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 우편에 선 예수님과 vs 복음 잔멸자 청년 사울(바울) (행 7:55- 8:8)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8:1, 개역)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2, 개역)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8:3, 개역)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8:4, 개역)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5, 개역)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 8:6, 개역)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행 8:7, 개역)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행 8:8, 개역)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복음인 성경말씀은 참으로 희한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그 내용마저도 숨김없이 바로 바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을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마치 6.25 전쟁의 고지 탈환을 하루에도 12번 이상 주인이 바뀌는 고지전과 같습니다.
고지전 영화 재미있던데 말이죠.
사람이란 어떤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 댓가성을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스데반 집사라는 아주 대단한 이단을 잡아 족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그 성과물을 사울이라는 청년에게서 확인받을려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사울이라는 청년 앞에서 최종적으로 돌로 쳐 버려서
죽음을 집행합니다. 판관 앞에서 실행을 해야 그 법적 효력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 보는 앞에서 이단을 척결해야 자신의 행위가 보장 됩니다.
지 혼자 이단 척결해 본들 누가 알아주겠느냐 말이죠.
그런데 사울이라는 청년 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새파랗게 어린 청년 앞에 스데반의 죽음을 보일려고 할까요?
왜 그 법적인 효력을 보장받을려고 할까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말리엘 문하에 대해서 살펴 봤습니다.
이 가말리엘 문하의 최고의 수제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청년 사울입니다. 곧 바울이죠.
결국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도 명예심으로 살 듯이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구지 굽신 굽신 거리며
인정받고자 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회적 구조 자체가 믿음이 아닌 행함이라는 신념으로 짜여진 구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차 있는 이상, 그런 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 장로유전에 그만큼 심각함과 위기의식에서 나온 다급함이 조성이 된 겁니다.
분명 앞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한 바리새인이, 아마 존경받는 최고의 지성 가말리엘 교법사 이겠지요.
이 일이 하나님에게서 났다면 아무도 막을수가 없고
사람에게서 난 일이다면 저절로 소멸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지혜롭게 보이느냐 말이죠.
중용의 정책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딱 그 경계선에 걸쳐서 이래도 빠져나가고 저래도 빠져나갈수 있도록 했으니
뭐 하나 제대로 된 단절성이 보이질 않는겁니다.
경계가 모호한 겁니다. 기다려 보자 그 경계선도 나타날 것이다 라는 식이죠.
반면에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여 재산 몇을 빼돌린 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성령을 통해서 바로 바로 즉사 시켜 버립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서 목사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데 얼마나 이용당하는 본문이냐 말이죠.
그러나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의 그 행위 때문에 즉사한게 아니라
성령의 단절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동원이 된 겁니다.
선결정(먼저 결정된)의 단절성으로 인해 후차적으로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가 그 교육소스로 동원이 된 겁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때마다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로 요렇게 베드로는 이들 부부를 즉사 시킬때는 언제고? 자기는 손으로 먹는 이방인과의 식사자리에서 은근히 자리를 빼는, 도저히 더러워서 같이 못먹겠다고 발뺌하는 것을 사도도 아닌 바울에게 딱 들켰을때에 여전히 자신은 그 단절성을 못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조차도 단절성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갈 2:12-14) 오죽하면 꿈에 예수님이 한다라이(보따리) 채로 무라 무라 괘안타 묵어도 된다 내가 준건데 누가 더럽다고 하노, 어서 무라카이 라는 꿈을 꾸게해서라도 이 단절성을 극대화 하는 겁니다. 즉 아나리아 삽비라를 즉사시켜도 정작 본인도 단절성 속에 놓여져야 하는 주님의 간섭이 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행 11장). 이 관계성의 사귐은 단절을 거쳐서 펼쳐지는 겁니다. 그 정도로 성령의 단절성은 베드로 본인도 스스로 행하고 지킬수 있는 능력이 베드로 본인에게는 없을 정도로, 도리어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대상물이다는 거죠)
성령은 철저한 단절성이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혹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나 예수는 두려워 떤다
(마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막 4:10, 개역)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를 묻자오니』
(막 4:11, 개역)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 4:13,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막 4:14, 개역)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행 28:23, 개역)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28:24, 개역)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행 28:25, 개역)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개역)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이 얼마나 예수님의 단절성의 성령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개방케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단절케 만드는 겁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증거하심은 개방이 아닌 오히려 완악케 만드는 복음증거이다 는 겁니다.
구원해 줄려고 안달난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부으시는 겁니다.
심판을 부으시면
단절을 부으시면
그 심판과 단절을 기뻐하는
마땅히 죄인임을 아는 주님의 회개를 보는 자가 저절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러나 개방을 부어버리면
지난 시간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처음자리가 아니라
그 빈 공터가 아니라
도리어 이미 확보한 아브라함 자손됨, 사랑받는 아내 됨(율법의 아내), 하나님의 왕되심의 백성됨을 외치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단절은커녕 개방으로써 너도 나처럼 믿기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 바로 400년 빈공간의 사라진 매개자 상황에 유대인들이 창작해서 조작해버린 그 결핍성을 채워버린 유대교라는 신흥종교가 자리매김으로 채워진 겁니다. 악마교이지요.
오늘날 기독교도 같은 맥락입니다. 악마교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공통점이 뭡니까? 유대교 기독교 공통점?
네 맞습니다.
자꾸 고아 아니다 아브라함 자손이다.
과부 아니다 사랑받는 신부이다.
섬기는 왕이 없어 버려진 나그네가 아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왕의 백성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면서 저거들끼리 서열 싸움을 하는 거죠.
원래 좌파는 바보입니다. 그리고 우파는 악당 깡패집단인 겁니다.
둘다 똑같은 마귀집단인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다 서로 서로가 정통이라고 싸우는 거죠. 결국 정통 탈환을 하고픈 겁니다.
이런 육의 싸움이 아닌 영의 싸움은 과거의 맥락을 잇는 영의 활동이 아니라
미래완료인 심판을 잇는(작살이 미래에서 날라와서 꼿아버리는)
미래완료의 침략이 영의 싸움인 겁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이 일에 충실하시고자
예수님은 십자가로 돌진 한 겁니다.
그것을 오해한 베드로는 사람의 일로써 막고자 했던 겁니다.
아니 개방해야 하는데 왜 단절로 나아가시는 겁니까? 안됩니다 라고 한거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자꾸 과거에 형성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를 계속 잇고자
그 이음을 통해서 정통을 유지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 또는 우리 모두는
자꾸 아브라함 자손임을 유지할려고 하고
자꾸 사랑받는 신부를 유지할려고 하고
자꾸 왕되신 하나님의 백성됨을 유지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정통화 시킬려고 하는 거죠.
이 일관성, 이 행함, 이 사랑 등등에 ...
(실험관 돋보기로 아니다 아 뭐더라 아 실험관 현미경으로 개구리를 우리가 들따 보고 있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개구리가 우리를 들따 보고 있듯이,
닭이 세 번 울어주지 아니하면 베드로는 그 완악함 마음을 지적 받을 길이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세 번 회개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닭이 세 번 우는 회개를 숙제해야할 판국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에잇 회개 안해 막 춤추고(비회개), 에잇 금식 안해(비금식), 에잇 눈물 안흘려(비눈물)를, 세명의 희생번트 안타로 도로에 진루하여 승점을 올리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비행함입니까?, 선물이란(여디디야) 바로 이 상대적인 행함과의 차이인 비행함입니다.
도리어 비행함이 나의 행함을 날려버리고 구멍 뻥뻥 뚫어줘야, 닭이 세 번 울어줘야, 주의 오른편에 서심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바로 비의인 자리인, 죄인의 자리에서 말이죠.)
졸지에 고아 과부 나그네로 새로 창조해 버리는
비일관성, 비행함, 비사랑, 비십자가 라는 단절성의 성령의 활동이 희년이 덮치니까
소위 왜 저딴짖을 했던고 라고
비로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앞에서 모조리 다 배설물로 여기게 하시는
주님의 회개가 덮쳐오는 겁니다.
이 주님의 회개가 넘어오지 않는 이상
내 회개로 자꾸 저런 배설물들을 더욱더 끌어 모이게 되는
그것이 전부인냥 착각 속에
마약 중독속에 살아갈 뿐인 겁니다.
오늘 청년 사울 곧 바울이 나오는데
가말리엘 교법사가 유대사회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로
(행 5:33, 개역)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행 5:34, 개역)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행 5:35, 개역)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행 5:36, 개역)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행 5:37, 개역)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행 5:38, 개역)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행 5:39, 개역)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말은 저렇게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아무도 못말리고
사람에게서 났으면 소멸된다는 성경지식과 경험을 말하지만
정작 뒤로는 그런 장로와 같은(나이든 존경인물) 자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오히려 그 말은 정작 뒤로는 젊은 놈들이 나서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무언의 암시, 응시가 되기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똑똑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즉 사람하나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또 그가 실수로도 남을 죽여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정도로, 007 살인면허증 같은 그런 기능을 발휘할 정도로 그런 수준이였던 새파란 젊은 청년 사울이 알아서 나서서
스데반 집사를 바로 즉사 시켜 버리는 겁니다.
뭐 아나리아 삽비라 사건과 같죠? 쌍을 이루듯 말입니다.
(행 22:3, 개역)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행 22:4, 개역)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행 22:5, 개역)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행 22:6, 개역)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그만큼 악마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일체 양보할수 없는 전쟁을
그 경계의 모호함이 없이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치열한 두 소욕의 싸움터 공간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고지전 쟁탈전이 벌어지는 겁니다.
정통이라고 우기는 대제사장 사두개인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 등등은 이 예루살렘을 빼앗길수가 없다고 사수할려고 하고
복음은 이 예루살렘을 빼앗아 원수의 성문 뚜껑을 열어 이들의 완악함을 열려고 하는 겁니다. 죄인되게 만들려고 말이죠. 원수되게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인 것이 사울 청년이 아니라. 그들 유대인이 아니라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령입니다. 왜죠? 단절성을 극대화 시키는 겁니다. 간격벌리기입니다.
사흘이라는 간격 말이죠. 새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자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니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저들이 죽인게 아니라 말이죠.
완벽하게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재현입니다.
주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자유(거룩)가 덮친 거니까요 그 거룩이 바로 차이성 단절성 구별성입니다.
졸지에 가인은 남아서 아무도 자신들 건드리지 않는
말뚝박은 군인 꼴이 된 겁니다. 제대할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청년 사울이 이기고
스데반 집사가 죽었으니 게임오바인가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바로 빌립의 활동이 성령의 소욕으로써 또 발현 됩니다.
스데반 집사가 소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풍성해 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충만 하여 만방에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죽여도 그 죽임이라는 사망권세 무기가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또 살아났뿌고 또 살아났뿌고 스데반이 죽으니 빌립이 나타나고 빌립이 죽으니까 나중에는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 바울이 되어 나타나고 바울을 죽이니 오히려 전세계 방방 곡곡에 십자가 곧 [너희가 죽인 예수가 주가 되셨다]가 더욱더 증식 활성화 되어 퍼지고 퍼지는 확장이 되는 겁니다.
자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단절성입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십자가는 가짜입니다.
어딜 감히 인간의 정(초코파이)이나 또는 인맥, 경험으로 쌓은 과거의 것들로
잇기라는 개방성으로(연합, 손세례, 손할례, 손성전) 이 단절성을 돌파 하겠습니까?
그 반대로 단절성이 개방성을 돌파하는 겁니다. 도리어 당할 판국입니다.
도리어 손 세례, 손 할례, 손 성전은 찢겨져야만 하는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래서 새창조된 새몸이 손성전이 허물어 짐으로써 사흘만에 세워진 몸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이듯 (처음자리 빈터 빈 공간)
비행함 비할례(비아브라함자손) 비사랑(비성전 비신부) 비백성(비하나님)이라는
손 씨에서 비 씨로 팔을 어긋맞게 되는 겁니다. 손씨 몰라요? 비씨는 알겠죠? ㅋㅋㅋ
철수가 아니무이다. 안 철수, 비 철수 ㅋㅋㅋ
바로 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충성한 자가
비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를 놓고
스데반 집사는 졸지에 비개방을 당하는
죽음 곧 단절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러든 말든 또 빌립이 투입이 됩니다. 목베인 영혼들이 마구 마구 생겨나는 거죠.
이 얼마나 신납니까? 신나는 죽음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고아(비자손) 과부(비신부) 나그네(비백성)에 충성하는 자가
너희가 죽인 예수가 주가 되었다는 겁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바로 취급당하여 죽임당하신 하나님의 저주 받은 십자가 죽음이
졸지에 모든 예정 모든 선택 모든 언약의 기준이 되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십자가만을 피해서 형성된 저들의 정통신앙은 정통교리는 정통선택(구원)관은
똥 덩 어 리 배설물임을
바로 너희들이 가장 신임하는 수제자 사울이라는 청년이
도리어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복음은 악마의 활동 조차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그 요소 하나 하나 까지 빠뜨리지 않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죠? 복음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철저한 단절성 차이성 구별성으로써 성령의 소욕의 넉넉한 승리 때문에
도살장에 끌려가 세상의 찌끄래기 배설물 구경꺼리가 되어도 상관없는
아주 매정하기 짝이 없는 비정함이
오히려 가장 애정깊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활동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개입했다면 이런 막장 십자가(극적 십자가=십자가의 이중성)는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손을 땍지 하면서 손때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손할례 손성전 손율법 손사랑 손행함 손자손을 모조리 배설물로 만들어 버리는
도리어 배설물 세상의 찌그래기 취급받는
비할례 비성전 비율법 비사랑 비행함 비자손 등등을 성령의 모태인 십자가에서 새창조 된
고아 과부 나그네가 희년의 완성으로써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이 원수들은 주의 오른팔인 구원의 뿔을 보여주기 위해
소모품으로써 동원되는 겁니다.
이 신나는 심판에
스데반 집사는 또 빌립 집사는
또 앞으로 계속 나타나는 목베인 영혼들은
비인간 취급받으면서도 까지
인자 되신 예수님이 오른편에 서신 주 되심
심판 주 되심을 증거하는
성령의 소욕에 동원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지금 귀에 새들의 쥐저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닭이 우는 소리처럼 저 새들도 열심히 주의 회개를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여시고자
주의 오른팔을 드셨습니다.
주님의 심판이 이 땅에 부어주시옵소서.
주의 진노를 우리 몸에 부어 주시옵소서.
그 진노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그 심판의 불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 심판의 불 속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 성령의 단절된 세계에
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볼수 없는 예수님의 얼굴을
심판의 제단 숯불로 우리 입술을 지져 주시옵소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우리
주의 섬기심인 그 십자가에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못박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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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깨뜨려 복음을 뽑아내듯 (행 6:10-7:60) (0) | 2013.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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