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무이다.(행 7: 1-60)
사람의 일이 아니무이다. (비일관성이 최고의 일관성이다.)
비행위가 최고의 행위이듯
비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다.
(행 7:1, 개역)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행 7:2, 개역)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 7:3, 개역)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4, 개역)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5, 개역)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행 7:6, 개역)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행 7:7, 개역)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행 7:8, 개역)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행 7:9, 개역)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행 7:10, 개역)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행 7:11, 개역)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행 7:12, 개역)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행 7:13, 개역)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행 7:14, 개역)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행 7:15, 개역)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행 7:16, 개역)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행 7:17, 개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행 7:18, 개역)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행 7:19, 개역)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행 7:20, 개역)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행 7:21, 개역)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행 7:22, 개역)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 7:23, 개역)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행 7:24, 개역)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행 7:25, 개역)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행 7:26, 개역)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행 7:27, 개역)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행 7:28, 개역)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행 7:29, 개역)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행 7:30, 개역)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행 7:31, 개역)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행 7:32, 개역)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행 7:33,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행 7:34, 개역)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행 7:35, 개역)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행 7:36, 개역)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행 7:37,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행 7:38, 개역)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 7:39, 개역)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행 7:40, 개역)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행 7:41, 개역)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행 7:42, 개역)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행 7:43, 개역)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 7:44, 개역)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행 7:45, 개역)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사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기서 비 라고 아닐 비 라고 쓴이유는
일단 반대의 의미로만 보면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아니다](아닐 비) 라고 규정하는 외부의 또는 내부의
(여기서 내부란 자아의 내부에 또 다른 주체를 말하지 자아라는 주체를 말하는게 아니다, 아닐 비 ㅋㅋㅋ)
간섭으로 인해 발생하는 분열 곧 차이를 말한다.
즉 거룩이라는 주체에 대상이 된 거룩에 휘감기게 된 전리품으로써 아닐 비 이다.
사랑은 여기 있다 라고 아예 단정시켜 버린다.
어디에 사랑이 있는데
어떤 장소 개념이 아니라 사건 개념이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아니요로 규정하는 사랑이
사건 개념으로써 참된 사랑이다는 것이다.
즉 단절성으로써의 아닐 비 이다. 非. 나(인간 육)에게서 나오는 뭐든지 가짜요, 뭘 해도 죄일 뿐이다.
즉 참된 사랑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그 사랑을 비사랑 즉 사랑이 아니다 라고
규정하는 사랑으로써 발현하는 사건의 유발자가 된다.
이 비사랑을 거쳐서 등장하는 사랑만이 참사랑인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가 비사랑에 의해 거짓취급받는 모습으로써 말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버림 받는 자신의 원함이 비원함으로 규정되는 사건을 제시한다.
곧 십자가 사건이다.
나의 원대로 와 아버지의 원대로의 차이성이 발생해 버리는 사건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예수님의 원대로와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가 부딧히는 충돌로써
졸지에
유대인의 원대로와 유대인의 하나님의 원대로가 상대적으로 부딧히는 충돌로 대조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걸림돌
(십자가에 메달리는 메시아가 디딤돌이 아닌 비디딤돌, 든든한 반석이 아닌 비반석 곧 거치는 반석,
평안 화평의 피난처가 아닌 불화의 검으로써 비화평 실족케함)로 작용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그들의 양심과 그들의 신앙에서는, 즉 지혜(지혜를 사랑하는 철학) 에서는
졸지에 십자가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비양심 비신앙 비지혜가 되는 식이다.
즉 비 라는 아닐 비로 표현한 것은 반일관성이 아니라
분명히 일관적으로 행동하고 사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기좋게 뒤짚어 엎어버리는
더 큰 일관성 앞에서 졸지에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그 사건 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그 압박감? 또는 희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 기가막히고 황당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좋은 그런 희열이다.
분명히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돌진하시겠다는 그 선언에
자신의 열정이 그를 가로막지 않으면 안되는 그 큰 사태를 격지 않도록 막고자 했다.
이 열정 앞에서 분명히 사랑이요 열정이 진정성 있게 분명하게 일관성있게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느냐 라고 [비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이 아님]을
졸지에 지적 받는 [하나님의 일]을 난생처음 격게 된다.
자신의 열정을 [사람의 일]로 규정해 버리는 [비사람의 일] 곧 [하나님의 일]에 휘감기게 되는
생전 처음 격게 되는 하나님의 일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비사람의 일] [사람의 일이 아니무이다]를 말이다.
어떤 이가 십자가마을에 이런 질문을 했다.
나는 믿습니다 라고 표현하면 왜 공격을 받느냐 그럼 십자가마을의 표현이 옳으냐 라는 질문이다.
십자가마을의 십자가가 비십자가가 아니면 그것은 저들 성화론이나 김성수쪽의 십자가가 되고 만다.
즉 십자가마을의 십자가 조차도 [비십자가]로 규정하는 십자가가 활동하지 않으면
졸지에 그것은 [사람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일에 대상물 밖에 되지 않는 십자가인 셈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신앙으로써 충분히 십자가의 저주를 가로막을 수 있는
예수님 안됩니다. 가시면 안됩니다 라고 할수 있는 가능성의 십자가 말이다.
그래서 아닐 비 이다.
십자가의 대상물에 십자가마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마을이 늘 글로써 내어놓는 그 십자가를 끊임없이 치는 십자가를
도리어 십자가마을 사람들이 목격해야 할 판국에 놓여졌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치는 [십자가 속의 십자가] 말이다.
어 그렇게 되면 스스로 저거들 끼리 망해 버리는 것 아니냐 라고 보인다.
그런데 도리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가짜 십자가이다.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십자가를 친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가 사라지는게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가 풍성해 진다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느냐
왜 예수님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느냐
라는 이 십자가 사건에서
이방인들처럼 너거 하나님이 너희를 버렸구나 아이고 꼬시다.
너희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해놓고서는 도리어 너희를 버리냐? 그게 말이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메?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메?
차라리 그런 하나님인 것 같으면 무슨 하나님이 그렇노 그 하나님을 버려라 라고
이방인들이 놀려댄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되어온 사건이
이제 집약이 되어서
그렇게 핍박받던 이스라엘이 도리어 예수님을 그렇게 놀려댄다.
뭐 니가 구원자 라꼬?
너 자신을 구원해 보시지?
니가 엘리야 라메?
니가 메시야 라메?
뭐 니가 하나님이라메?
옷을 찢고 회개를 하면서 목숨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 집어 넣는다.
이들의 비하나님을 곧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그 마귀,
[비하나님]을 끄집어 내기 위해
십자가 사건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아니되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비십자가]가 아니라,
반드시 반드시 발생해야만 하고 매일 매일 늘 수시로 발생해야만 하는
[비취소십자가사건]이 되도록 규정하는 사건으로 발생한다.
사람의 일은 곧 [비하나님의 일] 마귀일은, 다시는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치적인 공포로 백성을 규합케 하는 국가민족의 이벤트로 자리 잡게 되지만
정작 그런 [비사람의 일]인 하나님의 일은 매일 매일 수시로 늘 기쁘게 자리잡게 되는
생활 속의 일상 곧 범사에 주의 목전이 되도록 십자가의 피바다로 구석 구석 유비쿼터로 만들어
그 어떤 구석이든 십자가의 용서의 피가 미치지 않는 장소가 없도록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악이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여기 있다고
죄악의 구석 구석에 [비사랑]을 규정하는 사랑으로써 다가오는 사랑이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스데반 집사의 구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당연히 상대적인 유대인의 구약 해석에 반드시 비해석적인 해석으로써 대조적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유대인의 구약해석이 과연 오늘날 정통적 신학 해석이라고 우기는 자들처럼 진짜 정통적인 바른 해석이 흐트럼 없이 쭈욱 올곧게 내려왔는가 하는 점이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400년이라는 빈공간이 생겼다.
이 400년 간의 빈공간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아서 생겨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선지자라는 매개자가 사라진 시대를 대신하는 것들이 졸지에 생겨버렸다.
선지자가 없음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선지자가 없는 빈공간에 선지자를 대신하는 것들을 새롭게 가득 채워넣듯이
인간 손의 조작물들이 본격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란 정통성이 아니라, 육에 따른 본능에서 발생된 유전이라는 것이다.
육의 소욕에 따라 발생된 400년 빈공간을 채워 넣은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과 대조적인 마귀의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그대로 나타나
(돌을 떡 되게 기적베풀라-기업 자손,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천사가 손으로 받들어 준다-과부가 아닌 사랑받는 자,
온천하 만국을 줄테니 머리 숙여 절하라-나그네가 아닌 임금과 백성의 관계)
남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예수님과의 충돌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정통은 커녕 가짜들만 가득채워 놓고서는 정통이라고 우기는 것만 채운 것이다.
그럼 정통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정통은 사라져야 정통인 것이다.
이을수 있는 정통은 이미 가짜다.
진짜 정통은 오히려 사건이다. 이 불가능한 사건이 정통이다.
그 사건을 무효화 시키는 육의 소욕을 동원해서 사건은 십자가의 저주로써 표출된다.
이 아무것도 아닌 정통은 정작 누락이 되어 사라졌고
정통 아닌 것이 정통의 자리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식으로 [비 아무것도 아님]을 주장한 셈이다.
여기에 그런 [사람의 일] 곧 [비 아무것도 아님]을 배경으로 깔고, 카페트를 깔고,
그 무대의 장에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를 외치니
유대교에 세뇌된 베드로가 예수님 안됩니다.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면 안됩니다.
저희 유대교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 이다고 했습니다. 안됩니다 라고 외친다.
여기에 예수님은 [그 안되는 것이 된다], [그 안되야 하는 것을 이루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
베드로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의 일이 아닌], [비하나님의 일]에 예수님이 가시면 안된다 라는 말에
예수님은 그 [비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자 [비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십자가=비하나님의 일을 져야 한다고 한다.
베드로는 [비하나님의 일 = 십자가] 지면 안된다고 하고
예수님은 [비하나님의 일 =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고
이 두 충돌은 지금 스데반 집사의 구약 새해석에 대해
유대인들과의 충돌로써 다시 재현되고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이 아무리 유대인이 철회시켜 무화시켜도
이상스럽게 무화 되기는커녕 더욱더 불난 집에 휘발유 끼얹는 식으로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그 400년 빈공간에 너무 너무 충실하게도 [비하나님의 일]을 채웠다.
채워 놓고서는 [하나님의 일]로 채웠다고 우겼다.
그 내막이 바로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비하나님의 일 = 십자가]로 해석이 되는것에
비로소 반발하면서 유대인들의 살인의지를 유발케 한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게도 십계명 중에 살인하지 말라 라고 그 십계명을 지킨다고 자부했는데
지키는 십계명이 비십계명인 십자가를 죽여버리는
그렇게 됨으로써 지키는 십계명이 졸지에 모순에 빠지는 살인하지 말라 라는 법계정자가
도리어 법을 어기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법을 선포하는 법선포자 법계정자가 법선포함과 동시에 그 법을 어겨버리는
살인하지 말라 라고 했던 그 법이 도리어 살인하지 말라를 어겨버리는 비법계정자가 되는 식이다.
자 이렇게 되면 법이 아니무이다. 라고 법 계정자 본인 당사자가 외치는 식이다.
법 지키자 해놓고서는 당사자가 법을 어겨버리게 되니까
그 법을 무효화 시키는게 아니라
도리어 그 법을 일점일획도 떨어뜨리지 않게 되는 식이다. 율법강화다.
이것이 새법의 등장이다. 새로운 해석이다.
비사랑이란
사랑을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다 라는 말로써
내 사랑에 내가 충실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의 사랑 보다 더 큰 사랑에 압도적으로 졸지에 내 사랑은 사랑 축에도 못 끼어든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는 의미를 고백케 되는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비사랑인 것이다.
내 따나 최대로 사랑해서 진정성 있게 사랑이라고 자부했었는데
나의 사랑 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 사랑이 덮쳐왔을 때, 더 나은 사랑이 왔을때
그 사랑 앞에서 나의 사랑은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나의 사랑은 망해야 패해야 삭제 당해야 하며, 그의 사랑은 흥해야 하는
그런 진짜 사랑을 죽음속에서 저주 속에서 심판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라고 비로소 목격함으로써 저절로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 회개를 내가 진심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회개가 덮쳐오니 내 회개는 쥐뿔도 아닌 이루 말도 다 할수 없는
십자가의 울부짖음에 압도당해 그 위압감에서 자신의 회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는 것이다.
다윗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가 틀렸다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비회개 비눈물 비금식 비기도로 만들어 버리는 진짜 회개 눈물 금식 기도가 더 나은 제사로써 다가옴으로써 비교당해 버리니, 거룩이 입혀져 버리니
비로소 비회개임을 비눈물임을 비금식임을 비기도임을
즉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아는 것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적극적으로 의욕하며 추구하는 것이 회개이다.
왜?
예수님께서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지함으로써 즉 십자가(저주)를 의지함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그 십자가가 옳았음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일하신다는 거룩이 덮쳐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비믿음 곧 사람의 일로 규정해 버리는
비하나님의 일로 취급받는 하나님의 일 십자가이다는 것이다.
이 싫어버린바 된 하나님의 일이 아니면
지적받을 길이 없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
행 7: 1- 8절까지 아브라함에 대한 해석에서 유대인은 자신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토달지 말자 라고 암묵적으로 해석이 된 반면
스데반 집사는 그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자손이다 라고 비아브라함자손을 외쳐버린다.
맞아 죽어도 싼 해석을 한 셈이다.
돌을 떡 덩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졸지에 여전히 고아 취급해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자녀가 아브라함이라고 외친다.
아브라함 자손인 자신들로 귀결되는 해석을
아브라함을 예수님의 자손이라고 해석해 버리니
아브라함 자손이 유대인이 아니다 라고 해석되어버리는 효과와
(즉 너희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고아다.)
또 하나
졸지에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앉혀버리는 꼴이 되니 (기업 무를 자,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 고엘)
졸지에 자신들의 주가 되는 아브라함이 모욕당하는 고로 자신들도 모욕당하는 결과가 생겨 버린 것이다.
이것은 보통 충돌이 아니다.
모든 근간을 허물어 버리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버리는 해석이 되니 말이다.
아브라함자손으로써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주로 앉히고자 한 해석땜에 예수를 버렸는데
그 관계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는데
그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의 주가 되니 졸지에 버린돌이 머릿돌이 된 셈이다.
(다윗이 어찌하여 다윗 자손에게 주라고 하느냐? 유구무언)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즉 주춧돌 머릿돌 모퉁이는 건축구조물의 반석이 되는 핵심자리이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다 요동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들리는지 안흔들리는지 요동하는지 비요동치는지 알아볼려면
죽여보면 안다. 흔들어보면 안다. 요동 소동케 해보면 안다.
베드로가 반석인지 아닌지 알아보면 비반석케 해보면 안다.
물론 백번 만번 베드로는 흔들렸다. 요동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반석인가?
넘어져도 너~~~무 넘어져버린 꼬끼오 세 방에 꽈당 베드로는 나가떨어져버린 자인데?
바로 이 [비반석 됨]이 베드로가 반석을 흔들리지 않고 외칠수 있는 것이다.
비반석으로써 반석을 외치는
원수의 자리에서 주의 오른편을 말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베드로가 비반석됨이 아닌 반석의 자리에서 반석을 외쳐버리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자기 양으로 삼아버리는 꼴이 된다.
베드로 자신에게는 반석이 아니기에 [비반석]이기에 반석을 외치듯
자신의 사랑이 더 이상 아닌 것을 제대로 지적을 받았기에
뻔뻔스럽게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취지에서 스데반 집사의 구약해석은 계속된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제발 내 믿음이 옳습니다 라고 주장할게 아니라
내 믿음은 반드시 틀려야만 합니다 라고 제발 막사시라 라는 것이다.
비믿음을 추구하라 라는 것이다. 내 믿음은 아니올시다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또 그 다음 내용은
요셉을 거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모세라는 선지자에 대한 설교인데
광야교회 즉 비가시적교회를 줘도
또 모세라는 선지자를 줘도
위에서 언급한 바 결국은 그 광야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이 비구원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게되는
구원자의 섬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상을 섬기고 애굽으로 돌아갈려고 했다는 것이다.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만을 확보할려고 했다. 그 확정적인 법적 확정을 사랑보다 우선시 했다. 그래서 도리어 과부처럼 자신을 사랑해줄 애굽을, 우상을 다시 찾아 되돌아 간다. 부자청년처럼 말이다. 어릴적 부터 다 지킨 것을 알아주는 신을 찾아서 말이다. 그 우상을 찾아. 이것이 과부의 모습이다. 때려죽어도 아내가 될수 없는 새남편이 찾아오지 않는, 자신이 남편을 찾아 헤매는 과부)
이것이 지금 스데반 집사를 죽일려는 자들인 유대인의 마음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제자다 라는 것만 우긴다는 자체가 이미 애굽으로 돌아갈려는 마음과 같다는
여전히 예수님을 주로 모시기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세의 제자다 라고 우겨본들
남을 정죄하는 율법만 손아귀에 쥘 뿐이지
정작 자신들의 소경됨을 볼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외치니
그들이 졸지에 죄인으로 지적 받는 것에 대해. 소경 됨을, 과부 됨을 지적 받는 것에 대해,
비로소 완악한 마음이 들통남에 감사함이 아닌 살인의지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심한 충돌에 스데반은 오히려 확인사살을 하듯
쇠기를 박아버린다. 아니 자신이 뻔히 죽는 줄 알면서 말이다.
스데반 집사는 다윗을 이제 언급함으로써 건드리지 말아야할 성전을 난데 없이 휘져어 버린다.
시온이라는 기초를 건축자들의 손에 맞기지 않고
졸지에 예수님 자신이 건축물의 주춧돌이 되고자
반드시 건축자들의 손에 버림받음으로써 주춧돌이 된다는 비일관성의 십자가 지혜이다.
즉 인간의 손에 의하지 않는 건축물이다.
반석은 이렇게 인간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동치 않는 주춧돌이어야 한다.
그 건물의 재료로써 스데반 집사는 더 이상 죽음이 흔들 수 없는 반석재료로
건축물에 사용이 된다.
예수님이 직접 건축물을 세우시는 방식이다.
저들이 보기에는 비건축물이다. 비가시적인 시온이다.
그리고 저들에게는 가시적인 시온을 추구하다 보니 비건축물인 예수님의 몸을 허용할 수가 없다.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살아날수 있는 성전이 될수 있는가?
그런데 그 비건축물로 취급받는 건축물(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몸)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가시적인 시온 예루살렘 성전은 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건축물을 깨는 식이다.
이 정치적 싸움이 바로 온천하 만국을 네게 줄테니 절하라 라고 나그네의 임금, 백성의 왕 싸움인
머릿 싸움이다.
여기에 성령의 소욕에 아나리아 삽비라는 단절 되고
또 육의 소욕에 스데반 집사는 단절이 된다.
서로가 서로의 건축물에 이질적인 재료는 버리는 식으로써
각각의 소유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할례 (기업)
모세 율법 (사랑)
다윗 성전 (머리=주)
이 스데반 집사의 설교의 요지는 단절이다. 곧 성령의 소욕이다.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의 주] 되심 때문에 (너희가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나 주가 되셨다)
인간의 해석 곧 육의 소욕인 사람의 일은 단절되는 식이다.
여기에 인간의 반항은 이 십자가(인간의 손으로 짖는 성전을 거부하는)에 대한 거부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신앙을 비신앙으로 지적하는 예수님의 믿음이다.
예수님의 믿음은 인간의 믿음과 다르게 믿지 말아야 하는 것만 골라서 믿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저주이다.
나무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이다.
그 저주 속에 우리가 있기에
예수님은 그 저주를 대신 받고자 하시는 믿음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곧 비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그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를 지시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그 하나님의 저주를 지시고자 이 땅에 오심이다.
하나님이 저주를 세우고자 하는 비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저주를 세울줄 모른다.
성령의 소욕인 단절을 세울 줄 모른다.
그저 사람의 손으로 짖고자 하는 건축물 성전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개방, 바벨탑 구원의 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저주를 세움으로써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곧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다.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 vs 그리스도의 몸의 차이다.
비그리스도의 몸 vs 비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이다.
여기에 인간이 믿어대는 즉 가치있게 여기는 성전(다윗) 율법(모세) 기업 할례(아브라함)를 믿어댐으로써
졸지에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버림받는 돌 취급을 당하는
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머릿돌이 되게 하는
성령의 소욕으로써 스데반 집사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필요조건이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저들의 소욕에 성령의 소욕이 스데반을 저들의 손에서 빼내시어
예수 안에 집어넣고자 하시는 의미이다.
어찌했던 간에 저들에게서 빼내시고자 하는 사랑이다.
아니 죽여버리시고
심판해 버리시는 것이 사랑이라고?
아무리 봐도 이 비사랑이 유일한 최고의 사랑이다.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스데반 집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인 십자가 사건을 재현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가 십자가를 치는 방식인
십자가 속의 십자가이다.
스데반 집사도 아니요, 비스데반,
오직 십자가만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방식이다.
십자가 자체가 인간의 소욕에, 신앙에, 믿음에 대상물이 되지 않고자
십자가를 치는 십자가로써
늘 비십자가로 규정하는 십자가로 활동하는 날 썬 검이요, 그 뼈와 혼과 골절을 찔러 쪼개는 것이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더 이상 분절이 되지 않는 십자가는 거짓십자가로 규정하는 십자가만이
스데반을 빼내고자 스데반 집사를 쪼갠다.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 속으로 집어넣는
바로 죽여버리는 방식이 스데반을 빼내시는 방식이다.
졸지에 스데반은 그 당첨된 효과를 발휘하는 외침이
바로 오늘 본운의 스데반집사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외친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외침을
왜 너희들은 핍박하느냐 라고
왜 성령을 거스려 훼방하느냐 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무조건 일방적으로 지적해버린다.
그리고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서는 기뻐했다.
아브라함이 봤던 그 예수님
모세가 봤던 그 예수님
다윗이 대면했던 그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말이다.
동시에 이 성령에 충만한 성령의 소욕에
육의 소욕은 일시에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죽여버린다.
성령충만은 곧 육에 의한 죽음이다.
이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간격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이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취소시키지 않겠다는 취지이다.
이 사랑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비사랑]
비사랑을 구체화 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의 저주 속으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다.
이 십자가의 저주가 옳았음을
그 단절성이 옳았음을
우리는 이 두 소욕의 치열한 충돌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 주님의 저주의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축복의 십자가가 판을 치는 판국에서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십자가가 활동하심에 기뻐하며
십자가 사건이 늘 터진다는 것을 감사케 하여 주옵소서.
인간의 믿음을 비믿음으로 규정하는 십자가의 저주가
우리에게 늘 넘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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