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행 11:1-21)


버림받기 위한 선물(은사) : 속건제



(행 11:1, 개역)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행 11:2, 개역)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 11:3, 개역)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행 11:4, 개역)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행 11:5, 개역)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행 11:6, 개역)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행 11:7, 개역)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1:8,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행 11:9, 개역) 『또 하늘로부터 두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행 11:10, 개역)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행 11:11, 개역)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행 11:12, 개역)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행 11:13, 개역)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1:14, 개역)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 11:15, 개역)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11:16, 개역)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침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7, 개역)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8,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9, 개역)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 11:20, 개역)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개역)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제목을 저렇게 정해 놓고 갑자기 선물이라고 추가로 제목 속에 개입을 하고서는

이 선물 개념으로 다시 살펴 본답시고 며칠 뒤에 본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선물 선물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더라

다시 책들을 뒤적이면서

찾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주일 교회에 갈 때 버스 안에서 대충 읽을거리 찾다가

이거나 읽자 라고 집어들고 갔는데

아뿔사 너무 너무 놀랄정도로

선물에 부합되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마침 토요일에 어머니께서 욥기서를 읽다가

우연히 낭독을 하셨는데


평상시 그냥 대충 지나쳤던 내용이였는데

그날 따라 이상스럽게 중요하게 느껴졌다.


아 이거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읽으셨다.


당대의 최고의 부자

하인을 몇몇이나 거느리고 있었고

재산이 엄청나며

당대의 의인이며


(욥 1:1, 개역)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2, 개역)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 1:3, 개역)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 1:4, 개역)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욥 1:5, 개역)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 부분이다.


캬 바로 이거다.


하나님의 치심이 의미가 있을려며는

즉 사단이 숨어있다가 반드시 기어나올 입장이 될려면 

입맛이 구미가 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시시한것이면 사단이 말라꼬 기어나오겠는가?


최고의 부자요 최고의 당대 의인이라야

그의 쓰러짐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원래 거지였던 자를 내세우면

사단이 내기 장기에 참여할 리가 없다.


사단은 안다 하나님이 아끼는 것을

그것을 내기에 내놓지 않는 이상 기어나올 리가 없다.


내기꺼리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비방할수 있는 내리꺼리여야만 가치가 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고 할만한 자라야

그런 자를 내기에 걸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의미가 있는 자를 걸면 그때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정도로 당해 봤다는 반증인 것이다.


막상 욥이 쓰러지니까

모든 사람들이 달려든다.

내 그럴줄 알았어 라고

저마다 다 공격한다.


그 대표성은 욥의 세친구이다.


마치 욥이 다른 어떤 누구도 아닌 하나님으로 버림 받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려 왔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곁으로는 그 반대이다.

마귀가 씌인다는 의미가 그런 의미에서 감추인 것이다.

성령의 소욕 또한 그러니까 말이다.


곧 주님께서 일을 제대로 하셨다는 증거이다.


이 상황을 보고있는 사람들도 주님 일 참 제대로 하셨습니다 라고 박수치고 있고

모두다 그 예외의 상황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고백한다.

주님께 영광 돌릴 때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물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참으로 가혹한 선물이 아닐수 없다.


선물이란 결국 무능함과 공명(짝꿍)된 전능함이다. 무능+전능, 죄+피.

마치 구스여인에게 모세의 온유가 덮쳐지니 모두다 반발하듯이.(징후와의 동일화) 

분명히 가시적 즉 확정적으로 볼 때 철저한 무능이기에

누구든지 빫아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확정 시켰으니

아무리 어제까지 은혜를 입었다 손 치더라도

오늘 저주 받은 입장에서는 그는 버림받은 저주받은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본인이 저주 내린 이상 그 저주를 역전 시킬수가 없는 것이 확정적

확실한 입장이기에 밟아버리고 싶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밟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야 당연히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무능함의 확정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에서 건짐 받은 가능성이 없는 불가능성이기에,

하나님이 설마 방금 저주 내려놓고 취소 취소 취소 라고, 

이랬다 저랬다 할 리가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이기에,

불가능하기에 그런 법과 같은 언명을 다시 바꿀 리가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무능함은 확정적이다.


그런데 정작 철저하게 유린당한 욥의 입장에서는 그런 가시적인 상황 

즉 본인이 봐도 그 가시적인 상황을 피할길이 없는 당연함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가 있지 않는가 라는 그 의미에 사활을 건다.

비록 몸은 만신창의가 되었지만 말이다.

아픔과 고통을 부인할 수가 없지만

아프더라도 입에서 의지한바와 다르게 원망과 한탄이 나오더라도 말이다.


욥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 조차도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부인이 덮치는 것이다. 곧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 어찌 시공간을 초월하고 욥이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을 보랴?

다들 하나님만 쳐다 보고 있는 환경이고 그 환경에 제약을 받는데?

우찌 그런 시공간을 쳐다보고 예수님을 쳐다볼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자기부인할수 있는가? 그 당시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딴하나님을 믿을수 있는가? 그랬다가는 이단 중의 이단이 될텐데? 아나!! 하나님이나 저주하고 죽었뿌라 라고 외치는 아내의 말이 얼마나 실존적인가? 모두다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것이 바로 믿음은 보는 것에서 나지 아니하고 들음에서 난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주도권이 나라는 자아 이여서 보는 대상물의 응시점에 걸려들기 마련이다.


즉 욥을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얼룩(부정케 된 추락한 욥)을 응사하는 입장에서

도리어 이 얼룩이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눈을 상실케 된자가

본다고 하는 자를 도리어 보는 셈이다.

(즉 우리 손에 죽은 예수님이 산자로써 도리어 우리를 보고 있다.

욥은 그리스도가 격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고 욥은 바로 저런 자들과 다를바 없는 하나님 개념 곧 엘로힘에서

여호와 라는 기업 그 자체

선물 그 자체를

기존의 재산을 다 날려서(빼앗겨서)

새로운 시점인 얼룩을 통해서 선물 받게 된다.

기존의 소유하게 된 모든 것들이 날려감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 욥에게서 선물이 떠났다고 하는

그 선물에 대한 기존 선물 개념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선물을 욥은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다.

그럼 그 익숙한 선물을 배제시켜버리는 낯설은 선물이 뭔가?


예수님이요 고난받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 자신이다. 다른 기업은 없다.

곧 죄악과의 전쟁을 치르시는 여호와이신 예수님이다.

사랑은 전쟁 곧 폭력이다. 시기요 질투다.


사랑과 전쟁의 공명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다.

이 선물을 준비하시고서는

기존의 것을 날려버린다. 사람들이 저주 받았다고 하는 그 선물은 선물이 아니였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다. 쯧쯧쯧 안되었구나 저주를 받았으니 그 연민(선물)이 떠났구나.


결국 사람들이 욥을 보는 시선은 그 연민(선물)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엘로힘 곧 우상이다.


엘리후 부분을 읽으시던 어머니께서 물으신다.

엘리후가 욥에게도 잔소리 하네?


엘리후는 나이가 많은 욥과 욥의 세친구의 논쟁을 듣다 듣다 참다못해서

할 소리를 해야겠다 싶어서 드디어 입을 연다.


너희가 나이 많다고 하나 그것도 소용없구나

욥아 너는 왜 너를 버리시는 주님께 감사치 않느냐?

너에게 고통을 주시는 그것을 감사치 않느냐?

그것이 바로 선물이다.


너는 선물을 거부하거나 막을수 있는 권한이 없는 피조물 곧 죄인이다.

그 선물로 인해 감사해야할 것을 왜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하느냐?


그 고통이라는 폭풍 뒤에 하나님의 뜻이 나오거늘

왜 하필이면 납니까? 와이 미

도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케 보이

라고 따지느냐? 그런 모습이 악하다.


주님은 너를 통해서 욥의 세친구의 죄를 용서하는 제사를 드릴려고 하시는데

그 고통을 감사해야지?


엘리후 그럼 니가 한번 당해 볼래?

내가 왜? 너에게 닥친 일인데?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노아가 홍수심판 이후에 처음으로 한 행동이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부정한 짐승에게 피 뿌려서

성결제사를 실시한다.


동생들의 잘못을 맏이는 아무 잘못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맏아들을 족쳐 버린다.

맏아들 욥은 아버지 왜 하필 접니까?

제가 잘못한게 있습니까?


아버지는 이유도 없이 그저 맏아들을 죽여버린다.


이유는 동생들의 잘못 때문이다.

그 동생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매 맞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이유도 없이 때리시는 그 매를

그저 이유도 없이 감사합니다 라고 맞는 것이 

바로 선물이라는 관계성 , 사랑의 관계성이다.

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매를 대는 그 자체가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가 그 어떤 고통을 부여해도

그것 자체가 감사요 선물이요 사랑이다는 증거이다.


으앙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그 매맞은 자국을 싹싹 비비면서 욥은 감사함과 아픔에 육체에 남겨진 흔적에 감격을 느낀다.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피 흘리심은 맏아들 되심으로써 대신 매 맞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동생들의 허물을 덮는 성결제사 곧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욥은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어른 되심) 미리 앞당겨서 맛배기로 보여주는 샘플이요 그림자다.


아무도 어른 답지 즉 주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같은 그 연민을 빼앗기는 것이 바로 은사라는 선물 때문이다.


결국 선물이란 이 기존의 선물을 날려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선물은 없다.

선물이 선물을 치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선물은 선물이 아니므이다.


잉여(십자가)가 잉여(연민)을 치는 것이다.

하나님(여호와)이 하나님(엘로힘) 자신을 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치는 것이다.


낯설은 선물(자기부인:십자가의 예수)이 익숙한 선물(자기연민:우상)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된 인간(우상:부정)을 부정하는 부정(예수님: 인간이 된 하나님)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 믿음없는 믿음이요. 신앙을 포기하는 신앙이요.

회개를 거부하는 회개이다.


얼마나 회개를 하라고 욥의 세친구들이 들들 뽁아대는가?

정작 회개가 넘어오고 있는 것을 욥은 받고 있다.


곧 선물로써의 회개다. 자기부인이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보면


이방인에게 곧 고넬료를 이방인의 대표성(보편적 단독자)으로 세워서

주님은 보란 듯이 성령을 그것도 구약의 요엘서에 기록된 그 말씀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베드로도 놀라 자빠지고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들도 나자빠지는데

그 이유는 이방인은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큰 보자기 환상을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가 부어짐으로써 다들 그 놀라움과 감격을 격는데 있어서

돌아와 보니 유대인들의 반발이 심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초지정을 이래 저래 설명을 하니

더 이상의 반박이 입이 있어도 못하게 된 것이다.


즉 반박이 있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주님의 일하심이 제대로 였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기존의 개념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작 제사장 나라, 맏아들 로써의 유대인이 해야할 일을

도리어 역으로 이방인들을 대신해서 짊어져야할 성결제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거부하면서 도리어 무할례라는 율법을 어겼다고 꼬뚜리 잡고 있는 모습이기에


얼마나 주인 답지 못하냐 라는 것이다. 율법은 사랑인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데??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래서 대신해서 자신들이 못하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맏아들 곧 주가 되심으로써 이렇게 완성하셨다면 감사함이 넘쳐야 하는데 도리어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우리는 완악한 것이다. 법을 쥐면, 행함을 쥐고 있으면 완악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초지정을 이야기 함으로써 그 오해를 푸니

도리어 부끄러워 질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베드로도 그럴 판국이니 매일 매일 우리는 그런 지적을 받을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이것이 선물의 취지이다. 우리의 무지(잘못 알고 있는)를 날마다 빼앗겨야 한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의 주 되심 때문에 우리가 격게 될 모든 사건은 이런 욥이 당한것처럼

성령의 소욕에 지적 받는 우리의 육의 소욕들이다.

(주께서 내 주께 곧 주의 주 되심이라는 주의 이중분절)


(성화론자들은 반대로 이 숙제를 자꾸 맏아들에게 맡기지 말고

너가 직접, 우리가 직접 해야한다고 인간의 숙제라고 주장한다.


주의 자리를 앉을려는 심뽀다.

아직 덜 배고파 봐서 그런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숙제를 안 빼앗긴다.

그 숙제를 하고파서 난리다.


숙제를 당해야 할 판국에 놓인 피조물 주제에

자꾸 숙제를 할려고 율법을 대상화 한다는 취지가

죄 아래 갇혀 있음을 거부하는 까닭이다.


십일조가 맏물로써 10개의 대표성 곧 첫 순이듯이

바로 십일조가 예수님이고 안식이 예수님이여야 하듯(출처, 처음자리)

우리는 나머지 찌끄래기일 뿐이다. 그저 맏물 첫순 맏아들 속에, 안에 머물러

우리의 허물을 대신 감당하시는 그 거룩만을 은혜로 감싸 휘감김 당할 뿐이다.)


결국 종말의 사건이란 선물을 중심으로 인해서 재배치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물이라는 은사다.


은사라는 선물은 이 은사를 중심으로 인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그 소유물들을 하나 하나씩 빼앗기는 것이다.

예수도 내 손으로 쥐고 있다가

은사라는 선물(성령)을 받게 되니 그 예수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오늘의 예수로 인해 새로운 사귐에 놓여지는 것이다.


베드로는 앞에서 두 기적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나름대로 잡게된 그 경험을

그 다음날 새로운 선물 앞에서 기존의 것을 왕창 빼앗기는 사태를 격게 됨으로써

새로운 일하심 앞에서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아님은

도리어 새로움 앞에서 질질질 끌려다닐 뿐임을 이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유대인만의 선민 의식은 빼앗긴다.


왜?


선물을 감히 내가 누구관대 능히 막겠는가 라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들은 유대인처럼 가인과 같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그 종말의 사건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완악함을 유대인과 같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즉 그런 특권의식이 졸지에 자기연민만으로만 남아있지

도리어 그 특권의식이 자기부인이 되지 않는다.


정작 그 특권은 선물이다. 나를 빼앗고자 쳐들어온 것이다.


그 선물을 감히 막을수 있을까?


선물은 도둑이다. 선물이 선물의 값어치를 톡톡히 하고자

그 창고에 가득한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버린다.

그리고 그 창고에 가득한 물건 모조리 없애버린후에 딸랑 케익상자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둔다.


이 선물이 기존의 창고안에 가득찬 물건을 모두다 쳐버린 것이다.

그 선물의 박스를 열어보니 몽둥이 곧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기존의 모든 지나간 과거들 심지어 몇초 전의 것 조차도

다 지나가게 만들어 버리고

오로지 미래완료 속에서만 살도록 하신다.

그 미래완료가 종말 속에서만 이다.


곧 피다.


이 피가 특권처럼 움켜쥐고 있는 유대인 선민사상 조차도 다 날려버린다.

아니 감히 더 나은 것이 있는데

기존의 것을 붙잡고 있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는 것은

이방인은 몰라도 유대인은 아는 것이다.

뭘? 하나님이 그랬다는 것을 !!


그렇기에 이방인에게 화나는게 아니라

유대인은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 가짜이다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기존의 모든 것을 즉 우상을 매일 매일 깨뜨리는 재미를 누리신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우상이라는 연민은 그대로요

아무리 악하게 산다고 해서 그 연민이 더해지는게 아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섬기시는, 그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고자 펼치시는,

자신의 전능함(나를 원수 삼아 전쟁을 벌리시는)을 드러내시는 것 뿐이다.


이 무능함(은사)에, 이 어리석음(은사)에, 이 싫어버린바 됨(은사)에

우리의 악마성은 걸려들며 지적받으며 심판받는 것이다.


(요 16:8, 개역)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얼마나 제대로 섬기시는 지혜롭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인가?


(행 11:2, 개역)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 11:3, 개역)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 이방인 논쟁이 아닌?

할례 논쟁은 이 부분을 넘어서 신약 성경 전체를 차지하고도 남아돌아

지금까지도 쌍벽을 이룬다. 지금 현대에도 말이다.


할례(율법)을 지킬수 있는 특권의식을 

곧 우리를 


어떻게 깨뜨리시는가를 우리는 지금 현대 속에서도 누릴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은사라는 선물을 감히 어떤 누가 막을수 있는지

(곧 맏아들 되심으로써 대신 매 맞으시는 장대 위에 달린 인자를 보도록 말이다.)


우리는 즐겁게 구경하는 목격자로 놓여진 것이다.


나를 깨는 재미를 주님의 시선에 놓여져서 누리는 재미 (맏아들 되심 = 주의 주 되심)


바로 오늘 본문처럼 밑도 끝도 없는 충돌을 통해서 말이다.


그 정도로 주님은 제대로 한치 빈틈없이 일을 제대로 하신다.

우리가 손가락 까딱 한 것도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그저 욥의 세친구처럼 욥을 괴롭히는 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을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해 성결제사를 드리도록 하신다.

욥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보여주고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맛배기 샘플로써 보여준다.

우리는 그 선물을 막을 길이 없다.


나를 제대로 빼앗아 버리는 십자가라는 선물을 막을길이 없다.

나 같은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달려 피흘려 죄를 씻으심은
원수를 사랑하는 그 용서는 예수님의 주 되심이다.

원수를 사랑하지 말자. 예수님이 나를 원수 삼으심에 감사하자.
다윗 너가 왕이 아니요 내가 왕이기에 
다윗 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수인 다윗 너를 사랑하기에
선물 (여디디야)를 아무것도 한것이 없는 너에게 주겠다.

이것이 원수 사랑. 미즈 사랑!! ~~~. 원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무조건 이유없이 옳기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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