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귀에 응했다와 분이 가득함(쫏아내면 쫏겨나지 뭐) (눅 4:14-30)


응하심(오직 사렙다 한 과부, 오직 한 문둥병자 나아만)과 분이 가득함(회당의 여러 사람들) 



(눅 4:13, 개역)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눅 4:14,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5, 개역)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의 출처 곧 영이신 하나님에 대해

마귀는 흔들어댑니다.


그럼 마귀가 주장하는 출처는 뭡니까? 육을 출처로 두는 겁니다.

그 육이 바로 돌을 떡덩어리로 고아를 먹이며


사랑하는 자를 기적으로 저주(미움)으로부터 건져 과부의 남편이 되어주며


온 천하 영광을 받아서 떠돌이 나그네를 섬기는 임금이 되어라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육(선악)이라는 출처를 둔 마귀의 메시아 관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의 하나님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십자가라는 출처)를 뺀 하나님이요,

이방인에게는 지혜로운(어리석고 미련함을 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신(神) 인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응은 육의 차단입니다. 선악 거부입니다. 유대인의 하나님 거부입니다.

헬라 곧 이방인에게서의 지혜로운 하나님 거부입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십자가만 주장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주장하십니다. 육의 단절로써의 은혜입니다.

육을 수용하는, 육을 구원못해서 안달이 난 은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구원받고자 하는 육을 십자가에 못 박는 희년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은혜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육의 차단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이 마치자 잠시 동안 마귀가 떠납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에 모든 인간의 구원론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마귀야 말로 인간을 구원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좀 이상합니다. 마귀가 잠시 동안, 얼마 동안 떠나있다면

이 이후에 마귀의 등장이 가시화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나옵니다.

이 이후로 마귀와 예수님과의 독자적인 대면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계시록에나 마귀라는 짐승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만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는 더 이상 안 나옵니다.


그럼 성경이 잘못 된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이 마귀가 누구를 장악했다고 했고,

누구를 대변하고 보호하면서 주장하던가요?


바로 인간입니다.


자 그러면 얼마동안 떠나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바로 그 다음 구절부터 이 인간이라는 악마가 곧 마귀가

바로 바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로써 등장하게 됩니다.인간이 예수님의 대적자입니다. 마귀 자식이니까 말이죠.


또 이래서 그 성경 말씀이 틀린게 되나요?

왜? 빨라도 너무 빠르게 등장하니 말이죠. ㅋㅋㅋㅋ


결국 마귀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배치 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귀는 싫어도 어쩔수 없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

시나리오에서 악역을 맡는 겁니다.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뻔한 결론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결론 안다고 안볼게 아니라


그 풍성함을 누리는 향유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신나는 종말이다는 겁니다.


결론 뻔히 안다고 영화 안 보는 바보는 없죠.

뻔한 결론인지 안다고 안 보면 영화 이야기를 보고서 자랑하는 그 즐거움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성령의 권능을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소문이 퍼집니다.


이제는 고향 나사렛에 들어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이사야 서를 펴시고서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딱 이 부분을 읽고 덮으신 후에 이 말씀이 응했다고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고 선언해 버리십니다.전쟁 하기도 전에 이미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나팔을 부는 식입니다. 이것이 희년선포입니다.선포 자체가 곧 승리입니다. 선취입니다.


여기에 누가 반발하겠습니까?


성경 좀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즉 내가 성경 좀 아는데 넌 성경 모르는 놈 아니냐 라고 나서는 것이

너의 출처는 요셉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겁니다.


거 보세요 출처 싸움이 또 벌어집니다. 마귀가 떠난게 아니죠.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아니

인간 자체가 마귀의 가면이겠지요.


넌 요셉의 아들 주제에 왜 우리 영역에 들어오느냐?

우리를 무시하지 말아라 우리는 성경 해석자이다.

감히 그런 말씀이 응했다는 소리를 우리가 함부로 말 못하고 있는

조심 조심하고 있는 판국에


뭐 ~~~ 이 말씀이 너희 에게 응했다고?

지금 너 예수 장난하냐 장난해?


적어도 희년이 될려면 로마 압제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정치적인 해방이 되어도 당장 먹을 거리 해결이 시급한 경제적 상황단 한사람도 누락됨이 없이 천사가 받쳐주는 저주받은자 구원하는 종교적 상황이

해결이 되어야 희년이라고 말할수 있는데 단 하나도 가시적인 성과도 없이

현실은 전혀 변한 것 없는데 말로만 희년이면 나도 희년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예수님은 더 열받도록 그들의 속을 빡빡 끍어댑니다.


왜? 당연히 안색이 변하게하는 분노를 뒤짚어 씌우기 위함입니다. 곧 종말(심판)입니다.

그런 또 왜? 그야 은혜를 은혜답기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단절 아예 처음부터 단절케 하는 실족케 하기? 하나님나라의 침노 침략성? 공격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3, 공동)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눅 4:23, 쉬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속담에 빗대어 나에 대해, ‘의사야, 네 자신이나 고쳐라.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들었는데 여기 고향에서도 그 일을 한번 해 보아라!’고 한 것을 안다.』


예수님이 어떻게 속을 긁어대는고 하니

너 이렇게 말할려고 하지?

뭐!! 희년이 완성이 되어서 병든자 눈먼자 포로되어 갇힌자를 고치고 풀어주고 놓아줘 자유케 하겠다고? 니 병이나 고치세요 의사님??

오 그래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무지 많이 행했다며? 그럼 여기 너의 고향 나사렛에서 한번 똑같이 해보시지요? 라고 비아냥 거릴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덧붙여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이것은 희년 곧 기쁜날 은혜의 날을 완성하겠다는 취지입니까?

아니면 놀려 먹겠다는 겁니까?


저들의 반응은 너의 출처는 그냥 요셉일 뿐이야 라는 말 밖에 내뱉은게 없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아예 이렇게 심어버리면서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렇게 이런 현실에 희년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런닝맨에서 한효주가 비아냥 거리면서 아름답구나 라고 한 것처럼, 참 아릅답다!!) 퍽도 아름답게, 은혜답게, 기쁘게 작용하는 희년 답냐 라는 겁니다.

저들은 그야말로 정상적인 반응 곧 불가능한 현실인데 

예수님은 퍽이나 아름답게 저들의 속내를 끍어대면서

생각지도 않은, 마음먹지도 않은 말을 맹글어 내면서 

없던 말을 뒤짚어 씌우면서 퍽이나 아름답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시냐 하는가 말입니다.


이런 회당장 사람들과 같은 입장을 여러분이 당했다고 해보세요.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겁니다.

예수님에게 당해보면 말입니다.


생각한 적도 없는 마음을 넌 이런 마음을 지녔구나 라고 뒤짚어 씌우듯이 말할 때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이상하다 한두번도 아니고 (기이히 여길 뿐)

왜 카지? 도통 알수가 없었을 정도로 이상할 겁니다.


현실은 단 하나도 변한 것 없는데

응했다 라고 선포를 하고선 아예 승리했다고 하니누가 과연 현실을 제대로 보느냐입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예수님의 선언에

사람들 곧 회당장 사람들은(여기서도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반응으로) 현실적인 대응입니다.


현실은 곧 인간의 경험과 이성(지혜)으로 대응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의 특징은 정작 자기 병은 못 고치면서 남의 병을 고칠려고 한다는 겁니다.그것을 미리 아시고 예수님이 미리 저들의 생각을 말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또 약올리듯이 이 희년이 누구에게 응했는줄 아니?


아까 너희에게 입했다메?


아냐 아냐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큰 흉년이 들었을때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있었어도 내 팽개치고

오직 시돈땅 사렙다 이방여자 한 과부에게만 엘리야가 보내심을 받은바 되었고


또 엘리사 때에는 이스라엘 문둥병자 다 내비두고

오직 수리아 사람 이방인 나아만 장군만 깨끗함을 입었단다.


그카면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네요?

제 수준에서는 그렇게 말하겠는데 말입니다.


회당장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그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쫏아내 낭떨어지로 몰아세워서 떠밀려고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이 뻔뻔스럽게 아직 죽을 때 아닌데? 라고 하면서시계를 쳐다보시면서 아냐 아냐 아직 때가 아냐!!

그 무리들 가운데를 벌려 가로질러 내려가 버립니다.


뭘 이것 가지고 그러냐? 아직 너희들의 악마성이 이제 처음 들통났는데?

앞으로 새 빌었는데? 벌써? 시계 보시면서 아직 아니란다 

내 먼저 내려갈게 


하시는 겁니다.


참으로 기가막히죠?


희년을 완성하실 것 같으면 그냥 희년을 완성하시면 될 것을

왜 구지 이 쪽을 빡빡 긁어대시는 겁니까?

비정상이라면 몰라도 누구나 당연한 반응인데?


그러나 우리가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서 봤을 때


이 마귀가 인간을 장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출처를 노출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가 아닐까요?


바로 이것이 희년 완성입니다.

현실은 하나도 변한 것 없습니다.

오히려 정상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일관합니다.

그 정상을 마귀로 들통내는 것 자체가 희년인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전혀 전혀 돕거나 섬기거나 기업을 무라주거나 과부는 아내로 삼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귀가 주장하는 겁니다.


희년은 마귀에게서 건지기만 하면 게임오바입니다.그 마귀가 희년을 완성하라고 부추기고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인 예수 너가 하나님이 되라는 겁니다.그럼 진짜 희년완성은 뭡니까? 그런 모든 인간을 장악한 마귀만을 결박해 세간을 도둑질하면 되는 겁니다. 희년 참 쉽죠잉~~~~~.


문제는 인간이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그 희년을 비정상이라고 우기고

마귀가 주장하는 3가지가 옳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포로당해 건짐 받아야할 주제에 도리어 형사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이 자체를 깨부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희년입니다.


지금 인간은 갇혔고 포로당했고 눈멀었고 포로 되었다고 하십니다.

누가? 예수님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어디 어디 어디?

그런데 누가봐도 누가 갇혔고? 누가 포로 당했으며? 누가 눈 멀었느냐 말입니다.


다 정상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병원이라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치료 받으면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 시스템이 있는데 왜 구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 병원 시스템을 곧 종교 시스템을, 곧 인간 시스템이 매우 매우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고 있기에


예수님이 말하는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고 하는 말은 이 인간시스템을 거부한다는 겁니다.종교 경제 정치 시스템이 아무 문제 없이 잘 가동이 됩니다.전쟁이 일어나 페허가 되어도

모조리 다 사라져도

이상하게 인간의 손은 그 모든 것을 복귀 해 버립니다.신기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서의 현실입니다.역사가 사라져도 다 복원이 됩니다. 희한한 신기하고 놀라운 시스템입니다.


이런 기능을 놔두고 왜 미쳤다고 예수님의 희년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했다 해 놓고서는 넌 비정상인이야 내가 너를 고치마 라고 멀쩡한 놈을 일부러 팔 뿌라가 비정상인 만들어서 고치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많은 과부 냅뚜고 이방여자 사렙다 과부 한 여인

또 이스라엘 억수로 많는 문둥병자 내비두고 수리아 사람 딱 한명 이방인 나아만 장군


그럼 고치겠다는 건지? 장난치겠다는 건지 도통 알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고치면 마음이라도 동요할텐데 고치는 법이 없습니다.그러니 마술을 부린다고 바리새인(유대인 대표)이 정상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친다는 의미가 될려면 즉 의사라면 여러사람 될수록 많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딱 한명 고치고서는 희년 이루었다 라고 가버리면

이거 뭐 보통 모순(부조리)이 아닌 사기 중의 사기가 아닐까요?


물론 딱 한 명은 유일한 희년입니다. 그것은 우리 정상인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어떡하냐 말이죠? 딴 사람은?


그게 희년의 취지가 맞냐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희년이 아니지 않냐 말입니다. 이게 무슨 기쁜해 은혜의 날입니까?

약 올리는 해, 장난치는 해, 만우절이 모든 날을 채우는 식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제가 글을 적으니

적어도 우리의 진짜 속내를 시원하게 말하고 있으니 뭔가 틔이지 않나요?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까스활명수처럼 말이죠?


이게 바로 우리 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딸랑 한 명 빼고 딴 사람은? 이라고 걱정해주는척 하는 그 바른소리가

그러면 우리 속의 악마를 빼줄수 있기는 하냐 말입니다.


분명 모든 사람에게 이 희년이 응했다 라고 선취적인 선언을 하고서는희년(구원)이 아니라 놀랍게도 심판(종말)을 구체화 한다는 겁니다.종말의 구체화가 희년인 셈입니다.희년 선포가 희년에 주목하게 만들어 버리고서는

정작 희년이 아닌 그 반대인 심판을 너무 너무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암에게 포로당한 암걸린 환자를 치료 곧 구원하시는 방식이

곧 희년 즉 심판이다는 겁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고 3년 6개월 동안 바짝 마른 광야로 만들어 버리니까

톡 하고 튀어나오는 것이 약속의 자녀 곧 고아 과부 나그네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제대로 심판했구나 희년이 성취 되었구나 라는 취지에서 동원이 되는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엘리야가 딴 사람(여러 이스라엘 과부)에게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단 한 사람 사렙다 과부

엘리사가 딴 사람(여러 이스라엘 문둥병자)에게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단 한 사람 수리아 나아만 장군 문둥병자 라는 겁니다.


즉 보냄을 받지 않았다 라는 것으로 희년을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이죠.


여기에 암덩어리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먹거리를 단절시키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의사는 암만 상대 합니다. 암의 집에는 관심 없습니다.

암만 제거 하면 집은 저절로 깨끗해 지는 겁니다.

사실상 이것은 격분케 하는 체스쳐 였던 겁니다.


여기에 안 걸려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를 나무랠 입장이 못대는 거죠.


회당장 사람들 나무랄 수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지적하시고자 하시는 죄악을 우리가 들통당함을 격게 하심으로써


얼마나 이 희년 곧 은혜가 놀라운지를 예수님만이 의식하는, 홀로 주장하는 희년을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딸랑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침 받았다면 우리도 고침 받은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사로써

아무도 못 보는 암덩어리를 제대로 보시고 

그 암덩어리가 인간 전체가 장악하고 있다는

예수님만의 시선에서 발언을 막 해버리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만의 시선의 발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죄인 곧 환자입니다.


환자만이 의사의 말이 귀에 응합니다.

그러나 환자 아닌 사람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언어 표현들은 모조리 다

미친소리요, 헛소리요, 비정상적인 말일 뿐입니다.


우리는 기껏 마귀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를 고치는 예수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마귀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희년의 완성이라고 이미 희년개념을 가지고 있고

그 의미대로 해야 예수는 예수 답다 라고 인정해 주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 마음대로 ~~~ 라고 하십니다.

아니 내가 고친적이 없는데 누가 고침받을수 있냐 라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를 강조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더 밉상스럽게 냉소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고침 받으면 안될텐데 걱정하고 두려워 하십니다.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덜 아프구나 한번 제대로 아파봐라 라고  

더 깊숙이 마귀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보는 시선은 의사가 아니라 이거 뭐 완전 사기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환자 다운 환자가 없다는 겁니다.

원수 다운 원수가 없습니다.


비정상인이 없다는 겁니다.

다들 정상인이 되고파서 안달이 난 겁니다.


교회 가면 축복받은 구원받은자 되는 안달

사회에 가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안달

집에서는 아버지의 모든 이쁨을 차지하는 고아같지 않은 안달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단 한놈도 죄인이 없고 다 의인들 뿐이다는 겁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왜 자꾸 쓸데 없는 정상인들만 있느냐 라는 겁니다.


다들 저마다 자기 속내에 마귀가 없다고 하니

마귀를 빼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암걸린적 없다는 겁니다.

에이즈 성병 걸린적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리어 저들이 보기에도 마귀걸린자를 일부러 마귀안걸렸다고 자부하는 자들

눈 앞에서 일부러 딱 한명만, 그리고 일부러 격분케 만드는 조건인

개같은 이방인을 보란 듯이 고쳤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희년의 완성을

이렇게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아니 이미 이루었기에 격분케 된 반응으로 성취 된 겁니다.


캬 이것은 그야말로 마귀 씌인 정상인들을 격분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판을 뒤짚어 버리겠다는 심뽀인 겁니다.


아니 초반부터 이런 싸움의 양상이면

나중에는 우찌할려고?

첫 1 라운드부터 이러니 말입니다.


참으로 당신은 피 남편이군요 !  나쁜 사람 나쁜 사람 ~~~~ 나쁜 남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죽음은 아예 따 놓은 당상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나는 종말

곧 신나는 은혜의 날이다는 겁니다.


심판의 구체화가 희년입니다.


어떠세요? 

기쁜가요?

아니면 기분 나쁜가요?

이거 뭐 보통 살벌한 것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하필이면 천국에서 제대로 발휘되는게 아니라

지옥에서 발휘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심판의 구체화 = 희년 (비현실을 현실화 하는 것, 레알(정말로)?  레알(진짜라니깐))


요즘 어머니랑 같이 자주 부르는 노래가

케 세라 세라 세라 ~~~ 될 대로 되라지 내가 우찌 할수 없네


이게 은혜라니 얼마나 살벌한지, 비현실적인 일들이 마구 마구 펑펑 터지니까 말이죠.


하실수만 있으시다면 그만하이소 좀 제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제발 좀 저를 그만 거두어 주이소


이래나 저래나 안 통할 양반이다는 겁니다.


이미 정해져 버린 이상 어쩔수 없는 거죠. 케 세라 세라 세라


아니 주님이 직접 나서버리니까 이거 뭐 할 말이 없어요 없어


그러니 주님이 점점 더 겁이 나는 겁니다.

꼭 라이프 오브 파이처럼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 희년

뻥뻥뻥 다 구멍을 내어서 못쓰도록 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직접 밟아버리는 겁니다. 밟아도 너무 밟아!!


그러다가 예수님이 밟아버리는 놈이니 나도 밟아야지 라고 나서는 마귀도 밟아버리지 않나,

그러면 그런 분위기를 눈치 좀 채면 될것인데, 인간은 마귀 자식이라 어쩔수 없나 봅니다.십자가를 어리석은 지혜라고 욕하면서 정작 본인이 이 어리석은 지혜에 말려듭니다.

그래서 또 다른 놈도 밟을려고 하다가 또 짖밟히질 않나.


한 마디로 다 밟아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의 날이다는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심인지?


도통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마귀만을 의식하는 겁니다.


즉 시선이 전혀 딴판입니다.

인간은 보여주는 대로만 볼 뿐입니다.


딸랑 한 명?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 한 과부, 한 문둥병자를 고칠때에

과연 한 명일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군천사들이 죄인 하나가 돌아오는데 있어서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천군천사들이 온 하늘을 뒤덮어서 큰 잔치를 벌릴 정도이니


이건 뭐 ! 미친놈이 되어야 그 광경이 보이지?

안그러면 보일 턱도 없는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니냐 말입니다.


(눅 15: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개역)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개역)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이것은 의도적으로 아흔아홉이라는 다수성 보편성에 상대적인 누락성이 마땅한 단절의 한 마리에게만 보이시겠다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정작 단절된 한 마리가 도리어 단절이 된게 아니라

99마리가 차단 당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뻔뻔스러움이라는 미쁘심이요

당당함이라는 막살기 라는 겁니다.
(잃어버림이란 되찾기 위함입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되찾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케 세라 세라 막살아라.)


의도적인 반대라는 차이성이라는 겁니다. 간격벌리기입니다.


눈을 심판당하는 겁니다.

귀를 심판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응해지는 말씀 곧 희년입니다.


지상에 땅에서 통하는 시선으로 하지 않고

천군천사들이 온 하늘을 뒤덮는 시선으로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땅의 시선의 육의 소욕과

하늘의 시선인 성령의 소욕은 

서로 원수 지간임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마귀가 떠난 후 첫 번째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왜 복음 시작에 앞서서 마귀의 시험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부분이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도둑이 늑탈할려면 그 집 주인을 결박한 후에 그 세간을 빼앗는 겁니다.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결국 도둑의 시선과 집주인의 시선의 대립입니다.

예수님은 도둑으로써 마귀에게 포로된 자를 빼앗으러 온 겁니다.


그렇다면 환자만이 살려주세요 라고 그 결박된 줄을 푸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둑이 고맙지요.


그런데 도둑 잡아라 라고 십자가에 처형할려고 하는 자는

그 위법자를 당연히 잡아 가두어야 할 판국인데???

왜 이 도둑이 자유케 해주겠다고 하는지? 고치겠다고 하는지? 세간을  빼앗는다고 하는지?

천국은 침노 한다고 하는 예수님의 발언이 이해가 안됩니다.

더욱이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더더욱 무슨 말인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희년은 결국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닥치면

이것은 교회 30년 40년 5-6-70년 다녔다는 것으로 막을길이 없는

그야말로 폭로 당해야 할 판국의 실제 사건입니다. 진짜 현실.


회당장의 사람들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진짜로 진짜 빼앗김을 격어야 희년이 희년 답게 보이는 겁니다.

집주인이 결박 당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는 희년이 없습니다.


심판 곧 종말이 희년완성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먼저 시비를 거시면서

실족케 만들려고 없던 말까지 만들어 가시면서 하시는지?


진짜로 손모가지 머리 눈을 뽑힘당해야 볼 정도로

그 정도로 가치가 있기에

그 까잇꺼 좀 잃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귀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쳐들어 오시는 겁니다.



저들이 분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제대로 일하셨다는 반증인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빼앗길 때마다 발악하는 것은

결국 내 속의 마귀가 발악한 겁니다.


이런 마귀가 내 속에 들어가 있었다니


정말 정말 희년이 아니고서는

이 암덩어리는 빼낼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 내 속의 악마를 물리쳐 주십시오.

늘 나의 죄과를 보오니

이 죄에서 건져 주옵소서

정말로 정말로 비정상인은 남이 아닌 제가 비정상인 사이코 패쓰입니다.

이런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옵소서.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래기를 먹듯이

주인의 긍휼이 아니면 그저 버림받아 마땅한 고아가 아닙니까?


이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건져주옵소서

너무 너무 춥습니다.

그 뜨거운 십자가의 피로 눈 녹듯 녹여주시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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