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만들기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5: 1-11)



(눅 5:1, 개역)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눅 5:2, 개역)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눅 5:3, 개역)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 5:4, 개역)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6, 개역)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개역)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개역)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9, 개역)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눅 5:10, 개역)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개역)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귀가 예수님과의 출처싸움을 통해서

마귀는 육의 소욕을 강요합니다.


그런 요구에 예수님은 거부합니다.


마귀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즉 신 만들기입니다.

신 만들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곧 고아 과부 나그네를 구원 시켜 주고파 안달이 난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이웃사랑을 실천하자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웃 사랑 못해서 안달이 난 겁니다.
자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런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파서 안달이 난 나를 건드리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삼위일체 교리의 배경인 플라톤 사상과 같습니다.
(물론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참진리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삼위일체 속에 감추어진 사위일체 곧 인간인 자신을 개입시키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넣든 빼든 결국은 관심사가 자기자신이니 말입니다. 비정치, 반정치도 결국 정치이니까 말입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재해석(재탕 우려먹기)이라고 할 정도로

신과의 일치성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입니다. 서양철학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우상은 어두운 동굴 속에 머물러 버리는 상태이기에

그 우상에서 벗어나는 빛의 세계로, 바깥 세계로, 동굴 속에서 나오라, 우상에게서 나오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데아 사상을 늘 주입시킴으로써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는 겁니다.


인간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는 사명

인간을 죄악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사명

인간을 우상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사명


이것이 모두 마귀의 출처를 보여주는 육의 소욕입니다.

영을(이런 사람의 일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는 소욕입니다.
즉, 신 만들기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그 선악과를 출처로 삼아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고아 과부 나그네가 거룩한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 받아야 한다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갇혔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그들은 자유의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형적으로 갇혀버린 죄의 소원이 씌여진 모습인 겁니다.

강요된 선택에 따른 행동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육의 소욕을 무시하는 성령의 소욕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소욕에서 등장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는 무엇이며

예수님은 마귀가 요구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라 라는 소욕을 무시하고서

예수님 자신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어떻게 새롭게 창조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아를 거부하는 고아

과부를 거부하는 과부

나그네를 거부하는 나그네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

회개를 거부하는 회개

십자가를 거부하는 십자가


즉 이 이중성을 통해서 성령의 소욕을 


고아를 무시하는 고아

과부를 무시하는 과부 

나그네를 무시하는 나그네를 살펴보겠습니다.

(즉 거부 무시 라는 단어에 포기 라는 단어를 넣으면 됩니다.
회개를 포기하는 회개,
고아를 포기하는 고아,
나그네를 포기하는 나그네,
즉 앞엤것은 내가(육의 소욕)  추구하는 식이고, 그것이 차단당하는 뒤의 고아(성령소욕) 또는 회개가,
바로 예수님이 뒤짚어 씌우는 회개 고아 입니다.
그냥 고아 제사가 앞의 것, 더 나은 고아 제사가 뒤엤것,
나 아니오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입니다.
십자가를 포기하는 십자가, 십자가의 이중성)


이들의 자리, 곧 처음자리는 십자가의 죽음이기에

처음부터 없었던 [무 無]의 자리입니다.


자리가 무입니다. 자리가 없습니다. [없음]

그래서 언제든지 죽어도 상관없고

무시 당해도 상관없고

언제든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 취급 당해도

죽은자와 방불한 자로 취급 당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자리가 마귀처럼 육의 소욕인 선악과가 되어버리면

나는 절대로 없으면 안되는 자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껍데기는 자신의 출처를 평생토록 외치는 짖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조차도 없음의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인간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소욕에서의 십자가는 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외치는 십자가는 절대로 죽으면 안되는, 없음으로 취급 당해서는 안되는,
없음으로 취급당해도 그것을 잘 참고 있는 그 참는 자신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어찌하던간에 있음이 될 수 밖에 없는 출처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따로 사는게 아니라

출처만을 보이도록 살도록 되어 있는 삶입니다.


천국이 땡기는 자는 천국을 보여주는 삶만 살도록 되어 있고

지옥이 땡기는 자는 지옥만을 보여주는 삶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소욕이라고 했습니다. 무시를 통해서. 무엇을 무시하는가를 통해서 소욕을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도 있음이 아니라, 없음의 십자가이기에 십자가의 십자가 라는 이중성

곧 십자가의 반복성을 통해서 소욕을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의 소욕이냐 라는 출처 곧 배후인물을 보여주는 것이지 고아를 위한 예수님은 우상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아를 그때 그때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자 이렇다면 오늘의 결론을 미리 앞당겨 오면

구지 신만들기, 구원되기, 구원하기, 등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로부터 정죄 받을 수 밖에 없는 미끼로써

완벽하게 정반대인 막살기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의식을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자유를 해야지, 자유하는 삶을 살도록 지키고 노력해야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이 강요된 선택이기에 자유로 착각토록 만드는 것입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의식하지 않았는데

너는 내가 배 고플 때 먹을 것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고

일방적인 해석으로 뒤짚어 씌우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즉 전혀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자유이며, 자유롭다를 의식하는 것이 강요된 선택입니다.

자유로운 티를 내며, 이웃사랑의 티를 내는 식입니다.


얼마나 자유하지 못하면 자유하다 라고 외칠까요?

즉 얼마나 신이 안 믿겨지면 신만들기를 할까요?

얼마나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을 거부하면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애쓸까요?


그래서 마귀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라고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딴 고아 딴 과부 딴 나그네가 있다고 딴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아의 고아

과부의 과부

나그네의 나그네

종말의 종말


을 말하고 있는 이중고아(고아를 거부하는 고아), 과부의 이중성(과부를 포기하는 과부), 이중 나그네인 겁니다.


이 말은 잃어버렸다는 의미를 반드시 새기는 흔적으로써 이중 고아 이다는 겁니다.


잃어버림의 흔적이 없는 고아가 있습니다.

또 잃어버림의 흔적이 있는 고아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귀가 고아의 하나님이 되어라고 주장하는 그 고아요 그 하나님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고아에게 떡을 돌로, 아니 돌을 떡이 되게 해서 먹이는게 아니라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니라 말씀 곧 잃어버림의 의미가 담겨진 십자가로써 사는 사람을 고아라고 하는 겁니다.


곧 고아는 예수님 자신 뿐입니다.


하나님으로 버림받은자. 잃어버림받은자 로써 십자가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고침받으니까 9명의 유대인은 그 정상적인 유대사회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즉 이들은 잃어버림의 경험을 한 적이 없는 그저 재수없게 문둥병 걸린거지

자신들의 처음자리가 잃어버림의 자리가 아니였다는

선악의 자리, 하나님과 같이 된 자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침받으니 바로 바로 유대사회로 복귀 해 버립니다.

결핍성은 결국 유대사회로부터 분리된 것 때문에 격은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침을 받은자가 열명 아이가?
왜 딸랑 한 명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즉 예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해방시키는 자유케 하는 희년의 완성을

마귀의 주장 곧 마귀의 소욕 마귀의 출처로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육의 소욕을 건드리면서 하시는 겁니다.


(눅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저들의 출처로 돌아가도록 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 하심입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고 능청 스럽지요?
예수님이 등 떠밀어 놓고서는, 마치 안그랬는냥 아홉 어디 갔지? 내가 잘 떠밀었는지 확인하니 기가막히게 등떠밀렸구나 !! 이것이 강요된 선택에 빠진 저들의 모습이고, 이와 맞물린 [이미 항상 죄인]의 의미를 도출하는 십자가가 낳은 고아 개념입니다. 얼마나 우발적입니까? 살벌한 우발성, 사랑의 폭력성입니다.


아니 본인이 괜히 고쳐가 저들의 처음 출처의 자리가 땡기는대로 가도록

동기유발시키시는 방식이 놀랍게도 저들의 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겁니다.


고쳐 주옵소서 오냐 고쳐주마 너의 출처를 보여라 라는 겁니다.

고쳐주니 영락없이 자신의 출처를 이겁니다 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손해 본 장사냐 아닙니다. 무지 무지 남는 장사하셨습니다.


이방인 외에는 처음부터 남기지 않고자 하신 겁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입니다.
선민인 유대인을 짤라야 이 처음자리의 역전이, 부조리가, 모순이 보이는 겁니다.
이 걸림돌이, 이 불륜이 십자가 입니다.


이방인 한 명만 남기도록 하기 위해, 나머지는 그들의 출처가 잃어버림이 아니였다를 들추어내는 방식인(십자가) 겁니다.

그 잃어버림이란 바로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입니다.

그럼 십자가는 계속 계속 잃어버림을 양산 하는 겁니다. 증폭 증식입니다.

죽은자를 양산 합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자 말입니다.

죽은자와 방불한 불임자를 양산합니다. 이것이 수수께끼입니다.

불임자를 생산하는 생산력입니다.
(어떻게 불임인데 생산이 됩니까? 어떻게 죽은자인데 산 생명을 낳을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믿음 때문입니다.인간 믿음이 아닌 ...)


그럼 그 창조가 기본의 창조를 다 거부하는

창조를 거부하는 창조인 셈이겠지요. 창조를 포기하는 창조 입니다.


생명을 거부하는 생명 곧 이중 생명입니다.

죽음을 거친 생명이다는 겁니다.


죽음을 거친적이 없는 것들이 우기는 생명을 무조건 거부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생명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잃어버림입니다.


그래서 99마리의 생산력을 거부하고

잃어버림의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매시는 목자가 되겠다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메시아상을 무조건 이유없이 거부하시겠다는 겁니다.


죽은자와 방불한 그 한 마리의 양의 목자라면

과연 생명력의 목자입니까?

아니면 죽은자의 목자 입니까?


이것이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것은

죽은자들이 하나님을 신 답게 만들어 낼려고 무지 무지 애를 쓴다는 겁니다.


산자의 하나님이다는 것은

신 만들기와 전혀 무관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다들 신 만들기 라는 평생을 이 짖만 하고 있는데

싸가지 없이 놀려고 하고 그 거룩한 일에 동참치 않는 자는 졸지에 뭐로 취급당합니까?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세상은 모든 시스템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입니다.
그것 때문에 신도 신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기독교도 유대교도 모든 교회도 여기에 동원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줄테니 고아 과부 나그네를 섬기는 자가 되소서 라고 말입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고 있다 라고 하잖습니까?


하여튼 예수님을 메시아 만들어 줄려고 마귀가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환장을 해요 환장을.


저들의 처음자리를 제대로 보여주는 발언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본 사람은

심판을 목격하게 됩니다.


심판 속에서 만나는 주님 만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심판 속에서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을 구원자 만들려고 미치고 환장해 합니다.

예수 믿어 줄테니 우에 우에 해 달라고 하질 않나

예수를 이미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니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나


신만들어 줄테다. 메시아로 만들어 줄테다. 구원자로 믿어 줄테다

이것이 거의 협박입니다. 협박 


믿어줄께요 라는 협박


이것은 심판을 만난게 아닙니다.



심판을 제대로 만나면

심판 주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목격하게 됩니다.

구원자 아닙니다.

나의 구원은 도리어 심판주를 만나서 물건너 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문둥병자 열명 중에 한 명 사마리아인 이방인은 떠날수가 없습니다.

영광돌리기 위해서 못 떠났다고요?

아닙니다. 영광이란 심판을 제대로 받았다는 거룩이 임해버린 겁니다.

즉 죄인 중의 괴수로 당첨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떠날수가 없는 겁니다.


나머지 아홉은 심판이 없는 유대사회라는 이데아 곧 구원의 장소로 냉큼 자리를 옮겨버린 겁니다.


심판의 흔적을 도리어 깨끗이 지워 버릴려고

처음자리를 냉큼 지워버릴려고 한 겁니다.

지운다고 지워지던가요?



[아테네 학당)] 1509년, 프레스코, 스탄자 델라 세냐투라 바티칸 박물관, 로마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년, 프레스코, 스탄자 델라 세냐투라 바티칸 박물관, 로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대 철학자들의 무리를 이끌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옆구리에 '티마이오(Timaeus)'라 쓰인 책을 끼고 있는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며 만물지식의 근원인 '이데아'를 이야기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윤리학(Eticha)'이라는 책을 허벅지에 받치고 대지를 가리키며 변함없는 자연의 진리를 설파 하는 듯 하다.

라파엘로는 동시대 화가들을 모델로 고대 철학자의 얼굴을 그렸다. 여기서는 수염이 텁수룩하게 덮인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삼았다.




http://blog.naver.com/chansol21/50036492436



다빈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회화를 중요시 여기고 [조각]을 인문학에 끼이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조각은 원근법 즉 과학적이지 못하고, 회화의 불멸성 영원성에 비해 육체적 노동이 심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문학에서 최고봉인 시, 그런 시 보다더 더 뛰어난 것이 바로 회화 라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를 인식한 회화를 강조했습니다. 현실 충실입니다.


그러나 반면 미켈란 젤로는 신플라톤 신비주의를 따라 조각을 예술 중의 예술 이라고 아름다운 미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재미있게도 미켈란 젤로는 조각의 형상은 이미 그 돌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정으로 깍아내어 들어가면 이미 들어가 있는 형상이 나올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다만 잉여인 것을 제거할 뿐이다. 조각상은 거기에 그렇게 있다 라고 쓸데 없는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갇혀있는 형상을 끄집어 내는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미켈란 젤로 자신의 얼굴을 돌이나 작품 속에 자주 집어 넣었다고 합니다.
(성화론자들이 듣기 좋은 소리처럼 보이겠지만 정반대입니다. 자기를 쳐서 자신을 깍아들어가는 성화론이 아니라.
성령이 직접 우리를 치시는 겁니다. 정과 그 욕심 곧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는 겁니다.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고 성령이 직접 하시는 일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육은 개입되지 못하고 소외 될 뿐입니다. 무시당할 뿐입니다.)


얼마나 육체의 껍데기를 벗고서 갇혀버린 영혼을 구원 받고 싶었으면 저랬을까 싶네요.


저는 여기서 미켈란 젤로가 갇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플라톤도 동굴을 우상으로 했죠?)

그리고 이미 처음자리는 결정났고 그 처음자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각을 깍아낸다는 것이 더욱더 마음에 듭니다. 물론 둘다 육의 소욕에서의 하늘(이데아)과 땅(현실)을 추구합니다.

(마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러 오신게 아니라

처음자리를 드러내시는데 있어서

한 쪽을 제거 함으로써 다른 한 쪽을 드러냅니다. 잃어버림을 통한 되찾음을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9명의 고아 과부 나그네 곧 문둥병자는 자신들의 결핍이 이것 때문에 결핍되었다고

그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갑니다. 99마리 양도 동일합니다.
(99마리 양의 출처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제거되는 잉여는 한 마리 양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양의 출처를 드러내는 있어서 제거되는 잉여는 아흔아홉마리 양입니다.
열명의 문둥병자도 동일하고, 열처녀비유도 동일하며, 양과 염소의 비유도 동일하게 적용하시면 됩니다.
탕자의 비유 둘째아들과 첫째아들 비유도 동일합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싸우는 겁니다. 잉여 싸움, 출처 싸움)


그럼 다른 한 쪽인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과 사마리아 이방인 한 명의 문둥병자의 처음자리는

지금 방금 그 자리를 직시하고 자신은 이 자리 때문에 문둥병자 되었어야만 했다고

실로암 소경이 되었어야만 했다고, 잃어버린 양이 되었어야만 했다고,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 한명의 강도처럼 강도로 태어났어야만 했었다고 하는 겁니다.


왜?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과거에 어떤 목사 설교를 듣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거지 나사로가(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고

지옥간 부자(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을


정작 그의 설교 전체는 결국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면 안된다는 성화론자를 비판하면서도 성화론을 추구하는 식이다고 했습니다.


방금 전화가 누구한테서 왔는데

성경을 보면 발전이 있어야 하고

주님이 이 말씀으로 지적을 해 주셨는데
발전을 못해서 어떻게 하냐고?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경은 발전하라고 준 책이 아니라

그냥 니 모습을 그때 그때 보여주는 거울로써

그 지적하는 관계 자체가 사귐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뭘 요구하는게 없고(성화론자 즉 종교꾼처럼)

너는 지금 이런 모습이구나 라고 지적함으로써

그 관계성을 주님 쪽에서 붙들고 놓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매가 없는, 내어버려두는 사생아가 아닌

매가 있는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강요된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이미 항상 죄인이라는 지적하시는 자의 확고한 의지 입니다.)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내가 성경을 읽는게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는 겁니다.
나는 그 성경에 의해 들통날 뿐입니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래서 같은 구절 같은 내용이라도

볼 때 마다 달라지는 겁니다. (거울을 볼때 마다 내 모습이 항상 동일하던가요?)

나를 지적하시는 그 사랑이 깊고 넓고 높으기 때문입니다.

(엡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즉 발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런 나를 지적하시는 성경말씀이 점점점 수준이 높아지고 발전하시면서 더 깊게 사귀러 오시는 겁니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면

베드로에게 열병걸린 장모를 고치고

또 오늘 본문처럼


게네사렛 호수에서 무리들이 에워싸고 있는 중에 두 배가 있는데 한 배를 타서

그 배가 베드로의 배인데 육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를 청해 그렇게 하고서는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말씀을 마치자 더 깊은 곳으로 가자 하고 하시고

그 깊은 곳에서 그물을 던져라 라고 하니

베드로가 밤새도록 잡아봤다고 여기에는 고기 없습니다만

그렇지만 예수님 당신의 말씀을 의지해서 내가 딱 한 번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볼테니 똑똑히 보시라고

그래서 다시는 그물을 던져 고기 잡으라는 소리를 오늘 만큼은 하지 말라고

그물을 던집니다. 자신의 경험이 맞으니까 보채지 말라는 취지입니다.


어 그런데 아까 전만 해도 수도 없이 그물을 던져서 고기가 없어 허탕을 친 장소가 분명한데

그물이 찢어질 듯이 고기가 배한가득 잡혀 올라오고 있으니

이것은 마치 고기들이 알아서 굴러들어온냥 그물이 찢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심판을 경험 합니다.


구원이 아닙니다. 기적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박살내고 깨부서 버리는 창조의 권력은
심판 밖에 없음을 제대로 본 겁니다.
마치 야곱이 간밤에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은 그 샬롬을 그 안식을 경험한 겁니다.


안식이 덮치면 화로다 화로다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살벌합니까?


그러니 지키는 안식이란 없습니다.

행하는 안식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안식에 참여 됨은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 무슨 생뚱맞은 표현입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가득하면 감사하면 되잖아요?

두 배를 가득 채워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되었다면

기뻐하라는 취지니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갑자기 이상한 오바를 할까요?

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전혀 다른 소욕의 발언이 나옵니다.


마치 유세윤이 오바를 해서 음주운전 안걸렸으면 집에가서 휴 행운이였다 다시는 안해야지 라고 반성을 하고 다시는 안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음주운전했다고 아무도 잡지를 않았는데 자진해서 음주상태로 경찰서까지 차를 몰고가서

자기 스스로 자수를 해버리니

경찰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다들 의아해 하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과는 다릅니다.


베드로는 단절 곧 심판을 느낀 겁니다.

그래서 떠나소서 당신 같은 거룩한 분은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입니다 라고

거리를 두는 겁니다. 단절성 차단성 분리성 분절 차이성을 부각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차이성입니다. 거룩입니다 거룩


진짜 거룩을 만나면 그 거룩 때문에 원수의 자리에 놓여지는 심판성이 부각이 되지

구원이라는 동일성에 놓여지는게 아닙니다.


왜 안 타죽느냐를 실감하게 되는 샬롬이지

그래서 친숙함 친금감 친밀감이지


내 쪽에서 막먹을 정도로 친구아이가 라고 다가갈수 있는 여호와의 불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불이 다가오는 방식입니다. 내 쪽에서의 필요성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나의 더러운 꼴울 못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를 동원해서 그 더러운 원수성 비거룩성을 지적해서 깨끗케 하시는 겁니다.

즉 지금 더러워도 상관없습니다. 깨끗이라는 세계가 끌어 당기는 관계, 처음자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적 한다는 자체가 이미 항상 죄인이라는 고백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를 직시 하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지금 당장 나는 타 죽어야 하는 여호와의 얼굴을 본 부정한 자라는 겁니다.

뭘 해도 죄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고기를 찢어질정도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주셨으니

그동안 배고팠음을 해결하고

결핍을 채울수가 있고

아픈 곳도 고쳐주셨으니 당신은 우리가 기다려 왔던 메시아 맞군요 라고

오히려 육의 소욕의 출처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고백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슨 짖을 해도 처음부터 용서받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게 아니라

주여 고맙습니다. 이제 배불리 먹으러 갈게요 라고 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마치 9명의 유대인 문둥병자가 유대사회로 되돌아 간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입니다. 자유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그들은 그들의 자리가 자유의 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출처가 육의 소욕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 반대로 이미 항상 죄인의 자리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기에

이런 사건을 주님께서 벌리신 겁니다.


예수님 자신을 부각 시키기 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는 예수님 뿐입니다.

이웃은 예수님 뿐입니다.

약자보호법에서 약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높이는데 있어서 모든 사건은 동원이 되고

그 사건에 베드로는 동원 배치가 되는 겁니다.


이 방금 벌어진 이 사건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요?


(눅 5:9, 개역)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눅 5:10, 개역)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 5:11, 개역)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귀의 처음자리인 육의 소욕으로인한 신 만들기는 전혀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벌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은 전혀 살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할 뿐이지

조금만 지나면 금방 익숙해져 버립니다.


처음에 해 본적이 없기에 두려워 덜덜덜 떨리지만

자주 하면 그런 마음도 언제그랬냐는둥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다릅니다.

익숙한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복 곧 연습만이 대가를 만들어 낸다는 속담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반복도 안되고 연습도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놀라고 무섭고 떠는 겁니다.


구원은 두렵고 떠는 일인 성령의 소욕의 일이다고 바울이 말합니다.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얼마나 살벌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떨고 놀랬으면

예수님이 무서워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된 멘트가 아닙니다. 바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서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오죽 하면 말입니다.


이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곧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뭐가 아쉬워서!! 구원 못해서 안달한 예수님이 아닙니다.)

사람을 심판 속으로 몰고가는

죄인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성령의 일(소욕)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나 이렇게 당했다 너도 당해라

살벌한 사랑을 말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미 항상 죄인인 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그 소욕에 참예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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