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피하라 하더냐? (눅 3: 1-20)

역사와 묵시의 대립 구조 : 역사가 묵시를 감옥에 가둘수 있다?

2013년 4월 6일 토요일 오후 1:55:34


(눅 3:1, 개역)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눅 3:2, 개역)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3, 개역)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눅 3:7, 개역)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10, 개역)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 3:12, 개역)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개역)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눅 3:14, 개역)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 3:15, 개역)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눅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18, 개역)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눅 3:19, 개역)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눅 3:20, 개역)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묵시운동을 아무리 펼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운동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한참 유행했던 하나님나라 운동을 제가 격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유행을 탓을까요? 묵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이 묵시운동에 한묵시운동 하실래예? 라고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을 받은 세례요한 앞에서는 그 유대인들의 묵시운동은 그저 세례요한을 시기(미움)하는데 작용이 된다는 겁니다.

이 점이 놀랍습니다. 묵시운동을 했는데 성령받은 자를 시기한다는 자체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그런 자들이 정치적인 권력자들과 힘을 합쳐
이 묵시의 인물을 감옥에 가둔다는 자체 말입니다. 결국은 죽여버린다는 자체.

아니 묵시 운동을 누굴 겨냥해서 했던가요? 정치꾼들 권력자들을 향했던 것 아닙니까.
소위 정의라는 이름의 하나님이름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과 손잡고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에 타켓이 모두 모아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점입니까? 묵시는 인물 그것도 한 인물에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대로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렇게도 꼬깃 꼬깃 철통보안 비밀의 금고를 열었다는 겁니다.
누가? 묵시가 말입니다.

바로 이런 묵시사건의 상황을 배경으로 까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역사가 이 사건에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묵시는 인간의 대상물이 되지 않습니다.
대상물이 되어버리면 소위 말해서 “운동”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역사입니다.

만약 진짜 묵시를 했다면 결과는 세례요한과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이런 사건의 정황.
여기에 심지어 예수님도 같은 결과가 나온 겁니다.
즉 묵시가 세례요한을 대상으로 삼아서 나온 결과이다는 겁니다.

어떤 결과?  역사가 묵시를 감옥에 가두는 정체 시키기, 고립시키기, 손 발 눈 귀 짤라버리기. 등등
눈 카니까 삼손이 기억이 나네요. 두 눈 뽑아버리기.

그런데 놀라운 점은 역사가 아무리 묵시를 감옥에 가두어도(물론 건드렸다는 증거죠 )
그 묵시가 가두어지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람을 잡겠다. 공기를 손으로 잡겠다. 태양을 피하겠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인간이 죽음을 피하겠다는 것처럼


여기 오늘 본문에 세례요한이 아주 아주 자기목숨을 걸고서
이렇게 외칩니다.

뭐 피하겠다고? 피할수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누가 피하라 하더냐?~~~~~~~

진노를 진노 스스로가 구체화 하는 판국에?

누가?  왜 ~~~~~ ?

마침 어제 밤늦게 잠자기 전에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늙은선지자가 깨닫고 젊은 선지자를 자기 죽거든 자기 무덤 옆에 두라고

아닙니다 어머니
내 눈이 또 뻘겋게 되어 상기된채로 목이 아픈가운데 외치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어머니
지금 두 사람은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대표인물들입니다.
늙은선지자 개인이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변해 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기가막히게 포장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싫어하고 있다는 것은 대변해서 보여주는 것이
늙은 선지자가 젊은 선지자를 죽이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유대인 전체를 대변해주는 인물로써 대립되듯이 말이죠.

젊은 선지자는 말을 듣던 유혹에 빠지던 안빠지던 원래 죽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마치 우리야 장군과 똑같은 거죠. 기의 없는 기표. 무조건 미움 받도록 되어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원수 다윗을 용서하시는 것은
피의 영광을 위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지자가 반드시 나와야만 하고
이 피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거짓선지자가 등장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대변하는 이 거짓선지자들이 모든 백성 모든 왕 모든 제사장인 다수이고
젊은 선지자처럼 이스라엘의 죄악을 들추어내기 위한 참선지자의 노선은 오로지 죽음인 겁니다.

곧 단 한명 말입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는 모든 저주를 나에게 주세요 라고 기도하던 말던 그런 운명이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정작 본인들이 그렇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양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 마귀, 숨은 마귀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참선지자는 백성들의 원망에 아랑곳 하지 않고
모조리 하나님의 심판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 진노가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불속에 집어넣으면 사는데
불바깥에는 하나님의 심판 뿐인데

그 모땐 역할을 참선지자가 하는 겁니다. 원수만들기 말입니다.

요즘 목사들은 구원시킬려고 착한목자 선한목자 양의 탈을 쓰고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는데

진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심판 속으로 몰고가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상대적으로 죽임을 당하도록 말입니다.

역사는 묵시를 감옥에 가두고 머리 목을 짤라서 쟁반위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가 감추인 본색인 실상인 겁니다.

세상이란 복 받고 사는 곳이 아니라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
참선지자를 죽이고
독생자 예수님 마저도 죽이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감추는 곳이라는 것

이것이 묵시라는 겁니다.

이런 묵시를 역사 속에 반영을 할때에
과연 역사(시공간)에서 창조된 인간들이 즐겁게 맞아하는 기쁜소식으로 영접할까요?

오로지 십자가에서 탄생한 묵시적 인물만이 기뻐할 뿐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저주도 진노도 심판도 아주 아주 당연한것처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창세전부터 진노 받기도 되어 있는 마귀는
바로 그것이 싫은 겁니다.
캥기는 겁니다. 아비 마귀와 그 자식 인간들은 진노 심판을 발로 밀어놓고 축복과 구원을 챙기겠다는 취지에서 자꾸 위협적으로 나오는 세례요한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한쪽은 도시 바벨탑 그리고 구원의 성인 예루살렘 성전까지 갖추어진
그야말로 구원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광야입니다. 죽음이요 심판이요 저주요 목마른 생명수의 부재공간입니다.

역사적 구원성전도시와 묵시적 진노의 저주 광야

이 상반됨이 극과 극을 이루면서

묵시가 자작극을 펼치는 겁니다.
묵시의 영광에 압도당하는 끌려다니는 식으로써의 구원도시가 졸지에 대상으로 당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눅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5, 개역)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6, 개역)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회개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모든 육체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언덕처럼 또는 움푹파인 골짜기처럼 들숙날쑥 해도
묵시라는 불도저에 의해 골짜기가 메워지고 언덕은 깍여져서 평탄케 되는
바로 예수님의 빨간 카페트로 취급받는 상황이 바로 회개라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너희에게 피하라 하더냐? 그냥 당해라 라고 당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피하는게 회개가 아니라. 도리어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은 시험입니다. 회개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제가 아주 이상한 경험인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마 어마하게 큰 산들이 막 깍이듯이 마치 3D 장면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이제는 움푹파인 골짜기들이 강이든 내천이든 막 메우워 지는 장면들입니다.

그래서 흥분이 되어서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활동
모든 첩경을 평탄케 하신다는 의미로 막 흥분되게 이야기 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이미 누가 말했던 겁니다.
들뢰즈 강의에 매끄러운 미끄럽게 삑사리나는 문화 유목문화에 대해서 말이죠.
그때부터 그렇게 철학 공부를 할려고 해도 믄말이지 몰라서 늘 거듭된 시도에도 실패했던 철학들이
이제는 외우는게 아닌, 이해도 아닌, 어차피 그것은 포기했던
그냥 눈에 보이는 겁니다. 마치 책들이 그림처럼 보여주더라 말이죠.

그래서 아 이놈들이 이미 다 말했네 라고
나는 그동안 쥐뿔도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구나 라고 알게 된 겁니다.

얼마전에 누가 너는 유사복음이요 가짜복음이다 라고 말을 해 줬는데
그 말이 얼마나 당연한지요.

저는 참된복음을 증거한 적이 없고. 진짜 복음을 안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제가 대상으로 삼아도 대상으로 삼을수 있는 복음은 없었습니다.
도리어 대상으로 취급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그러니 첩경이 평탄케 되듯
평탄케 됨을 당하기 위해
저의 울룩불록 쏫아난 언덕, 움푹파인 골짜기 등등은 다 밀려버림 당해야 하는 겁니다.

아 그래서 그동안 작업했던 모든 것 삭제 당하고
모든 것 마귀로 취급당해서, 그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고 불도져에 다 터져버리는 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원래 마귀였고 하나님의 원수임을 평탄케 되니 비로소 숨겨진 내막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잘나고 못나고 다 주님 앞에서 소용없이 그냥 불도져에 밀려서 평평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평평합니다. 그래서 광야(죽음)에서 10가지 원망이 언약궤에 담겨지는 이유는 평평하게 밀어버리기 위한 겁니다.

그러나 도시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정글처럼 울퉁불퉁 쏫아오른 구원의 문, 잘난 놈 못난놈, 움푹파인 습하고 그늘질 거지동네, 거대한 교회건물 부자동네와 대조된 판자촌 거지들이 있는, 그 무수한 다양성의 첩경

그래서 도시든 광야든 모조리 다 밀어버리는 겁니다.

묵시를 흉내내는 역사는 바로 이런 일을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를 사탄으로 몰아 붙이지 못합니다.
도리어 베드로가 [안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그 사람의 일을
묵시를 흉내내는 역사는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묵시는 에누리 없습니다. 모조리 그냥 다 삭제 다 진노 다 심판 뿐입니다.
모로지 원망 속으로 집어넣어서 오로지 피만 바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원수 만들어야 그 위에 피를 발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마귀가 싫어하는 일이기 떄문입니다.

주님은 나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마귀만 상대하시는 겁니다.

나를 상대로 하시는 것 같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속의 마귀입니다.
마귀는 결국 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써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한데 묶어서
단 한 인물 세례요한 빼고 나머지 모든 인간을 비세례요한이라고 단정해서
한쪽은 세례요한 다른 한 쪽은 비세례요한 즉 세례요한 빼고 모든 인간입니다.
그들을 대표해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소원으로써 목을 베어 쟁반 위에 올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한 쪽은 묵시 곧 비역사 또 다른 한 쪽은 역사 곧 비묵시
이 대립 구조에서

역사는 묵시의 목을 배는 겁니다. 목배인 영혼을 양산하는 곳이 역사 라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나 정작 묵시는 아무리 목을 배고 베고 또 베어도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짖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오히려 평탄케 하는 회개를 통해서 단절을 통해서 세례를 통해서
오히려 저들에게 공백 즉 메울수 없는 공포로서 자리잡게 하는 겁니다.

역사는 두려워서 즉 사랑이 없어 두려워서 목을 베었는데 목을 베면 벨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빈터로써 그 공포의 자리를 피할 수가 없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헤롯은 경끼가 나는 겁니다. 죽었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 나타났는가?
세례요한의 부활인가? 라고 자꾸 자꾸 묻는 겁니다.

(눅 9:7, 개역)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눅 9:8, 개역)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눅 9:9, 개역)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이 헤롯의 반응이 놀랍게도 똑같이 사도행전에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에게도 나타납니다.
아니 하나님을 안 믿는 헤롯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은 왜 헤롯과 똑같은 반응을 나타낼까요?

사실은 그 반응은 성령받은 자들만이 사도행전에서 자백하는 겁니다. 어찌할꼬?

진작 우리는 이렇게 처음부터 회개 했어야 하는 겁니다.

오히려 십자가 사건때에 유대인들은 니가 엘리야냐? 라꼬 자꾸 묻죠.
그만큼 조마 조마 하다는 겁니다. 막상 죄를 지어놓고 죄 안짖기를 바라는 겁니다.
불안하다는 증거요 공포를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모호한 역사의 특징입니다. 역사의 산물들은 다 이렇습니다.

그러나 묵시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성령을 받으면 회개를 당합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 묵시에 끌려 죽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역사는 이 묵시의 소모품을 없애버렸다고 자랑할지 몰라도
오히려 더욱더 공포를 키운 격입니다.
괜히 죽이는 바람에 제2 제3 의 세례요한이 자꾸 자꾸 몰려드는 겁니다.
죽을려고 환장한 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최대의 무기인 살인이 안 나오고는 못배기고
반대로 묵시는 그 최대의 무기에 찔려 죽음으로써 구원받는
살인이라는 무기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어 별거 아니네 라고 다들 그 창에 안찔리고는 못배길 정도로 너도 나도 달려드니
도리어 힘들어 지는 쪽은 창을 드는 쪽인 찌르는 자가 피곤해 지는 겁니다.

십자가가 어떤이 에게는 공포로써 자리잡는 이유가
아무리 찔러 죽어도 또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죽이는게 또 가해자가 되는게, 살인하는게, 힘들어 공포스러운게 아니라
그 반대로 칼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공포라는 겁니다.

살인할수 있는 살생무기는 이것 밖에 없는 살인무기가
전혀 살인무기 값을 못하는게 공포인 겁니다.
핵무기 총 칼 미움 진노 심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성령이 세우시는 것은
오히려 음부의 권세가 가득한 곳에서 그 권세가 무용지물이라는 공포성을
성령이 바로 이유없이 미운 오리새끼를 통해서 펼치신다는 겁니다.

아니 십자가의 사랑을 이길 무기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지금 세례요한은 죽을려고 환장하듯이
아예 죽음을 재촉하는 겁니다.

빨리 빨리 죽여달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죽는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알 아세라 선지자와 차이나는 엘리야의 제사입니다.
남들은 다 복달라고 기도하는데
엘리야는 저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을 회개 라고 하는 겁니다. 단절성.

남들은 다 축복산 그리심산으로 올라가는데
엘리야는 저주산 에발산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어찌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이들에게
회개의 의미를 알려주는 겁니다.

1.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10, 개역)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옷이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고 먹을 것도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일까요? 회개맞나요?

2.

(눅 3:12, 개역)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개역)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여기서 좀 특이한 자들이 있는 세리 곧 매국노입니다. 그런데 그 매국노 짖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얼마나 부정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요 그 직업 자체가 그러니까 말이죠, 그러면 세리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바리새인들(유대인 대표성)의 입장에서는 회개일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정의이지 하나님의 일과 무관한 사람의 일일 뿐입니다. 오히려 세리에게 정한 세금 외에 더 거두지 말라고 어쩌면 바리새인 옆에 있으면 더 열받는 소리를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억울한 유대인의 입장이 아닌 다른민족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인 저의 입장에서는 전혀 억울하지 않죠 왜냐 정한 세금 외에 안 받는게 맞잖아요?

김대식씨는 가짜 복음이요 유사복음이다. 김대식씨는 억울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맞잖아요. 전혀 억울한게 없는 겁니다.

아니 처음부터 가짜였고 유사복음이였지 무슨수로 진짜복음을 증거할수 있겠습니까
증거했다면 악한 세상이 가만히 놔 두었겠습니까? 벌써 죽였어도 벌써 죽였겠지요.

또 살펴 봅시다.

3.

(눅 3:14, 개역)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 3:14, 공동)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주었다.』

(눅 3:14, 쉬운) 『군인들도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강제로 돈을 뺏지 마라. 거짓으로 고발하지 마라. 그리고 임금으로 받는 돈을 만족하게 여겨라.”』

아니 이게 묵시의 인물이 말하는 회개 맞나요?
이건 누구나 다 하는 윤리적 도덕적인 표현 아닌가요? 구지 세례요한이 말할게 아니라
고등학교 윤리 선생도 충분히 할수 있는 말 아닌가요? 그럼 이게 무슨 회개 입니까?

이게 마치 가능한 소리인 윤리 도덕의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게 우리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판대기 구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그 악한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인이 되어 요즘말로 하면 공무원이 되어서 강제로 돈 뺏듯 부정한 일 안하거나
거짓 구라를 치지 않거나, 정한 월급으로 만족할 자가 없는 구조라는 겁니다.
인간 개개인을 말하는게 아니라 구조 판대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리한테는 그 일 그만 두라 라는 말을 안하죠. 판대기 이니까

옷 두벌 있는자가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는게 어려울까요?
네 어렵습니다 도리어 불가능합니다.

먹을 것 있는 자가 못 먹는 자에게 먹을 것 나누어 주는게 어려울까요?
네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라고 하시겠지만
판대기 라고 했습니다.

옷 두벌 가진 구조에서는 더 가질려고 하지 옷 없는 자가 사실상 그들에게는 부재입니다.
없습니다. 없으니 주고 싶어도 못 주는 겁니다.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어렵죠?

아주 쉬운 예가 부자청년 이야기입니다.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을때에
모든 율법을 진짜 제대로 지킨 사람이라면
그것을 예수님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야할 행동이
이상하게 근심하고 돌아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구조를 직접 판을 짠 분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부자청년은 예수님이 짠 그 세상 구조판을 뒤엎어 버려야 비로소 이룰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럴 능력이 부자청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한게 아니라 죄를 더하도록 하기 위한 가두기 위한 판대기인데
행함의 문제로 취급해 버렸으니
처음부터 율법을 지킨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구조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결국 질문 1 2 3 의 답변을 한 세례요한은 종말의 수평화, 심판의 평준,보편화 이고
그 질문한자들은 그 수평을 위해 평준 보편화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수용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옷 두벌 있을 때 옷 없는 자에게 옷을 주고 또 같은식으로 먹을 것 주고
징수를 정해진 세금 외에 더 하지 말고, 남의 것 안 빼앗고, 정한 봉급에 만족하라는 말이
과연 지킬수 있으냐 라는 문제인 판대기 문제로 봐야한다면

우리는 도끼에 안 찍힐려고 할게 아니라
아무리 봐도 그 도끼 내가 맞아 찍혀 죽어야 합니다 라고 나와야 하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구조에서의 회개판대기는 예수님이 마련하는 겁니다. 다윗이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회개판대기가 바로 여디디야 판대기였듯이 말입니다. 회개를 행하는게 아니라 회개가 덮쳐진다는 구조인 겁니다. 주도권은 회개가 주체이고 다윗과 나 곧 우리는 회개의 대상물입니다. 우리가 회개 못합니다. 구조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세례요한이 외치면
도저히 피할수 없으니 저를 도끼로 찍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회개라는 겁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도끼가 사라지는게 아니라 도리어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공포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마련한 회개의 판대기에서는 그 도끼가 유일한 생명의 길이요 감사요 은혜인데 말입니다.

세례요한 도끼맨을 죽여도 살해해도 목 베어도 소용없습니다.
도끼가 세례요한을 데리고 다닌것이니
세례요한 백날 없애도 도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회개는 모든 하나님의 진노는 제가 받아 마땅합니다.
아무리 봐도 내 속에 선한 구석이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저를 도끼로 찍어 주십시오 라고
그 단절성을 격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하는 회개는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나를 내가 짤라낼수 없습니다. 손할례가 도리어 회개했다고 우기니
그 회개를 회개해야할 판국입니다.
지버릇 개 못 주듯이 대도 조세형도 평생을 못 고치는 겁니다.
아무리 화투를 끊어볼려고 손가락 짜르는 모진 마음을 품어서 회개했다손 치더라도,
묵시운동했다고 우겨도,
희한하게 손가락 열 개 다 짤랐는데 발가락 열 개로 기여이 배워서 화투를 치더라 라는 겁니다. 구조를 무시한 겁니다.

이것을 구조 판대기 종말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묵시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이런 실상을 밝혀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묵시는 노골적으로 들추어내는 겁니다. 까발리고 벗겨내어서 막짱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회개. 죽음으로 몰아버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역사는 서로 서로가 숨기기 바쁘기 때문에 누구 하나 발가벗겨주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판대기는 못 피하는 겁니다. 종말의 진노에 그저 다 같이 함께 놓여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평탄케 된다는 사실에 압도당하는
그 회개가 덮쳤다는 사실

같은 종말의 진노에 놓였기에 옷을 나눌수 있고 먹을 것도 나누고
정해진 봉급에 만족하고 남의 재산 안 빼앗는 이유는
본인이 회개 속에 놓여진 진노의 대상임을 알기 때문인 겁니다.

도끼는 남이 아니라 내가 그 도끼에 찍혀야 할 자입니다 라는 겁니다.
판대기를 제대로 보는 것이 회개입니다.

남이 아닌 내가 종말의 심판에 놓여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이지
두벌 나누어서 피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정한 봉급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럼 다 회개하는자 입니까?
임박한 종말의 구조의 다급함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는
첩경을 평탄케 하는
옷 두벌을 하나 빼기해서 옷없는 자에게 주면 평평해 지는
종말을 구체화 하는 모습이 바로 회개라는 겁니다.

자기자신을 불도져로 밀어서 바짝 마른 뼈처럼 쥐포가 되는 그 불가능성을 등에 엎고서
종말에 참예된 것이 바로 세례 할례 단절성을 구체화 하는 것이 바로
도끼를 제대로 보게된
도끼로 나를 찍어주시는 그 감사함에 놓여짐을 당하는 겁니다.


주님. 이 종말의 도끼로 나를 찍어 주시옵소서
나의 죄악의 피가 터져나와
주님의 피만이 옳았다고 외칠수 있게 하소서
이 피만이 참생명수임을 평평하게 첩경이 평탄케 된 광야에서
그 하나님의 진노에서 누리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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