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여!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눅 4:28-44)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 4:31, 개역)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눅 4:32, 개역)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눅 4:33, 개역)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 4:34, 개역)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5, 개역)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 4:36, 개역)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눅 4:37, 개역)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눅 4:38,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눅 4:39, 개역)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 4:40, 개역)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1, 개역)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눅 4:42, 개역)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눅 4: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눅 4:44, 개역)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희년이란 인간이 마귀에게 장악당했음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성이 유대인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을 무시하는 의미입니까? 인간은 아예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해 버립니다. 

왕따요 배제요 소외입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만을 상대로 합니다.

마귀가 오히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죠.)


그래서 풀어주는 자, 즉 자유케 하는 자가 의미가 있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그 죄인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이다는 겁니다. 곧 죽은자입니다. 포로된 자입니다.


이들을 자유케 한다는 겁니다. 이 선언을 하고 이 이사야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니

보이지도 않는 마귀에게 씌인 인간들이, 눈에 보인다고 우기는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분노를 가득 표출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면 뭐합니까? 분노 뿐인데.


차라리 왕따 배제 소외 투명인간 소경 이였더면 나았을걸 껄껄

(이미-항상 죄인 , 170p 죽신위)


본다고 하니 소경이요 분노 뿐인 겁니다.

(강요된 선택,  168p 죽신위)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래서 자유케 하는 희년 곧 복음이

바로 이 마귀를 동원해야만 되는 겁니다.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무지 무지 상관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역할을 해야지? ~~~ 라고 거의 비아냥 또는 

이미 실족한 자로 취급해 버립니다. 가룟유다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꿈을 딱 하나요. 무의식 속에서나,

꿈을 꾸고 현실에서 열심히 목표를 향해 실천을 하면서

행동에 나서게 되는 그 행위의 목적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죽이기입니다.


베드로 죽이기를 실현할려고 했던 헤롯, 

벌레에게, 아주 작은 평상시 그가 무시했던

벌레에게 잡아 먹혀 버리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부친살해] 라는 모든 인간의 무의식의 공통된 꿈꾸임 당하기 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방해를 하고 있으니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는 죄의 소원을 못 넘어서고 문턱에 걸려 넘어져서

영원히 실족한 자라는 이마표를 받아, 부친을 살해한 증거로써 동생을 살인한 최초의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겁니다.


십자가는 다시 이 최초의 살인사건을 재현하는 겁니다.

예수 죽이기를 확장 증식 팽창 왕성함입니다.


여기에 마귀는 나사렛 예수여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두 번의 사건에 언급이 됩니다.

하나는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때에  마귀가 갑자기 발악을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마귀가 빠져나오면서 외친 말이


나사렛 예수여 그 완성함이 곧 그 이사야 말씀의 응하심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고 외치며 귀신이 빠져나오는 사건이요


(눅 4:33, 개역)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 4:34, 개역)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5, 개역)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또 하나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심했는데

그 열병을 꾸짖으면서 귀신을 쫏아내고, 여러 사람들의 각색 병들을 고치십니다.


귀신이 쫏겨나면서 외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말을 외칠때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저들의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눅 4:38,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눅 4:39, 개역)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 4:40, 개역)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눅 4:41, 개역)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마귀는 예수님이 자신을 쫏아내면서 외치는 말이 당신은 거룩한 자입니다.

또 두 번째 베드로장모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쫏아내면서 외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일관성있는 외침입니까?


마귀는 한결같이 예수님은 거룩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자신을 쫏아내면서 귀신들린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는 그 증거를 통해서 외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한자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라는 마귀의 외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왜 예수님은 일관성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겁니까?

줏대 없이 말이죠.


줏대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바로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입니다.

다들 한결 같이 찌질남 이라는 것이 특징인데요

그런 뱀의 후손 같은 남자가 여자가 아니면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신화를 채용하는 방식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Woman Is the Future of Man, 2004  감독 홍상수)처럼 ... 


여자 앞에만 서면 그렇게 작아지는 남자 (김수희 그대(사랑)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 그런 굴욕도 상관없어요~)

여자 앞에서면 무조건 죄인이 되는 남자가, 구원자 여자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죠.

이런 소외 무시 배제를 스스로 추구함으로써

여성으로부터 귀염을 받는 

아마 그런 내용들이 라캉을 추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줏대도 없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고 하니

이랬다 저랬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다는 그 비밀성 때문에

그 비밀에 소외 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쪽에서 비밀을 안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니 그러면 말하기 전에 짤라야, 막아야 하지

다 말해 놓고 허락지 않는다는게 무슨 소용있냐 라고 하겠지만


그 역시도 예수님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인 그 비밀을 부각하는 차원인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그런 취지에 동원이 되는 배치물에 불과한 겁니다.

막혔다 허락하지 않았다는 강조하기 위해

말했기에 그 말함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되심이라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희년의 완성이 

즉 이 이사야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 라고 선언해 놓고서는

정작 한 과부 한 문둥병자를

일부러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를 피해 피해서, 도리어 이방인 사렙다 한 과부에게만

또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를 일부러 피해 피해서, 이방인 나아만 장군 문둥병자에게만


이 희년이 응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이 딱 끝나자 마자

멀쩡하던 정상적인 인간들이 분노에 가득차서 귀신들로 변해서

예수님을 낭떨어지로 몰아 떨어뜨려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부친 살해)

예수님은 유유히 그 가운데를 가로질러 시계를 보시면서 아직 때가 아니거든 ~~~

하고 내려가시는 겁니다.


캬 이 장면을 한번 그림 그리듯이 구성해 보십시오

얼마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희년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비정상입니다. 왜 끍어 부스럼을 만드냐 말입니다.

누구라도 분노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빡빡 끍어대니까 말이죠.

죽을 짖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살기가 넘치는 그 상황을 펼쳐야 복음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외치는 복음은 복음 축에 끼지 못하는 이유인 겁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살벌한 상황이 수시로 벌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분노를 끄집어 내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분노를 더더욱 뒤짚어 씌우는 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에

마귀는 차단 당하는 식입니다. 소외 단절입니다.


마귀가 나사렛 예수여 라고 했을때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며 무슨 선한 일을 할수 있느냐 라는

마치 애굽왕 바로(파라오)의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강퍅케 하심을 뒤짚어 씌운 결과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신났을까요? 오냐 오냐 드디어 내가 듣고픈 말을 했구나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줄게, (우비소녀) 기 다 려 봐 ~~~~

그래서 애굽왕 바로와 애굽군사를 통해서 주님은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마귀를 통해 영광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오늘 본문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렇게 무시를 하는 겁니다. 무시


이 무시라는 말은 소유 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을 못하게 하고 즉 무시하고

육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무시하는 겁니다.

즉 전쟁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베드로 장모를 고치면서 또한 주변의 많은 병자를 고쳐

마귀가 쫏겨나면서 외치는 그 말이

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지롱 이라고

그래서 그들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말했는데??


장면의 의미를 부각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외침을

예수님 쪽에서 막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귀의 소욕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방식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라고 하고서는,

이제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3번 시험할때에

예수여 당신이 하나님을 아들이거든 이라고 하나님의 아들 됨에 의문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해소할려면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율법 곧 이웃환대법, 약자보호법 이라는 사랑을 성취하라 라는 주장으로 시험했습니다.


이 얼마나 성경적입니까?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주장입니다.

양탈무리들이 늘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얼마전에 이웃을 사랑하지 말자 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원수 사랑하지 말자고


이웃이 졸지에 생겨 버리면

원수가 졸지에 생겨 버리면


본인이 예수님의 이웃(고아 과부 나그네)

본인이 예수님의 원수 인지를 때려죽어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생산기관이 아닌, 배설기관으로 주님은 우리를 취급해 버리니 무시 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구경꺼리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지금 마귀는 쫏겨나면서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외칠 때

누구를 겨냥한 겁니까? 인간들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라는 주장 아닙니까?


거봐 거봐 우리 마귀를 쫏아낼정도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란다 라고

마귀가 지 입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주장하는 겁니다.


마치 솔로몬 재판에서 아이를 두 조각을 내라는 법적 명령에

박수를 치며 옳습니다 왕이여 너무 너무 지혜로운 판결입니다.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도록 어서 빨리 아이를 두 조각 내소서 라고

그 판결에 동의하는 적극성이 바로 마귀의 성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 판결만이 나도록 마귀는 기다렸던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마귀 편인냥 오인하도록 말이지요.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섭니다. [강요된 선택]

하나님이 시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자유적인 독자적 영역을 못 구축하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하지 않습니까?


(슥 3:1, 개역)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개역)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그럼 그 마귀의 외침이

그럼 그게 복음입니까? 이게 일종의 [강요된 선택]이라고 합니다. 자유의지처럼.가룟유다가 예수님을 30냥에 팔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듯이, 이 강요된 선택에 말려든 겁니다. 괜히 목사말 들은거죠. 왜 듣냐 말이지요? 목사편 들면 그게 복음입니까? 


지금 마귀가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고아 과부 나그네의 위한 메시아가 되어라 라는 겁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그랬듯.


고아 경제 배고픔을 해결하라 (떡으로)

과부 종교 소외 당한자 해결하라 (기적으로)

나그네 정치 잃어버린자 해결하라 (섬김으로)


여기에 마귀는 쫏겨나면서 자신의 소명을 다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들이여 이 분이 거룩한자 맞습니다. 그리스도이심을 믿으세요 라고.


아니 이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 태도 입니까?


지금 마귀가 그리스도를 주장하고, 십자가를 주장하고, 희년을 주장하고, 이웃·약자 보호법의 완성인 사랑을 주장하고, 율법의 완성(사랑)자 되신 예수님을 주장합니다. 이웃사랑이 율법완성이거든요 그래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메시아가 되어라 라고 줄기차게 주장합니다.


아니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주장을 막습니까? 왜 허락하지 않을까요?


누가 비정상입니까? 그리고 누가 지극히 정상입니까?


놀랍게도 이 마귀의 외침은 이미 인간들이 주장하던 것 였었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초를 칩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여러 과부 중에 이방여자 한 과부

이스라엘 여러 문둥병자 중에 이방인 한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이것은 초를 치는 의미입니다.

인간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웃 개념, 약자 개념, 희년개념, 다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다 초 치고 있는 겁니다.


마귀는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초 치고 있는 겁니다.

이단이죠 이단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아니!! 이단들도 그거 이루어 달라고 다들 당파를 형성한 것 아닙니까? 개혁 핑계대면서 ...

정통이라고 우기는 놈들 또한 같은거 이루어 달라고 형성한 겁니다. 이웃사랑완성입니다.

문제는 그것 조차도 예수님은 다 초를 쳐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분노 아니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꿈 드림을 다 깨뜨려 버리는 겁니다.

마귀는 끝까지 인간의 꿈을 이루어라 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에 참여되지 못한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육의 소욕을 그대로 발산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의 소욕으로 막는 것은 당연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과부에게 보내신바 되어야 하는 육의 소욕에

딸랑 한 명의 이방인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진 바가 성령의 소욕이다는 겁니다.


즉 육의 소욕은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희년의 대상물을 자신들이 형성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희년의 완성자도 자신들의 형성하는 꼴입니다.

대상물도 자기가 형성하고 대상물의 담당자로 자기가

그러니 육의 소욕 맞지요.


10명의 문둥병자 중 9명의 유대인은 되돌아 갔습니다.

고침받아도 다시 자신을 소외시킨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갑니다. 강요된 선택입니다.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 박하사탕.


그러나 딸랑 한 명의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떠밀어도 안갑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떠밀어도 안가는 겁니다. 왜?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이미 항상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고침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불교처럼 자각 곧 깨달음이 아니라

인물 곧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실로암소경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는 성령으로 인해 응시점이 되는 겁니다. 얼룩이요 거리끼게 하는 존재 말입니다.


(눅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은 편파복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은 정작 지독한 미움으로 일방적이고

그 유대인이 더럽다고 정죄하는 이방인은 편파적인 편애로 일관하여

그 간격을 더욱더 벌리는 겁니다. 그 간격의 거리두기를 매울 길이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유대인은 강요된선택(자유의지)이고 이방인은 뭘해도 죄인 [이미 항상 죄인] 입니다.


죄의 소원처럼 선을 행했다면(진짜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면) 그 간격을 좁혀 보라는 식입니다. 자유의지 라메? ~~~~~

주님이 간격을 벌렸는데 감히 어느누가 좁힐수 있냐 말이죠.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육의 소욕에서의 희년의 내막을,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마귀는 들통이 나야 하는 겁니다. 육의 소욕들은 들통나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에서의 희년의 내막과 대비 대조 차이가 나야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마귀의 순애보 입니까? 일관성있는 줏대있는 모습입니까?

자신이 쫏겨나면서 까지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인간 편에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비밀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귀는 끝까지 초코파이 정인데 예수님은 철저하게 냉소적입니다.


기적은 오히려 마귀가 바랬던 것 아닙니까?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로지 자신의 죽음이라는 십자가로 향할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게 철저하게 냉소적으로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보내신 바 되었다는 겁니다.


마귀는 반발합니다. 십자가에 죽지 말고 

고아 과부 나그네를 자유케 하라 라는 겁니다.

제발 죽어버리면 메시아 됨이 무슨 소용이 있냐 라고

오로지 순애보로 인간만을 위한 인간의 변호사

고아의 변호사

과부의 변호사

나그네의 변호사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냉소적으로 십자가로만 향할 뿐입니다.


(눅 4:41, 개역)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눅 4:42, 개역)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눅 4: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고침을 받은 즉 귀신에게 씌였다가 포로됨에서 자유케 된 자들이

홀로 한적한 곳에 있으신 예수님을 찾다 찾다 겨우 찾아서

떠나지 말라고 말리니까


예수님은 냉소적으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일 때문에 보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미 깔려졌는데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해야

너희들처럼 그들이 그 포로됨에서 자유케 된다는 겁니다.


그 가짜 하나님나라가 바로 마귀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메시아.


그러니 인간은 이런 마귀에서 벗어날길이 없는 포로된 자들입니다.이 말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그 포로됨에서 자유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즉 이미 안식 율법 사랑 희년 개념 등등이 이미 다 깔려져 있습니다.

그것을 깨는 것은 십자가 뿐이기에

그 요나의 표적 때문에 보내심을 입었다는 겁니다.

악한세대가 기적 곧 마귀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자유케 하라는 그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마귀가 이미 안식으로 율법으로 사랑으로 희년으로 인간들을 장악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의미가 바로 안식 인데

안식일날 가르치시는데 귀신이 발악을 하고 그래서 병을 고치시는데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귀신이 씌였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들렸기에 안식일 지키고 주일성수하고 희년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예 작정하듯 약올릴려고 안식일과 전혀 무관한 이방인에게 보내심바 되니까

유대인들이 발끈하면서 분노해 버리지 않았잖습니까?


바로 이겁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자들을 마귀 취급해 버리시는 이유는

그들 안식일 지킨다는 자들에게서, 더러운 귀신들자로 취급받고 또 안식과 무관하다고 취급받는 이방인이,

안식일 지키는 자들로부터 정죄함을 받는 그 구조

그 환경을 팔을 어긋맞게 뒤짚어 버림으로써

과연 누가 참안식을 훼방하는, 참안식을 원치 않는, 안식을 분노하는 자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킨자는 때려죽어도 예수님의 안식 곧 고아 과부 나그네를 고쳐준

딸랑 한명의 이방인을 고쳐주신 그 긍휼에 도저히 동참 못하는 겁니다.이미 자신들의 안식이 있으니 말이죠.


왜냐하면 자신들이 정죄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을 깨끗하게 거룩한 자로 용서해 버리면

졸지에 누가 뻘쭘해 집니까?


(슥 3:4,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자신의 정죄를 철회하고 도리어 자신도 용서 해 달라고

이방인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에서 예수님께 더러운 죄인임을 고백한다는 것은


졸지에 있을수 없는 도저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있을수 없는 일이요,

자신의 믿음(자유의지)에 갇혀버린 일 아닙니까?


아니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이 왔다는 겁니다.

그 일


남이 원수가 아니라 너야 너 

너가 하나님의 원수야 라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은 너가 하나님의 원수야 라고 알려주심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의 비밀에 동참케 참여케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군요 지금 이웃사랑실천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안 보이는 이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끝까지 기적을 베풀어라 옳지 옳지 마귀인 우리를 쫏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 맞아 맞아


이 얼마나 희생정신입니까? 마귀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어요?

심지어 자신이 쫏겨나면서 까지

예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아들 됨의 일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귀가 말이죠.


그런데 왜 그 마귀의 외침을 막습니까?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마귀의 희생정신도 모르는 나쁜사람!


왜 마귀가 유대인의 모든 정신을 다 장악했는지 이제 아시겠나요?

그렇다면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기독교정신을 마귀가 다 장악한 겁니다.

처음부터 복음이 아니라 종교였습니다. 인간을 위한 구원 말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가장 싫어하거든요.


그 증거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딴데 늘 눈을 돌리는 겁니다.

그러니 기독교를 기독교로 볼게 아니라

그냥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우리들 모두가

귀신 씌인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남들보고 마귀 들렸다 할 처지가 못 됩니다.


자신이 마귀가 들린 상황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활동 외에는 고침 받을 길이 없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행위를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사건은 딱 하나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 십자가 사건이 오늘날에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즉 딱 하나의 믿음이(상대적으로 다른 믿음은 다 거짓이다는 말이겠죠. 인간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그 요나의 표적이 오늘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다가온다는 사실에

그 종말의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안식을 누릴수 있도록

십자가가 나를 못 박는다는 사실


그리스도 라는 비밀은 십자가에 달리신 내 죄 대신 죽으신 분을 말합니다.


마귀가 외치는 희년완성(고아 과부 나그네를 자유케 하는 강요된선택의 자유)인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외치는 희년완성(자유케 하심)의 자유인지?


두 소욕을 보면서

그 차이를 격고 그 간격을 누리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딸랑 마지막날에 지음받고서 안식에 일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우리는 벙어리가 졸지에 되어도

입이 고장나서 말을 못하게 되어도

손가락이 병이 들어 글을 남기지 못해도


이미 십자가의 증거에 참여 된 바를 누리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마귀 맞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맞습니다.

주여 저를 고쳐주옵소서. 그 십자가의 피로 이 더러운 죄인을 씻어주옵소서.


환자에게만, 포로된 자에게만 자유케 하시는 분이 보일 뿐입니다.



그 십자가를 자랑함은


오로지 죄인 중의 괴수 로써 말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막살기(181p 죽신위) 입니다.

줏대없이 뻔뻔스러운 찌질남이요(홍상수), 나쁜남자(김기덕)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케세라 세라 될대로 되라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입니다.

나 아니요 주님이 무조건 옳았습니다. 나는 무조건 틀렸습니다 입니다.


그 십자가의 저주를 누리는 겁니다. 유일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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