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싸움 : 출처싸움 (눅 3:21-38)



(눅 3:21, 개역)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2, 개역)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3, 개역)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눅 3:24, 개역)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눅 3:25, 개역)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눅 3:26, 개역)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눅 3:27, 개역)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눅 3:28, 개역)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눅 3:29, 개역)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눅 3:30, 개역)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눅 3:31, 개역)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눅 3:32, 개역)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눅 3:33, 개역)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눅 3:34, 개역)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눅 3:35, 개역)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눅 3:36, 개역)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눅 3:37, 개역)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눅 3:38, 개역)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도끼가 나무에 놓였으니 열매 맺지. 그냥 열매가 아닌 좋은 앨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태우겠다고 세례요한이 엄포를 놓습니다.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여기에 백성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느냐 라고 물으니까

심판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라고 합니다.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곧 심판을 배경 카페트로 깔아서 그 열매가 오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심판이 바로 백성은 옷 두벌 있는 자는 한 벌을 없는자에게 나누는 겁니다.

세리가 그럼 저는 뭘할까요? 정한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겁니다.

군인들은 그럼 저는 뭘할까요? 삥 뜯지 말고, 모함에 빠뜨리지 말고,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눅 3:14, 쉬운) 『군인들도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돈을 뺏지 마라. 거짓으로 고발하지 마라. 그리고 임금으로 받는 돈을 만족하게 여겨라.”』


이것을 성화론자들은 윤리적인 삶의 실천이라고 합니다만

그 반대입니다. 심판성의 평준화입니다.


즉 심판의 구체화인데

성령이 임하니 삐죽 삐죽 튀어나온 높은 산 꼭지 낮은산 꼭지

움푹 파인 골짜기 웅덩이 이 모든 것들이 불도져에 밀려 평평하게 되는 겁니다.

이 종말의 구체화를 통해서 그 첩경이 평탄케 된 길에 누가 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옷 두벌을 하나로 나눈다는 것은 윤리실천 성화가 되는게 아닙니다.

아니 성화하고프면 하세요 그 성화가 심판의 구체화 라면 성화한게 자랑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을 자신의 신체에 구체화 함으로써 화로다 화로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미 새 이스라엘의 완성, 모든 말씀의 성취를 봤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의 심판성을 기쁘게 여김으로써 그 심판성을 구체화 하는 것이

아주 아주 신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평준화가 목적이지

옷 두 벌을 옷 없는 자가 아닌 옷이 있는자에게 나누어 줘 본들 평준화가 아닌 겁니다.

놀랍게도 옷 없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심판의 평준화한 인간의 손에서는 벌어지지 않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리가 정한 세금 외에 거두지 않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삥 뜯지 않는 일이 잘하는 짖인 성화론실천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심판을 평준화 하는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군인들에게 삥 뜯기는 자는 평상시 삥뜯기다가 이 군인이 성령이 임하니까 삥을 안 뜯기니까 더 불안한 겁니다. 아니 당신이 삥 안뜯이니 더 불안하군요, 당신 군발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안하던 짖을 하면 갈때가 된 것 같은데? 괜히 나에게 더 큰 불안이 닥칠까봐 겁이나니 차라리 삥 뜯어가세요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라고 나오는게 일반 사례인 겁니다. 그런데 아니 왠일로 삥을 안 뜯으니 이것은 더 큰 심판이 닥칠 것 같다 라는 말이죠.


군인 또한 나도 왜 이러는지 몰라 ~~~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 몰라 ~~~~

이러는 내가 정말 미워 ~~~~~~~~ 미워,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 싫어 ~~~~


심판성이 덮치니까 안하던 짖을 하는 겁니다. 왜죠? 뭣 때문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첩경(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평탄케 하기 위함입니다.


마치 무덤가의 귀신들린 두 청년이 졸지에 귀신이 쫏겨나고 무덤가는 졸지에 통행로의 지름길이 된 평탄케 된 길이 되었지만

정작 돼지떼 속에 귀신이 들어감으로써 그 축산업 마을은 졸지에 귀신들린마을처럼 아무도 통하지도 않는 단절의 길이 된 예수님을 쫏아낸 귀신마을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세리가 정한세금 외에 안 받는 것 또한 동일합니다.

매국노가 일본앞잡이 노릇을 해야 자기 목구멍에 포도칠을 할수 있습니다.

즉 목구멍이 포도청, 포도청은 법적기관이지요. 안죽고 살기 위해서는 시키는대로 하는 겁니다.

아 그런데 세리가 일본 아니 로마 앞잡이 노릇으로 포도청 시키는대로 해야 살아남는 판국에 

그 보다 더 센 더 큰 더 큰 권력인 심판의 나라가 임하니 세리는 로마 시키는대로 하다가

로마(그 당시 최고의 권력) 보다 더 큰 권력이 임하니 넙쭉 아부하면서 그 권력의 심판 앞에 심판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겁니다. 심판의 나라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듯 심판에 합당한 열매를 내는 겁니다. 지금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윤리차원과 정반대죠?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놀랍게도 저렇게 시키는대로 한다고 또 심판의 평준화를 실천한다고 열매가 나오는게 아닙니다.

그럼 하지 말아라 라는 거냐?

하라는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지난 시간 제목이 타작마당이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했습니다.


하든 안하든 심판은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결국 열매는 주님이 준 적이 없다면 안나오는 문제입니다.


왜 하라 하지말라 라는 선악으로 밖에 안보이는 것일까요?

여전히 타작마당이 시시하게 보이니까 그것만 신경쓰는 겁니다.

타작마당이 얼마나 무서운지, 무서운게 보인다면 구원될까 하는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습니다. 불에 타 죽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불에 타 죽는 그 심판성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마땅함이 타작마당을 마련하신 주님께 감사한 자세다 라는 겁니다.

어딜 빠져 나갈려고 하느냐? 타작마당이 안보이느냐? 타작 마당 말고 누가 널 꼬시지?


우리는 그래서 기쁨이 될수 없습니다. 열매가 안됩니다.

열매란 기쁨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는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심판에서 유일한 기쁨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 라고 사랑이라는 유일한 화목을 말하고 있습니다.다른 열매가 사랑이 될수 없고 화목이 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처 개념이 그 뒤에 예수님의 출처로써 오늘 본문에 언급이 되는 겁니다.


어제 어머니께서 아주 아주 중요한 질문을 성경을 읽다가 이야기했습니다.

느헤미야에 보면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바치라 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어머니


무슨 말만 하면 “아닙니다 어머니” ㅋㅋㅋㅋ   


그전에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잖아요

고레스가 성전을 짖는 부분을 읽으시고

캬 ~~~ 고레스가 성전을 다 짖네?


그럼요 그럼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고레스가 성전을 짖는 겁니다.

성전을 짖는다는 것은요 어머니? 성전을 뿌수겠다는 걸까요? 아니면 그 성전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걸까요?


하도 이런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어머니는 내 눈치를 보고 대충 겐또를 때리시는 겁니다.


뿌쑤겠따?


딩동뎅 !!!


포로 잡혀 가서 성전을 지을 돈이나 그 어떤 것도 없이

거지 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알지도 못하는 고레스 이방왕을 메시아로 삼아서 성전을 짖도록 모든 재료와 모든 것을 준비를 하니

이스라엘은 그저 넙쭉 받아 먹기만 하는 겁니다.

어쩔수 없는 거죠. 그 성전을 유지할 수 있는 유지비 또한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럼 고레스 시대가 끝나면 결국 그 성전도 끝나는 겁니다.


자 그래서 포로시대 마치고 돌아와서 느헤미야 스룹바벨 가 성전을 짖는데

재료가 없이 지으니(지으라고 지시 받아서) 이거 완전히 깡통성전인 겁니다.

솔로몬의 황금성전을 본 나이든 사람들은 그 깡통성전을 보고 우는 겁니다.


자 그럼 그 깡통 성전도(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비천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 계속 유지가 될까요? 안 됩니다. 흐지부지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유대인 대표성) 이 그림자들을 다 복원해서 죽었던 문화를 다시 살려냅니다만 아무리 되살려 본들 자기멋대로 짜깁기일 뿐인 겁니다.

단절의 역사가 이미 봉합을 못하도록 거리두기를 확실히 해 두었거든요.


그럼에도 그 간격을 기여이 메워 넣어서

그 결핍을 채워 꼴에 거룩을 지킨다고 하니 기가막힌 겁니다.

봉합을 자기멋대로 해 놓고서는 봉합 곧 일치성을 동질성을 이루고 있다고 우기니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 모조히 확 잡아 찢어 버리는 겁니다.


자 이렇듯 성전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성전을 이렇게 설명했잖아요 어머니


그럼 성전은 이제 인물로 바뀝니다 누구 입니까? 성전은 누구다?

예수님 


딩동뎅 그렇다면 성전을 헐라 라고 해 주시는 분이 얼마나 고마울까요?

성전만이 그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성전 뿌수라고? 예수님 !!! 딩동뎅.


성전이 뿌셔져야 참성전이 보이는 겁니다. 마치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산다는 책 제목같은데 ㅋㅋㅋ    

  

자 그럼 십일조를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레위인에게 내라고 하잖아요

그래 그렇지 성경에 적혀 있네


그런데 왜 레위인인고 하니 십일조가 10개 중의 하나 라는 뜻이 아니라

즉 숫자가 아니라

출처 곧 허리를 말하기 위한 겁니다.


멜기세덱의 반차 곧 허리에서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제가 캤잖아요 어머니 이스라엘이 야곱의 허리 곧 환도뼈 생식기를 뿌수니까

그 갈라진 틈에서 부정한 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새창조물이라고

부정한것인데도 불구하고 거룩함이 덮쳐지니까 새창조물 이스라엘이라는 묵시존재가 튀어나왔다고


그 허리를 쪼개야 그 틈 갈라진 틈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참된 실채라는 겁니다.

에이 우리는 그거 부정한 겁니다. 쪼개지 않았을 때 갈라지지 않았을때가 거룩하다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대로 보이는 것만 거룩으로 취급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툭하고 튀어나왔을때에 부정하게 취급하는데 그것을 거룩이라고 하나님 자신이 그 속에 뛰어들어서 깨끗께 하심으로써 자신의 거룩성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허리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고 아브라함 허리에서 레위인이 나오잖아요


(히 7:1, 개역)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개역)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개역)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4, 개역)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히 7:5, 개역)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 7:6, 개역)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 7:7, 개역)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8, 개역)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히 7:9, 개역)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히 7:10, 개역)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 7:11, 개역)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히 7:12, 개역)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히 7:13, 개역)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히 7:14, 개역)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히 7:15, 개역)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히 7:16, 개역)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히 7:17, 개역)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히 7:18, 개역)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9, 개역)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십일조는 출처가 누구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거룩한 출처.

결국 멜기세덱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십일조는 누구다 라는 겁니다.


안식일에 일부러 안식일 지키는 율법을 어깁니다 누가? 예수님이

성전을 뿌쑤라고 헐라 라고 합니다 누가? 예수님이


안식일이 누구이기에 ? 안식은 예수님입니다. 날도 달도 해도 다 예수님입니다.

믿음도 누구? 예수님

성전도 누구? 예수님


묵시는 역사의 시선을 뒤짚어 버립니다.


문법 파괴 정도가 아닙니다. 

우주의 모든 법칙을 다 파괴합니다. 왜? 어차피 인간이 규정한 우주는 다 엉터리이기에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이 파괴합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의 죄인으로 오시지 않은 하나님은 이제는 다 가짜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신 곧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자 이래 되면 믿음이 되지 않는 예수는 가짜 예수요

인간의 모든 믿음을 엎어버리지 못하는 예수 곧 믿음은 예수님이다가 되지 못하는 예수는 거짓입니다.

날과 달과 해가 되지 못하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안식이 되지 못하는 예수도 가짜요

성전이 되지 못하는 예수도 가짜입니다. 인간이 세우는 성전을 허용하는 예수는 물론 가짜입니다.

인간이 율법 지켰다고 부자청년처럼 나오는, 교회 충성 봉사 선한일 성화된 것 이 모든 것을 삭제 시킬줄 모르는 예수는 가짜이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지옥갈까봐 겁나서 천국 보내줄려고 애달아 하는 예수는 가짜 인 겁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못 맺으면 도끼에 찍혀 불에 태움을 당한다고 했을때에

아무도 못 맺는다는 불가능성을 인지하라는 겁니다.


열매 맺는 가능성을 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는 말은

육체는 다 불구덩이에 들어감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때에 단지 히브리 잡족이 먼저 대표성으로 경험한 겁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이 말은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너 제대로 심판 속으로 들어왔구나 라는 뜻입니다.

심판 속에서만 구원이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선이 일체 용납이 되지 않도록 요셉이 구덩이 속에 파묻힌 것처럼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절망, 희망없음 속에서 봐야 구원만이 제대로 목격이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또 오해하기를 세례요한이 지금 구원받을길?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움을 당하는 일에 피할길을 지금 제시해 주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작 정작 정말 정말 그 심판이 옳았고 나는 빠져나올길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그 불가능성 즉 단절성을 직시하는 자 만이

예수님만 보일 것 아닙니까?


어떻게 그 속에서 성화론자의 발상처럼 구원받을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여기냐 말입니다.


아예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매 맺을 길이 없고

열매는 오로지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이 열매로써 왔다는

그 완료성만으로 기뻐하면 그것으로 족한 겁니다.


왜 열매는 예수님 뿐인가?

내가 열매랍시고 만들어내는 열매는 족히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빨랑 빨랑 접어버리고

주님의 열매 되심으로 족하는 그 판대기를 누려보자 라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내 열매는 절대로 하늘에서 기쁘다고 절대로 절대로 그런 소리가 안 나는 겁니다.


오로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하늘의 음성으로

그 열매가 예수님이심으로 그 기쁨에 함께함으로써

그 완료를 누리면 될 뿐입니다.

비록 심판 속에서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출처 곧 열매를 보는 겁니다.


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인지? 왜 기뻐하는 자 인지

그 출처를 보니 아 열매 맞구나 라고 무릎을 팍 치는 겁니다.


마치 십일조가 ,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내라 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 레위인을 목사라고 우기는데 레위인이라는 의미도 이미 예수님 당시에 다 사라진 겁니다. 그림자이니까 실체가 왔으면 안개는 누락 될 뿐인데 자꾸 끝까지 엑스트라다가 주인공 자리를 꽤 차면 안되는 겁니다. 그카이 사도를 계승한다고 우기는데

사도는 성경이 다 기록 되기 위해서만 있었던 잠시 우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겁니다.

사라지는 직분을 자꾸 붙잡으니까 말도 안되는 교부를 우기고

디모데를 교부라고 자기 멋대로 취급하고 그 교부시대를 잇는 자들이 오늘날 사제 또는 목사라고 우기는데 그냥 돈 벌려고 하는 짖일 뿐입니다.


십일조는 거룩의 출처가 누구냐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상은 그 이상은 이라고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눅 3:23, 개역)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예수님으로 역으로 추적해서 그 허리 곧 출처를 추적해 들어가 보니


(눅 3:38, 개역)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그 끝 거룩의 최종목적지는 바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라는 하늘의 음성이

나를 심판하는 심판의 소리로 들려야 함으로써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겁니다.


나는 미움일 뿐이고 나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참된 열매 예수님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등장이 고마운 겁니다.


아 그래서 종말의 평준화 심판의 구체화를 실행하시는 분의 취지가 곧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화목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심판을 기쁘게 받음으로써 왜 이 거룩 때문에 심지어 이렇게 외치고 있는 세례요한 마저도 에누리 없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이 심판의 명료하고 또렷한 구체성 확립성 때문인 겁니다.


이런 종말의 구체성이 없다면

우리는 이 예수님을 죽인 이 악마의 세사에 빠져나갈 생각을 할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숙제로써 주님이라는 열매가 준비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출처까지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괜히 사람들의 설교에 우왕좌왕 돈이나 삥 뜯기면서 종말을 준비한답시고 사기당하지 말고


이 심판 속에 제대로 들어가 보자 라는 겁니다.

심판은 결국 주님이 하시지 않습니까?


그 주님이 뭘 또 준비하셨는지 말입니다.

심판을 준비했다는 말은 곧 열매이신 예수님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마음껏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 출처 족보 원산지 까지 다 알려주십니다.


이 얼마나 제대로 된 도끼 방망이 입니까


이 타작마당을 감사하지 않고는 못배기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신

치밀하고 꼼꼼한 모습을 우리는 세례요한까지 누락시키면서까지 보여주시는 그 성실하심에

저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 악마의 세상을 빨리 심판하여 주시옵고

나의 육된 모습을 빨리 빨리 후패케 하옵소서

이 아무것도 아닌 먼지와 같은 자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심판의 구체화를 보여주는

첩겹을 평탄케 하시는 주님의 소모품으로 사용하시고 버려주옵소서

오로지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십자가 외에는

다 거짓으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지 못하도록

십자가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거걸치지 않도록

중간의 잡것들은 다 치워주옵소서

심지어 생명 같지도 않은 내 목숨 조차도

다 치워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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