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과 나그네(이방인) (행 11:17-30)


(행 11:17, 개역)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18,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9, 개역)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 11:20, 개역)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개역)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 11:22, 개역)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 11:23, 개역)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1:24, 개역)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1:25, 개역)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개역)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1:27, 개역)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행 11:28, 개역)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 11:29, 개역)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행 11:30, 개역)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이방인에게 세례 곧 성령세례가 부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곧 유대인에게는 할례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할례는 곧 율법논쟁이다. 할례언약은 영원한 언약이 아닌가?

이 문제로 인해 유대인 중의 유대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청년사울이
그것도 예수님을 죽이는 그 법적체제에 가장 열심이였던 자가
유대인의 사도도 아닌, 이방인의 사도로써
주님께 직접 픽업 당한다.

그의 불러낸바 됨은 그 어떤 접촉점이 없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

자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과연 이방인의 눈에 비추이는 유대인은 과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일까? 하는 점이다.

놀라운 점은 성령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선물 받은 자들의 시선에서는
유대인이야 말로 진짜로 이방인이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사물의 시선으로써 작용키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서에 까지 베드로는 사도바울에게 책망을 받으면서 까지
주의 이름에 대한 의미가 계속 증거되는 증폭으로써 사건이 부각이 된다.

(갈 2:6, 개역)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갈 2:7, 개역)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갈 2:8, 개역)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갈 2:9, 개역)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갈 2:10, 개역)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갈 2:11, 개역)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갈 2:12, 개역)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갈 2:13, 개역)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 2:14, 개역)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갈 2:15, 개역)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갈 2:16, 개역)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7,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 2:18, 개역)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갈 2:19, 개역)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외적 할례를 지키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내적할례자는 여전히 더러운자이다.
그러나 내적 할례자의 입장에서는 외적 할례자야 말로 이방인이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적할례자는 외적 할례자로부터 더럽다, 부정하다, 비거룩하다 라고 정죄받게 되지만
정작 성령의 시대 곧 종말의 심판 시대에는 이 내적할례자들이 외적할례자의 부정을 대신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욥은 내적할례자로써 이유없는 까닭없는 고난 속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종말때에, 심판 때에 불속에서 살아난 자가 진짜 할례라는 그 효과를 톡톡히 보는 자이다.

아니 불 속에서 누가 살아날 수 가 있단 말인가. 모조리 다 타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외적할례자(손할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부활신앙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내적할례자(마음판의 할례자)는 부활이 아니라, 모조리 다 타버림으로써 할례라는 약속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거룩과 그 거룩을 지킨 나는 불멸하다는 모든 종교의 신과 결부된 신앙이다.
이것이 외적할례자가 무할례자는 정죄하는 선민사상인 저마다의 신의 대리자 역할로써의 부활이다.

그러나 내적할례자는 바로 그런 신앙으로부터 탈출당하는 욥과 같이 엘로힘에서 여호와로 이동되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약속으로 인한 이행이다.

그 약속만 남기고 그 약속이라는 주의 이름만 남기고 누락시키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는 것이다.

아니 실컷 믿고 버림받을 것 같으면 말라꼬 믿나? 도리어 버림받을까 두려워 한다고 바울이 말하지 않았는가?

(고전 9:27, 개역)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15:12, 개역)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개역)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14, 개역)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8, 개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9, 개역)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개역)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1, 개역)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22, 개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율법의 가입은 모든 인간의 죽음이 명료하다는 것이다. 죄 아래에 갇혔기에 확실한 죽음이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욥의 세친구가 욥을 정죄하는 모습이다.

유대인이 무할례자 이방인을 정죄하는 모습이다.

사실은 유대인의 처음자리가 이방인의 자리(고아 과부 나그네)였는데 말이다.
모든 율법은 이 약자보호법으로 규정되는 긍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그들에게는 절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란 있을수가 없다.
유대인 본인들이 긍휼케 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그 법을 명료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요 유대인이요 그들은 그것을 언약으로써 이어왔다.

이 법을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요, 유대인이 아니요, 언약도 아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법인 율법을 하나님 자신이 어겨버린다. 위법자이다.

이 모순의 간격에 베드로가 걸려들었다.
그의 넘어짐이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보편단독자로써 유대인의 대표성으로 잠시 그 배역을 맡게 된다.

(롬 1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롬 11:12, 개역)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롬 11:13, 개역)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개역)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11:15, 개역)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6, 개역)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3, 개역)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롬 11:4, 개역)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롬 11:5, 개역)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11:7, 개역)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롬 11:8, 개역)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9, 개역)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 11:10, 개역)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이 모순의 간격에 베드로가 걸려들었다.
그의(유대인) 넘어짐이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보편단독자로써 유대인의 대표성으로 잠시 그 배역을 맡게 된다.

즉 법과 위법 중에 예수님은 위법을 택했다.
도리어 법이야 말로 가장 위법적이고
(베드로는 더더욱 거룩한 법을 수호할려고 하면 할수록 위법 속에 놓이게 되고)

법의 시선에서 가장 불륜적인 퇴폐적 위법인 사랑을 예수님은 자신의 약속을 담는 그릇으로 삼아버린다.
그 약속이라는 보물을 가장 부정한 그릇에 담아버린다. 보물이 귀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 그릇을 보물이 담겨졌다고 여겨서 유리그릇으로 삼을려고 한 것이다.
일부러 보석은 자신의 보물됨의 가치를 높일려고 가장 천한 그릇을 찾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의 신체를 더욱더 천박한 그릇으로 삼아버리기에 쳐서 복종케 한다.
자신의 구원이 너무 너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보물이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두려워 하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보물 속에 예수 안에 자신이 이미 있다는 것의 풍성함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간격을 더더욱 더 벌려버린다. 그 간격을 좁힐까봐 도리어 걱정이다.

불안은 그 간격을 너무 좁혀서이다.
그래서 그 불안 때문에 외적할례자는 부활을 자기신앙의 규범으로써, 법제화 한다. 이것이 자기기만이다.

외적할례는 그야말로 증거물이 있다. 얼마나 확정적인 신체의 표시인가? 그 표식이 권력이요 힘이 된다.
그러나 내적할례는 무슨 수로 마음을 칼로 짜른다는 말인가? 그 표식은 눈에 보이나?
눈에 보이는 권력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능의 대조된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된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은 그 기만에, 상대적인 기만으로써 그 법을 깨뜨리는 위법자로써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이름이다.

이 주의 이름을 이방인이 감히 부를줄이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

부르는 자인 이방인은 아무리 봐도 유대인의 시선에서는 주의 이름과 전혀 안어울린다. 언발란스이다.

그래서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번이고 베드로는 반복한다. 언발란스야 말로 가장 사랑의 극치이다.

(갈 2:6, 개역)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마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아무거리낌이 없는 것이 외모를 취하지 않음인데 곧 자유인데, 베드로는 자꾸 자꾸 거리끼는 일에 걸려버린다.

그것은 자꾸 이방인이라는 외모에 걸려버리니까 자신도 외모인 껍떼기인 주제에 자꾸 걸리는 것이다.

즉 주의 이름이 그렇게 벌리는 일인줄을 못보는 것이다.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부른게 아니라
주의 이름이 이방인을 이용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주께서 내 주께이다.
여기에 이방인이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자신들이 왜 주의 이름을 부르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 그런데 유대인이 시기케 하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 구조 때문에 알게 된다.

할례자가 무할례자에게 걸려넘어지는 것이다.
무할례자가 주의 이름이 새롭게 창조해낸 새생명체로써의 사물(기계)로 봐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게 되니, 정작 시기와 질투가 작동하게 된다.
정작 무할례자는 할례자에게 걸려 그 할례의 참의미인 십자가의 용서를 받았는데 말이다.

즉 할례자가 무할례자를 응시할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무할례자가 할례자를 응시 하는, 응시 당할 입장인데 도리어 응시를 해 버린 꼴이다.

[죄인이니까] 무슨 짖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죄 아래 갇혀있는 입장을 대표해서 보여질 수밖에 없는데 도리어 그를 얼룩 취급해서 제거해 버릴려고 나서게 되니까

정작 법을 어기는 그 비정상인 할머니로부터 지적받아야 할 판국인데 말이다.
법을 지키는 자가 정작 외설적인 자인 더러운 자이고, 위법을 감행하는 자가 정작 사랑이 담겨지는 자이다.

정작 현미경을 쳐다보는 관찰자(전지적 가카 시점)가 아니라
도리어 현미경에 올려진 개구리가 그 관찰자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법을 쥘 것인가? 위법을 쥘 것인가?

지금 베드로는 이방인을 외모로 취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을

도리어 이방인이 너를 건지는 입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주의 이름은 계속해서 베드로는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닭을 매일 매일 붙여서 울도록 하시는 것이다.
닭의 울음을 즐기게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를 이방인 만들기 이다.
베드로를 나그네 만들기 이다.

왜? 주의 이름이 중요해서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그네가 되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를 밑도 끝도 없는 모호한, 답도 없는, 의문의 할례 논쟁,
곧 이방인에게 성령세례를 부으시는 언약모순의 논쟁에서 그를 건져내시는 뒤로 빼돌려내는 주의 이름이다.

이방인이 그렇게 빼돌림 당한 것이다.

법을 괜히 많이 알아서 그 모순에 바른 소리한답시고 나서게 되지만

정작 법을 모르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더 옳은 사랑이 어디있는가?

반드시 사랑은 위법자 라는, 불륜자라는, 악마 소리, 이단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가짜가 맞다.

주의 이름이 가장 부각이 되는 것은 나그네에게 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다.

고아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과부에게는 남편이 없다.

아버지를 단 한번도 불러본적 없는 고아에게
아버지가 있어야 아버지라고 불러 볼것인데 그런 고아에게 아버지가 생겨버렸다는 것은

아버지 라고 불러보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그 감격이야 말로
가장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찬송받으실 왕이여 라는 소리에
반드시 분히 여기고 위법이라고 불경스럽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 어린아이의 찬송으로 인해 새롭게 배치되는 것이다.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이 어린아이가 그들에게 응시점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닭울음으로 작용하는 응시점(부정한 얼룩 반점) 말이다.

남편을 불러볼수 없는 과부에게 남편을 부를 수 있도록 하듯
나그네 과부 고아는

유대인에게는 자신들의 처음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들의 응시점이 되는 걸림돌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지혜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도록 더더욱 골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도록 하신다.


베드로는 이 자유의 영 곧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일하심에 실족케 됨을 당해도 상관없는
그 누락을 역시나 다시 이방인의 자리에 이행해서 놓여짐으로써 그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감히 뭔데 그 선물을 막겠느냐? 아버지로부터 매 맞음으로써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그렇게 흩어져(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있던 자들이 이 일의 계기로 주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더더욱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데 일심으로 매진하게 된다.

더더욱 스데반의 죽음이 누구로 인한 것인가? 사도바울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그 사도바울을 돕고자 바나바나 모든 주의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는데

더욱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까지 주의 이름이 퍼지는 것이다.
그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인(고아 과부 나그네)이라는 죄인이
죄인이니까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의 응시점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아가보가 흉년이 든다는 성령으로 인한 증거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금을 보내는데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진다.

즉 그리스도인이란(유대와 이방인의 구분을 성령세례라는 선물로 다 없애버리는 무차별성이다)
그 무할례자라고 취급받는 이방인이 정작 유대인에게 흉년이 들어서 어려움을 격는데 있어서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자들로써 더더욱 사울청년(사도바울)이 앞장서서 그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충돌로써 성령으로부터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늘 지적받는 관계성에(사귐:불륜) 놓여진 그 자체가 머리 위에 숯불을 얹은 것처럼
부끄 부끄 부끄 럽게 만들고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늘 주의 이름만이 높여지도록

주의 이름이 스스로 벌리는 사건 속에 놓여졌다는 자체가 선물이요 막을길이 없다는 것이다.

내 죄를 지적받는 관계 즉 사랑이 아니면 나의 죄를 지적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이 아닌, 반드시 원수(다윗)을 먹이고 마시우게 하는 사랑(다윗의 자손)이라는 불륜, 위법이 율법의 완성이다.

내적할례(마음판의 할례)를 실행하시는 성령이야 말로

마지막 종말때에 심판 속에서 건져내시는 유대인을 시기케 하는
외모를 취하지 않는

단절된
고아에게는 아버지이요
나그네 이방인에게는 기업이요
과부에게는 사랑이다.

여기에 마귀는 기어나온다.

고아에게는 돌을 떡덩어리로 만들어 주라고
과부에게는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 기적이라는 구원의 확정을 주라고
나그네에게는 온천하 만국을 얻어 모든 권력으로 착취하는 만왕의 왕이 되라고


예수님은 그런 인간이 기다리는 메시아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런 메시야를, 하나님을 깨뜨리는
저들에게는 가짜 하나님으로만 오신
십자가에 달려 저주 받는 주로

주의 이름을 높이셨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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