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의 죽음과 유대인의 베드로 죽이기 (행 12: 1-25)



지난 시간에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이

유대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일소에 말소 시키는 사건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아니 성령 세례 때문에 이런일이 발생한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니? 반발할것인가? 아니면 동참해야할 판국인가?
베드로는 자신이 동참하기 싫어도 동참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열합니다.
그래서 모든 입이 함구 하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유대인들은 뭔가를 오해하는 성향이 이미 육체에 가득합니다.

무엇인고 하니? 자기 배운 거랑 다르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알던 해석과 차이나는 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럼 바른 해석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형성된 해석이 유대인 곧 바리새인의 해석입니다.
성령이 그때 그때 할 말을 내려주지 않는 이상 모든 인간의 해석을 비켜가는 식입니다.

즉 이것은 더 강한자 더 나은자(더 나은 제사, 더 나은 해석자 곧 성령)가 일소에 말소시켜 주지 않으면

그 의문은 꼬리에 꼬리는 무는 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신학교리를 반성에 반성으로 완벽하게 구비하였어도

그래도 의문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예수님께 몰래 밤에 찾아가 묻는다는 것은

그 한 사람 바리새인의 의문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유대인의 의문인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니가 백날 선생짖 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난 다는 말을 해석(주석)에서 본 적이 없기에 믄 말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아닌척 그 의문을 마치 해소한냥 감춘척 행동해야만

적응해 나갈수 있는 사회구조였던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적응


결국 인간 종교에서의 믿음이란 노동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적응력을 믿음이라고 우리 끼리 그냥 넘어가자 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 의문을 일소에 말소 시키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육의 말소입니다.

성령으로 난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해석이 안되기에 반발합니다.
성령의 활동이 안 보이고 이방인이 감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에서 졸지에 완악해져 버린 겁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전혀 문제 없어 문제 없어 문제 없는 것이

이상하게도 육의 세계에서는 너무 너무 의문에 의문이요 소동이요 문제꺼리가 되어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이름의 독점권은 주님이 우리 유대인에게 외에는 보내신바 된 적 없는 이름이기에 거기서 의문이 졸지에 걸림돌에 걸려 거리끼게 된 겁니다. 부딧히는 돌에 부딧힌 겁니다.)

심지어 미쳐 꿈에도 몰랐던 살인까지 벌어지게 되니(내 속에 살인의지가 까가득(만땅) 할 줄이야?)

더욱더 의문으로 빠져 무법천지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만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성령이 나서지 않으면 지나개나 다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은 어떻게 문제를 일소에 말소 시켜버리는 겁니까?

육의 방식은 안된다고 차단하는 겁니다. 의문에 의문만 더욱더 꼬리를 물게 되니 말입니다.


성령의 일은 간단합니다.

육이라는 그릇이 자꾸 진리를 담을려는 그릇 노릇을 할려고 나서기 때문에

그 육의 기특한 짖을 짖밟아 버리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즉 육의 그릇 깨뜨리기입니다.


육은 얼마나 부조리 한지 자기가 감당할수 있는 양만 감당할려고 합니다.

이유는 진리 때문이 아니라 육의 보존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진리를 위했다고 빡빡 우겨서 본인도 그게 맞는 줄 압니다. 다 죄인데!!


그러면 그 육이 감당하지 못하도록 일소에 입을 함구 시키는 방식이 바로

그 육의 그릇이 숨도 못 쉬도록 넘치도록 퍼붓는 겁니다.

그러면 육은 충만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육은 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물 위를 걷는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죽음 속에서 물 위를 걸었다 라는 기적적인 경험은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즉 나 물위를 걸었다를 곧 영(요나의 표적)을 육인 내 쪽으로 끌고와서 자랑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자랑은 주변인이 알아서 할테니 너는 그 그릇이 찢어지는 경험 곧 죽음을 경험하라는 겁니다. 그래야 죽음 속에서 생명을 말할때에 그 생명이 진짜 생명이다는 겁니다.

둘 다 생명이면 그것은 목격자가 아닙니다.

한 쪽은 죽음의 자리에 놓여져야 생명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성령은 목격자 만들기 입니다. 곧 자기부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목격담이 멀쩡한 정상인에게는 미친소리 비정상으로 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목격담이 그 사건 그대로 이행이 될려면

같이 죽음 속에 놓여진 자에게만 그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는 겁니다.


간담이 서늘 할 정도로 말이지요.


그 죽은자가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사건과 그 사건의 목격담 자체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새롭게 형성하는 겁니다.

그들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때에


유일하게 기생 라합에게만 그 이름이 주로써만 불려질 뿐입니다. 즉 다른 이름은 다 가짜다 라는 것을
놀랍게도 기생라합만 알고 있지 나머지 인간들은 양다리 다 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부르는 자에 의해 달려있는게 아니라

주 라는 이름 자체가

대상을 이미 정했다는 겁니다.


이미 정했다고 하니 또 오해를 하는데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예정론 조차도 인간들이 믿고픈 대로 교리를 형성하니 소용없구요.

주 라는 이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미리, 또 앞으로 미래 완료적으로 부르도록 되어 있도록 조치해 놓은 것이 주 라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부르신바 되었다는 거죠. 그러니 웃기게도 부르는 자 가 주의 이름을 대상으로 삼을수 없고

거꾸로 주의 이름이 부르는 자를 대상으로 삼았기에 나타난 결과이기에

원인 없는 결과로써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유대인은 시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를 수 밖에 없도록 조치를 제대로 했기에

시기 했다는 결과물도 같이 도출하는 식입니다.


결국 애초부터 주의 이름은 인간이 부를 수 있는 대상물이 될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빼앗긴냥 시기를 하니

이 시기가 말도 안되는 웃기는 짖이다는 겁니다.

마치 기득권을 처음부터 가졌고 소유했냐 말이죠.

정작 그들이 소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그들은 싫어했던 겁니다.


부를 수 있는 기득권은 빼앗기기 싫고, 그렇다고 부르기를 원하는 마음은 없고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기도 주의 이름 부르지 않고, 남도 주의 이름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와 같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는 손할례를 강력하게 주장하듯이 그들은 주의 이름을 얼마나 외적으로 많이 불렀겠습니까? 우리가 마치 예수님을 믿는 척을 하듯이 말이죠.


(마 23:12, 개역)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4, 개역) 『(없음)』

(마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결국 성령의 활동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심입니다. 바리새인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속의 육의 유전으로 인한 것을 발각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세례에 대해 오해한 그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더 이상은 반문은 없게 됩니다.


그 보자기 환상은 마치 베드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반박이 없게끔 하신 주님의 조치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이요 주의 주 되심입니다.

할례(율법)은 우리가 할수 있는 손의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할례 당해야할 판국인 심판의 문제 곧 성령의 숙제 입니다.


여전히 베드로와 그들과 지금 현재 우리는 주의 이름의 대상물입니다.

이것이 관계성이요 사귐입니다.


그럼 오늘 사귐은 어떻게 다가올까요?


먼저 주의 이름이 곧 주의 주 되심을 위한 조치로써 헤롯이라는 왕을 걍퍅케 하십니다.

수천년 전의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하듯이 동일하게 말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못배기는 상황을 누가 만들어 냅니까?


애굽왕을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애굽 군사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사건이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주님 스스로가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과연 그 소리가 누가 제일 이해가 안될까요?

당연히 이스라엘이듯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불러도 그거 바리새인처럼 거짓입니다. 남을 못부르도록 하기 위한 노림수입니다.


그럼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릅니까?

단절성이라는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능한게 아니라

불가능 하구나를 알고 회개케 만드십니다.

그 회개가 덮침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불가능성이

성령을 통해서 저절로 부르게 되는 겁니다.


즉 다른 말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절대 부를수 없는 이름이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 단절성의 간격을 제대로 실감하는 자는 성령이 임한 죄인 밖에 없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가 하니

그런 사도행전 11장의 사건(성령세례와 이방인 주의 이름 부름과 유대그리스도인 오해)에

더더욱 중첩적으로 12장 부터는 베드로를 노리는 핍박이 가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 자체의 확장 증폭 그 풍요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이들 악마들을 툭툭 건드리는 겁니다.

그 와중에 내부적인 오해와 점검은 같은 처지로 몰아가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다급한지 야고보가 죽었습니다.

헤롯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동기부여가 됩니다.


즉 이방인 보다 누가 복음의 적으로 가장 자리잡고 있는고 하니

유대인 바리새인 등입니다. 같은 민족이 같은 민족을 말입니다.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언약회복에 최대의 위기가 예수의 등장과 그 죽음으로 해결이 되기는커녕

더욱더 더 큰 위기에 처해졌으니

누가 동기부여만 해 주면 뭐든지 할 입장입니다.


이 동기부여를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막는게 아니라

더욱더 퍼트리는 효과를 나타내는 겁니다.


(행 12:1, 개역)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2:2, 개역)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3, 개역)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법 지키기는커녕 이상스럽게 어길 수밖에 없으면서 까지 법을 지킵니다.

왜 주님은 일부러 저들의 율법 지키는 날만 골라서 이 사건을 터트리시고

저들이 꼭 이런 절기를 회피 못하고 골라서만 맞딱뜨릴 수밖에 없는고 하니


법을 지킨다는 것이 곧 법을 어긴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안식일날 제자들이 바리새인 코 앞에서 일함으로써 안식일을 어기듯

그들의 목숨과도 같은 순결을 무참히 짖밟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순결할까요?

그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의 순결을 짖 밟는 짖은 마다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법 자체의 모순이 그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다고 하니 못 보는 소경이다는 겁니다.


법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은 어떤 누구도 법을 지키는 법이 없이

도리어 법 뒤에서 무법을 저지른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법이 보장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법에 걸려든 겁니다.
(절기 곧 법이란 축제로써 죽음을 구체화 하는 날입니다. 각성날 마약날인 셈이다. 부림절 죽으면 죽으리라 페스티발. 왜 야고보를 죽여야만 하고, 베드로를 죽일려고 할까요? 왜 예수님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일까요?)


자 그렇다면 성령이 임한자는 이 무법이 오기를 소망 하는 겁니다.

그 무법이 무 곧 없다 뭐가? 법이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법이 있다 라는 그 유법을 무법이 완성해 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죄 있는 자는 죄 아래 곧 법 아래 갇힌바 된 겁니다.

그러면 죄 없으신 분이 이 법을 완성해 버리면 되는 겁니다.


너가 시험에 못 통과하면 먹고살기가 힘들어 라고 다들 법을 통과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반칙을 벌려 무시험 합격 처리 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시험생 (죄인)은 시험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합격 되었다고 자신이 합격 될 정도로 대단한 자라고 하는게 아니라


분명 도저히 불가능한  아무도 합격 할수 없는 시험인데 합격이 되었다고

그 환자는 의사를 자랑하는 겁니다. 의사 때문이라고?

바로 요 말, 이 말이 회개입니다.

난 아무리 봐도 안되는 놈인데, 의사 때문에 살았다 라는 겁니다.

살았다는 말은 죽음이 기정사실인데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 스스로가 영광 받는 모습입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든 베드로를 잡아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도 죽인 자들이 그까이꺼 베드로를 못 죽이겠습니까?


그들은 명분만 찾으면 뭐든지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상입니다. 회개의 반대, 미쁘심의 반대인 시험에 걸려든 겁니다.


문제는 잡았고 잡았는데 잡은 티를 내야하고 왜 죽이는지 명분이 분명하게 되어야 하니


(행 12:4, 개역)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유월절에 예수님의 재판과 같은 식으로 몰고가게 되면 어떻게 되든간에 베드로는 죽이는데 성공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가 지금 절기를 일부러 맞추고 있습니까?

무교절날 잡혀서, 유월절날 재판받아 처형시킬려는 그 절기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 말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고 믿도록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막판에 뒤집어 엎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음을 제대로 격도록 하는 겁니다. 배신때리기의 달인인 겁니다.


뭐든지 술술술 유대인 뜻대로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졸지에 천사의 개입입니다.

이 천사의 개입은 전혀 전혀 예상 할 수가 없었던 뜻밖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의 손에서 잘 진척이 되어가다가

인간의 손을 떠난 문제가 개입해서 일을 다 처리해 버리는 식입니다.


그 앞에서 인간의 손은 그야말로 부끄럽게 되는 식입니다.


(행 12:6, 개역)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 12:7, 개역)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 12:8, 개역)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행 12:9, 개역)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즉 천사의 개입은 단 한번도 역사의 개입을 허용한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쿨쿨 자고 있습니다. 옥에 갇힌자의 태도 맞나요?

그렇다고 본인의 손에서 해결할 문제가 있긴 있나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기도를 했다굽쇼?

기도하면 뭐합니까? 소녀가 베드로가 밖에 왔다 라고 해도

그저 애들말로 취급해 버리지 않습니까?


기도한 사람들의 그 마을의 수장이 제일 높은 어른이 말하면

어쩔수 없이 문을 바로 바로 열어버리겠지만

어린아이 소녀가 말했다는 것은

일부러 천사의 개입을 말함으로써 역사의 개입은 일체 허용하지 않겠다고 역으로 말하는 겁니다.


천사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역사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역사 니도 할 말 없제? 네 할 말 없습니다 라고 만드는 겁니다.


베드로도 비몽사몽간에 참말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자신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천사의 몫으로 이행된 입장입니다.


그저 될대로 되라지 라는 케세라 세라 세라 밖에 안되는 겁니다.


베드로도 그런 판국에 사도가 아닌 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왜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고 하니 사도로 안세우면 베드로는 마귀가언제든지 채어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지 않으면 베드로를 내어놓으라는 마귀의 송사를 이길 재간이 없다는 겁니다.


목사도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늘도 역사하지 않으면 마귀가 다 가로챕니다.

어제 예수 잘 믿었다고 우겨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붙잡는 손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손 놓지 않는 사귐의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붙잡을 대상이 안됩니다. 나이 들어 늙어 힘이 빠지면 붙잡는 힘도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붙잡는 방식이 바로 천사의 개입이요 동시에 역사를 철폐시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함이 철폐 당함으로써 그 증거가 비몽사몽간에

천사가 툭툭 치는대로 공 굴러가듯이 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라는 공이 천사가 발로 차, 발로 차 


(행 12:12, 개역)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갑니다.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안열어줍니다.


베드로의 음성인줄 아는 자는


(행 12:13, 개역)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행 12:14, 개역)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로데 라는 여자아이 뿐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여거 열러고 하니 아직 어려서 힘이 없어

도움을 요청하니


다들 딴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 나쁜사람일수도 있으니 문열어주면 잡혀갈수 있는데

자꾸 문 열어라고 보채는 여자아이를 미쳤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위험한 상황에 어린아이는 그 위험성을 인식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미쳤구나 라고 몰아 붙일수 밖에요.


(행 12:15, 개역)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행 12:16, 개역)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자 천사의 개입은 곧 역사의 철폐입니다. 그러면 역사는 어떻게 철폐 됩니까? (손할례철폐)

반드시 천사의 개입을 무시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여자어린아이의 말은 미친사람으로 죽은사람의 말로 취급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본인들이 죽은 역사를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자기들 잘못을 애들한데 뒤짚어 씌우는 격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사실은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천사의 개입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가 개입하면 다른 하나는 숨어있다가 뭍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시이소 원리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천사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철폐는 당연히 발악을 합니다.

갑자기 사도행전 12장 18절부터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베드로와 중첩이 되어서

펼쳐집니다.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황은 오로지 율법수호와 성전사수로 인한 무슨짖이든 마다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이방인 헬라인은 다릅니다. 권력과 힘의 유지를 위한 정치성입니다.


결국 둘 다 같은 우상 수호입니다. 자기를 수호하는 것이 곧 우상 수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마치 미꾸라지처럼 유대인의 저런 상황 툭 건드리고

헬라인(이방인)의 저런 정치적인 상황도 툭 건드리면서

그 경계선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면서 역사를 툭툭 건드리고 시비걸면서 천사들에게 발로 차여 갑니다만

역사는 이 베드로에게 건드려진 이 상황를 수습한다고 요동케 됩니다.

체제 유지가 이루 말로 못할 정도로 신경이 바짝 쓰이는 겁니다.


마치 안식일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하나 무너지면 다 무너지니까 말이죠.


(행 12:18, 개역)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행 12:19, 개역)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행 12:20, 개역)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행 12:21, 개역)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행 12:22, 개역)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행 12:23, 개역)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행 12:24,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그래서 정치적으로 꼬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돈과 두로 사람들은 헤롯 신하 블라스도를 회휴아여 헤롯과의 화친을 청합니다. 헤롯은 알다시피 세례요한을 죽인 자입니다.


저번에도 그런말 했습니다만 갑자기 세례요한이 외부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여 유대인의 죄와 이방인의 죄를 같이 묶어서 죽음을 재촉합니다. 하긴 유대인은 지금 힘이 없는 로마압제의 상황입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동기유발시킬수 있는 것은 헤롯을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손하나 까딱 하지 않고

피를 묻히지 않는 방법은 이방인의 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인 겁니다.

아니 그러면 안죽이게 되는 것일까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손이 아닌 남의 손으로 예수님고 스데반 집사도 죽인 사람입니다. 


지금 철학자들이 이 사도바울에 대해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그냥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인물로써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죽이는 그 상황의 형식적인 절차를 진두지휘한 최선봉에 선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들 철학자들이 가룟유다 대신에 세워진 사도라고 할 정도입니다. 들뢰즈도 지젝도 바디우도 말이죠.


그러니 가룟유다 보다 더 심한 자입니다. 그러니 바울(청년사울)의 말 한마디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헤롯이 화친에 응하고자 왕의 복장을 하고서는 연설을 하여 대중을 자신의 수하에 둘려고 했습니다. 
(마치 에스더서에서 하만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지뭐 라고 누가복음 이전 앞글처럼 비정상 취급당하지 뭐 라는 식이듯, 여기에 하만은 헤롯처럼 비로소 본색이 드러납니다. 내가 왕이다. 그러니 죽음의 축제 페스티발[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 잔치]이 벌어져야 하는 겁니다. 케세라 세라 세라, 에스더 6:1- 7:10)


케 세라 세라 ~~ 될대로 되라지~ 죽으면 죽으리라 ~~ 막 살아라 막 죽어라 ~~ 막 살아라 ~~~

'Que Sera Sera' in "The Man Who Knew Too Much"  너무 많이 아는 남자




2013년 12월 25일


될 대로 되라지

어머니랑 어제 이 동영상을 보고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노래 속의 아이들은 점점 더욱더 밝게 웃는다. 초과과잉으로 잉여가 흘러 넘친다.
그러나 반대로 어른들은 점점 어두워 진다. 그 슬픔의 현실을 미리 알아버렸기에
이 땅은 머리 둘 곳 없다고 울고 운다.

몇년전 모장로의 의지를 보고
못난 자식 때문에 또 쫏겨나야할 입장이 되니
이 노래가 귀에 들어와
같이 울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우리 모자를 쫏아낼려고 하니 어쩔수 없네요

될 대로 되라지 될 대로 되라지 죽으면 죽으리라

그때 부터 이 노래를 어머니가 좋아하시게 되었다.

이 영화(히치콕)의 내용을 알려주고 나니 
자기 이야기인냥 입에서 흥얼거리신다.)

 

(더 6:6, 쉬운) 『하만이 들어오자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크게 높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면 좋겠소?” 하만은 속으로, ‘왕이 높여 주고 싶은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라고 생각하여』

(더 6:7, 쉬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크게 높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시다면,』

(더 6:8, 쉬운) 『먼저 종들을 시켜, 왕께서 입으시는 옷과 왕께서 타시는 말을 내오게 하시고, 그 말의 머리는 관으로 꾸미게 하십시오.』

(더 6:9, 쉬운) 『그런 다음에 그 옷과 말을 왕께서 높여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왕의 신하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을 시켜, 그 사람에게 왕의 옷을 입히게 하고, 말에 태운 사람을 성 안 거리로 다니게 하면서 ‘왕은 높여 주고 싶은 사람에게 이렇게 해 주신다’ 하며 외치게 하십시오.”』

(더 6:10, 쉬운) 『왕이 하만에게 명령했습니다. “어서 가서 왕궁 문에 앉아 있는 유다인 모르드개를 위해 그대가 말한 대로 옷과 말을 내어오시오. 그대가 말한 것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그대로 하시오.”』

(더 6:11, 쉬운) 『하만은 왕의 명령대로 옷과 말을 내어 와서 모르드개에게 옷을 입히고, 그를 말에 태워 ‘왕은 높여 주고 싶은 사람에게 이렇게 해 주신다’ 하고 성 안 거리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더 6:12, 쉬운) 『그런 뒤에 모르드개는 다시 왕궁 문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만은 당황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집으로 갔습니다.』


(더 7:9, 쉬운) 『그 때, 왕을 모시던 내시 가운데 하르보나가 말했습니다. “하만이 자기 집에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장대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것은 왕을 해치려는 음모를 알려 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하만을 거기에 매달아라!”』

(더 7:10, 쉬운) 『그러자 사람들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하만이 세워 놓은 바로 그 장대에 하만을 매달았습니다. 그런 뒤에야 왕의 분노가 가라앉았습니다.』


헤롯의 연설을 듣는 중에 백성들이 저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라고 외치면서 소동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천사가 또 개입하여 벌레가 나타나 헤롯을 잡아 먹는 겁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흥하고 왕성하여 더욱더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바울일행이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행 12:24,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행 12:25, 개역)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자 여기서 놀라운 점은 사실상 헤롯은 베드로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체제를 더욱더 곤고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그냥 일반인 대하듯 노예는 노예대로 정치꾼에게는 정치꾼대로 종교꾼은 종교군대로 이단은 이당 다루듯이 다룰 뿐입니다.


베드로와 접촉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치 세례요한과 접촉할 이유가 전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저들도 이 십자가의 영광(주의 주 되심)을 위해 동원이 되어야 하기에 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를 죽이든 세례요한을 죽였든 예수님을 죽이든 상관없이

헤롯은 자기 체계만 신경쓸 뿐입니다.
바로 그런 취지로 자기체계에 반대되는 우상세력을 처단하는 겁니다. 우상이 우상을 처단하겠다는 오이디푸스처럼?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이든 아군이든 이렇게 설정한다는 자체가

오로지 자신만의 관심사 뿐인 겁니다.


바로 이것이 벌레입니다.

아이구 벌레를 욕했군요.


벌레에게 딱 잡혀 먹기 좋은 인간의 모습인 겁니다.


사람이 벌레를 잡아먹지 어떻게 조그마한 벌레가 사람을 잡아먹냐 말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10가지 재앙이 그 때로 끝난게 아닌 겁니다.


여전히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을 구원에만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돈 뜯어먹을려고 하지 말고

심판이 [이미와 아직]이라고 해 버리면 아무도 돈 낼 사람이 없도록 할텐데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심판은 단번의 제사로 끝났다고 아 그것은 또 기가막히게 확정을 주더라 말이죠. 확신이라서 확신이 아니라 마치 점쟁이가 돈 타낼 구실을 찾듯이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면 돈을 안내놓고는 못배기거든요. 무당인 셈이죠.


그럼 이 헤롯을 잡아먹은 이 벌레가 오늘날로 치면 돈입니다.

돈이 사람 잡아먹는다는 말 못 들어 봤지요?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돈이 사람을 잡아 먹는 다는 것을 믿숩니다. 아주 아주 잘도 믿숩니다. 믿~~~~~~~~~~~~~~수~~~~~웁니다.


자 베드로가 벌레취급받듯이 죽임으로 몰려갔습니다.

베드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니리아와 삽비라를 죽였듯이

그 상황이 사실상 동일하게 벌어지는 겁니다.

헤롯이라는 그 큰 권세덩어리가

베드로 닭에게, 벨레 베드로에게 잡아먹힌 겁니다.


이 방식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되는 길은 없습니다.


역사와 묵시의 대립은 반드시 서로의 소욕을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베드로를 쫏아낼려다가 본인이 도리어 쫏겨난 겁니다.

이 세상의 무대에서 말입니다.


그 동안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말이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우상숭배만 한 겁니다.


이것이 헤롯의 최후입니다.


사도를 만나면 우리는 우리의 끝 곧 최후를 만났다고 여기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겁니다.


역사를 철폐당하고 천사의 개입으로 심판 받는 것이 바로 주의 주 되심을 목격하는 겁니다.



주님! 저희들도 헤롯과 다를바 없는 그저 권력과 힘과 자기사랑에 빠져있는

우상숭배자일 뿐입니다. 그런 나를 건드리고 지적하고 간섭할 때

우리의 귀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우리의 눈을 새롭게 만드셔서

그 복음의 외침에 귀를 열어주시옵소서.


그리고 나의 역사와 육이 철폐 당하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 사귐이 아니면

그 심판이 아니면

아무도 건질자가 없사오니

이 죄인을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