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작마당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꾀더냐 (눅 3: 9-22)

2013년 4월 8일 월요일 오전 11:47:09  김대식


(눅 3:9,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 3:10, 개역)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눅 3:11,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 3:12, 개역)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눅 3:13, 개역)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눅 3:14, 개역)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 3:15, 개역)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눅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18, 개역)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눅 3:19, 개역)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눅 3:20, 개역)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눅 3:21, 개역)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 3:22, 개역)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역사가 묵시를 감옥에 가둘려고 한다는 것은
곧 묵시의 활동을 정체 고정화 시킬려는 의도입니다.
즉 자신의 활동 행위들만이 생명화 시킬려는 거짓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즉 행함의 구체화입니다. 가짜 생명인 육을, 역사를, 이미 썩어버린 고정된 물을 움직여 볼려는 시도입니다. 시체를 움직이면 그것을 살았다고 합니까?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죽음을 움직여도 이미 죽음은 죽음인 겁니다. 시체입니다.

그 시체됨을 감추기 위해서 묵시에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종말이란 뒤짚어 씌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묵시가 나타나야 비로소 뒤짚어 씌울 대상이 졸지에 생겨버리는 겁니다.

복을 빈다는 것은 묵시에게 저주를 뒤짚어 씌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묵시가 나타났다는 것을 오히려 떠벌리는 반증인 겁니다.

타작마당은 묵시가 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가 가만히 있어도 역사가 저절로 그 타작마당을 정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죽음의 자리를 목격하고서는 캥기기 때문에, 스스로 그 자리를 묵시에게 뒤짚어 씌우고자
이상스럽게 기여이 마련하고 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의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 8:28, 개역)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마 8:29, 개역)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8:30, 개역)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예수님(묵시)를 의식하는 존재는 마귀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는 마귀 밖에 없기에
마귀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귀를 예수님을 자신의 일하심에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바로 묵시를 의식하는 그 두려움 그 공포를 말입니다.

그 공포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예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심뽀입니다.
제사도 기도도 다 그런식입니다. 사귐도 없이? 화목케 하심도 없이도? 말이죠.

지난 시간에 말한 부자청년이 왜 근심하고 돌아서는고 하니
율법을 무시한 처사를 도리어 율법을 지킴으로써 율법가면을 쓴 것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을 그 공포를 율법가면으로 가릴려고 한 겁니다.
율법(행함)으로 예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심뽀.
(율법의 첫계명이 뭡니까? 누가 그 큰 계명을 지켰나요? 나죠 나죠 라고 묻는 율법사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죽음을 손바닥으로 가릴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마귀가 웃기는고 하니 예수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여전히 분위기를 파악못하는 겁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말이죠.
즉 바람을 손으로 잡겠다는 겁니다.
할례를 손으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인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런 악마가 씌여진 자들을 통해서
그 빈공터(골짜기 웅덩이를 메울수 없고, 뾰족 쏫아난 높은 웅장한 기념비 같은 언덕을 깍아버려 평평케 하는)를
더더욱 미끄럽고, 기름빠다를 발라 어떤 누구도 그 자리를 메울수 없도록 하는 일을
악마든 뭐든 다 활용해서 만드는 겁니다.
그들은 이상스럽게 기여이 메울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그 간격을 벌려버립니다.

마귀를 활용해서 더욱더 매끄럽게 하고
세례요한을 통해서 더욱더 평평케 만들어서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집어 넣는 겁니다.

정한세금 외에 더 거두지 말고, 남의 재산 빼앗지 말고, 정한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말은
행하라 라는 뜻인 행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종말의 삶이 덮쳐진다는 겁니다.

구조의 판대기가 상대적으로 덮쳐버린다는 뜻입니다.

남들 다  정한 세금 외에 다 더 거두는 역샤의 구조의 삶에 덮쳐져 살게되는데
졸지에 그렇게 하지 않는 묵시 구조의 삶이 덮쳐지게 되니
여기서 중요합니다.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차이나는,
이유없이 미움받는 오리새끼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이 덮쳐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는데 말입니다. 졸지에 덮쳐져서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딸랑 1시간 일하고 딸랑 30분 일했으면
예수님을 악하다 라고 주장하는 자들 말 마따나
예수님이 악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기 위해서라도
또 자기 분수에 맞는 것을 인정해서 자기 땜에 불화가 일어나지 않게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딸랑 1시간 일했으면 1시간 노동 값만 받으면 된다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묵시란 그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역사를 주장하면 딸랑 1시간 노동값만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묵시의 존재, 종말의 단체인 새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성도가 아닙니다.
묵시 곧 약속이란 딸랑 1시간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아주 뻔뻔하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값을 넙쭉 다 받는 겁니다.
겨우 아주 겨우 겨우 딸랑 30분 일했어도 하루 일당 전체 노동값을 넙쭉 다 받는 겁니다.

이유는 역사가 아니라 묵시의 일인 예수님의 일하심이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나의 일 곧 사람의 일이 개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일은 이 묵시의 일 하나님의 일에 의해 왜 삭제 당해야 함의 정당함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또 어떤 일을 해도
그 모든 일들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취지로써
역사로부터 이유없이 미움받는 짖만 골라서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그것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전혀 무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묵시가 덮쳐지면 그 어떤 일들이 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상대적인 대조적 대립적인 존재를 붙이지
우리가 의식하는 존재는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저들의 사고방식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여이 그 속에서 빼내시고 그들과의 차이성을 내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의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하심입니다.
이 선하심이 반드시 이 선하심을 악하다 라는 비방 욕을 기여이 얻어먹으면서 증거되는게
그것이 역시나 구조다 라는 겁니다.
선하심 홀로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부자청년이 율법을 지켰다면 선한일을 했다면 그 율법의 구조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상대적으로 악하다는 소리를 들었어야 하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로 부터도 그런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으니
부자청년 당사자가 율법의 구조를 무시했기에
감히 지켰다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뾰족한 기념탑을 더 높이 세우겠다는 꼴입니다. 평탄케 하는게 아니라?
빈터로 만드는게 아니라?
그래서 그 전재산 모조리 다 가난한자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그 빈공터로 만들라 할때에
정작 그 빈공터에 본인이 미끄러져 자빠지는 겁니다.

이런 지적을 우리가 지금 세례요한으로부터 받는 겁니다.

뭐? 니가 예수님 믿는다고? 뭐? 니가 구원 받겠다고?
뭐 니가 충성 봉사 했다고? 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했다고?

야야야 너 지금 타작마당 안 보이니?
타작마당도 안 거치고 그런 배부른 소리 할꺼니?

타작마당이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를 들이대는 이유는 모조리 다 미끄러뜨리기 위한 겁니다.
탈탈 털어서 가려내고 가려낸다는 겁니다.

이것을 분별 분리 검문검색 비역질 계류기술 즉 종말 뒤짚어 씌운다는 겁니다.

이 거룩작업에 의해 탈탈탈 털려서 빈털터리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광야란 주님에게 모조리 탈탈탈 털리는 곳입니다.

어 목이 곧네 목 뿌라 줄게
어 안색이 변했네 안면맞사지로 야들야들하게 해 줄게 불도져로 얼굴 밀어버릴께
어 원망했네 감사할때까지 더 지근 지근 밟아줄게

뭐 괜히 한마디 해버리면 더 매를 버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당하는 사람 코 앞에서
어 너 목 뿌라졌네 내가 목을 곧게 해줄게
어 너 얼굴이 밀려져 있네 내가 얼굴을 아름답게 해줄게
어 너 지근 지근 밟혀졌네 내가 1급병동 최고급 의료시설로 고쳐줄게 라고

소경과 문둥병자를 레위인들에게 보이고 바리새인들 코 앞에서 고쳐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구조라고 했습니다.

수직적 사고방식이라고 철학책에서 봤는데
아버지와 아들만의 전능성의 전이에 어떤 누구도 개입할수 없는데
그것이 수평적 (역사) 속에서는 차이화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유없이 미운 오리새끼가 안 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 수평 보편화가 되는 것이 종말성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눅 3:17,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18, 개역)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놀랍게도 이 타작마당을 정하는 것이 복음이요
이 복음에 상대적인
적개심을 품게되는 존재들이 그 다음 19절부터는 캥기는 존재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구조를 바꾸겠다고 하니 기여이 손으로 묵시를 손대겠다는 심뽀입니다.
마음판의 할례는 할례가 다가오는 방식이지
우리가 할례에 다가가 손댈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그러니 기가막힌 짝이 되는 겁니다.
반드시 복음이 증거되는 그 타작마당에
그 하나님의 진노를 거부하는 자들의 거센 반항이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는 겁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다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합니다. 포착해도 이미 늦었고 소용없습니다.

세례요한을 가두어버렸으니 이제 좀 나아지겠지 라고 했더니만
여기에는 더 심한 실로암 댐이 터지듯이 그 전운이 감도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이 인물에 비교하면 쨉도 아닌 겁니다.
세례요한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수합니다.

나는 이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 못한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백번 만번 저주 받아 마땅하다.

즉 제대로 묵시를 본 겁니다.
자신이 외치는 묵시는 이 분에 비하면 가짜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서 비키는 방법이
헤롯의 뺨때기 때리고 자발적으로 잡혀
무대에서 퇴장하는 누락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빨랑 빨랑 퍼뜩 퍼뜩 똥차를 치우듯이
자신의 존재를 치워버리듯이
자신의 죽음을 재촉해 버리는 겁니다.

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자신의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그러나 그는 제대로 봤습니다.

보라 세상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이분을 본 이상
자신이 구지 묵시를 이렇쿵 저렇쿵 하면서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누락될수 있는 길만 찾아서 알아서 퇴장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묵시를 제대로 본 사람은 그 허리케인의 위력 앞에서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빨랑 빨랑 들어가는 것이 차라리 편한 겁니다.
도망치고 내빼봐야 도망치는 곳으로만 일부러 따라오듯이
집요하게 다가오는 스토커와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자수하여 광명찾자고 회개하라고 하는 겁니다.
진노 속으로 들어가 그 진노의 보편수평의 구체화를 재촉하는 겁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갑자기 불쑥 외쳐놓고
자신이 그 진노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남들에게도 빨랑 들어온나 라고 외쳐버리고서는
죽어버려서 퇴장해 버리는 겁니다.

참 허무하지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모습이 참 지혜롭다 라는 생각이 드는게
그 뒤에 오실분의 전운을 본 사람이라면
그 재촉하는 퇴장이 참 지혜로왔네 라고 무릎을 팍 치며 앗차 할 껍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악마와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기 예수님과의 묵시전쟁을 붙여놓는듯한 기도를 올려놓고서는
자신의 얍샵하게 빠지는
싸움 붙이고서는 말이죠.

그런데 세례요한도 꼭 그런 느낌처럼 타작 마당 운운해 버리고서는
그 타작마당에 자신을 타작해 버리니
미련하게 보이는데 정작 뒤에 오실 분의 활동을 봤다면
오히려 참 똑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누가 감히 그 분과 화친을 청할수 있으며 (왜? 아군을 반드시 배신을 해야하니까?)
누가 감히 건방지게 어디에서 나타날줄을 알고 아들을 보고 입맞출수가 있겠습니까?(변태 취급받을텐데?)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시 2:12, 개역)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다급한 전쟁의 상황
전쟁도 아닐뿐더러
다급함도 아니요
진노도 아닌 속에서

어떻게 전쟁의 상황을 의식하고
다급한 진노를 의식하느냐?

바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인 마귀라는 의식을 하지 못하면
아들에게 입 맞추기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자신이 진노의 대상입니다 라고 여기지 않는 이상은
백날 들따 봐도 아들을 찾을수 없고
찾지도 못하니 사귐 곧 화목을 화친을 청할수 없고
아군을 배신 때려서 적군으로 보는 의식도 할수도 없습니다.

자 그래서 엘리야선지자는 모든 저주를 나 주시고 복 남주세요 라고 제사드리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 말 마따나 복 달라고 하는 이유는 전혀 분위기를 파악못하는
자신이 진노의 대상임을 인지 못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바알 아세라와 같은 우상숭배자인 이유가
도끼가 나무에 놓여졌으니 열매를 내 놓으라고 해서
진짜로 열매를 내 놓을려고 한다는 자체입니다.

진노가 임했다고 하니 진노를 피할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것을 또 믿음이라고 가르치면서 선생 노릇을 한다는 자체입니다.
기가막힙니다.

부자청년이 율법의 구조를 무시했던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구조를 얼마나 얍잡아 봤으면?

피할수 있는 진노면 그것은 진노가 아니무이다.

바로 그렇게 죽어있는 시체인 자신을 움직여서
진노를 이동케 만들려는, 진노에서 벗어날려는 심뽀인데

그 반대입니다. 진노 속에서 자신이 그 진노를 입고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
묵시 판대기가 덮쳐진 자입니다.

결국 복음이란 십자가란 이 타작마당을 즐거워 하는 겁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서는 이 타작마당이 펼쳐지는 겁니다.
미리 앞당겨서 끝을 누리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그 끝을 자꾸 자꾸 발로 밀어서 멀리 멀리 둘려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 아세라와 같은 제사를 오늘날 교회들이 복달라고 외치는 우상이 자리잡는 겁니다.

전혀 묵시의 판대기를 의식치 않는 거부하는 처사로써
그런 곳에서 양성된 자들이
부자청년처럼 뭘 또 행하면 구원얻냐고 나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는데 라고 나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은 이런 부자청년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착하나요?
아군을 배신하겠습니까?
길가다가 갑자기 입맞추는 변태 짖을 하겠습니까?
부자청년이야 말로 기가막힌 먹잇감이요 돈이 되잖아요?

성화가 돈이 될 줄이야 ???? 이 돈 되는 것을 미쳤다고 성화론자들이 포기하겠습니까?
생명 생존과 직결되는 판국에

우리 모두가 이런 곳에서 다 활동했던 자들입니다.

벗어날길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저주의 대상, 심판의 대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아는 자만이

인간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만 이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타작마당을
기쁜 소식으로 즐거워 할 겁니다.


타작마당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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