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 변론과 사울 죽이기 공모 (행 9: 22-31)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오전 11:08:10


(행 9:22, 개역)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행 9:23, 개역)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행 9:24, 개역)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행 9:25, 개역)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 9:26, 개역)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행 9:27, 개역)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행 9:28, 개역)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행 9:29, 개역)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행 9:30, 개역)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행 9:31, 개역)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을 처형하겠다던 자가 청년사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청년사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다 죽이기로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를 죽이고 또 다른 예수쟁이를 죽일려고 가는 길에
다메섹에서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게 됩니다. 죽음을 만난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죽은 자를 만난 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그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는
둘 다 살았다를 전제로 하는 것이 만남입니다.

그런데 죽은자를 만났다는 것 앞에서
졸지에 살아있다는 나 조차도 죽음이 되어버림으로써
죽음으로써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멀쩡하게 물 위를 잘 걷고 있는 베드로를 일부러 물에 빠뜨려 죽게 함으로써
살았음에서 본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아님을 보게 하는 겁니다.
날 물 위로 걷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환상을 깨뜨리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요
나를 물 아래로 빠뜨려 세례 단절 차단 거절 거세 할례 죽여버리는 분이 진짜 십자가의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환상 속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예수와 매치가 되지 않아야
그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게 됩니다.

현실이란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부재성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기호일 뿐인데
실재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 실재성을 위해 성령마저 동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이 부재성의 이름을 다 이루셨습니다.
결국 이름 싸움이다는 겁니다.

누구 이름이 현실이냐 라는 겁니다.
바벨탑을 건립하는 인간의 본성은 이름 결집입니다.

그 이름을 회파하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마저도 활용하면서 결집(성전)화 합니다.

주의 이름은 주의 주 되심을 위해 모든 힘의 결집을 다 회파함으로써
철저하게 힘을 빼버립니다.

진짜 교회라면 힘이 일체 없습니다.
그래서 부러워 할 만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도리어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왜 힘이 없으니까 말이죠.
힘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진 힘도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교회이어야 진짜 교회이겠지요.

나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교회이어야 말로
그 순간 만큼은 주의 이름이라는 부재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이름을 변론하는 것이 이제 사도바울입니다.
비로소 유대인들은 반작용으로써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는 겁니다.

거듭말하지만 반작용이란 원인에 의한 결과를 도출할려는 역사성 곧 행함입니다.
누가 먼저 앞서서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반응이다는 겁니다.

바벨탑이란 반작용인 겁니다. 노아 홍수로 먼저 대량살상의 죽음이 오게 되니까
비로소 방주의 반작용으로써 흉내내는 행함이 도출이 되는 겁니다.

결국 행함이란 믿음의 반작용입니다.
방주 흉내내기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주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이 담겨지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하나의 항아리로 보면
수시로 누구 이름이 담겨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인간의 이름인지 또는 인간의 이름을 빙자한 하나님의 이름인지
아니면 우발적인 주의 이름이 담겨진 것인지를
시시때때로 달라짐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의 재현을 주의 이름 때문에 보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런 사건이 매 순간 벌어지는 교회는 없습니다.
다들 평강이다 평강이다 로 사람들을 세뇌 시켜버린 이상
더 이상 이런 사도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가 벌어지지 않는 겁니다.

즉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가 벌어지는 것이 정상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공모가 벌어지지 않는 비정상의 시대에 우리는 사는 겁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부터 인간이름과 주의 이름의 대격돌은 성경전체에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환상으로 취급해 버리는 세상은 이런 상황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그야 말로 힘에 결집하는데 미쳐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데 성령을 부으시는 겁니다.

성령을 부음으로써 비로소 미움과 편애라는 거룩이 갈라지는 겁니다.
복음의 반작용으로써 말입니다.

비방받는 표적으로써 이 땅은 흥함과 패함이 갈라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안 갈려질려고 하는 상황은 얼마나 비정상입니까?

오직 예수님만 편애받고 모든 것은 지독한 미움을 받아 마땅한 것이 정상 아닙니까?

바로 이 일에 드디어 청년사울은 이 이름의 변론을 위한 그릇이 됩니다.
비로소 정상적인 일에 사울은 그릇으로 동원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적이면 이 이름을 위한 변론이 아닌
쓸데없는 하나님의 일로 변장된 인간의 이름을 위한 변론만으로 가득한
바벨탑 세상인지를 성령을 통해서 정상의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는 일은 정상적인 일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주 스스로가 이제야 정상적으로 일하심으로 인해서
인간들은 거기에 대한 반작용의 일들을 펼쳐야 하는 겁니다.
얼마나 정상적으로 일하셨으면 인간들은 그동안 안할려고 꽁꽁 숨기던 일을 비로소 합니다.

사울 죽이기입니다.
예수 죽이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시고 그동안 숨겨놓은 일을 비로소 꺼내놓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제대로 일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공모해서 죽였듯이
이제 사도바울도 공모래서 죽여야 하는 겁니다.

(행 9:24, 쉬운) 『그러나 사울은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행 9:24, 우리말) 『그러나 사울이 그들의 계획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철저하게 지키고 서 있었지만』
(행 9:24, 현대인) 『사울은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 성문을 지켰지만』
(행 9:24, 현대어) 『밤낮으로 사방의 성문을 지키며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곧 그들의 계획을 알아챘다.』


(행 9:25, 개역)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행 9:26, 개역)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 얼마나 극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사도바울은 늘 죽음이 떠나지 않는 죽음 속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입니다.

누가 꾀더냐 말이죠.

진짜 적은 죄인 중의 괴수 사도바울 자신이였듯이
사도바울은 개의치 않는 겁니다.

극적으로 탈출하게 되고
어디를 가도 반기는 인물 하나 없어도
그는 주님의 이름 위한 그릇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일을 격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의미 없고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포나 두려움은
도리어 사울에 대해서 더더욱 그럴뿐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두려우면 그 두려움 속으로 더욱더 들어가면 됩니다.
공포스러우면 그 공포 속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유혹 스러우면 그 유혹 속으로 더욱더 들어가면 됩니다.

들어가 보면 별거 없다는 것이 밝혀 집니다.
별게 아닌 것이 공포로 자리잡고 있고 두려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더욱 의식케 만들어 버리니 사라지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그 속으로 들어가 바닥을 한번 뜯어보는 겁니다.

공포의 바닥으로 들어가 바닥을 뜯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는 겁니다.


진짜 공포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저주를 졸지에 사도바울은 만났습니다.
죽음을 죽음으로써 만났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울게 없겠지요.

그래서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는 것은 비로소 정상적인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모두다 주의 이름이 벌리는 사건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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