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왜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까?

십자가 죽음의 재반복 (스데반 집사의 죽음) (행 6:1-15)

심판 속에서 보는 예수님 살해 발생 이유 : 왜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죽일 수밖에 없는가?


(행 6:1, 개역)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 6:2, 개역)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행 6:3, 개역)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 6:4, 개역)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 6:5, 개역)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6:6, 개역)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 6:7, 개역)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8, 개역)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6:9, 개역)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행 6:10, 개역)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11, 개역)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행 6:12, 개역)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행 6:13, 개역)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행 6:14, 개역)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행 6:15, 개역)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유혹을 이기는 방법이란 없습니다. 즉 불가능합니다.
만약 유혹을 이긴다면 애초부터 유혹이 아닌겁니다.
못이긴다는 의미에서 유혹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이기는 이 불가능에 도전해 본다면
그것은 바로 유혹에 지는 겁니다.

만약 유혹을 이겨버리면 그 다음부터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지 모릅니다.
교만이 그 사람을 장악해 버립니다.
사람이 교만해 지는게 아니라, 교만이 그 사람을 장악하기에
유혹을 이긴게 아니라 도리어 유혹에 말려들어
유혹이 그 사람을 가지고 노는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혹에 지는 것이 낫습니다.
위선자가 될 바에 위악자가 되는게 낫다는 겁니다.

욕망을 이길려고 할게 아니라
도리어 욕망하는게 낫다는 겁니다.

결국 유혹도 욕망도 내 손에서 떠난 문제이기에
그 유혹과 욕망에 져 버리면 어느새 사라지는 겁니다.

유혹 속으로 들어가면 유혹이 사라지는 겁니다. 선악이 사라집니다.

마귀를 이길려고 한다면 마귀에게 놀아나는 꼴입니다.
그래 마귀에게 지자 라고 죽여라 죽여라 마귀야 날 죽여버려라 라고 하면
마귀가 에이 재미 없어, 재미 좀 누려 볼려고 했더니만
재미없잖아 라고 어느새 마귀가 사라지는 겁니다.

기여이 마귀를 이길려고 하면 할수록 마귀가 좋아라고 아주 재미있게 농락할수 있겠다고
마음대로 가지고 탈진할때까지 농락하다가 단물 다 빨아먹고 뱉어버립니다.

왜 유혹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하면
이미 이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죽일려고 작정한 겁니다.
사기칠려고 달려든 사람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 보다 더 나은 능력이 있다면 이미 그것은 사기가 아니겠지요.
그런데 무능하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당해야만 하느냐?
걱정 마십시오. 다른 길이 있습니다.
바로 죽는 길입니다.

에이 그게 무슨 다른길이냐
그것이 무슨 이기는 방법이냐 라고 백이면 백 반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다른 길을 제시하는게 아니라
심판의 의미를 말하고픈 겁니다.

다른 길이란 심판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이 유혹에게 지는 것이다 라는 의미는 결국 단절이라는 심판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심판 밖으로 벗어난다고 해서 심판에서 벗어나는게 아닙니다.
심판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테니까요.
늘 어디든 어느때이든 항상 심판의 목전에 있는 겁니다.
(사실은 이미 다 죽은자입니다. 살리는 자가 외부에서 옴으로써  심판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유혹자입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도 유혹자입니다.
죽으러 심판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의지력을 불태우고 있는 겁니다. 그래 그래 불태워라 라고 말려드는 겁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 뭡니까?
바로 예수님을 죽은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유혹을 이길려고 하다가 말려든 겁니다.
가인도 자기는 죽지 않았어 라고 우기다 보니 아벨을 도리어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자꾸 파고드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자작극에 말려든 겁니다.
우리는 안 말려들겠다고 할게 아니라
가인이 안되겠다고 할게 아니라
왜 가인이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는지
가인의 자리에서 이 사건을 보는 겁니다.
스데반의 자리에 앉을게 아니라
스데반을 죽인자들의 자리에서 왜 스데반 집사를 죽일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이런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에도 아직도 반복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일려고 작정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벗어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죽일려고 하는 그 속으로 그 중앙 속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겁니다.

정작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작정한 그 적개심 그 살인의지는
예수님이 심으신 겁니다.
그러니 도망갈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평상시 그들의 신앙을 깨작 깨작 건드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처음부터 저들의 손에 죽고자 그렇게 하신 겁니다.
우리들의 손에 죽으시러 오신 예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또 그런 일이 재 반복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왜 또 발상했는가를 보여주는 재 확인입니다.
불과 십자가의 단회성을 외친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죠.
(단회라는 일회인 1은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 라는 숫자 개념이지만, 정작 예수님에게서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계속 무한반복케 한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게 아니라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고, 예수님은 이런 자신의 죽음을 계속해서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답을 미리 말해드리면 성전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성전에서 사고 팔고 하는 자들을 돈바꾸는 그 책상을 뒤엎어버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킨다고 했는가 라고 말이죠.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년에 한번 있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멀리 있던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고자 모일때에
중간에 바칠 제물들이 죽어버리거나, 곡식들이 상해 버리면 안된다 아입니까

그카이 편이성을 위해 성전 주변에 장치들이 제공이 되어 있는 겁니다.
물론 돈 받고 하다보니 비아냥 거릴수도 있겠지만
그 돈들도 목적은 딱 하나 성전건축에 성전 관리에 다 쓰여지는 겁니다.
단순히 돈을 탐내서 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돈을 탐한적이 있던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돈을 사랑한적도 없는 바리새인에게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워버립니다.
왜냐하면 돈을 주인 개념과 연계시켰기 때문입니다.
딴 주인 개념을 돈에게 연관시킨겁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에게 욕먹는 세리 라는 자들에게는 일방적으로 용서하시고 말이죠.
이해불가능하죠. 돈에 환장한 자는 세리 입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말이죠.

아무튼 편리성 제공으로 돈거래를 통해서 성전건축이라는
성전중심의 신앙을 예수님께서 건드려 버립니다.
이것은 저들의 주인인 마귀를 건드리는 것인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를 건드려 버리는겁니다.
가인으로 치면 가인의 제사를 건드려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서 생뚱맞게도 자신을 대조 시켜 버립니다.
절대 인간 안 건드리죠

이게 중요합니다.
인간 안 건드립니다.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쫄따구를 건드려 봐야 또 생겨버립니다.
그런 소모품들은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주인을 건드려야 합니다.
그들의 신을, 그들의 하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이 이해못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왜 자꾸 인간을 무시하냐 라고 그들은 자꾸 인간이 주체이기를 원합니다.
믿음도 인간이 믿지 누가 믿냐 인간이 믿어야 믿음이 믿음아니냐 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믿음이 인간을 다룹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대상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건드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인간은 반대로 습관화 정치화 해 버렸습니다.
믿음을 대상물로 삼아버립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상대 안합니다.
그냥 무시합니다.
쫄따구는 무시해도 됩니다.
그들의 주인만 상대하면 됩니다.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을 건드리면 온 마귀와 마귀 쫄따구들이 발악을 하면서 안색이 변해 달려듭니다.

오로지 성전이 있다라는 이유로 그들은 신앙했다는 겁니다.
희망을 걸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희망 날려버리고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그럼 성전 없이 어떻게 신앙하라 말이냐?

주인이 없는데?

새 주인이 왔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전이라는 그림자는 허물어져야만 하고, 그 그림자의 실체가 옴으로써 누락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 상전 노릇하는 이 성전을 치는 겁니다.
인간은 아예 상대할 가치가 없이
주인이 누구로 바뀌는가 하는 그 과정을 목격할 뿐이고
또 주인이 바뀜으로써 그 주인의 대상물이 될 뿐인 겁니다.

자 이런 의미이다 보니
성전이라는 주인을 어떻게 허물어 짐으로써 옛남편이 왜 구원할 수가 없고
새남편만이 옛남편 옛주인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의 결과는 무조건 죄입니다. 그래서 심판 받아야 마땅할 뿐입니다.
지켜도 죄 뿐이요, 안 지켜도 죄 뿐입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심판 속에서, 옛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새남편의 등장인데 새남편의 등장이란 옛남편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옛남편이 어떻게 죽을까요?
성전이 어떻게 허물어 질까요?
지금 옛주인에게 다 충성하고 있는 판국인데
어떻게 새주인에게로 넘어가겠습니까?
넘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성전! 그거 허물어 버리면 됩니다.
성전이 허구로써 그림자로써 이데올로기 짖을 했기에
새주인만이 그 허상을 깨뜨림으로써
쫄따구는 주인만 바뀔 뿐이지 이동되는 그 과정을 누릴 뿐입니다.
못누리면 쏙아 냄을 당하는 겁니다.

유월절이 그런 기준에서 작용이 됩니다.
옛주인 애굽의 왕(사망이 왕 노릇)의 종 되었던 데서
이끌어낸 건져낸 여호와 새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똑같이 성전이 피라미드처럼 작용하던 그 종노릇에서
참성전 예수님이 새 주인으로 되는 그 과정 때문에
출성전 출애굽 출마귀 출세상 출이스라엘 출예루살렘 출교회를 당하는 겁니다.
새주인 때문이겠지요.
그럼 당연히 입창성전 예수님이라는 [예수 안]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 [예수 안] 이라는 현상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성령을 대상으로 삼아서 신앙하는 것은 옛주인의 방식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성령에 의해 대상물이 되어버린 자들이 발생합니다.
예수 안이라는 현상으로 성령을 받은자들이

이 옛주인의 방식에 빠진 그 핵심 중앙인 예루살렘을 자꾸 허물어 버리듯이
자꾸 목배임을 당하듯이 공격합니다.
그 난공불락의 성 예루살렘을 무참히 공격합니다.
그럼 당연히 애굽왕 바로왕처럼 그 성을 사수하는 세력이 당연히 생기는 겁니다.
그 성을 사수하고자 자꾸 자꾸 죽이는 겁니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주인을 사수하는 겁니다.
자기를 무시하지 말라 가 아니라
자기 주인을 무시하지 말라 인 겁니다.
기호학에서 문자란 결국 배후세력의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무시한 것이 곧 자기주인을 무시한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가 울면 자기도 따라서 울어버리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런 동질성 동일성이 바로 선악을 아는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것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의 핵 곧 예루살렘이라는 성전중심의 신앙으로 동질성을 추구하는
그 하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신들의 전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일으킨다고 하는 겁니다.
사흘이라는 간격을 벌려 보자
죽여보자 허물어 보자
그러면 너희들의 하나님이 과연 진짜인지 가짜인지 볼수 있지 않느냐

이 말을 들은 인간이라는 쫄따구들이 가만히 있겠나요?
자기 하나님 안 건드리고 에라이 예수 너나 죽어라 과연 사흘만에 일어나는지 보자 라고
죽여버립니다.

예수 니가 자초한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은 동질성을 자랑합니다.

저 봐라 저 봐라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는 나무에 달린자 이다 라고 말이죠.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간지에 말려든 겁니다.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에 말려든 겁니다.
십자가는 신앙대상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또 십자가는 재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저주받아야 할 것을 이런 주인교체 작업 때문에
마귀만을 상대로한 어리석은 십자가 사건이 재현이 되는 겁니다.
단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무한반복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결국 성령을 대상으로 하라는 날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는 대상으로 이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의 무한반복을 보여주는 겁니다.
졸지에 우리는 대상물이 된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 라고 뒤짚어 씌웠지만
정작 우리가 저주 받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겁니다.

주인을 교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꾀더냐 라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주인이 바꿨는데? 또 옛주인으로 돌아갈래?
나 돌아갈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꾀는 놈이 누구냐 라고 나무래시는 겁니다.
돌아가본들 주인이 없는데? 이 보호자 싸움에서 그 신은 없는데 말입니다.
허구요 허상이요 우상인데 말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개역)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개역)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개역)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6, 개역)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갈 3:7, 개역)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갈 3:8, 개역)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 3:9, 개역)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10, 개역)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개역)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2, 개역)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4,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15, 개역)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갈 3:16, 개역)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7, 개역)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8, 개역)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갈 3:19, 개역)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20, 개역)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갈 3:21, 개역)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2, 개역)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3, 개역)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4, 개역)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5, 개역)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6, 개역)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개역)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개역)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개역)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곧 유업은 기업무를자 고엘 즉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볼자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또 옛남편으로 돌아갈거냐 라는 겁니다.

고아 즉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겁니다.
과부 즉 그 남편 그거 가짜다 라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의 여섯남편이 다 가짜이듯
나그네 즉 너희 왕은 가짜이다 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인 싸움입니다.
그 주인 싸움에 중간에 낑긴 너희들이다는 겁니다.
누가 주인이냐 라는 겁니다.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임마누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겁니다.

어머니께 이틀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범죄를 했는데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을 누락 시켜버리면 이스라엘 전체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라고 여겨서
자신의 회개와 금식과 눈물의 기도를 펼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의 건재를 바랬던 겁니다.

참나 누가 누구를 걱정하나요? 죄인 주제에 말이죠.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다윗의 가문만 남겨버리고
이스라엘 전체를 누락시켜 버립니다.

그것을 그림까지 그리가면서 쌩쇼를 다 했는데
전체 집합 이스라엘이 있고 그 속에 부분집합으로써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했다면 다윗만 갈아버리면 됩니다.
딴 왕을 세우면 되겠지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해석이요 다윗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을 인간들이 자신들의 대상물로 삼아서 생긴 버릇입니다.
건방지게 대상물이 되는 약속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복음이 인간을 대상물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다윗만 살리고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사건을 기준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옳았느냐? 천만의 말씀
다윗을 땅콩처럼 톡 하고 두 조각내어 깨뜨립니다. 깨뜨리니까 그 속에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담겨져 있는 사람만 똑 하고 깨뜨리지 아무나 깨드리지 않습니다.
이 예수님만 남겨버리고 다 허물어 버립니다.
성전을 허물어 버리듯이
이스라엘 전체도 다 허물어 버립니다.

오로지 새주인만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써 다들 동원이 된 그릇입니다.

우리 손에서 긍휼의 그릇이냐 진노의 그릇이냐 따질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토기장이 마음대로 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 집사를 똑 하고 깨뜨립니다.
그 속에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대상물이기 때문에
약속이라는 보석을 드러내기 위해서 깨뜨리는 겁니다.
그릇을 깨는 겁니다. 접시를 깨자.

그런데 반대로 약속을 대상물로 삼은 자들은 성전 사수라는 이유로
스데반집사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꾸 성전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행 6:1, 개역)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저들의 약속과 새약속의 싸움 곧 두 약속의 싸움인 겁니다.
옛언약과 새언약의 충돌인 겁니다.
제3자 이방인들이 보기에는 기가차.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나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전체 세상의 싸움으로 확대됩니다.
결국 남의 일이 아닌 겁니다. 각 나라의 내부의 전쟁이 결국 이런 식입니다.
그래야 내부싸움으로 국력이 약해졌을 때 외부전쟁에 지는 겁니다.
그 외부에서 처들어 온 국가도 결국 내부 싸움에 빠지는 겁닉다.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성령의 소욕으로 인해 본문에 원망과 시기가 상대적으로 벌어집니다.
왜일까요? 왜 사람들이 심히 늘어나고 상대적으로 결핍성을 느끼는 자들은 원망이 극에 달하고 하는 이런 상대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혼자만 한쪽만 좋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한쪽이 심히 늘어나면 다른 한쪽은 심각한 결핍성이 벌어지는 겁니다.

다른 쪽이 이 쪽의 상황에 전혀 무반응적인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사건이 안됩니다. 사건이란 지난시간에 말했듯이 주인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주인을 건드릴줄 모르는 사건은 사건도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들이 반응합니다.
왜 자꾸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느냐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또 재현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누구 하나 죽는구만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냥 안 죽죠. 뭘 건드린 겁니다.
주인을 건드린 겁니다.

주인 건드리면 인간이라는 쫄따구는 반응합니다. 눈 시뻘겋게 달려듭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냥 [예수 안]을 외치는게 아닙니다. 예수 안을 대상으로 삼아버렸다면
아무런 사건이 안 발생합니다.

그런데 [예수 안]이 스데반 집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밖]이 반응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야 쪼개지는 거죠.
쪼개져도 상관없는 그 속에 약속이 속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죠.

상대적으로 안색이 변한 얼굴이 대조적으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 속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 4의 인물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불 속이라는 심판 속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저희들의 아비인 주인의 중심부에 들어갔듯이
우리들 또한 중심부에 등 떠밀려 들어가서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어제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어머니랑 대화하다가 하게되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정작 성전 다니던 즉 교회다니던 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믿을수가 없습니다. 이단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참 이상합니다. 교회다니는 자에게 복음을 증거하는게 아니라
교회다니는 자들로부터 죄인이라는 정죄받는 자들만 골라 골라서 자기 제자를 삼더라 라는 겁니다.
꼭 교회 다니는 자들 눈 앞에서 말이죠.
얼마나 더럽고 죄인들이면 다들 교회에서 거부하고 교회에서 쫏겨나서 교회에 감히 발을 들을수가 없는자들만을 골라 골라 그렇게 자신의 약속을 새언약을 심어버리시니까
상대적인 교회들이 미쳐서 날뛰고 그들을 본격적으로 정죄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약속을 심지 않았다면 전혀 미움 받을 이유가 없었듯이 말이죠.

(행 6:10, 개역)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11, 개역)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바로 이것만이 저들의 하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새약속을 심지 않았다면 전혀 건드릴수가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새언약이라고 새롭다 라는 의미를 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언약이라고 여전히 이어가면 되는데
새롭다 라는 새언약이 심겨져 버리니까 졸지에 언약이 옛언약과 새언약이라는 분절이 발생하는 간격이 벌어진 겁니다. 그것을 사흘만에 라고 죽음을,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곧 별세가 아니면 탈락되어야 마땅한 모세도 넘어갈수가 없는 심판의 강인 겁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변화산에서 소환되어 증거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니 옛언약으로 분류된 자들은 자신의 하나님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스데반의 증거를 찢어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두 하나님의 싸움인게 맞지요.

다음 시간에 할 7장을 보면 기존의 하나님을 대상화한 시각에서의 구약해석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돈 바꾸는 상을 뒤집듯) 새로운 해석이
그저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가
신학도 한것도 아니요
정통성경도 연구한것도 아닌
어디서 굴러 들어온 뼈다귀가
건축자들이 세운 그 건축을(건축물이란 그 당시의 최고의 기술과 지혜가 집약된 의미로 작용)
단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마치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만의 외침이
졸지에 스데반 집사에게도 들어가서
이들에게 분노를 자극하는 말만 골라 골라 하는 식입니다.
이미 완료이기 때문에 의문에 놓인자들은 그렇게 밖에 들리지 않는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돌파 하시는 겁니다.

정작 새언약의 기준에서 보면 드디어 옛남편의 사망으로 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자유의 발언입니다.

참 묘하지요 그 경계선을 아주 아주 예리하게 건드리면서 자유를 언급하니 말이죠.(유물은 이 경계선을 자극하기 위해 있는 겁니다. 물이 없으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전쟁이 납니다. 남이 가졌고 소유했는데 내가 못가지고 소유하지 못했다면 전쟁이 납니다. 차이성의 간격을 벌리기 위해서 말이죠. 풍요와 결핍은 그 값어치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툼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괜히 천국과 지옥이 있는게 아닙니다(예수님은 이 경계선을 일부러 톡톡 건드리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 자인지를 말입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임을 밝혀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새주인의 열심을 보이십니다.) 돈이라는 유물 잉여도 그렇고요. 주인을 보여주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 중에 최고의 잉여는 여성성입니다. 이 여성성만이 진정한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도(자기 양)를 빼앗고자 주님 쪽에서 마귀에게 먼저 시작한 일방적인 전쟁입니다. 그 어떤 전쟁도 이 전쟁 밖에 없습니다. 화평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빼앗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전쟁입니다. 아가서는 이 사랑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랑 때문에 벌어짐을 말이죠. 십자가 전쟁은 반드시 빼앗고야 말겠다는 이미 넉넉한 승리를 선언한 뿌뿌뿌 나팔을 불며 쳐들어오는 전쟁입니다. 그 과정에 우리가 놓여진 대상으로써 보호자 주인 싸움을 목격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일만 골라 골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동원이 되는 스데반집사가
또 십자가 사건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란 자가용 차에 걸려서 흔들 흔들 거리는 부적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물도 될수 없습니다.
나무를 왜 섬기냐고 또 따지는 자들도 있습니다.
나무도 아닙니다.

십자가란 저주입니다.
그 저주가 왜 축복인가를 스데반집사의 얼굴을 우리 같이 보면서
얼마나 성령께서 제대로 대상으로 삼았으면
상대적인 안색이 변한 분노의 얼굴에서 나타내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저주 속에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를 몰아넣은 겁니다.
똑 하고 스데반 집사를 깨뜨리니 약속이 들어 있음이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그러나 약속이 없는 자들은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자기변명으로 합리화 시킵니다.
저 봐라 봐라 저러니까 저주 받았지 라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도저히 못보도록 완고함 속에 가두어 버린 겁니다.

누가 봐도 유대인의 승리요, 스데반 집사의 실패입니다.
유대인들은 손해 본 것 전혀 없지요
그런데 그들은 유혹에 빠진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해서든 계속해서 목베인 영혼들을 양산해 내야 하니까 말이죠.
과연 누가 저주 받은 겁니까?

저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저주 받은 겁니다.

저주 속으로 들어가버린 등떠밀린자가 축복 받은 자입니다.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심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망의 왕노릇하는 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예수 안]입니다.

그냥 심판, 그냥 저주, 그냥 죽음이 아닌 (마귀도 건드릴줄 모르는, 마귀가 시기하지도 않는)

예수님이 받은 저주, 예수님이 받으신 심판, 예수님이 당하신 죽음 말입니다.

성령은 그것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지금도 현재도 이 십자가의 저주를 확대 재생산 증식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성령의 소욕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알길이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마귀보란 듯이 벌어진
약속이 벌린 주인 싸움인 것을 보여줍니다.

이 불가능한 말도 안되는 기묘한 일들을
주님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 마음대로 벌리십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지 않고자 하시는 그 섬김은
예수님만의 숙제입니다.

그 숙제가 우리에게 매일 매일 우리를 죽이시면서 벌어지는 것을 감사하게 바라보면서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그 날을 고대하고 고대합시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를 이 심판 속으로 몰아가는 그 섬김을 펼치시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인 우리에게 새주인으로써 말입니다.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님! 이 추운 겨울에도 주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 눈 녹듯 다 녹여버리는
주님의 피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또 스데반 집사와 같은 주님의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무리 꽁꽁 얼어 붙은 우리의 완악한 마음도
십자가의 피로 눈녹듯이 녹여주시옵소서
우리는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오직 그 십자가의 지혜로
십자가의 피를 헛되게 하지 않고자
심판 속으로 집어넣는 그 사랑을 그 성령의 일하심을
외면하지 않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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