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대기 뒤집기 (눅 5:33-35)



(눅 5:33, 개역)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눅 5:34,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눅 5:35, 개역)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일부러 십계명을 어길려고 오신 겁니다.

오죽 하면 마귀가 십계명 정신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메시아가 되어라 라고 할 때
보란 듯이 그 마귀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마귀가 가장 주장하는 이웃사랑실천이 바로 마귀의 사상임을

노골적으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런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기시는 그 승리 자체가

십계명의 완성인 겁니다.

그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기시고 

비로소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승리를 나누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 그 승리를 베풀어 주시는 겁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잠시 떠난 마귀들은 다시는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지만

바리새인과 율법사 등등 곧 마귀의 단독자죠. 

마귀의 자식으로써 마귀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데


그들이 항상 예수님께 들이대는 것은 율법에 근거를 둔 자신들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또 반대로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철저한 율법에 준거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도 꼭 예수님 앞에서 그것을 과시하듯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은 율법이라는 거룩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과의 경쟁모드로 자신들을 내세우게 되는 겁니다.


왜 율법이 올무라고 하는 걸까요?

그라고 율법이라는 거룩은 왜 인간의 대상물 곧 숙제가 될 수가 없는 겁니까?


만약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고 나만 있다고 칩시다.

아니 더 현실적으로 무인도에 졸지에 갇혀 버렸다고 칩시다.


그럼 바리새인이든 율법사든 누구든

아무도 보지 않는 이상은 그 사람은 율법을 지킬려고 하지 않습니다.

안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전혀 동기성이 없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율법은 대상이 되지 않고, 타자성, 타자의 타자인 대(큰)타자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멀리 떨어져서 불안 곧 죄악이 있는게 아니라
문제는 율법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죄가 되는 겁니다. 아에 몸에 칭칭 감아요 감아.


그렇다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처음부터 죄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지키라는 취지가 전혀 아닙니다.

지킨 놈만 괜히 억울하게 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이 율법의 이중성
곧 율법의 율법으로, 율법의 강화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니까?
더욱더 웃끼게도 그 산상수훈을 지키겠다는 자들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갇혔다 라는

심지어 이제 신약에서는 마귀의 정체까지 밝히시면서까지

갇혔다 라는 것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사기를 치면서 더욱더 돈 뜯어내기에 혈안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치신 올무에 더욱더 잘 걸려든 셈입니다.


이것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니까

그 전까지는 전혀 예수님이 자기랑 별차이 없는 일반인이였는데

졸지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니까

졸지에 마귀가 덮쳐져서 이 사람을 임금삼아야 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리는 겁니다.


분명 그 전까지는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주종 관계를 스스로 맺을려는 인간은 없습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고 타인을 임금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마귀가 씌여지면 안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됩니다.


제사장 옷 에봇을 우상 섬기는 원리도 동일합니다.


아니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오천명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 까지 남으니까

비로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심판의 주를 만났구나 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지나개나 다 임금 삼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습니까?

누가 임금으로 보이지. 이제야 난 죽었구나
심판주를 만났으니 나는 이유없이 죽어 마땅하구나 라고 누가 여기겠습니까?


기적이 이웃사랑실천의 차원에서 오 그럼요 그럼요 받아줄께요 라고 자기유익으로 끌어당기지

누가 그 기적이 날 죽이러 오셨군요 네 맞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여기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금식이 나오는데

금식이 누가 나는 죽어마땅합니다 라고 여기는자 있습니까?

금식 그 까잇꺼 대충 하루 밥 안 먹고 띄우지 뭐

이슬람교도 금식 하고 난 뒤에 그 다음날 배터지게 먹던데 뭐

저 이방종교도 하는데 그 까잇꺼 대충


이래 생각하는 만만한게 금식 아닙니까?


예수님은 여기에 죽음을 가미 시킵니다.

죽음이라는 살인을 가미 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금식을 어기는 겁니다.

배 터지게 먹고 마시자 라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보도록 

보란 듯이 금식을 어겨 버리는 겁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립니다.


그래서 되받아치는 바리새인의 주장 곧 요한의 제자는 금식을 하는데 너희들은 왜 금식 안하냐 라고 하니까


아니 누가 잔칫날에 먹고 마시지 누가 금식을 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잔치 중의 잔치, 최고의 잔치는 바로 혼인잔치 입니다. 결혼입니다.
둘의 차이를 영원히 없애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둘의 차이를 영원히 반복하는 3일이라는 간격을 확정시키는 것이 결혼입니다. 이것이 혼인의 이중성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보기 좋게 어겨버립니다.


그리고 의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눅 5:35, 개역)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금식을 완료하심에 있어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종말의 완료입니다. 단절의 완료입니다. 성령의 소욕의 완료입니다.


이것이 금식입니다.

심판을 완료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와야 안식이 완성이 되듯

금식의 주인이 와야 금식이 완료 됩니다.


그 완료자를 보고서 주여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금식의 완료를 비로소 보고

자신의 죽음이, 심판이 마땅함을 외치는 겁니다.


아니 그거 할려고 구약에서는 금식을 지켜왔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킴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 금식의 완료자를 금식을 지킨자들이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금식의 완료입니다.


안식의 완료입니다.

율법의 완료입니다.

거룩의 완료입니다.

희년의 완성입니다.


진짜 주인공이 오기전까지는 무조건 가짜로 취급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짜인 주제에 진짜가 오면 자리를 비켜 줘야 하는데

마치 자신이 진짜인냥 그 자리를 아예 차지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대표자인 바리새인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선물이 와야 육의 단절성 곧 육의 소욕의 차단을 거쳐서

은혜로 나아가게 되니

아무리 공부하고 지식으로 쌓고 행함으로 열심을 갖추어도

이 선물 앞에서 삭제 심판당해야 마땅한 겁니다.

즉 이 선물만 있으면 충만 충분 완료 되었기에

이 선물 외에는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선물이 등장하자

선물을 더욱더 선물 답게 하기 위해서

그 선물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어두움의 역할을 톡톡하게 되니

금식을 지키는 자가 금식 완료자를 죽일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제대로 걸려들게 된 것입니다.

이상한 고리, 뫼비우스 띠와 같은 율법이라는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금식(율법)이 죽음(십자가의 사랑 곧 질투)으로써 완료되는 겁니다.


금식은 살아야 그것이 완료되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지만

이것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에 나타난 마귀의 출처인 겁니다.


결국 안식일 지키기

금식 지키기

회개 지키기

율법 지키기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웃사랑하기


이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심판을 거치지 않은 이상

모조리 다 거짓된 겁니다.


괜히 지켜가 도리어 금식의 완성자, 회개의 완성자, 율법의 완성, 희년의 완성자를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이상한 고리를, 모순의 고리, 부조리의 고리를 끊을자 있겠습니까?


그럼 금식의 완료자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심판을 만나 기쁘게 잔치집 음식을 맛나게 먹고 마시며

신나는 종말을 맞이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 쓸데없이 괜히 지켜가지고

난 지켰는데 너는 과연 지키느냐 안지키느냐 라고

대상물이 되어야 할 주제에

도리어 대상물을 찾아 헤매며 대상물로 삼느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제사장 에게만 보이도록 하라 하시고. 그만 소문이 퍼져 많은 문둥병자가 몰려와 고쳐달라고 했지만 도망쳐 버리십니다.


레위기에 보면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자신의 문둥병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랬을때에 문둥병으로 판명이 되면 제사장은 문둥병 판명을 공포한 뒤에

이 문둥병자를 격리 시키고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회복이 되면 다시 문둥병 여부를 가려서 안으로 들여놓을지 아니면 더 격리 시킬지를 가리는 그런 내용이 레위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자 한 명을 이스라엘의 대표성으로 삼아서

거룩의 철저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개인의 문둥병으로 보는게 아니라

상관없이 전체 판대기로 거룩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기회? 방편으로써

거룩이 이런 단절성으로, 분별, 분리성으로써 작용한다는 거룩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문둥병자는 아 재수 없게 나는 문둥병 걸렸구나 라고 할게 아니라

주님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로써 작용하는데 있어서

도리어 감사함이 넘치는 겁니다. 


주님의 완료가 있으니 문둥병자로 살아가던, 아예 불치병으로 평생을 살던,

아니면 재수 좋게도 건강한 몸으로 살던

상관없이 그 심판 속에서 주님의 완료를 쳐다보는 겁니다.


그런데 금식을 차라리 지키지 않았더면

금식의 완료자를 바라볼 것인데

괜히 지켜가지고

금식을 왜 안지키냐고 따진다는 것은

출처가 마귀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아니다 라는 것을 도리어 들통내는 지혜에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라면 고쳐주실 것인데

소경 아니다고 하니


한 개인의 소경을 두고 즉 실로암소경을 두고

이 한 개인의 잘못, 죄인지

부모의 죄인지를 따지는데 있어서

예수님까지 끌여들이는 겁니다.


오히려 이런 모호하고 의문으로 가득차 버린 이 미완료의 세계를

이 실로암 소경 하나로 판대기를 뒤집어 버리는 심판 앞에서

감사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의문과 모호함과 미완료는 이제 물러날테니까요

껍데기 그림자는 물러나 누락되고 이제 고대하고 고대하던 실체가 나타나니 말이죠.


그런데 그 앞에서 심판과 종말 곧 끝을 누리는게 아니라

도리어 안식일 왜 안지키노

금식 안지키노

왜 병 안고치노

고아 돌을 떡 되게 해 배고픔 해결 않노, 

과부에게 사랑 안 주노 기적 안주노,

나그네를 섬겨 떠돌이 생활 그만할수 있도록 복지혜택을 주지 않노? 임금 되기 싫나?


라고 협박하듯이 매 순간 순간 시비를 걸고


동시에 자신들은 그런 율법을 지켰다고 기여이 예수님 입으로 자랑케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왜 딸랑 한명

이스라엘 많은 과부 중에 하필이면 딸랑 한명 이방여자 사렙다 과부에게만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 중에 다 냅뚜고 하필이면 딸랑 한 명 이방인 나아만 장군을

고치시는 겁니까?


99마리 내버려두고 오로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는 겁니까?


한 마리 양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판대기를 뒤업어 버려서

그 한 명으로 다시 출발해도

완료는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넉넉한 완료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소 천국 도 채우시고

천국 뿐만 아니라 지옥도 넉넉하게 채우시는 겁니다.


지옥 가고 싶어도 못갑니다.

주님만이 채우시지

인간의 자발적인 힘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

천국 뿐만이 아니라 지옥도 그러합니다.


철두철미하게 십자가에 의해서만 저 둘 세계가 채워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인자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신랑이라고 표현 합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슬픔은 아무나 가지는게 아닙니다.

오로지 신부만이 슬퍼 합니다.


신부만이 금식하게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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