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는 하나님과 종말의 응시


어제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성경읽다가 하셨습니다.

식아 구약을 보면 그렇게도 산당을 없애는게 힘든가 보다

그 말을 듣자 마자 또 흥분이 되었죠.

어머니 그거 무지 무지 중요한 말입니다.
안그래도 이번주 설교에도 나왔거든요.

어무이 그 산당 누가 못 없애도록 할까요?

응???

아니 주님이 시키는대로 없애러 가서 없앴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날 또 있는거예요
또 없앴어요
어 또 그런데 그 다음날 또 있는거예요 예를들면 말입니다 예를들면....


누가 못 없애도록 하느냐 말입니다?

하나님?

딩동뎅 바로 그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주님께서 자신이 충분히 없앨수 있는 산당(우상숭배하는 제사장소)을
꼭 이스라엘에게 시키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백날 없애 봐라 사라지나? 라는 겁니다.

또 예를 들면 이겁니다.

12명이 올라가서 산당을 없앴어요
그 다음날 가니 또 세워져있는거예요
그래서 또 없앴어요
그 다음날 또 있는거예요

12명이 도통 이게 무슨 일인지 도통 알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12명 중에 한명에게
주님의 마음이 심겨집니다.

자신들이 산당을 없애는 하나님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게
그 한 사람에게 주의 마음이 심겨지니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 산당을 없애지 않고 혼자 빠지는 겁니다.

도리어 비꼽니다.
백날 없애봐라 없어지나? 라고 말이죠.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왜 물러치지 못하는 이유와
입다와 입다 딸 이름없는 딸과 그 당시 이스라엘 장로 이야기와
솔로몬 이후의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청년이야기도 했구요

이들 성경이야기의 특징은 속이시는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이래 이래 시켜놓고 정작 속이더라 라는 겁니다.

그 속임수의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자만이
아 그거구나 라고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에 손을 뗍니다.
같이 속이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참선지자 단 한명을 졸지에 딴세계를 봐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이스라엘을 전혀 고려치 않고 도리어 놀려먹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바알 아세라 선지자를 놀려먹듯이
그래 작게 불러서 듣기겠나? 크게 불러봐라
안듣기네 안듣기네 내가 잘못들었나

그런식으로 이스라엘의 전체를 대표하는 거짓선지자 궁정선지자를
놀려먹고 비꼬며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속이시는 하나님을 만난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그런 입장에서 모든 사물은 바로 속이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작용이 되는데
거짓선지자와 이스라엘 왕 백성들은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다는 식으로
사물들을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식으로 활용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바로 그런 인간의 가상한 노력을 거부하면서
배신을 때리는 겁니다.

뭐 너희들이 우리를 다루겠다고?
너희가 본다고 하니 보지 못하는 구나
눈을 괜히 달았구나 라고 사물들이 비꼬는 겁니다.

그래서 산당이 비웃는 겁니다.
뭐 너희들이 나 산당을 없애버리겠다고?
웃기고 있네


마치 설 제사 추석제사때에 교회다니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형제들간의 싸움처럼
제사 음식 안먹겠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 음식이 비웃는 겁니다. 뭐 안먹겠다고? 너가 배가 불렀구나
아직 배 안고픈가 보네? 오냐 배 한번 골아봐라.

산당이나 교회건물이나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히나
이런것들의 출처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정작 인간의 손모가지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손모가지를 다 짤라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것을 의식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직접 12 중에 딸랑 한명에게 주님의 마음을 심어 넣으니
그 사람은 산당 없애는게 아니라
인간의 손모가지를 짤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도 주님이 다가와서 심은 마음 때문에 알게 된 거지, 그 사람 또한 12명과 같이 알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손목을 짜를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진짜로 손목을 짤라버린다면 그 사람은 역시나 주님의 취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작 그 사람은 산당 없애겠다는 일을 비꼬는 겁니다.
정작 그렇게 되니
이 사람은 사물들의 응시처럼 빈공백의 터로서 남게 되니
백날 해봐라 메워지나? 라는 식으로
미운털 박힌 자처럼 이상하게 행동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참선지자의 모습입니다.

뭐 구원한다고? 야야야 아서라 구원이 아니라 거꾸로 심판이 곧있으면 온단다.

자 이러니 백성의 불안한 마음을 요동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모습입니까?

문제는 속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은 참선지자가 아무리 뽑아도 안 뽑혀진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미 완료된 새이스라엘을 봐버렸기 때문에

눈에 가시화된 이스라엘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 참선지자의 말을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선지자와 이스라엘은 그렇게 짝꿍이 되어 공명을 이루는 겁니다.

결국 산당은 이런식으로 눈에 보이는 산당을 없앨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두기 싫어하는
이미 산당 자체가 자리 잡고 있는
인간 신체가 산당인 마귀의 집이다 라는 것을
역으로 추적해서 밝혀 내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산당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손모가지 짤라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지난 번에 말했지요
구조를 자꾸 무시하니까
모진 마음을 품어서 화투치는 손가락 열 개를 짤라서 다시는 화투 못치도록
지독하게 미운 마음을 품어서 겨우 겨우 화투를 끊을까 했는데

아니 발가락이 가만히 있지 않고 결국은 화투를 배워서 발가락 열 개로 화투를 치더라 말입니다.

구조를 무시하면 괜히 손가락만 짜른다는 사실

안됩니다 안돼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 그대로를 받아주시는 주님을 보면 될 것을
괜히 화투치는 미운 나를 화투 안치는 괜찮은 나로 만들어서 소위 성화해서
주님께 가겠다는 발상 자체가
부자청년을 근심케 만들어 돌려보내버리시는 주님의 구조 판대기를 무시한 처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속이시는 하나님으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근원적으로 악마가 있다는 그 구조를 정작 속이시는 하나님만 충실하게 인지하고 있는데
인간은 자신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에 빠져서
몰라도 너무 모르게 사기 안치는 착한 나를 꿈꾸고 그런 나를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물의 응시는 무시받는 식으로 무시하는 겁니다.
즉 우리가 산당이라는 산에 지어진 집을 내눈에 보이는 식으로 취급하고 마는 그 무시성을
역으로 사물들은 너가 본다꼬 웃끼시네 넌 아직 못 보는 구나 아이고 눈 달려 뭐하노 라고
우리가 무시하는 산당이 도리어 우리는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사물들이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것일까요?

바로 속이시는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 떨면서 그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시선을 무시하는 겁니다.

부자청년은 재산이라는 사물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정작 동전이라는 사물이 부자청년을 무시해 버리니까
한방에 훅 가버리니는 겁니다.

그래서 수시로 닭의 울음처럼 닭이 우리를 늘 수시로 무시해 줘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겠다는 심뽀는
마치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절대로 속이지 않는 하나님일 거야 라는 우상숭배와 같은 겁니다.

같이 속이시는 하나님처럼 속이고 다니고 거짓말하고 다니게 되면
보이지 않는 사물들의 응시 곧 외침을 보고 듣고 말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즉 인간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서 절대로 못벗어나는 겁니다.
보이는 것대로만 해석할 뿐입니다.
마치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말입니다.

세미한 음성 즉 듣기 불가능한 음성
실로암소경처럼 못보는데 아무것도 못보는게 유일하게 보이는 예수님, 예수님만은 보이는,
그러나 본다고 하는 자들은 못보게 하시는 그 예수님

바로 속이시는 방식인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고
상대적으로 안보이는 것들만 진짜로 만들어버리는

이 구조를 주님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속임수의 이중성으로써
십자가 라는 저주의 이중성으로써
이 구조를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와같이 실로암 소경이 사물의 응시처럼 종말의 응시로 등장 또는 내세우시는 겁니다. 소모품으로..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고 어린아이의 응시를 종말의 응시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마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7번방의 선물이라는 영화를 보면 어린아이의 응시가 판을 뒤짚는 겁니다. 진짜 속임수의 권력과 권력에 대한 아부로 휘감긴 인간신체조직에 어차피 부정한 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 판대기를, 아무 힘도 없는 무능한 어린아이(속임수)의 응시가 종말(속임수)의 응시로써 판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겁니다.

뭐 천국에 간다고? 창녀와 세리가 너희 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창녀와 세리를 종말의 응시 즉 두 눈 두 눈구멍으로 빈터라는 종말의 응시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 빈터에 쭐꾸덕 다 미끄러지는 겁니다.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어머니께 왜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하셨나요? 물으니까
자신들이 옳고 저들이 틀렸다고 한 것을 주님이 바깠뿌따고
캬 그래서 무슨 하나님? 속이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을 붙잡았다고? 귀신들린자를 귀신 쫏아냈다고?
도리어 잡았다고 하는 자들이 도리어 종말의 응시에 잡혀 버린 겁니다.

마침 어제 누가 전화를 했습니다.
교회 목사가 자꾸 새벽기도 하라고 한다고
제가 망설임없이 새벽기도 할 생각 추호도 하지 말라고
저거들도 못하는 것을 왜 남에게 뒤짚어 씌우냐고
교회 충성 봉사 그런것도 아예 하지 말라고

그저 니가 하고싶은것만 하라고
누가 방해를 해도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빼앗기고픈
니가 기뻐하고 니가 즐거하면서 주위사람도 부러워 하는
그런 너가 즐거워 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여튼 종교가 사람 다 배려놓기 때문에
말 들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귀신들린 청년 둘이가 무덤가에 있는데
아무도 그 무덤가로 가지 않고 삥둘러서 피해가버리는데
예수님은 그 청년들 속에 있는 귀신을 쫏아내면서
귀신이 돼지떼 속으로 들어가기를 허락하시자

졸지에 가만히 있던 아무 짖도 하지 않은 돼지 축산업 주인이
예수님을 다시는 못 오도록 동네에서 쫏아낸 겁니다.

(마 8:28, 개역)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개역)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8:30, 개역)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 8:31, 개역)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마 8:32, 개역)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 8:33, 개역)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마 8:34, 개역)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누가 귀신입니까?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격게 되었다 해보세요.
예수님 안 쫏아내고 못배기지 않나요.

구조입니다. 안 당해서 은혜이지 당하면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귀신들린 청년들의 무덤가는 이제는 마음껏 다닐수가 있게 된 자유의 길이지만
정작 그 동안 마음껏 다녔던 그 동네는 아무도 다닐수 없는 예수님을 쫏아낸 마귀의 동네가 된 겁니다.

즉 우리 자체가 마귀의 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런 마귀들의 눈에
속이시는 하나님
마귀같은 예수님으로 다가오셔야 하는 겁니다.

본다고 하는 그 눈을 속이시지 못하는 예수님은 가짜이듯이 말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눈이 없어도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그러나 눈이 있다는 우기는 인간만은

이 예수님이 짠 판구조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니
눈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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