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 받는 예수 (눅 2:40-52)

비방받는 표적과 편애(편파)적인 종말

2013년 3월 8일 금요일 오전 10:55:03


(눅 2:40, 개역)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 2:41, 개역)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 2:42, 개역)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 2:43, 개역)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개역)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개역)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개역)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개역)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48, 개역)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개역)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개역)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 개역)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비방받는다, 비방받는 표적이 된다. 즉 미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일로써 이 땅에 깔아놓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거부반응이지 않겠는가?

어디까지나 인간의 세상에서는 인간이 먼저이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미움을 깔아버렸다는 세상을 먼저 생각해 버린다면
그런 사고방식의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우찌 살아가야 하는가?

지난 시간에 비방받는 표적 때문에 종말의 판이
드디어 화산폭발 전의 지층처럼
숨어있다가 올라오는 것처럼
은폐되어 있다가 나타나는 종말의 사람들이 등장시킨다고 했다.

여러 이스라엘 사람 중에 단 한명의 이방인 나아만 장군 문둥병자
여러 이스라엘 과부 중에 단 한 명의 과부 사르밧(사렙다) 과부
이듯이

곧 죽기만을 기다린 죽지 못하고 있는 시므온 선지자 비로소 아기 예수를 안고서
이제야 놓아 주신다고 했고
100살 전후인 과부 안나선지자라고 하지 않고 84년 된 단절성의 과부라고 했는데
이들이 비로소 막힌 담이 허물어 지듯이 비로소 구원자 되신 아기 예수를 외치고
누락되는 소모품의 역할을 한다.

즉 고아 과부 나그네가 종말의 판에 등장한다. 꼽사리로 낑겨서 말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고아의 아버지
그 과부의 남편
그 나그네의 임금 이 중요해서 깔려지는 배경(얼굴)이라는 공명 때문이다.

즉 지독한 미움을 받는 미움의 판
사람들에게 싫어버린바 된 원수의 판대기다.

이들이 바로 비방받는 표적 때문에 등장되는 종말의 판으로써 동원이 된다.

자 그럼 이것으로 종말이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이 배설기관들은 반드시 [다 이루셨다]를 위해서 동원이 되는 종말의 판이듯이
이 종말은 결국 사랑이 완료 되었기에, 다 이루신바 되었기에
모든 구멍을 열어놓음으로써 흐름이 소통 되는 것이다. 짝꿍이다. 영원한 무한반복의 공명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구멍을 열어놓을자 없다. 그래서 구원의 뿔이 구멍을 다 뚫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단절 거절 차단 거리두기 이런 불가능성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로써 몰아넣는
뒤짚어 씌우는 종말이다. 편파적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유일한 소통 곧 구멍뚫기 인데
이것이 바로 편애다.

지난 시간에는 비방받는 미움으로써의 종말인데
오늘은 이 편파적인 편애로써 종말 그 자체로 사랑의 완료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지난 시간에 말씀이 그래서 그렇지
사실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써는 받아들일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
성경말씀 전체가 다 그렇다.
얼마나 일방적인가?
다른 말로 하면 얼마나 인간을 배제 소외 누락 시키는 것인가?
그래서 인간의 해석이 들어갈 틈이 아예 없는 단절성이다.

말도 안되는 아기 예수를 안고서는 이 아기 예수로 인해서, 이 비방받는 표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두동강 난다는, 오늘날로 치면 교회가 두 패로 나누어 진다는
그런데 한 쪽 패거리는 다수요, 또 다른 한 쪽은 소수가 아니라 단 한 명이라는 둥

즉 아예 없다. 없으면 다른 한패거리 라고 할수 없는데
없기 때문에 다른 한 패거리 로 규정을 하고서는
그 없음을 밀어붙이는 방식이니

왜 이런 불가능성 곧 없음, 말도 안되는, 싫어버린바 된, 걸림돌로써, 거리끼는,
어리석은 방식으로써만 일(사건)을 진행하시는 것일까?

오늘 본문 때문이다.
즉 예수님만 편애 받으면 됐잖아 라는 식이다.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있는가?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가장 말되고 납득이 되고 가장 믿음직한 소리가 되어버리고

오히려 가장 말이 되고 설득가능하며 가장 믿음직했던 것을
가장 말도 안되고 가장 시험이 되어버리는 소리로 뒤짚어 씌움을 당하게 된다.

소위 출애굽기 당시의 애굽이라는 바벨탑이 가장 인간들에게 믿음직 스러웠다.
그런데 가장 시험이 드는 우상의 터전이 되었듯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오늘날 바벨탑인 교회가 인간들에게 믿음을 주듯이 가장 믿음직 스러웠는데
도리어 가장 시험이 들게 하는 식의 우상이 되듯이

그 이유는 바로 완료된 편애적인 아기 예수님의 등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제도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다.
어제 아무리 예수 잘 믿어도 소용이 없다
오늘 예수 믿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김 모 목사의 죽음 때문에 나온 대화였는데
그동안의 행적으로써의 믿음은 소용이 없다.

정작 예수님의 등장 때문에 판이 뒤짚어진 것이다.

즉 아기 예수님 때문에 뒤짚어 씌우는 식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라는 이 편집증이 바로 유대인의 믿음이였다.
여기에 예수님의 믿음은 그것을 흡집내어버리고 갈기 갈기 찢어버린다.

무엇으로?
비방받는 십자가라는 표적으로써 말이다.

도저히 편집증에서는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증상이다.
싫어버린바 될 수가 없다. 아니 자신들이 이미 선택받기로 된 예정된 선민인데
그것을 뒤짚어 엎어 버릴 판대기가 없는데 말이다. 하나님 조차도 인증샷으로 남긴 것이
바로 구약인데 누가 구약을 뒤엎어 버린다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점은 아무도, 누구도 뒤엎어버릴수 없는게 맞는데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이 뒤엎어버린다. 구약을 쓴 하나님 본인이 뒤엎어버린다면
유대인들은 할 말이 없게 된다. 

도리어 솔로몬의 재판처럼 유대인들은 창녀로써 다른 창녀를 정죄하는데만 일관했다.
정작 자신들 때문에 아기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아기의 어미를 달래 주기는커녕
놀랍게도 법을 괜히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 법 때문에 졸지에 무조건 이유없이 다른 창녀(인간)에게 뒤짚어 씌워야
그 법에서 벗어날수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법은 그런 창녀(유대인)를 마귀로 규정하고자 작동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끝났고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은 물러가고, 그림자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실체가 주인공으로써 등장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랑의 등장을 위해
이스라엘이 두 창녀의 모습처럼 두 패로 갈려지는 현상이다.
하나는 법 속의 뒤에 숨어버리는 이미지
또 하나는 사랑 때문에 법에 의해 법의 철회를 알리는 죽음(희생)으로써
솔로몬 왕의 지혜는 이 희생에 공명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의 실체 앞에서 그림자는 그림자 역할을 톡톡히 하도록 되어 있다.

세례요한은 자신은 후패 되어 마땅한 누락되어야할 소모품이라고 했다.
그것은 실체의 등장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

왜 이렇게 말도 안되는 전개가 똑같이 지난 시간과 오늘 본문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나타나는가?

아기 예수님의 되바라진 싸가지 없는 모습을
성경말씀은 여과 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편파성이다.
즉 편애받는 모습이다.

이 편애성에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도 유구무언이다.

그 당시 소위 성경말씀을 가르친다는 선생들 조차도 유구무언이다.

그 특이성과 편파성이 인간의 역사에 과연 오래 가는가?
금새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복음은 마치 겨냥한듯한 즉 뒤짚어 씌우는듯한
그 어린아이 예수의 이 편애성을

복음이 비로소 전하기 시작하는 30세 쯤에도
그대로 밀어 붙임에 있어서
놀랍게도 유대 사회가 흔들려 버린다.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삭제 시켜버리듯이
예수님의 복음 증거 시작은 아주 아주 위협적이다.

오늘날로 치면 한국 기독교를 아예 없애버리는 식이다.

그러니 청년사울의 그런 열심은 아주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사울도 졸지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버리니

졸지에 접촉해버린다는 그 자체가 전도당해버리는 꼴이 되는 셈이니
아무도 감당 못하는 십자가이다.

기록된바 십자가는 완료로써 증거 되는 식이다.
유일한 단 하나의 완료는 십자가 뿐이다.

마치 단 한명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신바 되었듯
즉 상대적인 여러 이스라엘에게는 보내신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 만이 예수님이 전부를 걸어버린 순종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는 되바라지고 뻔뻔하며 싸가지 없는 부정성 곧 불가능성을 이룬다.

유일한 사랑은 십자가로써 이루셨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이라는 죽음은 실재계로써
십자가의 사랑만을 즐기고 누릴 뿐이다.

(마 3:17,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벧후 1:17, 개역)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목사말을 들을 필요 없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자 없다고했다.

(요일 2:27, 개역)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오직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예수님의 말만 들으면 된다.

왜? 편애를 받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며
그 분만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 사랑을 완료 했기 때문이다.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 어떤 누구도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자는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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