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다고 의심하는 베드로 (행 9:32 - 10:48)

불의함(더러움)의 충성(섬김)이 베드로에게 덮치다. 징후와의 동일화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행 9:32, 개역)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행 9:33, 개역)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행 9:34,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행 9:35, 개역)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행 9:36, 개역)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7, 개역)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행 9:38, 개역)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행 9:39, 개역)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행 9:40, 개역)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행 9:41, 개역)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행 9:42, 개역)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행 9:43, 개역)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행 10:1, 개역)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행 10:2, 개역)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3, 개역)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행 10:4, 개역)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5, 개역)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행 10:6, 개역)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행 10:7, 개역)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행 10:8, 개역)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행 10:9, 개역)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행 10:10, 개역)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행 10:11, 개역)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0:12, 개역)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행 10:13, 개역)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행 10:14,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행 10:15, 개역)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0:16, 개역)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48절까지


주의 주 되심이 사울이라는 청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사울에게 벌어진 사건에 의해 당하는, 거룩 사건 곧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펼쳐졌습니다.

이제는 사도 베드로에게 벌어지는 사건의 덮침으로써
베드로의 주변 상황이 어떻게 주의 주 되심을 드러내시는지
주님의 숙제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32절부터 룻다에 사는 애니아 라는 8년된 중풍병자를 베드로를 통해서 고치십니다.
그리고 욥바에 사는 도르가(다비다) 라는 여제자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시체를 다락에 씻어서 누워 놓았는데 이들 제자들이 위의 사건 애니아를 중풍병에서 고쳐 일어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에게 가서 룻다에서 욥바로 올 것을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지체없이 욥바로 가서 시체가 있는 다락에 올라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주께 기도하여 일어나라 하니 그녀가 일어나 앉아있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의 결론을 우리는 쉽게 쉽게
아 기적을 행하니 당연히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뒤의 이야기를 또 양상이 확 달라지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식으로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는 겁니다.

결론을 미리 앞당겨서 말해 보면
이 뒤의 반전의 이야기를 통해서 앞에서 벌어진 두 사건을 다시 새롭게 보는 겁니다.

즉 사귐이라는 화목은 곧 죄사함은 외모를 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외모란 눈에 보이는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외모 라는 법에 위법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사귐이라는 없다 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용서라는 사랑은 법에 의하면 외설적으로 음란하고 불륜으로 취급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범법을 저질러 라서도 용서하겠다. 사귀겠다.
사귐이라는 화목을 펼치겠다 라는 것이 주님의 취지로써 성령이 남녀노소에게 부어진다는 겁니다.
징후와의 동일화 즉 예수님께서 원수인 죄인에게 뛰어들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반대로 외모(법적)에 따라 화목할려는 인간의 육의 소욕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앞의 글 이웃사랑하지 말자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미 美 라는 아름다움의 권력에서 못 벗어나지만, 성령은 그 반대입니다. )
 
자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본문을 더 길게하고픈데 너무 길게 느껴져
딱 중요한 부분을 적어보면

10장 34절

(행 10:34, 개역)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어떤 반전인고 하니 9장 43까지는 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10장 부터는 이달리야대(이탈리아)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라는 이방인이 환상을 보는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청하라 라는 지시입니다. 1-8절

10장 9절 부터는 이제는 또 베드로가 배고파서 식사를 할려고 준비하는데 환상이 덮칩니다.
환상의 내용은 보자기 같은 큰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내용물이 땅에 네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새 같은 것인데
또 음성이 들리니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라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베드로는 아니되옵니다 라고 저항합니다. 그 이유는 속되고 더러운 음식이다는 겁니다.
깨끗한 것은 언제든지 먹겠지만 속된 것은 안된다는 겁니다.

무우라 ! 
안 묵을랍니다.

괘안타 무우라!
안묵을랍니다. 속이 매쓰껍습니다.

괘안타 내가 깨끗케 했따 아이가! 무우라!
안묵을랍니다. 더러운데 왜 자꾸 깨끗타 카십니꺼? 


그렇게 말하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했으니 너가 속되다 더럽다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음성이 또 들립니다.
이런 식으로 이런 일이 세 번씩이나 있은 후에 그 그릇이 하늘로 도로 올라갑니다. 9-16절

그래서 베드로가 무슨 뜻인가 하여 의심하고 있는데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와서는
백부장 고넬료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드로 너를 청하라 하여 너에게 왔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욥바 사람 두세명을 데리고 가이사라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에게 갑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모든 친지를 데리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자 고넬료가 엎드려 절하니 나는 사람이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고 유대인으로써 이방인을 만나는 것이 위법인줄 나도 알고 너희도 알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라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말라 라고 하셨기에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달려왔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무슨 일로 불렀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신에게 덮쳐진 환상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불렀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안보이는 분의 개입으로 인해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가 되었으니
왜 불렀는지 고넬료 입장에서 말이죠. 난 몰라서 이런 환상이 덮쳐서 불러라 해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왜 위법을 행해서라도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와야만 했는지

두 사람은 하나의 장기알로써 왜 이런 배치로써 여기 저기 장기판에 놓여지는지 모릅니다.

당연하죠 장기알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간단합니다. 보이지 않는 분의 개입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이제 베드로는 이 안보이시는 분의 개입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왜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성사시켰는지 그 둘 조차 모르는데

성령은 베드로를 통해서 그 이유가 설명이 되어집니다.

베드로의 첫 마디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나 베드로를 또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할 판국임을
새롭게 믿어야할 판국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왜 이런 자들에게 부어지는 지를 증거합니다. 36-43절
즉 예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자를 너무 너무 사랑하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은
이들의 죄악을 씻기고자 함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주께서 주가 되심을 증거합니다. 여기에 동원이 될 뿐인 두 사람인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놀라할 정도로 그 증거를 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서 그 증거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놀라 자빠지는 겁니다.

아니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니 얼마나 놀라우냐 라는 겁니다.

아니 베드로가 몰라서 놀라자빠지나요? 맨날 외우는 구절 아닙니까?
그런데 외운다고, 안다고, 평생을 읽어왔다고 할 차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징후와의 동일화 라고 했는데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서 베드로가 새롭게 믿어야 할 판국이 뭔고 하니
바로 십자가가 잉태해서 낳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을

베드로가 믿어야 할 판국일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는 겁니다. 즉 사실은 안 믿었다는 겁니다.
성경을 가장 잘 안다는 유대인들은 다 이런식임을 베드로라는 대표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을 쓸데 없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유대인이요 그 대표성이 베드로 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환상의 취지, 곧 성령의 일하심을 도통 알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부하고 배격하는 겁니다. 즉 하나도 몰랐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새로움 앞에서 그 이전 것을 가지고 해석할려고 달려들어 본들 소용없는 겁니다.
새로움이란 그 이전의 것을 거부합니다. 즉 단절입니다. 왜 새롭다고 할까요? 헌 것이 먹혀들지 않기 떄문이죠.

마찬가지로 주의 주 되심이란 기존의 주 개념을 모두 거부합니다. 
어제까지 알고 있는 주님을 가지고 해석울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 주의 주 되심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모조리 육을 차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단절성을 격는 겁니다. 도리어 단절이라는 심판을 받아 마땅함으로 그 심판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 심판 속에 들어가면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것도 무지 무지 봐줘서, 배려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철저한 차단성이 바로 거룩입니다.

설사 어제까지 믿었다 할 손 치더라도 오늘 새로움 앞에서 그것은 전복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놀라운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분명 어제까지 8년된 중풍병자 성령으로 고치고
죽은자도 기도해서 살아나게 한 성령으로 해서 벌어졌건만
매일 매일 성령의 새로움의 사건 속에 놓이지 않으면
아무리 그런 일이 벌어져도 오늘 성령의 새로움에 놓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겁니다.
(마치 모세가 아무리 주의 일을 해도, 아내 십보라 눈에는 오늘 새로운 긍휼이 덮쳐지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죽어야하는 심판받을자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일려고 달려드는 천사들을 보고서는 급히 급히 아들들의 양피를 베어 그 발에 던지니 비로소 물러갑니다. 당신은 어쩔수 없는 피 남편이군요 라고 말이죠. 피의 새로움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는 피가 다루고 데리고 다니는 피와 결혼한 자군요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성으로써 모세가 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대표성으로써 베드로는 그 자리에 놓여서 본인또한 그 새로움에 놓여져야만 하는 겁니다.

즉 분명히 이것은 위법인데 그 위법이 아무리 무식한 베드로이지만
유대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요 그로 인해 이방인 고넬료 조차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을 깨뜨리면서 까지 사랑이라는 사귐 즉 화목이 쳐들어와서
베드로가 그 실재상황을 목격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시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베드로 중심으로 사건이 벌어진게 아닙니다. 앞의 두 사건도 말입니다.
그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중심인데
우리는 그냥 쉽게 성령 중심이라고 종교인들처럼 입바른 소리로 하지만
정작 성령께서는 그 가시성을 고넬료 중심으로 사건의 판을 짜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과 베드로는 놀라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놀랄수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베드로는 졸지에 대상이 되는 꼴이 된 겁니다. 교넬료가 대상이 아니라 !!!
주체자가 아니라 말이죠. 주도권은 베드로에게 전혀 없습니다. 방금 기적을 행해도 말입니다.

놀란 입장(놀람당함) 에서 볼 때 오히려 고넬료가 놀라게 한 재료, 원인이 되니까 말입니다.

즉 말씀이 성취된 겁니다.

요엘서에서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증거 되는 이 말씀을 정작 누구는 정작 정작 안믿겨지는 겁니다.
맞습니다 놀래야 믿어졌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럼 놀래키는 분이 안믿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었고
그 이전에는 그냥 구약에 있으니 '뭐 믿지뭐 까짓꺼' 라고 일종의 지식으로나?
실재화 되지 않은 식으로, 과거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런데 놀랬다는 것은 실재라는 묵시의 세계가, 말씀의 세계가 실제로 쳐들어와서
역사에 흡집을 내니까 그 흠집에 상처난 자만이 그 상처의 흔적으로써 놀람을 당했다는 것이
기정 사실화 되는 겁니다.

이것이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라는 말과 같은 취지입니다. 방금 앞에서 말해 놓았지만
진짜로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지니 베드로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다시 놀래 자빠지는 겁니다.
결국 베드로의 대상이 고넬료가 아니라
고넬료를 통해서 베드로가 놀래 자빠져야 하는 겁니다.

위법이니까 말이죠, 앞의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복시켜 버리니까 말이죠.

이것을 우리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이 멀게되고 다시 비닐이 벗겨져서
이제는 유대인을 굴복 시키는 성령이 함께 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징후와의 동일화입니다.
징후란 증상이란 몸에난 상처로 인해서 그 갈라진 틈에서 난 고름과 같은 진액 등의 부정한 겁니다.
상처에서 난 나쁜세균이나 액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성을 새롭다 라고 하는 겁니다.

허리 뿌사서 그 틈사이로 부정한 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이스라엘이라고

새롭게 창조 했다고 하는 겁니다. 왜? 주님 자신이 그 틈사이(상처)에서 난 부정한 액에 뛰어드시니까 말이죠.
우리 눈에는 누가 봐도 속된 겁니다. 더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진짜 깨끗하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자신의 주 되심을 베드로나 유대인을 통해서 하는게 아니라
위법스럽지 않은 거룩한 것으로 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속되고 부정한 것을 통해서 하심으로써 자신의 주의 주 되심을 펼치시니
그로 인해 베드로는 놀래 자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새로운 주님을
매일 매일 새롭게 믿지 않고는 못배기는 판국인 겁니다.
그정도로 주님께서 새롭게 다가오니 기존의 경험화 했던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일부러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는 날에 안식일을 범하심으로써 참된 안식일의 주인을 증거하는
바로 인물, 안식이 누구냐 라는 물으시는 것처럼
그 부정한 액체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사귐입니다. 어제의 것은 놀랍게도 법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그 법을 어기는 위법으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어제 설교에서도 나왔는데요
직업이라는 의무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을 택할 것인가?

오늘 본문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 말 조차도
성령이 미리 앞당겨 덮침으로써 하게 된 말이지
베드로 자력으로 알길이 없었습니다. 고넬료라는 재료가 나타나야 짝꿍이 됨으로써
비로서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놀라 자빠지는 겁니다.

직업이라는 의무를 택하게 되면 아무도 욕하지 않습니다. 아까운 사람 안됐다
자살할려는 사람 물에서 꺼내야지 라는 아주 평범하고도 당연한 생각으로 경찰이라는 의무를 다한 겁니다.
정의로운 죽음이요 희생정신이다고 칭찬해 버리면 그 다음날 다 잊어버리는 것이 세상이치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의 입장에서는 나쁜사람 나쁜사람입니다.
이제 그 가족은 누굴 믿고 사냐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주변에서 말하지만
정작 그것은 다 의미없는 헛소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사랑하는 가족을 계속 부양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귐입니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외설적이다 라고 합니다.
정의롭다는 것이 악마적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의무를 내팽계치고 사랑하는 자에게 도망치는 것을 오히려 옳다 라고 합니다.
외설적이고 음란하고 불륜을 택하는 것이 옳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거짓말을 통해서 진리를 말한다" 라고 합니다.

법은 정작 이 사랑을 음란하다 라고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법의 내막은 너무 너무 외설적입니다.
그 음란성을 감추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하는 법을 택하는 겁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도 그들이 법을 택해 모세에게 강요해서 그러한 겁니다.

오히려 음란하다고 취급받는 그 사랑이, 그 거짓되다고 속되다고 불의하다고 더럽다고 취급당하는 그 거짓이
참된 진리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드시 저들에 의해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다 라는 별명을 얻어야 하는 겁니다.
먹보에 술꾼에 죄인의 친구.

베드로가 본 환상은 바로 법이라는 깨끗한 것에 위법으로써의 더러운 속된 것을 먹게 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성령이라는 선물을 십자가의 죽으심(저주)으로써 너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너희의 주가 되셨다 라고
이방인에게도 주로 부르심은 입은바 됨을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이 실재화 됨으로써 놀라 자빠질정도로 트라우마화가 되는 겁니다.

트라우마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성이 덮친 것은 본인들이 봐버린 바람에 놀래 자빠지게 되었으니
안 믿고는 못 배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증표가 그 증거가 바로 상처(트라우마)라는 흔적인 겁니다.

제대로 찔렀고, 그 찔림에 갈라진 틈이 제대로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줄줄줄 세는 부정함이 흘러넘치니
참 제대로 찔렀구나 라는 것이 트라우마 입니다. 징후.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개같은 이방인 여자 다말로 인해서 입이 떡 벌어져
너가 나보다 옳도다 라고 실재계가 덮쳐 다시는 입이 열 개가 있어도 반박을 못하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찔렀으면 그런 소리를 할까요 너가 나보다 옳도다.

즉 그 말은 그 이전에는 며느리를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거부하고 반박하고 무조건 이유없이 싫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뒤짚어진겁니다. 그것이 화목입니다. 전쟁은 너가 종결시켰구나입니다. 너야 말로 화목(사귐)이구나.
창녀짖이라는 부정한 짖을 해서라도 나를 법에서 빼어내서 위법한 약속 속에 들어가도록 말이다.
그래서 이런 다섯명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족보에서 머슴아(랑그:법)을 빠롤화 시켜 즉 미끄러져 자빠지게 해서
약속 속으로 집어 넣는 역할을 하도록 한 겁니다.
 
이 불의한 방식이 아니고서는 화평은 없습니다. 곧 십자가 라는 징후를 비로소 즐기는 겁니다.

정작 가장 안믿은 유대인 본인들이 이제는 성경 개뿔도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신 성령이 부어짐을 요엘서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짐을 보고
유대인들이 놀라는 겁니다. 머리가 숯불을 얹인것 처럼 화끈하고 뜨거워 얼굴이 부끄 부끄 되는 겁니다.

이방인은 덜 놀래지요. 법을 몰랐으니 위법이 되는지 몰랐죠. 법을 아는 자는 유대인 뿐입니다.
상대적인 유대인이기에 더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의 대표로써 베드로가 입이 떡 벌어지는 겁니다. 놀라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이것이 성령이 부어지는 장면입니다. 실재라는 그 불가능함이 덮쳐져서
오히려 충만케 되어 흘러 흘러 넘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의 두 사건 8년된 중풍병자가 병이 오래되어 누어 앉은뱅이처럼 된 자를 일으키는 기적

또 구제와 선행으로 많은 일을 했지만 병들어 죽게된 그 시체를 다시 일으켜 살아나게 한 사건은

바로 베드로가 한게 아니라
(아닌 증거가 때려죽어도 속되고 더러운 음식 부정한 음식 못 먹겠습니다. 깨끗한 음식 다 놔뚜고 왜 먹습니까 라는 외모를 보는 베드로)

성령께서 이방인 고넬료를 베드로와 조우케 함으로써
고넬료라는 이방인 곧 죽은자를 통해
너 또한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살려주지 않으면 너 또한 백날 유대인이라고 우겨도
너도 마찬가지 속된 이방인 더러운 이방인일 뿐인 베드로 너를
지금 이 순간 깨끗하게 씻겨 주시지 않는다면
그 위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누구도 더럽다 하지 말라)
그 법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무도 깨끗지 않다 말라)
8년 된 중풍병자를 일어나라 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죽은 시체를 살려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정작 사귐이란
남의 죄악을 내가 또는 베드로가 씻겨내 준들
내가 도리어 버림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매일 매일 새로운 사귐(즉 반대로, 상대적으로 법적이지 않은)으로써
부정한 나에게 매일 다가와서 나를 짝꿍으로 삼으시는 그 사귐
부정한 나와 함께 즐기시는 징후의 동일화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넬료 덕분에 자신의 깨끗하다고 여겼던 그 법이
도리어 음란하고 외설적인 것임을 지적받음으로써
비로소 손을 때게 되는 겁니다.

그 작업에 베드로는 매일 매일 놓여져 있는 겁니다.

바로 사귐이라는 관계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에게도 부어주시는 성령의 일하심에
베드로는 더욱더 부정한 것만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성령의 사귐에서 못벗어나는 겁니다.

점점점 속된 것만 찾아
점점점 더러운것만 찾아

그 부정함과 함께 동일화 된 그 피의 능력을 새삼스럽게 새록 새록 새롭게 누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과연 누가 더럽다고 하는지? 누가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지?

가져와 봐  내 피가 그 허물을 못 덮을 줄 아느냐? 라는 그 당당함과 뻔뻔함에
정작 베드로는 두손 두발 다 들어 항복해야 할 판국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홀로 하시는 희년선포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선포되는 억눌린자 포로된자 갇힌자를 자유케 하는 복음인 겁니다.

(행 10:44, 개역)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행 10:45, 개역)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 10:46, 개역)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7, 개역)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8, 개역)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나 아니요 그 피가 옳았습니다를 매일 매일 목격하도록
우리는 질질질 끌려 다니는 행복에 놓여진 운명입니다.

자 그럼 그 다음장은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인간이라는 육의 반응이 대립적으로 나타납니다.
왜? 주의 주 되심을 더욱더 증폭케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주의 주 되심을 스스로 높이시고 널리 널리 퍼트리시고 그 사랑의 깊이를 더하게 하시는 증폭을 누리도록 하시는  주님의 섬기심입니다. 그 섬김을 우리는 매일 당하는 겁니다.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17:9, 개역)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약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님! 또 놀랍니다. 도대체 주님은 왜 저를 이렇게도 깜짝 깜짝 놀라게 하십니까?
심장 약해 늘 경끼나는 허물 뿐인 나인데?
더럽다고 의심 뿐인 나 일 뿐인데!!

아니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 마귀인데
이런 허물 뿐인 자들인 우리를
피의 능력이 무엇인줄 보여주시고자
허물치 않겠다 하시면서 다가오시는 지요?
아무리 봐도 마귀인 나인데?
누가 봐도 마귀인데,
아무도 마귀 아니다 라고 하지 않는데,

왜 이런 허물많은 마귀인 나에게
그 귀한 피를 흘리시는 지요?

그 피로 뻔뻔하게 주의 사랑을
주의 주 되심을 누리며 감사케 하소서.
이 십자가의 저주를 기쁘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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