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는 말씀의 응하심 (행 13:13-52)


성령의 시점에서의 바울 설교 (전지적 가카 시점에서의 바울 스피커)



(행 13:13, 개역)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 13:14, 개역)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행 13:15, 개역)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행 13:16, 개역)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7, 개역)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 13:18, 개역)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행 13:19, 개역)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행 13:20, 개역)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행 13:21, 개역)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 13:22, 개역)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 13:23, 개역)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행 13:24, 개역)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침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 13:25, 개역)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 13:26, 개역)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행 13:27, 개역)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행 13:28, 개역)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행 13:29, 개역)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행 13:30, 개역)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행 13:31, 개역)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행 13:32, 개역)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행 13:33, 개역)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 13:34, 개역)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 13:35, 개역)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행 13:36, 개역)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 13:37, 개역)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행 13:38,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 13:39, 개역)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행 13:40, 개역)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행 13:41, 개역)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행 13:42, 개역)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행 13:43, 개역)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행 13:44, 개역)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행 13:45, 개역)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행 13:46, 개역)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7, 개역)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행 13:48, 개역)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9, 개역)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행 13:50,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 13:51, 개역)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행 13:52, 개역)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응시된 단어는 썩음을 당치 않게 한다와 선지자의 말이 응했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전제된 것이 썩었다는 것이 전제되었고

선지자의 말이 무시 당했다는 것이 전제 된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발 합니다. 언제 썩었느냐 라는 겁니다. 썩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전제로 깔아버린 배경을 취소하라는 반발과 


또 언제 우리가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느냐 라는 겁니다.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다면 적어도 가시적인 성전과 율법지킴이 왜 있겠느냐?

오히려 선지자의 말을 지켰기 때문에,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이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놀랍게도 바로 자신이 그 속에서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요 그런 배경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했던 자로써 지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인 결과로써의 그런 지킴과 선지자의 말씀을 사수해 왔다는 것은

육으로 한 것이지 결코 성령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당사자가 직접 외치고 있으니

이것은 변명 자체가 통하질 않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말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분명히 동일성을 추구했는데 그 동일성이 제대로 된 간격을 보여주더라는 겁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전도서 12장을 읽고 지혜가 무엇이냐고 말이죠.


(전 12:1, 개역)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2, 개역)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3, 개역)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전 12:4, 개역)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전 12:5, 개역)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전 12:6, 개역)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전 12:7, 개역)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8, 개역)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9, 개역) 『전도자가 지혜로움으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 12:10, 개역)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

(전 12:11, 개역)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전 12:12, 개역)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전 12:13, 개역)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4, 개역)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마침 지난 주에 올린 글이 바로 지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듯해서 지난주의 글 내용을 말했습니다.


곧 지혜란 심판자입니다.


지혜를 마치 지식처럼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습득하는 어떤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인물입니다. 아주 아주 구체적인 인물입니다. 곧 나를 심판 속으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자꾸 심판 속으로 등 떠밀어서 밀어넣는 인물입니다.


지난 주의 글의 내용 중에 어떤 인물이 한 쪽에게는 자유 곧 강요된 선택을 부어버리고

또 한 쪽에게는 이미 항상 죄인 이라는 심판을 부어버립니다.


희년이니까 또 마귀의 3가지 시험이 희년완성자 너 예수가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의 메시아가 되어라는 요구에 딱 맞는 자유 해방 구원이니 


우리는 자유 쪽으로 냉큼 선택 할 줄 몰라도


정작 그것은 강요된 선택입니다. 마귀의 육의 소욕에 의한 겁니다.

그러니 문둥병자 유대인 9명은 또 아흔아홉마리 99 양은 자기처소 자신의 처음자리가 육입니다 라고 지가 알아서 그 처소를 보여주고서 떠납니다.


그런데 정작 희년이 부어지니 자유는커녕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이미 항상 죄인이라는 제대로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누가 나를 심판에서 건져내랴 라고 제대로 된 심판을 만나게 되었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의 처소는 돌아갈 자리 자체를 상실케 되는 


지금의 그 자리가 곧 처음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 심판의 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한명의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을 상실케 된 겁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그 잃어버린 자리 자체가 자신의 처음자리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작극 곧 십자가로 인해 잉태된 자리이기에

이 자리를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 못하는 졸지에 자신의 잉태자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자리가 오늘 본문처럼 썩음을 당치 않게 하는 자리 라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문둥병자 걸렸는데 그 문둥병을 고치니까 자신의 처음자리를 발설하게 됩니다. 강요된 선택에 의해서 냉큼 문둥병 자리를 박차고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이데아 곧 유대사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은 거룩한 곳 예루살렘이 아니라 마귀가 장악한 도시입니다.

처음자리가 결핍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마귀입니다.


그러나 한명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고아 중의 고아입니다.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문둥병자 중의 문둥병자입니다.

심판의 자리 외에는 처음자리가 될 수 없는

고침 받아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이미 항상 죄인입니다.

그것이 이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의 처음자리입니다.

뭘 해도 죄 밖에 없습니다.


곧 전도서 12장에서 말하는 지혜란 심판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자가

나의 심판의 주가 바로 지혜자입니다.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바울은 일종의 12제자와 다른 정반대의 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제자는 소위 양육이라는 제자훈련? 맞나요? 하도 오래 되어서 종교적인 용어를 다 까먹었는데 소위 제자 훈련을 거친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 당시의 바울은 예수님을 죽이는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였습니다.


즉 제대로 된 단절된 상태입니다.


철저하게 성령의 소욕의 반대된 육의 소욕의 시스템에서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어떻게든 제거할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그 악마의 시스템의 핵심부의 지위에서 활동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시선이 없이 

그런 시선을 거치지 않고 바로 증거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성령의 시점과 매치가 되는지는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12사도 보다더 그 십자가의 죽음에 더 적극적으로

뭐하나 거리낌이 없이 십자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위축들어하는 자들은 12사도가 책망 받을 정도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게도 십자가에 당당합니다.


이 내용이 본문에서 성령의 시점에서 외쳐집니다.


즉 썩음을 당치 않게 하기 위해서

이미 항상 전제된 썩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썩음을 당치 않게 하는 소금의 기능인 성령을 증거합니다. 


즉 바울은 썩었다는 그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였던 자로써 

소금이 팍팍 찌들어져들 정도로 쳐진 그 상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심판을 제대로 만나자의 외침입니다.


구원을 제대로 만난자의 외침은 듣지 마세요

그가 심판을 만나면 달라질 테니까요


그러나 심판을 제대로 만난자는

더 이상 썩어질 자리가 없는 그 막다른 바닥에서 만난 심판이기에

심판의 주 만을 외칠 겁니다.


전도서 12장은 심판을 만나는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지혜자가 심판 속에서 놓치 않고 붙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에게는 징계가 있고, 사생아에게는 내어버려둔다는 겁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버가로 배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떠나고 남은무리들은 안디옥으로 이동합니다.

안디옥에서 회당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읽은 후에 회당장사람들이 혹 백성에게 권할 말이 있으면 바울 당신이 하시오 라고 하니


사도바울은 백성에게 구약의 내막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마치 얼마전에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사야선지자 말이 너희에게 응했다 라고 아예 단정내리듯이


오늘 본문도 똑같이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이 응했다 라고 외쳐버립니다.


누가복음이란 사도행전이랑 완전 쌍둥이 판박이처럼 펼쳐집니다.

그럼 당연히 누가복음처럼 응했다고 하니 저들이 반박하잖았습니까?

동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반박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몰아가서 죽일려고 하지요? 그러나 유유히 아직 시간이 아니거든 하시면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뻔뻔스럽게 그 응하심을 외쳤듯이

오늘 본문에서도 쫏겨남을 당해도 흥 별거아니네 라고 옷을 툴툴털고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기쁘게 즐거워 합니다. 그럴줄 알았어 제대로 복음을 증거했기에 나타나는 반응이구나 라고 즐거워 합니다.


자 썩어짐을 당치 않기 위해서 라는 말씀과 말씀이 응했다 라는 이 말씀이

왜 마귀가 씌여진 육의 소욕에게서는

왜 그렇게도 싫어하는 의미이며


예수님을 죽일려고 낭떨어지로 몰아갈 정도로

살인의지를 불태우는 것일까요?


개미 한 마리 죽인적이 없던 그들에게 왜 예수님 만큼을 죽일려고 하는 그 육의 소욕의

처음자리인 그 악마성을 제대로 노출 시키는 것일까요?


그 악마의 자리인 그들의 처음자리에

사도바울이 있었던 겁니다.


그 당사자가 도리어 그 자리에서 이제는 성령의 충만으로

성령의 시점에서 외칩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12제자들이 제자훈련 받아서 나온 그 경험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 경험 자체도 결국 예수님을 버리는 그것도 세 번씩이나 버리는 그 내용입니다.

제자훈련 했다는 특별훈련 자체가 도리어 올무인 셈입니다.

배워도 기억이 안 납니다. 언제 기억이 나느냐? 성령께서 기억나게 해줄때에

그것도 제자훈련 값을 한 행동이 나올때는 죽어도 기억 안나고


언제 여호와를 기억하는가? 언제 예수님을 기억하는가?

심판을 만났을때에만, 단절의 성령을 만났을때에만 기억이 성령으로부터 나는 겁니다.

까먹었던 것을 상기시키는게 아니라, 말씀이 응했다는 차원입니다.

그 말씀이 응하심이 뭡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입니다.


즉 이미 항상 죄인 이라는 겁니다.


뭘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매일 창조해 내십니다.


그럼 성령께서 그것도 보이지도 않는 성령께서 매일 창조했다는 증거가 뭡니까?

이상하게도 미움이 발생하고 죽일려고 하는 살인의지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은 반드시 육의 소욕에 의해서만 인지될 정도이니

육의 소욕이 아니면 성령의 소욕을 눈치챌 길이 없습니다.


대 낮에 빛을 아무리 비추어도, 후라시를 비추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빛 하나 없는 그 어두움 속에서 

빛은 빛 값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도리어 어두움을 그 빛을 더욱더 빛 되게 하도록 받쳐주는 들러리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어두움에게 영광과 공로를 드리는 자는 없습니다. 그저 이용해먹고 뻔뻔스럽게 버리면 그만입니다.


언제든지 빛을 위해서 이용해 먹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출처싸움 곧 소욕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는 말씀이 응했다 라고 완료를 선언해 버리면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졸지에 곤란해 지는 겁니다.


미완료 상태로 남아야 지키게 되고, 지키게 되어야 장사를 할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덜 고치고 애매하게 고쳐야 의사는 장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세상이 병균들로 가득해야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완료 해버리면 누가 예수님을 죽일려고 할까요?

의사 협회 아닙니까? 이웃사랑실천본부 아닙니까? 정의사회구현협회 아닙니까?


미완료상태로 남으면 자신이 가치가 있습니다.

완료가 되어버리면 자신은 무가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칭 의사라는 축에 서 있었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의사 중의 의사)이였던 이 사도바울이

성령에 의해 무시당하는 죄인 중의 괴수(문둥병자 중의 문둥병자)의 자리에서


의사협회를 배신 때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다 이루심을

넉넉하게 승리했음을 완료로써 바울이 외치니까


그거 의사 협회에서 바울을 안죽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보기좋게 쫏아내었더니만

바울은 더욱더 성령에 충만한 겁니다.


아 참 제대로 소금을 쳤구나 라고 기뻐합니다.


이거 뭐 완전 공포영화의 미저리도 아니고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늘 다시 부활하는 에어리언도 아니고

좀 제발 좀 죽어라 라고 겨우 겨우 죽였더니만


바울이 잘개 잘개 부셔져서 이제는 확장 증식을 해버리니

이거는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16절부터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이 놀랍게도

16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들어라 라고 전제를 한 뒤에

17절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애굽을 치는 설교로 시작하지 않고

광야에서 40년간 참으셨던 하나님을 괴롭힌 이스라엘을 치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는 겁니다.


(행 13:16, 개역)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행 13:17, 개역)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행 13:18, 개역)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어 이상하지 않나요? 이 참았다는 것을 쭈욱 계속 밀고 나갑니다.성령의 소욕으로써의 세례입니다. 광야는 말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막사는 이스라엘을 심판 곧 연합 (세례), 소욕으로써 다루십니다.


(행 13:19, 개역)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주셨다고 합니다. 기업으로 말입니다.


(행 13:20, 개역)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또 사사 곧 구원자를 주셨다고 합니다.


(행 13:21, 개역)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그것도 모잘라 왕 달라고 해서 왕을 사십년간 저들이 원하는 바를 주셨다고 합니다.


(행 13:22, 개역)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행 13:23, 개역)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결국 그래서 예수님 까지 주셨다는 의미로 나옵니다.


주면 뭐합니까? 주는 쪽쪽 육의 소욕화 곧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를, 백날 줘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 주십니까? 또 주십니다. 자기 챙길 자는 다 챙길 뿐입니다. 남는 장사이거든요.

이래나 저래나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막 사는) 우리일 뿐입니다. 우리도 매일 그러는 것은 매 마찬가지이거든요.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 어떤 접촉점이 없이(제자들의 시선과는 달리)

성령의 시점으로 인해 이 예수님을 심판의 주 곧 내 속의 육의 소욕인 우상을 깨뜨리는 자로써의 심판주를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을 이들 유대인에게 증거합니다.


(행 13:24, 개역) 『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침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행 13:25, 개역)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행 13:26, 개역)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행 13:27, 개역)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바로 이것이 선지자의 말을 응하게 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에게 걸림돌이요 거리끼게 하는 것으로써 제대로 박힌 겁니다.

빼도박도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즐거워 하라고 황당한 말로 외치는 겁니다. 선지자의 말이 응한게 얼마나 감사하냐 라고?


그것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써 외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중고아 이중과부 이중나그네가 아닌 자들은

성령의 소욕에서 탈락하는 겁니다.

그냥 고아 그냥 과부 그냥 나그네 말입니다.


그냥 문둥병자 9명은 제거 되는 방식입니다.

왜? 선지자의 말씀이 응할려면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라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 이루셨다로 성령의 소욕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소욕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시하고 딴 소욕을 찾습니다.


그러니 문둥병자는 딴 소욕을 찾아서 자신의 원래자리로 되돌아 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입니다.

왜 너도 가지 왜?

주님이 여기 있사온데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내 병을 고치는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심판주를 만났으니 제가 어디로 갑니까 라는 겁니다.


암요 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에 저를 지억해 달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잉태한 발언으로써 제대로 된 사귐의 의미를 드러내는 식입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그 발언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면 오로지 법적인 발언 밖에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빈말 곧 사귐이 없기에 나오는 예의상의 말만 하는 거죠.


얼마나 제대로 된 사귐을 주님 쪽에서 완료 해 버렸으면

남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도록 시기케 하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옵소서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참으로 뻔뻔스럽지요

한게 뭐 있다고?

뭐 저리 당당하게

그것도 예수님 앞에서 감히 ...


즉 누가복음의 특징은 바로 남도 아닌 유대인을 열불나게 하는 내용 뿐인 겁니다.

마태복음은 모든 구성 형식을 유대인의 초점에 다 맞춘채로 내용만 예수님으로 채워버리니

유대인은 아무 유익이 없는 식이기에

유대인 속으로 들어가서 십자가를 펼치는 방식이고


누가복음은 아예 이방인 중의 이방인을 택하고 난 뒤에

그 선택이 옳았음을 꼭 얄밉게 유대인을 동원해서 두 개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성령의 소욕의 탁월성을 스스로 영광 돌리고 스스로 영광 받는 식입니다.

그러니 육의 소욕은 자연스럽게 미움과 시기와 살인의지를 발산하는 방식입니다.


지금 바울의 설교가 딱 그런 식입니다.

너희 유대인에게 줬잖아 줬잖아 줘도 못 먹었제?

그런데 우야노? 너희들이 죽어도 싫어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응했으니?


아니 그러면 이방인에게 증거하면 될 것을

꼭 유대인들이 들끓는 그 한복판에서 바울이 외치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그러니까 선지자의 말씀이 응했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의 말씀이 응하는 방식은


유대인들의 주장 곧 마귀의 주장, 육의 소욕의 주장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말씀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그것은 늘 유보되는 방식이요 미완료 상태입니다.


도리어 그 선지자를 유대인들이 죽임으로써

아 죽었으니 응했다는 겁니다.

바로 당사자 유대인들이 반드시 선지자를 죽이는 방식으로써 응한다는 겁니다.


아니 여기에 유대인들이 끼어들기를 원할까요?

원하지 않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당사자로써 외치지 않나요?

그렇다면 말씀 응하는게 먼저입니까? 자신들의 존재가치가 먼저 입니까?


육의 소욕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따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처음부터 유대인이 아니였던 겁니다.

그래놓고 표피적으로 손할례당처럼 이방인만 나타나면 정죄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보존함이 먼저이지 말씀 응함이 먼저가 아니였다는 것을


말씀 응함이 까발리는 겁니다. 그러니 거리끼는 십자가가 옳았던 겁니다.

나는 무조건 틀렸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유대인척 하는 것을 십자가가 까발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소금을 팍팍 치는 썩어짐을 당치 않게 하는 성령의 소욕입니다.


그러니 그랬던 당사자 사도바울 곧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바울이 성령을 통해서 말해 준다는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한 겁니다.


역시나 죽일려고 했지만


그것이 말씀이 응한 겁니다. 선지자 죽이기 말입니다.


나는 어쩔수 없이 선지자 죽이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강요된 선택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 , 이미 항상 죄인의 자리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셨다는 겁니다.


이 제대로 된 복음의 일에 직시하여서 이미 항상 죄인 곧 뭘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죄의 심각성을 구원받은 강도처럼 인지를 하느냐 라는 겁니다.


이 성령의 소욕, 십자가만이 밝히 보이는 이 십자가의 심각성을 외면한다는 것은

오히려 바울을 등떠밀러 죽일려고 하는 육의 소욕과 다를바 뭐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썩어짐을 당치 않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님은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소금을 팍팍 치시면서

내가 하는 일을 초 치시면서

심각하게 소금의 엄청난 양을 뿌리는 겁니다.

피를 엄청나게 쏟아 부으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썩었고 냄새나고 부패가 심각하기에

소금을 엄첨 쏟아 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목사라고 소금 쪼매 뿌리고

악덕 비리 기업 갑, 뇌물에 찌든 공무원이라고 이빠이 뿌리고 하는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 동일하게 다루십니다. 처음자리는 저절로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데 몰아 집어넣어서 통째로 다루시는 겁니다.


이 심판 속으로 몰아넣는 이 바울의 성령의 시점을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을 또 살려주시는지요?

오늘도 썩지 않도록 소금을 이빠이 뿌려주시고

그 귀한 피로 씻어 주옵소서.


이런 기도, 이런 글을 적는 그 가치로 내 존재를 정당케 마옵시고

그저 빨리 심판해 죽여 주시는 그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건방지지만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옵나이다.


늘 우리는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인 막사는 자일 뿐입니다.


이미 항상 죄인으로써 다루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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