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을 찢는 행위 (눅 5:36-39)



(눅 5:36, 개역)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눅 5:37, 개역)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눅 5:38, 개역)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 5:39, 개역)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새 옷을 선물 받은 기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큰 즐거움 입니다.

어느 정도로 선물의 위력이 있는고 하니


헌 옷을 새 옷이 오기까지는 절대로 못 버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함께하며 정을 쏟아 부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 옷의 위력 앞에서 그런 장담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을 새 옷의 도착성 ㅋㅋㅋㅋ  
(닭 울음의 도착성? ㅋㅋㅋ. 그 위대한 베드로 조차 닭울음에 무릎 꿇어야 하니 말이죠)


이런 유물 개념을 아예 인물개념, 의인화로 한 번 바꾸어 볼까요?


여인에게서의 남편은 마치 운명처럼 작용이 됩니다.
발가벗은 몸을 감싸는 옷처럼 하나의 형식을, 형태를 갖추도록 하게 하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여자에게서의 머리는 주님께서 남자로 세워버린 이상

이 율법의 대타자성을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는 그 머리 곧 남자의 머리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이다 라는 것 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요구하는 겁니다. 정작 자신의 머리를 실제적으로 짤라 버릴려고 오시는 구체적인 분은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짜를 분이 자신의 머리이니까 말이지요. 뱀의 머리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율법에서 벗어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버리는 아주 쉬운 방법은

내 쪽에서는 갇혀버린 이상 불가능하고

예수님쪽에서 가능케 하신 인자를 쳐다보는 겁니다.

즉 인간은 다 죽었다, 신은 죽었다 라고 선언하는 그 인자를 쳐다보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다 죽었다 라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마저도 해당이 되기에

너무 너무 쉬운 인자 쳐다보기가

사실은 불가능성의 이중성 즉 불가능의 불가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인자를 쳐다본다는 것은

헌옷인 나를 이 새옷 앞에서 여지없이 버리겠다는 입장에 놓여질때에만 뿐입니다.


새 옷의 위력 앞에서 아무리 애지중지 나의 운명이다 라고
"나"라는 육의 껍떼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새 옷의 위력은 헌 옷의 초코파이 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새 옷의 위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뭐 눈에 뭐 만 보인다고
헌 옷을 싫어하지 않는 이상 새 옷이 전혀 새 옷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에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헌 옷이라고 율법 외에 한 의(선물)가 나타나, 너 헌 옷 입었구나 라고 아무리 알려줘도
자신에게는 여전히 그 헌 옷이 생존의 새 옷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생존이 실존이지? 뭐가 현실이겠습니까?


그래서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그럼 죽게 되지 사는자가 있습니까?

그러니 죽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헌 옷이요 가짜 옷이다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려도 안죽는 인간이 주님이 만드신 인간인데

불뱀에게 물리니까 여지없지 죽는 인간이라면 주님이 만든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가짜죠.

바로 이것을 율법 외에 한 의(잉여, 선물)가 나타나서 지적하는 바입니다.
모든 인간을 율법 곧 죄 아래에 다 가두고, 가짜다. 비거룩이다를 규정하시고.
율법 외에 한 의, 즉 외부에서 오는 잉여 만이 그 비거룩성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만이 그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헌 옷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험 받습니다.

시험을 왜 받습니까? 왜 시험에 드는 것일까요?

헌 옷에 미련 두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기적을 백날 배풀어도 소용이 없는 것은

정작 그 헌 옷에 백날 새 옷을 찢어서 헌 옷에 붙이는 꼴이니까 말입니다.


기적이 복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으로 보이는 자에게만

새 옷의 위력은 결국 헌 옷을 버리게 만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심판성 단절성 차단성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구별 차이 분별.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율법을 지켜 자신에게 구별 차이 분별 즉 심판성 단절성을 두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게 적용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위선입니다. 아니 율법의 올무에 갇힌 겁니다.
우리 같이 지적 받자가 아니라, 난 지적자이고 넌 지적받아야 하니

주여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저 세리와 같아져 버리시니까
졸지에 바리새인은 걸려든 겁니다. 유대인은 짤렸다는 겁니다.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렇다면 이 새 옷의 위력을 언제 실감하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새 옷을 백날 줘 봐도

그 새 옷을 찢어서 헌 옷에 같따 붙이고자 할 것 아니겠습니까?


새 옷의 위력은 "나"라는 헌 옷을 무기력하게 만들때에 비로소 그 위력이 보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아도 고개가 돌아가도록 욕망이 솟구쳐 오르게 됩니다.

이 욕망을 소욕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소욕이냐? 아니면 육의 소욕이냐 라는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출처가 누가 땡기는 소욕이냐 라는 겁니다.
성령의 욕망이냐? 마귀의 욕망이냐?


새 옷의 위력이 어느 정도로 위력이 있는지

"나" 라는 헌 옷 보다 더더욱 볼 품이 없는 헌 옷 중의 누더기 옷으로 새 옷이 오는 겁니다.  싫어버린바 된 옷.

새 옷의 위력은 헌옷을 입은자들에게 전혀 새 옷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새 옷의 위력입니다.


불뱀에게 물린자 에게 주께서 불쌍히 여겨 모세를 통해 긍휼을 베푸시는 방식이

그 헌 옷을 물어버린 그 뱀을 구리로 모양을 만들어서 나무 장대 위에 높이 달아서

그 놋뱀을 쳐다 보는 자 마다 병이 낫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민 21:5, 개역)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 21:6, 개역)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 21:7, 개역)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민 21:8,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개역)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헌 옷은 아무리 기적을 받았던 복을 받았던 백날 해도 안되는 옷입니다.

새 옷을 줘 봐도 결국은 찢을 뿐입니다.


왜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가 자기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것입니까?

헌 옷에 미련을 못 버린 겁니다.

그들은 기적을 받은게 아니라 도리어 시험든 겁니다.


그러나 왜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왜 돌아가지 않고 남아버린 겁니까?

돌아 갈 곳이 있어야 말이지요.

주님이 헌 옷을 찢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게 사실은 굴뚝 같은데

돌아갈 곳을 아예 없애 버렸으니

못 돌아가는 겁니다.

그 어떤 구원의 장치도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9명은 다시 교회도 다닐수 있게 되었고

다시 율법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에 다닐수 있게 되고

다시 금식도 하고 너무 너무 그 장치들이 너무 많습니다.

얼마나 좋나요?

구원의 장치들이 이거 뭐 한 둘이가 아니니

그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가 이 즐거운 곳을 놓치고 싶을까요?

교회만 가면 천국인데? 너무 너무 많은데?


너무 많이 알고 있기에  이런 헌 누더기 옷을 누가 버리겠습니까?

냉큼 돌아가야지요 가서 자랑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자신의 몸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것 아닙니까? 건강하게 되었다고 !!
 
물론 누가 고쳤니? 라고 유대인이 물으면 절대로 말 안하지요?

하나님이 날 고쳤다고 하지 예수님이 날 고쳤다 라고 하면

되돌아간 보람이 사라질 것이 뻔하니까 말이죠.
그래 말했다가는 문둥병과 같은 저주인 왕따 당할테니까 말이죠.

그러니 그 유대사회는 악마의 사회인 겁니다.

요즘도 교회사회 기독교국가 기독교가정도 동일한 다 악마 집단입니다.


헌 옷에 미쳐 환장한 곳들이기 때문이지요.자아라는 육체에 갇힌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미쳐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갇혔다 라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불뱀에게 물린 현실이 분명해야 합니다. 모호하다면 새 옷도 의미 없습니다.


티비를 보다가 한번은 어떤 목사가 감염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아마 ebs? 였는데.

그런데 그 이후로부터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무도 자기 옆으로 오는 자가 없고

술술술 빠져 나가더라 하더군요. 직접 접촉이 있어도 감염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졸지에 목사라는 자리에서 왕따로 극하강 해 버린 겁니다.


제가 보기에게는 그 목사 진짜 복 받은 겁니다. 감염걸린게 죽을만큼 싫은게 아니라

정작 제대로 복받은 겁니다. 주님께서 목사 만들어서 구원시키는게 아니라. 죄인 만들어 구원 시키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목회고 뭐고 간염 고치는 작물을 키우는 농사꾼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본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건진 겁니다.

헌 옷의 실상 말입니다. 적어도 새 옷과 대조되는 헌 옷의 현실을 제대로 격은 겁니다.
그리고 그 헌옷과 세상과의 관계성을 제대로 격은 겁니다.
불뱀 아무나 물립니까?  광야란 불뱀 물리는 곳입니다. 광야교회 말입니다.
그래야 진짜 현실이 뭔지 볼것 아닙니까?

진짜 현실은 인자(새옷)가 나무에 달린다는 겁니다.


설사 그 병을 고쳐본들, 또 그렇게 해서 식사를 가까이 하지 않던 자들이 가까이 오게 되었다 해 본들


그것은 그것이 되든 안되든 의미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새 옷의 실상을 보게 된 겁니다. 헌 옷이 헌 옷이라는 실상을 격지 않는 이상

어떻게 새 옷의 실상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마귀에게 정죄 받는 헌 옷의 실상을 격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리는 헌 옷 말입니다.


(슥 3:1,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개역)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5, 개역)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그 헌 옷의 실상(원망할 수 밖에 없는 원수 된 몸)과
그리고 마귀(불 뱀)를 거쳐서 예수님이라는 그리스도의 옷을 보라는 겁니다.


이 새 옷이 새 옷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그것들을 거쳐 오라는 겁니다.


안거치면 그저 헌 옷을 땜빵하기 위한 새 옷일 뿐이니

그저 표적을 본게 아닌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예수님을 임금 삼을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시험 든 겁니다.


미쁘심은 나를 제대로 심판하시는 주를 만나는 것이 미쁘심 진짜 믿음입니다.

얼마나 믿음직 스러운지 새 옷을 구지 찢을 필요 없이 헌 옷을 아예 버려 버리시는 겁니다.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십니다.


이것 보다 명료한 것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의문의 증서를 백날 헌 옷에 칭칭 감아본들

새 옷 만 찢는 행함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새 옷을 찢는 행함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새 포도주 새 부대의 의미도 동일합니다.

새 것이라는 것은 명료한 차이성을 드러냅니다.

모호한 경계란 없습니다.


그런데 옛것에 매인바 된 자들은 모호함을 계속 유지할려고 합니다.

새 것이 오면 옛것은 물러가야 함으로써 새 것에 동참되는 겁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달라고 하는 자는 없습니다.

묵은 포도주의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 묵은 것과 새 포도주의 차이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모호함을, 의문만을, 미완료만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은

이제는 의문의 것이 없이 명료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더욱더 벌리는데 작용이 될 겁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가는 겁니다.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아니 앞에는 새 옷을 주장하면서 새것을 높이더니

또 새술 과 새부대를 언급 하면서 새것을 높이더니

왜 이제는 묵은 포도주 즉 헌 것의 가치는 높이느냐?
묵은 포도주가 잉여 곧 선물이지, 새 포도주는 잉여가 아니죠 ??


뭔가 한 개가 등장하면 그것은 동질성이 아닌 차이성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드래는 겁니다.

거기서 더더욱 간격을 넓히게 됩니다. 선물이란 잉여는 그런 의미 입니다.


소욕은 그런 겁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자꾸 자신들의 실천한 것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고

예수님이 가는 곳 마다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데 있어서

반드시 세리 창기 죄인들을 사용해서 간격을 벌렸습니다.

소욕성이라는 출처를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그 반대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소욕의 출처를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의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세리 창기 죄인들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마귀 즉 바리새인들도 사용하십니다.


그냥 제사가 아니라 더 나은 제사 로서 말입니다.


제사와 더 나은 제사의 간격을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의(잉여)로써 간격을 벌리시니


바리새인들이 했던 방법을 그대로 하시면

그들 바리새인들 말 마따나 누굴 따라야 하겠습니까?


더 나은 것을 따라야 할 것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이 세리 창기 죄인 보다 더 낫다고 우겼으니


우리 세리 창기 죄인은 그렇게 주장하는 바리새인 말 마따나

마귀 말 마따나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분 나타나면 그 분을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스가랴서 본문을 위에서 언급했는데

마귀가 더럽다고 주장했잖아요

그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분은 따라가면 됩니다.


마귀 말 마따나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 보란 듯이 펼치시는 십자가의 지혜만이

육의 실상을, 헌 옷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는 겁니다.

그것을 거쳐서


새 옷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것이 새 언약

엣언약과 차이나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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