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깨뜨려 복음을 뽑아내듯 (행 6:10-7:60)

하나님의 일은 성전(육)을 깨뜨려 복음(그리스도의 몸)을 뽑아내는 일이고,
사람의 일은 복음(그리스도의 몸)을 차단하여 성전(육)을 사수하는 일이다.



(행 6:10, 개역)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11, 개역)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행 6:12, 개역)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행 6:13, 개역)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행 6:14, 개역)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행 6:15, 개역)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7:1, 개역)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행 7:2, 개역)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 7:3, 개역)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4, 개역)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5, 개역)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행 7:6, 개역)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행 7:7, 개역)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행 7:8, 개역)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행 7:9, 개역)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행 7:10, 개역)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행 7:11, 개역)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행 7:12, 개역)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행 7:13, 개역)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행 7:14, 개역)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행 7:15, 개역)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행 7:16, 개역)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행 7:17, 개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행 7:18, 개역)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행 7:19, 개역)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행 7:20, 개역)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행 7:21, 개역)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행 7:22, 개역)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 7:23, 개역)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행 7:24, 개역)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행 7:25, 개역)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 7:26, 개역)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행 7:27, 개역)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행 7:28, 개역)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행 7:29, 개역)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행 7:30, 개역)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행 7:31, 개역)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행 7:32, 개역)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행 7:33,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행 7:34, 개역)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행 7:35, 개역)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행 7:36, 개역)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행 7:37,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행 7:38, 개역)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 7:39, 개역)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행 7:40, 개역)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행 7:41, 개역)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행 7:42, 개역)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행 7:43, 개역)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 7:44, 개역)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행 7:45, 개역)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사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누락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실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실체 노릇을 해 버리면
그 그림자는 딴 실체의 그림자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즉 주인이 다른 그림자인 겁니다.

여기에 성전은 과연 누구와 공명된 짝꿍인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누구의 그림자이기에 짝꿍 노릇을 톡톡히 하는가 라는
주인 싸움에 주인의 징후로써 드러나는 겁니다.

(요 3:30, 개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1:27, 개역)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8, 개역)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 1:29, 개역)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30, 개역)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요 1:31, 개역)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 1:32, 개역)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죽음의 징후로써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죽일려고 달려드는 자들을 막을길이 없습니다.
유혹을 이길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사수해야 합니다.
편법을 쓰든, 불법을 저지르든, 어찌했던 간에 성전만큼은 사수해야 합니다.
법과 법 사이의 허점을 노려서라도 성전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 성전을 깨뜨리겠다고 예수님의 몸이 다가옵니다.
분명히 예수라는 작자를,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참람한 말을 했던 작자를,
성전을 허물어 버리겠다고 했던 작자를,
성전 헐고 사흘만에 일으키겠다고 했던 작자를,
분명히 분명히 우리들의 손으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서 활동해 버린다면
이것은 마귀의 최고의 무기인 살인도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미움도 통하지 않고, 죽음도 통하지 않고, 사망의 권세도 통하지 않는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서 활동한다면
성전은 깨어져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몸이 다시 일어났다는 징후로써 등장하는 자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징후란 출처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출처의 상태를 물질로써 형태로써 가시화 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출처에서 나오는 물질과 같은 가시화 되는 형태입니다.
몸에서 콧물과 기침소리가 나면 그 몸이라는 출처에서 감기가 걸렸다는 증상으로써
콧물과 기침소리가 징후가 나타나는 겁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이죠.
몸을 출처로한 징후로써 처음자리를 말하고 누락하는 것이 증상 징후입니다. 사라지는 거죠.
그리고 사라져 보였던 처음자리인 몸은, 실체는 드디어 가시화 되는 겁니다.
그는 흥해야하고 나는 후패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징후로써 성령 오순절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아무나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는 징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 걸린 자 만이 콧물이라는 징후가 나타나듯
성령받은 자 만이 콧물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차이성을 보이기 위해서 단절과 차이로써의 간격벌리기가 벌어지는 겁니다.
아나리아와 삽비라 사건은 단절로써 아무나 성령받은자 속에 썩일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차이성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 차이성은, 이 단절성은 점점더 확대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 사건이 한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뻥뻥뻥 계속 증식되면서 터지는 겁니다.

만약 십자가 사건이 단 한번으로 그친다면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벌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벌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취소 시켜버리거나
예수님의 죽음을 인간들의 신앙대상물로 삼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의 부활 신앙 마저도 십자가인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 깨뜨리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십자가 사건은 한번으로 족해 그때로 지나가버린 사건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래야 교회를 통해서 장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그들의 무대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을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는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버립니다.
즉 십자가 사건의 재현입니다.

이 두 소욕의 충돌을 과거 구약에서는 약속의 땅 곧 함 땅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펼쳤는데
신약에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펼칩니다.
무엇이 있어서 일까요?
성전과 약속이 중첩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지금 현대에서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가야 느낄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 치열한 충돌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란 거의 없습니다. 100% 이다고 생각해야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멀리 멀리 찾아서라도 가야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성전으로써 그 충돌을 격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원수된 우리로써의 죄인만 그렇게 격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의지입니다. 반드시 자기 자녀를 마귀의 손아귀에서 끄집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 자에게만 이런 충돌이 있는 겁니다.
소유권 싸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런 싸움이 없는 자는 딴 싸움을 벌리겠지요.
자신의 생존 싸움인 돈 문제인 겁니다.

교회를 빼앗기면 졸지에 돈이 날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소유는 이런 육의 소욕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겁니다. 저들의 살인의지를 이용해서 주님 자신의 자녀를 빼내는 겁니다.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빼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을 반드시 허물어야 하는 겁니다.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육의 소욕인 돈벌이 생존권을 박탈하는 효과입니다. 죽일 필요 없이 확대 시켜버립니다.
바벨탑을 톡하고 허물어 뜨려서 수평적으로 확대시켜 국가가 탄생토록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마귀의 손아귀에서 자기자녀를 빼내는 효과입니다. 물론 죽습니다. 이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을 표출시키는 겁니다.

결국 인간 좋아라 라고 벌어지는 사건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악마성의 확대이고
아벨의 제사는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표출시키는 징후로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주님의 살아계심만 나타낼 뿐입니다. 거기에 동원이 된 그릇 즉 껍데기로써 아벨이 태어날 수 밖에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도 그러합니다. 하필이면 예루살렘을 사수할려는 의지를 표명한 그 핵심 중앙에 십자가 사건을 또 뻥뻥 터트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 집사의 구약 해석이 나옵니다.
왜 구지 구약을 해석하는고 하니
스데반 집사의 성령 받아 외친 것에 대한 거부성을 더더욱 부각 시키기 위한 겁니다.
저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스데반 집사의 성령의 외침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저들의 말처럼 반드시 예수의 성전 헐라 라는 발언으로 모세와 율법을 거슬린다고 거부한 것을 스데반 집사가 친철하게도 거슬리는게 아니라 이제 그 내막의 실상이 왔다 라고 그림자의 실상을 제대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 소리는 저들을 더더욱 긁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어차피 도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죠.
죽이든 말든 어차피 스데반 집사는 성령을 받은바 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사람을 좋게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좋게 해야 합니까?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죠. 맞습니다. 사도바울이 스데반 집사를 죽인 당사자로써
이 관경을 목격한 자입니다. 자신이 원수로써 성령의 일을 목격했습니다.
사람의 일에 빠져서 하나님의 일을 못 보았던 그 상황을 바울 본인이 제대로 격었던 겁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죽여라 라고 외쳤던 자들입니다.
그것도 교회 다니고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성전에 충성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 원수성을 까발리는 겁니다.
과연 사랑해서 말씀을 지킨것일까요? 아니면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하나님과의 동질성이 못 될까봐 두려워서 지킨 것일까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서 말씀을 지킨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그 내막을 들추어낼려면 예수님만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손에 죽어보면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랑은 여기에만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말씀을 지키고
성전에 충성하고
율법을 지키고
모세를 거슬리지 않게하겠다는 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 외에는 달리 할게 없습니다.
이래도 죄 저래도 죄 어쩌라는 거냐 라는 것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사랑은 바로 그 죄성을 폭로해 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사랑이 왔기 때문에, 내어주심 때문에, 감사만이 나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는 졸지에 저들이 아니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율법 모세 그리고 하나님 그리고 성전을 제대로 이야기하다가 돌삐 맞아 죽습니다.

이제는 저들이 악령이 충만해서 스데반 집사를 단절시켜버립니다.

아나리아 삽비라 사건의 반대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 싸움을 벌리는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육의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영역에 즉 바벨론 국가 교회의 영역에 들어오지 말아라 단절시켜버리는 겁니다.

똑같이 성령의 영역에 아나리아 삽비라 차단시켜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영역의 소욕을 제대로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이 두 소욕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그 영역을 차지하고픈게 아니라
자신의 소욕을 부각시킨다는 겁니다.
주님이 뭐가 아쉬워서 땅따먹기 하겠습니까?
무슨 기독교 문화 운동으로써 전도와 선교로써 영역 따먹기 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어차피 소돔과 고모라는 아무리 부흥해도 날로 날로 번성해 나아가도 어차피 망항 지옥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 일병 구하기를 펼치시는 이유는 자신의 긍휼을 입은 자가 괜히 쓸데 없이 그 소돔과 고모라에 말려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롯이 괜히 소돔과 고모라에 말려들어간게 아닙니다.
일부러 심으신 겁니다. 롯을 빼내면서 소돔과 고모라가 롯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라는 알리바이를 형성해서 심판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입장에서 롯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라고 생각해 봅시다.

뭘 어떻게 대해요 롯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보통 다른 사람대하듯이 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그 당시 사람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구별할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대하는 모습이 결국 예수님 보다 낮은 자리, 우리야 장군 보다 낮은 자리에서가 아닌, 꼭 왕의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서 보기 때문에.
우리야 장군이 특출나게 여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의 신분은 반드시 다윗보다 낮고,
예수님의 비천함은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못난이 자리에 있어도 그 보다 낮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의 시선에서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거룩함을 볼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스데반 집사를 왜 죽일 수밖에 없는가?
아무리 봐도 거룩성이라는 차이성을 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을 대상으로 삼아서 거룩을 소유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받은 성령 즉 거룩한 성령을 같이 받은게 아니라
차이성으로써 스데반 집사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악함으로 거룩한 곳 성전을 소유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가짜 거룩과 진짜 거룩의 싸움입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소유당하는 거룩이요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거룩에게 소유당한 스데반 집사입니다.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 사건은 그 반대로, 남들은 다 받았는데 이 부부는 받지 못한 사건으로써의 단절성입니다.
소유성 싸움입니다. 주인 보호자의 소유권 싸움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직한 영 곧 사랑이 곧 성령이 곧 예수의 마음이 있다고 우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데반 살인 사건은 왜 벌어질 수밖에 없는가?

정직한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사랑이 없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은 그래 그래 잘 지켜도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였음을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아는 겁니다.

자 이런 십자가 사건을 배경으로 우리 주변에 깐다면
삶이라고 우기는 우리의 환경에 깔아버린다면
우리는 백이면 백 또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 받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안다 라는 이유로 더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이런 인간이 이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도 같은 장소 예루살렘에 말이죠.
한 쪽은 육의 소욕으로 붙잡고 있고
또 한 쪽은 성령의 소욕으로 붙잡고 있고

이 중첩된 곳에서 만이 십자가 사건을 만개시키는 겁니다.
반드시 불뱀에게 물려 다 죽어야 할 심판으로 몰려버린 그 장소에서
악마의 소욕과 여호와의 소욕을 같이 보도록 하신 배려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애굽이라는 그 악마의 소굴에서 빼내시도록
애굽왕을 강퍅케 했듯이
그래서 다른 소욕인 성령의 소욕을 보여주시듯이
지금 이스라엘을 완악케 만들어서
다른 소욕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속의 이스라엘
구약식으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속의 남은자
더 과거로 표현하면 가인의 제사 속의 아벨의 제사 즉 제사 속의 제사입니다.

지금 이 스데반 사건으로 치면
성전 속의 성전 즉 성전 속의 그리스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우리 손으로 소유해 버리면
또 십자가는 반드시 이런 사건을 벌려야 합니다.

십자가 속의 십자가

너희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 십자가가 너희를 다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그 십자가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되는 겁니다.
사실상 십자가 속의 십자가가 아닌
그냥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본인 당사자 에게는 십자가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만
정작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받은자에게는 폭력적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을 쥐어버린 다윗의 모습이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십자가 속의 십자가에 도리어 소유당해 버리니까
졸지에 이스라엘 전체가 다윗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 속에서 세상에나 세상에나 예수님이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이 다윗을 핍박하는 그 배경으로써 십자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나 역사를 거꾸로 해서 규정하듯 다윗에게 나타났고
지금 스데반 집사에게도 나타나 스데반 집사를 이스라엘 속에서 빼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은 몰라도 그 스데반 살인 사건의 핵심에 사도바울이 있는데
그 사도바울 조차도 빼내시고자 이렇게 십자가 사건이 맞물리도록 공명화 됩니다. 짝궁이 됩니다.
사도바울 조차도 나중에 성령 받고서 스데반 집사처럼 이스라엘로부터 핍박당합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구약을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재해석해 버립니다.

즉 구약의 모든 사건 사건 하나 하나가
제사 속의 제사 곧 하나님 속의 예수님으로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으로써 재해석이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십자가의 취지라면
십자가 때문에 반드시 발생해야만 하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취소나 인간들의 실수로 인해 방지해야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더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죄악을 감추시는게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도말하시고자 이렇게 해서라도 들추어내신다는 겁니다.

이런 죄인에게 비로소 구원자가 왜 십자가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는가를
다시금 보여주시는 겁니다.

로마군사와 저들이 비웃은 내용을 한번 깊이 세겨 봅시다.

어찌 구원자가 도리어 십자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이것은 로마병사의 말입니다.

너나 구원하시지?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말입니다.

왜 자기는 구원 못하면서 구원자 행세를 하느냐 말입니다.

안 이상합니까?

모든 인간은 이 구원을 목적으로 자기구원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도 믿고
로마 국가도 세우고
성전도 짖고
율법도 지키는데
뭐가 아쉬워서 너 같은 구원자를 또 믿냐 말이지요.

물론 허기진 배를 가진 사람들 이나
다신교 사람들은 뭐든지 다 끌어모아서 이 신 저 신 다 신어보고 온갖 신을 신발장에 두겠지만
일신교는 그런 무식한 자들과 차이두기 위해서 한 놈만 팬다 라고 나오겠지만

뭐가 아쉬워서 내 손으로 죽여버린 그 예수를, 내 손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주로 그것도 주인으로 삼느냐 말입니다. 졸지에 내가 노예 둘로스가 되는 판국인데

그래서 구원 속의 구원입니다.

내가 이해한 구원을 깨뜨려서
내가 소유한 구원이 아닌 구원이 나를 소유하기 위해서
내 몸을 깨뜨려서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깨뜨려서 약속이라는 이삭을 드러내듯
다윗을 깨뜨려서 여디디야 선물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깨뜨려서 예수님을 드러내듯
성전을 깨뜨려서 십자가의 복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지금 스데반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불뱀 물린 자들로써
마귀에게 갇힌바 된 자임이 들통납니다.
그 마귀라는 주인에게 새주인이 와서 도둑처럼 세간을 늑탈함으로써
그 전리품으로써 새이스라엘을 만들 듯이 말입니다.

이 작전에 사도바울이 말려서
뽑혀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또 사도바울을 또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의 몸이 뽑혀나오는 겁니다.

복음이 우리를 대상으로 삼아서 벌어지는 거룩한 성령 전쟁이 이러합니다.

인간의 솜씨로, 신앙으로 벌어지는 전도나 선교, 순교도 아닙니다.

반드시 대조적인 기능이 나타나면서 드러나는 겁니다.

이런 기능에 인간의 모습은 그저 완악함 뿐임을 들통날 뿐입니다.

 

예수님! 우리는 이런 십자가의 자작극에 말려들어서
우리의 악마성이 빨리 빨리 들통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왜 옳았는지
우리는 그 십자가를 왜 거부할 수밖에 없는 마귀자식인지를
십자가라는 사랑 앞에서 들통내시고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사랑하사 화목케 하시는 그 십자가의 심판을 부어주심에
감사함이 넘치도록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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