈출수 있는 재간이 이스라엘 쪽에서 없었듯이
안 멈출 재간도 역시나 이스라엘 쪽에서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하는 짖이 육적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즉 가능성에서 가능성 쪽으로만 생각해서 자기좋은 쪽으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그 역시나 불가능한 일임을 여전히 모릅니다. 아니 알수가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 합니다.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합니다. 무슨 말장난 같죠.
그러나 이것은 장난이 아닙니다.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해석한 것조차 불가능하기에
인간은 그 대체물로써, 그 대안으로써
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으로 해석한 가능성을 고착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제 말한 육체입니다.
이 육체를 수평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바로 역사화입니다. 역사입니다.
이 역사에 동원이 되는 그릇이 바로 시간과 공간입니다.
시공간을 인간은 역사화 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 사고방식인 선악의식입니다.
의미를 두는 것 모조리 다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졸지에 이스라엘을 없는데서 뿅하고 만들어 버려서
바로 이런 역사를 깨뜨리는데 세운 군사로 활용을 하는 겁니다.
아니 방금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이 그랬다면서요? 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역사를 깨뜨리는데 활용한다고요? 네.
그 이스라엘이 이 이스라엘이 아닌가요?
자꾸 헷갈리게 하시네?
그래서 어제 말한 주께서 내 주께 방식처럼
주가 주를 스스로 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치는 방식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주의 기능이 그랬듯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부인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이 또 생겨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쳐 버리면 둘 다 자살꼴처럼 둘 다 자폭해야 하는데
그 빈자리에서 또 새로운 이스라엘에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 마치 귀신잡는 해병처럼 계속해서 되살아나
죽었다고 여겼는데 다시 살아나서 그 기능을 유감없이 펼치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어제 말한 성령입니다. 곧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잉여입니다.
잉여란 쓰면 쓸수록 소모되어 없어져 버려야 하는데
소모시켰는데 오히려 더 값절로 풍요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마술과 같죠.
예수쟁이를 죽여버려서 씨를 말려놨는데
언제 또 이게 안죽고 살아나서 더더욱 갑절로 부풀어 올라서 확장 증식이 되어 덮어버리는 겁니다.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세워졌는데
왕의 기능은 백성과 국가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인데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바로 맞딱뜨린 골치 아픈 문제가
이스라엘이 빠글빠글 마치 개미처럼
나쁘게 표현하면 여름철 모기처럼 온 애굽을 덮듯이 새끼를 까는 겁니다.
이것이 졸지에 위협이 된 겁니다.
그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이
민족말살정책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능 어디를 가나
밉상 받도록 되어 있는 이질적인 차이성 나는 존재 입니다. 전쟁기계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차이 안날려고 아무리 이스라엘을 지워도 저들이 알아채리는 겁니다.
기가막히게 알아채려서 이스라엘의 기능 값을 톡톡히 하도록
저들이 도와주는 방식입니다.이스라엘은 마치 피부처럼 그 경계선에 놓여진 것처럼
천국과 지옥의 구분 구별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가는 곳 마다 악마 나라의 본색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리 감출려고 해도
이런 기능은 감출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두 조각 냅니다. 기능이니까 당연하죠.)
그래서 이런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꿔버리는 것이
그냥 골치아프게 악마나라의 백성처럼 그냥 묻혀버려서 차이안나게 살도록
그들의 행함처럼 같이 그들처럼 근육을 움직이고 같이 개방을 하면서
터놓고 살도록 초코파이 정처럼 살면 그만인 겁니다.
그런데 기능이라는 약속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딜 감히 하늘의 신분을 감출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마귀나라 백성들이 먼저 눈치 채도록 도와 줍니다.
베드로가 나 예수 모른다. 내가 저 예수를 알면 내 장을 지지겠다 라고 장담을 하면서
말을 내뱉자 마자 말이 무색해 질 정도로 어떤 하녀가 나 저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봤어요
하나가 외치니 줄줄이 사탕으로 나도 봤어 나도 봤어 연속적으로 목격자들이 외치는 겁니다.
얼마나 잘 도와 주고 있는 겁니까.
그러니 베드로는 아니다 아냐 라고 아무리 거부를 해도
그는 졸지에 참되신 예수님과의 사귐의 관계를 거부할수 없을 정도로
마귀백성들이 도와주며 베드로를 끝까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닭이 때마침 아주 아주 때마침 꼬끼오 ~~~~~~~~ 꼬끼오 ~~~~ 꼬끼오 ~~~~~~~~~~~~
라고 울어주니 닭도 도와줄려고 미리 대기해 있다가 때마침 기가막힌 타이밍에 증인의 외침을 토해내는 겁니다.
이 닭 선지자의 외침을 누가 외면할수 있겠습니까?
닭이 선지자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잠시 잠깐 우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모품 선지자 말이죠.
베드로는 자신 속에 있는 그 기능 때문에라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아무리 끊고자 해도 끊을수가 없습니다.
고래 심줄 보다 더 강한 예수님 자신의 피로 발라버린 기능입니다. 피를 증거해야 하거든요.
이스라엘이 이런 같은 기능입니다.
어린양 피를 발라버린 그 기능 때문에 그 기능을 위해서라도 도드라지게 도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구 없다 라고 파묻혀 버릴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저들 마귀나라에서 도출 시켜버리니까요?
그래서 그 시아버지 유다의 기능이 왜 자신의 장자를 바치는지
그 장자를 바칠 때 까지는 요셉은 절대로 시험에서 패쓰 안 시키는지?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운명처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선취작업인 겁니다.
결국 역사를 깨뜨리고 빠져나오는 방식은 역사를 거스리고 가로질러 버리는 묵시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자자손손 대대로 반복학습 습관을 구축해서 그것이 맞는냥
자손들에게 가르치는 그 유전을
그 역사를
그 역사를 담은 그릇 시공간을 형성한 것을
그 행함에서 행함을
유일하게 깨뜨리는 것이 바로 묵시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그릇이 아니라
역사의 그릇을 조작해 내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그 역사의 그릇을 깨뜨리는 군사로써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계속해서 불가능만 남기는 기능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내 믿음이 아닙니다. 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로 귀결되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기능을 단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 귀결되면 끝난겁니다. 그래서 누락입니다.)
그래서 지금 본문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우리 사람이 하는 것으로 보느냐
우리를 쳐다 보지 말아라
이것은 너희가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셔서
그 분의 약속대로 하신 성령을 부으심으로써
주님의 살아계신 증거로써 선물을 부이신 분의 일로 나타나는 것이지
어찌 나에게 여타저타 의미를 둘려고 하느냐
내가 아니라 저분이 하셨다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성령이 선물로써 부어집니다, 그 선물로 부어지는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베드로가 주체가 된 사건이 아님을 성령 때문에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선물로써 부어지는 사건을 그저 불가능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이것을 우리 버릇대로 습관대로 이해와 가능성의 세계로 옮겨 보고 싶은 유혹을
우리 또한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저장하고픈 겁니다. 메모리 기억 장치에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나도 그짓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안된다
저장 메모리가 터진다. 무슨 수로 바람을 잡을려고 하니
잡히는 바람이, 과연 바람이냐?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을 저장하면 그건 바람이 아닌 썩어버리는 만나와 같아져 버리니
그냥 냅뚜라 (만나가 우리를 관찰해서 들추어낸 겁니다.)
그러니까 왜 날 쳐다보노 내가 한게 아니라 저분이 하셨다 라고 떠넘기는 겁니다. 배제요 단절입니다.
저분이 하신 숙제이다 라고 이것이 이스라엘 기능입니다. 본인도 목격자일 뿐이지
주체가 아닌 겁니다.
저들도 베드로가 했던 버릇처럼 접촉을 시도하는 겁니다. 여기에 단절을 선언하고 누락 배제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입니다.
이것을 그렇다고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득 시키고 납득시켜서 이해가능하도록 하는게 아닙니다.
결국 단절입니다.
그저 불가능 뿐입니다.
이 불가능성이 저들도 성령이라는 불가능한 선물을 받았을때에 저절로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가르쳐 준적도 없고 배운적이 없이도 말입니다. 즉 역사화 시킨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행함으로 역사로 근육으로 개방성으로 하는게 아니다는 것을
오히려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 베드로의 목격담인 겁니다.
어제 이 본문을 보면서 사실 기가막힙니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 할때는 언제고 마치 전혀 안그랬는냥 이렇게 뻔뻔스럽게
아주 당당하게 그것도 예수님이 하신일이다 라고 왜 날 보냐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웃었습니다.
네 네 인정합니다.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제 말했듯이
그 당사자가 다름 아닌 베드로 이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원수 만이 외칠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기쁜소식입니다.
자신이 원수로써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해 버린 그 당사자 원수 만이
이런 성령을 외치는 오순절 사건을 외치는 당사자로써 세워지는 것은
진짜 진짜 말도 안되는 모순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순임을 뻔히 알아도 그 역사를 깨뜨리면서 묵시는 돌파 하는 겁니다.
그게 뭐 어쩌라꼬?
뭐 뭐 뭐
뻔뻔하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기능은 어제의 이스라엘을 해체 시키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부인해서 즉 자기부인을 해서
다시 오늘 새로운 이스라엘의 기능을 부여받아서 이스라엘로써 세워지는 겁니다.
기능 때문에 말이죠.
그럼 이 기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는 누가 가장 적합한 겁니까?
이 기능을 남이 아닌 당사자가 거부한
이 기능을 외면한 그 사람이 가장 적합했던 겁니다.
피란 죄인에게 가장 잘 부합되는 기능을 펼친다고 했습니다.
아 그럼 죄인 되어야 겠네 라고 의도적으로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짖는 것은 의인의 행위요
그 행위를 지적하면 또 버럭 거릴꺼니까 행함이요 복수요 원한과 가책이지
피가 스스로 피의 가치를 높이고자 찾아낸 죄인 곧 한 말이 잃어버린 양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의 부재성이 곧 죄인이라는 기능으로써 피와 부합이 된다는
피가 주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은혜가 주체가 되듯이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가 가장 적합한 자인 겁니다.
그래서 우하하하하 우스웁다.
어쩌면 이런 기쁜소식이 어디있으랴?
베드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시선을 지금 예수님께 돌릴려고 자신을 누락 시키는 겁니다.
저들의 시선이 과거의 자신처럼 자꾸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지금 에누리 없이 그 시선을 장대 높이 달린 인자에게로 돌리고자 하는 겁니다.
땅에 붙어 있는 자신에게 돌릴려는 그 시선을 거부하는 겁니다.
이 유혹에 안넘어가는 그 불가능성이 자신도 선물을 받아서 인데
너희도 이 선물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물의 기능은
기능이 기능을 쳐 버림으로써 또 다시 새로운 기능이
그 틈사이에서
그 빈자리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그 틈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이스라엘이듯이
가차없이 자신에게 몰려드는 그 시선을 쳐 버리는 겁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올때에
갑자기 제일 먼저 기드온을 반기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자신을 가장 반대 했던 자들이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반기고 싶어서 반기는게 아니라,
자신들에게 몰려들 책망을 미리 대처하는 방식이 바로 아부로 돌변하듯이
그렇게 자신들을 방어하는 방책으로써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요 근육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왕으로 세우자 라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겁니다.
내부가 오히려 적이 가득한 겁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의 기능을 안보고 기드온이라는 인물과 자신이라는 인물로써 인간 대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드온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계시자라고 볼수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죄인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기드온이 말하는 겁니다. 내가 한게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고.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기능으로써 증거하는 당연한 태도입니다.
자 여기까지면 좋겠는데
문제는 이 기능을 기여이 우상화 하는 자들의 유혹이 만만치가 않다는 겁니다.
어이구 그래 그래 너가 겸손하구나 그 겸손이 우리 중에 최고다
그러니 너는 우리들의 왕이 되어야 한다 라고 진짜로 왕으로 삼고자 함 일까요?
아니면 꼭두각시로 이용해 먹을려고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 7천명?을 배불리 먹여서 남은 소쿠리가 12바구니가 되니까
그것을 보고 반드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반드시 자신들의 왕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남의 왕이 되면 안됩니다. 자신들의 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눈치 채시고 도망을 칩니다.
또 인간들이 눈치 채고 따라 잡습니다.
또 도망칩니다,
이것 완전 웃끼는 코메디 개그 아닙니까? 엽기적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역사란 개그입니다. 습관은 이 정도로 악마적인 겁니다.
어떤 습관? 이스라엘에게서 습관화 된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만들어 조작하는 반복 역사 시공간 말입니다.
여전히 사람의 일로 가능성의 일로만 보는 겁니다.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버리는 기적은 기적이 아니므소이다 라고 선지자가 삐져 도망쳐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버려야 이스라엘 기능이 이스라엘 답게 한다는 것이 여호와의 주장입니다.
이 둘이 충돌을 합니다.
뭐 뻔한 거죠.
그러나 우리들이 매일 매일 이와 같이 부딧혀야만 하는 겁니다.
베드로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매일 매일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다 밟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버려야 합니까?
왜 이스라엘을 해체해야만 하는 겁니까?
왜 이스라엘을 배제시켜야만 합니까?
왜 이스라엘은 누락 되어야 하는 겁니까?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왜죠? 도대체 이스라엘이 뭔데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가 맺은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로써 맺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귐이라는 관계도 일방적이지
이스라엘이 원하는 관계의 사귐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피 영광만을 위한 관계의 사귐 때문에 이스라엘은 참예, 세례, 연합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 속에서, 불 속에서, 죽음 속에서 그 사귐을 돋보이게 만드시는 겁니다.
징계가 없으면 내어버려 둔 사생아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맞음 으로써, 해체 됨으로써 다시 결속이 됩니다. 참 희한하죠?
이스라엘이 매 맞음으로써 더욱 더 새롭게 됩니다. 어제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늘 매일 매일 해체 작업을 성령께서 벌리시는 겁니다.
먼저 매 맞은 자가 나 이래 이래 매 맞았다 라고 하면 나중된자가 부러워 죽습니다.
나도 맞고 싶어!!! 마치 마조히즘 환자 같아 보이지만
정작 아버지의 사랑을 그 만큼 많이 용서받았다는 부러움 때문입니다.
늘 고아로 자라다가 아버지가 새로 생겨서 졸지에 새로운 관계가 생성이 된 겁니다.
그 관계성을 부러워 하는 것이지 매 맞은이라는 마조학적인 쾌락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생아가 왜 나쁜겁니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도 꾸지람을 해줄자도 없고 칭찬해 줄 자도 없는 그야 말로 오로지 혼자인 홀로인 독자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의 기쁨을 나눌자도 없고 아무도 그의 슬픔을 함께 나눌자가 없는 겁니다.
관계성의 단절입니다.
그런 죽어버린 사생자에서 자녀로 옮기움을 당한 것이라면
이것은 마치 죽어도 좋은 겁니다.
죽어도 사는 관계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매일 매일 해체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매일 매일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죽이기
자기부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로서의 특이한 기능입니다.
불가능한 기능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이 불가능한 것을 하시고
이로써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신에게로 귀결 되기에 자기부인을 할 수가 없고,
또 습관적인 사람의 일에 빠져,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 악한세대의 기적을 이루고서는
그 육체화를 자손들에게 되물림 할 뿐입니다.
그 장자를 내어놓으라는 겁니다.
교체하자 라는 겁니다.
독생자 예수와 맞 바꾸자 라는 겁니다.
내 자식은 나의 기쁨이 되겠지만
이삭이라는 자식은 늘 마음을 콕콕 찌릅니다.
상한 마음으로 만들어 버리게 하는 장자인 겁니다.
늘 자기부인케 만드는 장자입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겁니다.
내가 낳은 자식들이 모여 요셉이라는 장자를 땅에 파묻어 죽일려고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폭삭 썩어 문들어 져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이런 죄인의 허물을 덮어줄려고
피의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 뺑뺑이 돌립니다.
이방여자 며느리 다말 때문에
이 피의 의미를 알고 장자의 죽음에 참예가 되어서 살게 됩니다.
이 장자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모르는 애굽의 새로운 왕의 등장으로
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다시 확장 시킵니다.
그러니 어느하나 쓸모 없는 것 없이 피를 위해 모든 것이 배치 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서 무가치하게 취급하는 이 성령을 선물로써 주시는 겁니다.
자꾸 같은 인간 끼리 가치있게 가능성을 펼치자 라고 다가올 때
성령은 거부하는 겁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는 거부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해체로써
거부로써
단절로써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믿음이 펼쳐지는
묵시만을 이 마당에 깔아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시도는 묵사발 되는 그 현장에
성령께서 하심을 바라보고
내가 늘 무시하고 죽였던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기뻐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부지런한 활동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금과 은이라는 가치로써 인간이 그 가치에 등입어 이윤을 보고자 하는 것은
왕이나 거지나 가난한자나 부자나 남 녀 젊은이 늙은이 다 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가 원하는게 뭐냐? 뭘 원하니? 케보이?
불가능한 것을 주겠다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행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개역)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개역)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개역)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개역)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내 이름으로 내가 걷고 일어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걷고 일어나는 그 관계를
성령을 부으셔서
이런 앉은뱅이도 일으키는 요나의 표적을
아무도 원치 않는 그 십자가의 능력을
그 피의 용서를 부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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