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로써의 십자가 (거리끼게 하지 않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무이다) (행 8: 1- 8)


왜 유대인에게는 십자가가 걸림돌일 수밖에 없는가?


처음자리로써의 십자가



(마 3:16, 개역)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행 8:1, 개역)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2, 개역)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행 8:3, 개역)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8:4, 개역)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5, 개역)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행 8:6, 개역)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행 8:7, 개역)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행 8:8, 개역)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이 가시화 됩니다.

바로 마귀의 활동입니다.


즉 마귀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가시화 시키지 않는 십자가복음은 거짓인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구체화 하면서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시온이라는 이 예루살렘 성전을 기준으로 해서 고지탈환을 하루에도 12번이 바뀔정도로 그 고지전이 치열합니다.


아니 이미 완료된 복음인데 왜 구지 탈환을 해야 합니까? 그냥 냅둬 버리지?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두 소욕이 보이질 않겠지요.

뭔가 부지런히 충돌과 싸움 곧 전쟁이 보여진다는 것은

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미 완료된 전쟁이기에

구지 이길려고 고지탈환을 하는게 아니라

두 소욕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경계선을 긋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와 아직이라는 또 신학적인 논리에 빠져야 하느냐?

경계선이 아직 안 그어졌다는 거냐?


신학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경계선이 [아직] 안 그어져서 이제야 부랴 부랴 긋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이미 완료가 되었기에

그 완료성의 풍부함, 증폭, 잉여성(천지삐까리로 허드레 널려 있어서 만개해 무익해 보이는 찌끄래기 부스러기 싫어버린바 됨)으로써 확장 충만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입니다.

시간적인 1 2 3의 순서로 볼게 아니라

역으로 시간을 거꾸로 쳐들어가는

천국이 (미래완료) 어떻게 누구를 작살 꼿는가 라는 확인작업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고 하니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에 있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다는 겁니다.


그냥 뱀같이 지혜롭자 비둘기 같이 순결하자 해 버리면

또 또 또 성화론자들처럼 율법 지키기 밖에 안되는

말씀을 건방지게 대상화 하는 자기 숙제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앞엣것을 빼면 안됩니다. 너희를 이리떼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마 10:16)


미래완료가 덮쳐서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노동화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 댓가성을 노리게끔 되는 겁니다.

일한자에게는 일한 것이 삯이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도리어 이 어리석은 지혜에 충성한 예수님의 일하심을 봐야 할 판국입니다.

안본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일에 빠져 있기 때문에

아들을 위한 임금의 잔치가 왜 신나는 종말잔치인지를 모르게끔 되는 겁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케 하기 위해서

주님은 자기 양을 이리가운데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이것이 너무 너무 지혜로운데 말이죠. 누가? 인간이 아니무이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렇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적의 궁궐속에 쏘옥 하고 집어 넣어 보호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탁란의 지혜입니다. 풀수 없는 수수께끼(삼손) 입니다. 해석불가.


저주에서 심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저주 속으로 심판 속으로 집어 넣는다는 겁니다.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죽음 속으로 집어 넣듯이 말입니다.


거짓을 이길려고 할게 아니라

거짓을 누가 이겼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목격하라꼬,

그 거짓 속으로 집어넣는겁니다. 목격하면 증인으로써 아니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우리는 반대로 베드로처럼 자꾸 거짓을 이길려고만 할려고, 거짓말 하면 안된다고,

선악적인 법적 의식으로 이길려고 하는 겁니다.

 

그냥 차라리 유혹에 져버리세요. 유혹에 지면 유혹이 없습니다.

즉 뱀 같이 지혜롭다면

그 거짓을 이기는게 아니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거짓속으로 집어 넣어 거짓말 세 번을 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베드로는 안된다 거짓말 세 번 안할끼다

예수님은 아니다 넌 거짓말 세 번 할끼다


베 : 세 번 안한당께요

예 : 어허 한다 카이


베 : 안한다 카이요

예 : 한당께


베 : 절대 안합니다 제가 장 지지겠습니다.

닭 :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아뿔사

(7번 용서 하겠습니다=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철회 단절이 아닌 개방 소통 말입니다.
안된다 너는 7에 70 증폭으로 용서 받아야 한다. 넌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다.
가로막는 종말, 김종말, 박종말, 문종말, 안종말, 최종말, 김종말, 박그레이스, 문은혜, 안그라시아 이랑께롱.

이미 넌 내꺼랑께. 
아뿔사!!)

나는 무조건 틀렸고 예수님은 무조건 옳았군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뱀같이 지혜로우심입니다.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지금 베드로를 상대로 한게 아니라

이리 떼 라는 늑대 마귀들 짐승들을 상대로 한 겁니다.


베드로는 마귀를 거칠수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만 오로지 돌진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만이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만을 들추어 내기 때문입니다.


마귀 궁금해? 궁금하면 십자가

궁금하면 십자가 속으로 집어 넣어버리면

아 그래서 그렇구나 라고 무릎을 팍 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구원용이 아니라 심판용이라는 겁니다.
개방이 아니라 단절성입니다.
오픈이 아니라 철회 입니다.(오픈하면 손님 맞이할려고 얼마나 분주하겠습니까?)
열린문이 아니라 게임끝 종말 묻닫자 손털자 입니다. (문 닫으면 속이 시원합니다. 빨래 끝~~~)

끝났다네 끝났다네 세상은 끝났다네 라고 신나는 종말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개방이 아니무이다.

철회 이무이다. 단절 이무이다. 이 단절성이 뱀같이 지혜로움과 비둘기같이 순결함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심판용이다 라고 외쳐도

실제로 복음증거의 현장이 심판성이 나타나지 않고

오늘날 교회들처럼 인간의 온정이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면

그것은 가짜 십자가인 구원 못시켜서 안달이난 개방용 성령, 십자가의 영 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조작물이 되는 겁니다. 악령들린 동아리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철회하는 단절성만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 성령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비둘기 같이 순결하다 라는 겁니다. 거룩성입니다. 종말성 차이성 구별성입니다.


이 비둘기는 심판의 종결성입니다.

노아 방주의 심판성으로 물이 빠졌을 때 비둘기가 그 확정성을 보여주는데 활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비둘기 같이 성령이 함께 하심이 되는 겁니다.


단절성의 확정적이다는 겁니다. 개방의 확정이 아니라

그래서 평화이다는 겁니다. 전쟁의 종결이다는 겁니다. 종말의 완성이지요.
전쟁의 종결이 없는데 우찌 평화라고 마음대로 외칠수가 있겠습니까?
종말은 미래완료로써 마음껏 전쟁을 본격화 하는 겁니다.

즉 전쟁의 시작이자 마침을 예수님의 개시로써 완성 종결이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전쟁에 미완료가 아닌 이미 완료로써 나팔을 뿌뿌뿌 불면서(이미 승리, 이미 종결)

완료되었다고 이미 넉넉한 승리를 외치면서 본격적인 십자가를 외치는 겁니다.


그렇기에 저들이 오히려 이 십자가가 종결이었는데

예수님을 죽여버림으로써 끝났는데

도리어 끝난게 아니라 본격적인 시작이 되어버렸으니

더 이상의 전쟁 무기인 죽음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죽음이 소용이 없게 된게 바로

죽음 속으로 집어넣은 뱀같이 지혜로운 십자가의 지혜 때문이다는 겁니다.
맞물리도록 뫼비우스 띠 처럼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시적으로는 고지탈환처럼 고지전을 벌리는 겁니다.
이미 원수의 성문 뚜껑이 열렸다는 의미겠지요. 열어놓으면 인간들이 달려들어 닫고 열어놓으면 또 닫고.


자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유대인에게서만은 이 십자가가 걸림돌 거리끼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정작 오늘 사도행전 본문처럼

앉은뱅이가 낫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는 성령의 활동인 희년 완성은

이스라엘이 누려야할 유대인의 몫입니다. 그래서 빈자리가 되고 그 빈자리를 누리려야 할 유대인이
스스로 처음자리를 거부함으로 인해서 그 사랑을(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기쁜소식) 이방인으로 채우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자신은 유대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심바 되어서 왔지 

개같은 이방인에게 보냄바 된게 아니다고


그러자 맞습니다 주여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꽁꼬물 부스레기 찌끄래기 잉여로

살지 않습니까 제발 저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 주시옵소서 라고


긍휼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주인과 종의 관계인 긍휼(사랑)의 관계를

보냄을 받은자와 이스라엘의 관계로써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씀의 내용이 도리어 이스라엘 유대인을 완악하게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줘도 안 먹겠다고 하는 겁니다. 사랑 필요없어 이미 하나님 믿거든, 율법 지켰거든, 성전 손에 쥐었다고 말이죠.

그거(그림자) 허물어 버리는 진노, 저주를 먹어야 쓴 잔 쓴 나물을 먹어야 사는데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이상하죠 완악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더욱더 완악하게 되는 꼴이 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누구 잘못입니까?


누구 잘못입니까 라고 묻는 제가 묻는 것이 웃기게도

개같은 이방여자가 졸지에 이 관계 속에 들어옴으로써

졸지에 유대인은 팥죽 팔아버린 형에서 꼴이 난 셈이 되고

이 이방여자는 약속의 관계 속으로 넙쭉 참으로 뻔뻔스럽게 들어오게 되는 것을


바로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게 펼치시는 것이 되는 겁니다.


믿음을 그 여인에게 주고서는

유대인에게는 안주시고서는

그 여인에게 준 믿음을 찾으셨으니

자기가 심은 믿음을 되찾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뱀같이 지혜로운 탁란인 십자가의 지혜 곧 성령의 종말의 사고

단절의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의미 입니다.
하만으로 부터 액막이가 된 삼생이를 심판의 불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두 소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금옥이를 삼생이 액막이로, 삼생이를 금옥이 액막이로 말이죠.


뱀을 싫어하는 유대인이 도리어 이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된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싫어하는 유대인이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된 겁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남이 아닌 교회가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면 교인들이 다 도망치니까 돈이 안되거든요.
뱀 싫어하면 뱀 자식이 아닌게 되는 겁니까? 아니죠.


이번주에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처음자리 즉 태어난 자궁이(십자가) 바로

더러운 똥물인 부정의 자리였다고 말이죠.
그것이 스캔달인 십자가 자리 입니다.


그것을 신약이 아닌 구약에서 언급하기를

바로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이방인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할 일은 바로 이 처음자리를 계속 확정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꾸 이스라엘 본인들이 자신의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왜죠?

거룩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괜히 율법을 지킨겁니다.

율법을 못 지키도록 

반드시 어길 수밖에 없도록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율법을 보면 볼수록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룩 그 더러운 똥물을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아닌 이방인 나아만 장군이 똥물에서 7번 씻어서 피부병 문둥명이 나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상태가 처음자리 처음사랑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은혜를 공짜로 누리던 그 긍휼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의미로 말이죠.


오늘 십자가마을 글을 보니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 라는 글을 봤습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oard01&page=1&wr_id=9924


즉 이 말은 잃어버림이 없다면 되찾는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잃어버림의 자리가 바로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입니다.

너희는 원래 똥덩어리(배설물) 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남이 아닌 이스라엘이 발로 차버리니까

졸지에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자로 변해 버리는 겁니다.


안 핍박한다고요?

반드시 핍박 합니다.
피해자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라고 외친 가해자 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창녀 세리 강도를 주님께서 긍휼이 여기니까

그것을 일부러 바리새인 코 앞에서 펼치니까

바리새인이 미쳐버리는 겁니다.


그 멀쩡하던 인간들이 그렇게도 순하고 양반같고 남만 배려하고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교회 하나님 가족 밖에 모르는 그들이

예수님의 더러운 짖을 보고서는 미쳐 환장하는 겁니다.


저거 저거 안 막으면 큰일난다고 보는 겁니다.

악에 대한 방종은 뭐라 뭐라 라고 카던 영화도 본적이 있는데


꼭 유대인의 사고방식인 거죠.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고 여겨 그래서 지난 시간에 청년 사울 곧 바울이 그렇게 열심으로 나사렛 이단 예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심을 다해서 막아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부정성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겁니다.

너희가 그 부정한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였고

그 고아 과부 나그네를 불쌍히 여긴 그 마음이 담긴 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무이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사랑해서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는 율법을 못지킨다는 긍휼을 바라는

처음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라 라는 율법을 지켜서 여호와를 사랑했잖아 라고 처음자리인 부정성의 자리가 아닌 도리어 그 처음자리를 외면하는 자리에 앉고야 말았다는 겁니다.

이 모순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아주 잘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법으로 받아들이는 내 마음 속에 떡하니 주인 자리 차지하고 있는 죄 라는 놈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캬 바로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죄 라는 것이 나의 주인 노릇하고 있는 이상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무이다 라는 것을 사도바울은 안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돌진한 이유가 바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라는 마귀를 , 마귀만을 상대한다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졸지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 로써만 증거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걸림돌로써 말입니다.


이 십자가가 졸지에 처음자리를 짝꿍으로 하는 율법의 완성으로써

우리가 다가가는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대상물이 되는 우리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거기에 유대인은 이 처음자리인 십자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처음자리인 십자가를 거부함으로써

졸지에 거리끼게 되는 십자가의 지혜에 말려드는 양상이 된 겁니다.


도리어 십자가의 미끼로써 마귀를 들추어내는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이

도리어 미끼를 자신들이 물어 버리는 식이 되는 겁니다.
걸림돌(마음에 찔림바 되는)로써 작용해야할 이스라엘이 도리어 걸림당하여 실족케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전쟁(십자가)에서 태어난 그 처음자리를 그들 스스로가 거부한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창녀 세리 강도,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찾아오신
희년의 완성자, 율법의 완성자(사랑) 예수님에게 실족 당해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마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지금 사도행전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졸지에 이스라엘이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써

졸지에 육의 소욕의 대표성으로 성령의 소욕에 대조가 되어버리는 존재로써

드러나는 겁니다.

도리어 그들의 완악함은 여전히 개같은 이방인과 또 그들과 어울리는 자들을

여전히 율법에 의거해서 더러운 자로써 취급함으로써

끊임없이 충돌되는 그 현장에 유대인들이 계속 동원이 되는 겁니다.


맞습니다. 마귀는 성령의 소욕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다 해야 하는 겁니다.

마귀가 마귀 값을 하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마귀입니까?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두움은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빛이 그 차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겁니다.

이 차이성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러니 이 단절성이라는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예수님이 자기 양을 어디에 보내 겠습니까?

바로 늑대들이 우글 우글 거리는 곳에 보내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왜 원수의 문으로써 뚜껑을 열려고 할까요?

어차피 오늘 본문처럼 그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할려는 것이 없이

오히려 그 예루살렘의 핍박을 기점으로 해서 우주로 확장해 버리는 겁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이 십자가 사건이

또 다시 확장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것도 복음이 증거 되는 교회에서는 이 두 소욕의 충돌이 여실히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왜죠? 예루살렘이 그랬거든요.


교회 자체가 고정된 복된 장소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증거 되는 순간

마귀들이 발악하는 그 육의 소욕을 들추어내는

성령의 소욕의 내막을 나타내는 사건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의 재현 확장이 아니라

그저 부동산 확장

교인수 확장이라는 딴데 눈길이 돌려져 버리면

이 두 소욕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인간들의 조작물들이 다 막아버리는 겁니다.

이 두소욕의 맹렬한 두 세계를 보여주는 마당터가 교회입니다.

배경입니다.

배경은 무대일 뿐이지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꾸 주인공으로써 교회가 교회의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조작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고 만 겁니다.

교회 뒤에 숨은 인간이 말입니다.

율법과 성전 뒤에 숨은 인간이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지키고 사수하기 위해서

복음을 거무하는

그런다고 복음이 가만히 있느냐? 계속 거리끼게 하도록

목베인 영혼들이 자꾸 자꾸 나타나는 겁니다.

이러니 유대인들이 난감하기 짝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리끼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인

아버지 없는 고아

남편 없는 사랑못받는 미움받는 과부

임금도 없고 섬기는 자 없는 떠돌이 나그네를

이스라엘 본인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 이면서

예수님을 졸지에 이단으로 몰아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뱀 같이 지혜로움에 말려든 겁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한 성령의 소욕인 단절성 곧 종말에 말려든 겁니다.


종말단체가 종말을 거부했으니 말이죠.

마치 할례민족이 마음판의 할례를 거부하는 식입니다.

그래놓고 손 할례 했다고 우기는 식처럼 말입니다.


불가능한 마음판의 할례를 받은자인 처음자리 불가능한 긍휼인 고아 과부 나그네가

졸지에 아브라함 자손 아들이다. 사랑받는 아내 신부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가능한 손할례로 바꿔버리니까


졸지에 강도만난 자를 율법 지킨다는 이유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부정한 시체나 피 흘린자를 가까이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해서 가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즉 부정한 자가 그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 겁니다.


마귀들린 자의 이웃이 된 겁니다.


아니 누가 마귀들린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이 바로 마귀들린자요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입니다 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빚진자임을 아는 자

곧 회개가 덮쳐진자(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잃어버림이 있어서 되찾음이 있는) 그 자만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 곧 주님의 용서가 임한자인 겁니다.

그 용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써

인간의 믿음이 아닌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의 믿음은 그 사마리아인을 계속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라는 의미로써

사마리아인으로 남겨두시는 겁니다. 곧 부정한자인 죄인 중의 괴수로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유대인에게서는 그 사마리아인은 끝까지 걸림돌로써 작용케 되는 겁니다.

사마리아인 자체가 걸림돌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대적으로 유대인에게 붙이니까

남들에게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데

유독 유대인들에게서만큼은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또 양심이라는 선악을 아는 인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겁니다.


뱀같이 지혜로움과 비둘기 같이 순결함이 사마리아인에게 덮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못본다는 그 증거가 어리석다 미련하다 라고만 판단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애굽이라는 늑대소굴에 양들을 집어넣고 탁란시켜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뻐꾸기가 드디어 날라오를때에 비둘기 같이 순결한 종말성 곧 단절성

갈리짐이 펼쳐집니다. 출애굽입니다.

미련한게 아니라 오히려 기가막힌 지혜입니다.


실컷 우묵배미, 오목눈이 처럼 남의 자식만 실컷 키웠던 겁니다.

지혜문서에 나오는 4가지 지혜로운 동물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비리붙어 사는 겁니다.(잠30:24-28)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하시고자 늑대소굴에 집어 넣는 뱀같은 지혜이다 라는 겁니다.

죽음에서 보호하실려고 죽음속으로 집어넣듯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이것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입니다.


이것이 제사 보다 더 나은 순종입니다. 순결입니다.

종말이라는 순결이요 처음자리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욕할 때


베드로는 가시면 안된다고 착각한 겁니다.


베 : 십자가에 가시면 안된다고

예 : 그러나 그 십자가가 너를 건진다고


베 : 아니 저주인데 우찌 건집니까 심판인데!!!


예 : 그 심판이 너를 건진다는 겁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행 8:3, 개역)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이 복음을 잔멸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말하는게 아니라 복음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란 새로생긴 새창조물의 의미로 성전과 대조적으로 표현된 겁니다. 물론 뒤에는 또 썩여져서 나타납니다. 마치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해놓고서는 뒤에는 또 막 썩이듯이


아무튼 복음을 잔멸하는 사울이

놀랍게도 복음 스스로가 잔멸한다고 표현해 놓고서는

잔멸 되는게 아니라 도리어 확장 시키고 있는 겁니다.


a : 잔멸되더냐? 

b : 안됩디다. 


a : 잔멸 안되면 어떻터노?

b : 잔멸 되기는커녕 도리어 불난 집에 석유 붓는 돕듯 더 불이 퍼집띠더


자 이래서 스데반 집사는 바로 코 앞에서 복음을 외치는 겁니다.

도리어 구원해 주는 꼴입니다. 


죽여버리면 끝났다 심판받은거다 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를 도리어 주님의 오른편을 들도록 하게 하는 꼴이 된 겁니다.


막기는커녕 도리어 퍼트리는데 반드시 유대인들이 동원이 된다는 식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합니까? 이것이 모사입니다. 뱀 같이 지혜로움입니다.


그래서 새해는 저주 받으세요 라고 하는 것이고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column&page=1&wr_id=2085

니 멋대로 살아라 라는 것이고

해피엔딩은 없다 라는 겁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column&page=1&wr_id=2090

즉 성 관계는 없다 라는 라캉이 말한 의미와도 같습니다. 

인간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라는 겁니다.
[이성의 간지, 예정조화, 보이지 않는 손, 자연의 의도, 허위의식(이데올로기), 소외(누락, 배제, 물러남, 수동성),
원인 없는 결과, 무시험 합격, 부조리, 모순, 부정성, 스캔달론] 라는 겁니다.


잃어버림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되찾기 위함입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oard01&page=1&wr_id=9924


되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자꾸 이런 노래를 부르십니다.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나는 요 이 땅에 있을맘 없어요. 낡아빠진 성경책 겉표지에 테이프로 붙인 종이조각에 이 노래가 있는 겁니다. 노래 부르시면서도 순 거짓말이라고 웃습니다.)


복음을 잔멸하고, 그 복음의 교회를 잔멸한다는 것은

그런 사울의 손에 붙인다는 것은

그 사울이 교회를 위해(여기서는 성도를 말합니다.) 목숨을 거는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마치 거짓말 하도록 하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거짓말하도록 하심 같이 말입니다.

마귀의 손에서 빼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빌립이 또 멈춤없이 복음의 증거에 동원이 됩니다.

여기서 기적과 병고침이 동원이 되는 것은

기적 자체나 병고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기적행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병고칠려고 하신 것이 아니듯이


도리어 차이내기 위함입니다.


저쪽을 시기케 완악케 하시고자 긍휼을 입힌 겁니다.


여기서 빌립이 성령을 통해서 병고침과 기적이 일어난 것은

성령의 소욕이 문둥병자 앉은뱅이라는 처음자리를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즉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처음자리 말입니다.

자 그러면 또 다시 이 처음자리를 무효화 시킬려는

십자가 라는 걸림돌을 무효화 시킬려는

육의 소욕이 보란 듯이 상대적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두 세계는

마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처럼

아직까지도 계속 되는 겁니다.

미래 완료로써

이미 완료된 천국의 소욕이 작살을 미래에서 꼿아서 땡기듯이

지옥의 소욕이 작살을 꼿아서 땡기듯


이 두 소욕은 두 세계를 또렷하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런 일들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모습은 지금 현재에도 보란 듯이 벌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거리낌으로 또 미련함과 어리석음으로써 지금 현재에도 자신의 소욕을 또렷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욕에 갈려야 할 판국으로써 경계선을 또렷하게 배치되는 성령의 소유성을 드러내는데 동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주님의 소욕이 이 십자가를 통해서 또렷하고 명료함을 보게 됩니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건지시고자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마귀 손에 붙이심을

늑대 소굴에 집어넣는 그 십자가의 지혜를 보게 됩니다.

육의 소욕인 육체와 함께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십자가의 그 저주에

그 심판에 

그 죽음에

몰아가심을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게 하심이

그것이 바로 사랑이였음을 또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성령의 열매 그 성령의 소욕을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성령의 소욕이 금지함이 없이 매일 매일 부어주소서


십자가의 저주를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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