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주, 예수님을 위하여 (눅 5:27-32)



(눅 5:27, 개역)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눅 5:28, 개역)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눅 5:29, 개역)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눅 5:30, 개역)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일부러 마귀들(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보는 앞에서


(눅 5:23,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죄사함 받았느니라 라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왜 꼭 마귀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들은 그저 마음으로만 의논한 것인데?

그 속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시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빛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즉 전제된 배경은 이 땅과, 이 인간들과, 이 환경은 그야말로 어두움이라는 전제가 깔린 상황이다는 겁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율법까지 가입하여서 그야말로 죄악에 갇혀진 모습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야말로 첨상첨화입니다.


모든 시간 공간 모든 환경은 예수님을 드러내는데 이용될 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또 인간이 창조된 것 조차도 모두 다 예수님을 위한 겁니다.


누구에게 전화상으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는데

왜 인간을 마지막 날에 만들었는고 하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안식에 참예됨이 바로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비를 거는 자들은 결국 첫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날을 다 목격했다는 자들이

이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참예된 자를 시기하고 송사를 거는 겁니다.

결국 송사 걸으라꼬 유도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한 것이 은혜로 참예 되었다 라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지난 시간에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께로 고침을 받고자 하는 그 모습은

정작 예수님의 자작극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심은 결국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은사란 곧 선물이란 회수용이라는 겁니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새긴 이름이 내이름입니까?

내가 새길수 있었던 가요? 태어난 적도 만들어진 적도 없는데?

예수님 자신을 위하여 새긴 이름이니 !  그 이름 맞는지, 잠시 검문검색하겠습니다(계류기술).

신분증 좀 주시지요? 아 약속이 담겨진 그릇 맞군요.

아 약속이 없는 진노의 그릇이군요, 라고 

창세전에 새긴 생명책에 의해 갈려지지

인간의 믿음 따위로 뒤바꿀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위하여 라는 말에, 그 약속에 의해 반드시 이 땅에서 그 결과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색이 변했던 가인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가 안색을 변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말이죠.


예수님 자신이 부으시고 자신이 결국 자신 스스로 높이시는 방식입니다.

믿음을 말입니다.

자신이 믿음을 부으시고, 자신이 그 믿음으로 결국 자신 스스로 영광받는, 영광을 높이는 방식말입니다.
이것을 도착성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폭력성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가장 그 도착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때문에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 조차도 3번 부인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딜 감히 베드로의 되도 않는 자기 사랑으로

십자가의 사랑에 한다리 걸칠려고 하냐 말이죠.

안돼 ~~~~~~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랬다가는 천국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육의 소욕을 억제할 수가 없을 겁니다. 입이 가만이 있지 않고 독단적으로 살아서 조잘거릴테니 말이죠.

(마치 첫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다 목격했다고, 그러니 날 무시하지 말라고 할껍니다.)


그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마지막 날에 창조되어

첫째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은혜로, 선물로, 긍휼을 베푸심으로

공짜로 안식에 참예할 뿐입니다.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 안식(평화)이 얼마나 살벌한지

조금이라도 행함이 있다면 모조리 차단 단절 삭제 당하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인간의 공로도 가미 될 수가 없습니다.

안식은 오로지 은혜로만 이루어진 평화의 날입니다.


그 평화를 그야말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진노와 심판으로 이룬 겁니다.

오로지 성령의 소욕으로 이루어진, 육의 소욕의 차단입니다.

그 육의 소욕이 마귀가 주장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라 라는 거부성입니다.


(마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막 2:28, 개역)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눅 6:5, 개역)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오직 안식일의 주인을 위한 것이 안식일입니다.

곧 인자입니다.
(안식일은 며칠이냐, 지키냐 라는 구약적 물음이, 신약에서는 무조건 인물 곧 안식은 누구냐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서의 안식은 예수님이 공공연하게 일부러 어기는 식입니다.
안식일을 어김으로써, 안식일을 지킨자들의 허상 곧 우상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마치 창기 세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시는 방식 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못 지키는 의문의 안식일을 찢어버리지 못하는 자는 안식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신 것은


모두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 자들의

모든 허물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덮어 주시겠다는 그 은혜성 때문입니다.

그 은혜성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반발하는 세력을 깔아놓는 겁니다.
제대로 단절 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를 위해, 인자는 심판의 주로 오신 겁니다.

그 심판 주가 되기 위해서

주의 주 되심, 주의 이중성

너거들을 위한, 인간을 위한 주가 아닌, 주님 자신을 위한 주가 되기 위해 이중반복하는

임마누엘, 곧 너거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만의 하나님이다


아니 왜 그래야 하는데?

죄를 사하시는 분은 인자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주가 되시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이다는 겁니다.

종말의 주가 되시지 않으면

지나 개나 다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단절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주께 입니다. 나를 원수 만드시는 그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분이

바로 심판의 주 되신 인자 입니다. 심판 주 인자.


결국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십자가에 달리신게 아니라

우리를 차단 하실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겁니다.


인자란 결국 차단 단절의 의미입니다.

성령은 개방이 아니라, 단절이듯이 말입니다.


이 인자를 위해 고아 과부 나그네가 우발적으로 생성이 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해 인자가 오신게 아닙니다. 나무에 달리시는게 아닙니다.


기존의 고아 과부 나그네가 여기에 아무리 참예하고 싶어

스스로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곧 문둥병자를 고쳐라 중풍병자를 고쳐라 라고

기적을 베풀어라, 병을 고쳐라, 돌을 떡덩어리 되게 해서 고아의 배고픔을 해결하라 라고
아무리 예수님에게 다구쳐도 주님은 거부하십니다.


만약 그것이 단절 되지 않고 허용 개방이 된다면

마귀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니까 말이죠.


마귀가 얼마나 착합니까? 광명한 천사 아닙니까? 항상 인간의 편이요

자나 깨나 인간의 구원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마귀에게 가면 단 한 사람도 탈락함이 없이 전부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지옥을 채우겠지요.


이런 마귀의 활동을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허용을 해야 합니다.

마귀 없이는 주님이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오죽 하면 애굽왕 바로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무리가 그대로 행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단절성이 제대로 부각이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도착적이지 않습니까?

육의 소욕의 차단, 곧 육의 차단의 철두철미함.


그럼 10가지 재앙도 다 보고

이런 애굽의 멸망까지도 다 보고

애굽의 신들의 죽음까지도 다 보고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것 까지도 다 봤던

출애굽의 구원을 격었던 그 광야 이스라엘은 그럼 예외가 되던가요?


그들 또한 다 차단 당합니다.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심지어 이 세상 인류 역사상 땅의 소산물이 아닌, 유일하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하늘의 양식을 먹었던 자들도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세대

출애굽의 홍해 기적을 격지도 못한 자들

그저 부모라는 선지자에게 들은

만진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오로지 눈에 아무 증거 없이 그 말씀 스스로가 일으킨 사건을

이야기로 듣기만 하여서 요단강을 건너는 겁니다.


심판 재현입니다.

종말 재현입니다.

죽음 재현입니다.


잃어버림의 재현입니다.

전쟁의 재현입니다.


어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요단강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들 조차도 가나안 땅에서 계속 탈락 누락 다 짤리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함이 그릇되었냐 옳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거룩이라는 단절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겁니다. 그들은 이 거룩 곧 단절성 심판성에 동원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안짤리고 남아있어 본들, 그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라 자체가 민족 자체가

이스라엘 전체국가 자체가

판대기로 누락되니


개개인의 행동유무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받고 멸망당한 그 이스라엘이 구원이 되는 것은


뒤에 오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시하고

비아냥거리고

철저하게 거부했던 그 십자가로 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한 적이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 훈련 한 적이 없듯이


그럼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뭡니까?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의 믿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구원 받은 겁니다.

그러니 모세의 제자다 라고 모세 뒤로 숨어 본들 소용이 없는 겁니다.


지팡이 뒤로 숨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짖을 할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믿음은 지팡이 뒤로 숨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를 건진 것은 닭의 세 번의 울음입니다.


그 닭의 울음 세 번 뒤에 베드로를 숨기지 않는다면 베드로는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이미 항상 죄인 이라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겁니다.


야곱도 지팡이를 의지했고

모세도 지팡이를 의지할 뿐입니다.

모세 야곱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지팡이가 모세의 팔을 들었돠 놨돠 하는 겁니다.


또 이래 말하니까 지팡이를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사장의 옷 에봇이 정작 자신들의 눈에 구원의 효과를 주는 매개체로 작용이 되니까

바로 우상 숭배를 해 버리니까 말이죠.
인간은 항상 매개체를 원해서 그것을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리니까 말이죠.
대표적인게 교회건물입니다. 모임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체 해야만 합니다.
물론 해체해 본들 소용없지만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뼛속까지 악할 뿐입니다.

이유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합니다.


야곱에게 모세에게 주어진 은사 곧 선물은 지팡이입니다. 즉 무시 받아라 라는 겁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진 은사, 선물은 죽음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닌 구경꺼리로써의 죽음입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인간의 육체 자체가 할례처럼 껍데기를 벗기듯이

십자가에서 개 죽음 당하듯 머리가 짤리는 사형깜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육의 탈출 방식입니다.

육의 탈출은 자살한다고 육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 뿐입니다.

육이 가장 싫어하는 십자가의 사랑만이, 그 십자가의 용서 만이,

그 정과 욕심을 삭제 당하는 겁니다.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욕심을 제거하는 방식은 도리어 욕심을 제거하겠다는 욕심을 더욱더 부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교입니다. 뫼비우스의 고리에 말려든 셈입니다. 아무도 그 연결고리를 끊을자 없습니다. 평생 매여 있습니다.


회개를 하겠다는 그 회개탐욕을 못 버리는 겁니다.

버리겠다는 버리는 나는 또 또렷하게 남게 되니까 말입니다.

어딜 감히 행함을 인간 스스로가 펼칠수가 있단 말입니까? 강요된 선택에 말려들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

회개를 포기하는 회개

신앙을 포기하는 신앙


즉 이 이중성 고아의 고아를 만드시는 (죽은자)

주의 주 되심인 십자가의 십자가를 보라는 겁니다.


오죽하면 철학자들 곧 성화론자들이지요 이들도 이중성을 말할 정도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때려죽어도 안보이는 겁니다.

십자가 조차도 선택 대상이 되니
십자가가 선택하는 대상물 [인자]를 쳐다볼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성과물로서의 십자가만 보겠지요.

그렇게 이중성을 말하는 그 철학을 거부해야 하니

자신의 생산물, 창조물, 생성물을 거부할 빠

차라리 처음부터 말 조차도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말이죠.


문제는 십자가가 그들을 일부러 뺑뺑이 돌리듯이 맨날 제자리에서 뱅뱅뱅 돌 뿐입니다.

잃어버림이 생길수가 없으니 되찾음도 있을수 없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대상물일 뿐이지 도리어 그들 자신이 대상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림도 자신의 숙제이지, 졸지에 자신이 잃어버림의 대상물이 되어버리면 큰일날테니까 말입니다.

나의 숙제로써의 잃어버림은 불교나 유대교가 되어버립니다.
잃어버림 자체가 나를 대상물로 삼으면 비로소 나에게서 원수성 곧 살인의지라 들통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육체의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랴?

그래서 참람한 말을 감히 서슴없이 뻔뻔스럽게 하셔야만 하시는 예수님이 죄사함받았다고 겁대가리 없이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떠난 발언이 와야 하는 겁니다. 구원 차원이 아닌 심판차원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발언입니다. 여호와의 불이라는 소멸케 하시는 단절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죽하면 괜히 바리새인을 바로 이 주의 주되심이 사건이 벌어지는 그 현장 현장마다 반드시 배치시키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절성.


무조건 이유없이 그들은 개방성입니다.

 

그래서 그 상대적인 단절성이라는 성령의 소욕이 대립되게 차이성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인자는 너는 인간이 아니다 라고 마치 신은 죽었다처럼 인간은 죽었다 라는 선언으로써 심판성으로 다가 옵니다.


그런데 전혀 심판성은커녕 다들 싫어버린바로 여겨 고개를 돌립니다.

심판성으로 보이면 당장이라고 입맞추고 머리를 땅에 처 박고

살려 주십시오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라고 나와야 할 텐데


그냥 고개를 돌린다는 것은 전혀 심판은커녕 심판 근처에도 못가는

지나 개나 다 무시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자는 전혀 전혀 심판하고 무관해 보입니다. 그래야 심판주가 인자 이신거 맞는거죠.


심판자의 자리는 차라리 부럽고 두려워 떠는 자리겠지요. 얼마나 권세가 있는 자리 입니까?

칼자루 쥐고 있으면 누구든지 절하면서 엎드리고 아부하고 장난아니겠지요.


그런데 정반대의 위치인 오히려 누구든지 보기만 하면 졸지에 심판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한 대 주어 박고 싶을 정도로 지나개나 다 돌을 던지는 위치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낮고 낮은 위치인 겁니다. 스쳐지나가면서 이유없이 대가리를 팍 쳐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다 따라하거든요. 심지어 아이들도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단절성으로 보이겠습니까? 차라리 개방성이 솔직하지요.
돌을 누구든지 들을수 있도록 만드는

그야 말로 구타 유발자 이니까 말입니다.


누가 인자를 심판자로 보겠습니까


아무나 남녀노소 무론 막론하고 다들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아 보고 싶어할 정도로

너무나 쉬운 대상물, 막대해도 상관없고 전혀 죄책감이나 양심이 꺼려지지 않는

오히려 당연하고 그 짖이 참으로 정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단한번도 드린적이 없던자도 유일한 영광드렸다고 자부 할 정도로


모든 자들이 이 십자가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인 인자입니다.


전혀 전혀 심판성이 아니올시다.

단절성이 아니올시다.


오히려 개방성입니다.

누구든지 돌을 들을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자가 바로 인자입니다.


아니 그런 나에게 돌삐 맞아 죽었고,

십자가에 아무런 가책없이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기쁨으로 못 박아 죽인 그 자가


나의 심판 주 일 줄이야? 나의 죄를 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일 줄이야?


세리인 레위가 예수님으로부터 나를 쫏으라 라는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쫏습니다.


심판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레위라는 세리가 즉 매국노죠. 제자 마태입니다. 그 세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립니다.

그래서 많은 세리들도 참여하고 많은 다른 사람들도 참여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빠져서는 안되는 인물인 바리새인도 참여합니다.

그 바리새인이 그 현장에서 비방을 합니다.


(눅 5:30, 개역)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맞습니다. 병든 자에게만 의사가 보입니다.

이것을 주의 주 되심이라고 합니다.


종 아닌 자에게는 주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가 되시지 않겠다는 선언인 겁니다. 이것이 인자를 해석할수 없는 수수께끼로 오심입니다.


즉 저들은 딴 주인이 있고, 그 딴 주인의 종이다는 종결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개방적인 주인이 저들의 주인이다는 겁니다. 곧 육의 소욕의 출처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병든자들의 주인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병든자에게만 의미 있는 기능은 의사 뿐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기능으로써 인자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심판성입니다. 단절성입니다.


더욱더 이중적으로 의미를 부각시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죽은자에게만 살리는 자가 의미있지


이미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자에게 무슨 살리는 자가 의미 있겠습니까?

대낮에 형광등 불빛을 켜서 뭐하게요?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 이다는 겁니다.


세리 마태 본인은 심판 주를 영접하여 큰 잔치를 벌리는 식일 뿐입니다.

여기서 이중과세를 부과시키듯 예수님 자신은 바리새인 곧 마귀를 끌어들여서

단절성이라는 거룩을 증폭시키는 겁니다. 이중성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비방으로 인해 큰 잔치가 훼방받는게 아니라

오히려 잔치의 의미를 더욱더 풍성하게 만드는 겁니다.


단 한번도 주님은 훼방받으시는 적이 없습니다.

더더욱 풍성하게 될 뿐인 넉넉한 완료만 증폭 증식 될 뿐입니다.

마귀가 방해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 더더욱 영광받으실 뿐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주입니다.


회개란 눈물 질질 짜면서 자신을 반성하여 자신을 고치는게 아니라


심판의 주를 만나 그 풍성한 심판을, 종말을 기쁘게 누리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상관없는 겁니다. 그 죽음 조차도 종말을 더더욱 풍성하게 하니까 말입니다.
예수님만 심판주가 되셨으면 그것으로 더 바랄게 없는 겁니다.


심판주를 만났다는 기쁨

그것을 누리는 겁니다.


죄인에게서 심판주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 그 간격의 단절성을 벌리고서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밖는 분이 바로 심판주인 겁니다.

나의 죄악을 심판 할 줄 모르는 주가 무슨 주가 됩니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야 말로 나의 주가 되시는 겁니다.


회개는 그 분을 만난 기쁨에 감격하는 겁니다.

아 비로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분을 만났구나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자


그러니 그 심판주를 모셔놓고 나를 심판하실 유일한 분이라면서 잔치를 벌리는 

그 정도로 종말의 기쁨, 심판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기에 무슨 눈물 짜고 반성하고 그 딴거 없지요?

심판의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신나는 종말의 잔치를 여는 겁니다.


이 심판의 예수님을 위하여 나는 세리(매국노)로, 원수로, 죄인 중의 괴수로

태어났었었었어여만 했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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