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고전 9:23, 개역)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 9:24, 개역)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5, 개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6, 개역)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27, 개역)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마침 어제 설교에서도 나왔듯이
담배회사가 담배피지말라는 경고 문구를 담배에 넣는다.

까주(까다로운 주체)를 1년간 멍때리면서 뭐 이래 어렵노 싶어서
반을 읽는데 끙끙거리다가 나머지 반은 수월하게 읽혀졌다.
(라캉을 알고 싶어서 번역이 잘 없어 지젝을 통해 알려고 했더니만
이 놈은 헤겔리안이라서 더 복잡한 헤겔을 어쩔수 없이 보다가 뒷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라캉이 나왔다.
들뢰즈 니체는 일방통행인데, 부정의 철학은 모든 철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니
그 수수께끼(화행)의 방대함 때문에 온데 다 간섭함에 있어서 혀를 내 둘렀다.)

뒷부분(까주 631p 앎과 행위의 틈새-선을 넘어서)에 나온
독일 담배회사의 경고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나체촌에서는 성폭력사건이 제로 이다.
오히려 옷을 입으면 그것을 벗기고자 하는 금지된 것을 욕망케 한다.
욕망이 주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말이다.

십계명도 같은 원리이다. 성경이 이런 원리이다.
하지 말라 하면 더 하도록 유도한다.

뭐 담배피지 말라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반항하고픈 영웅기질이 발동하게 된다.
이것을 오이디푸스 남근주의를 주제로 다루면서 책에서 언급한다.

할례란 결국 발가벗겨버리는 것이다.
대상으로 잡았다가 도리어 대상으로 취급당해 버리는 것이다.

손할례로 취급할려다가 도리어 마음판의 할례를 당할 판국이다.(여기에 바리새인이 걸려든다.)

이것이 십자가다.

그래서 상실의 상실이라는 두 죽음을 격도록 한다.
그 두 죽음 사이에서 참된 희생을 보라는 취지이다.

그 불가능성을 향유하라 이다.

불안이라는 공포는 그 불안으로 들어가버리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포를 회피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공포의 노예가 된다.
(불안은 욕망의 대상 원인이 결여되어 있을때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결핍자체를 상실할 위험으로 인해 욕망의 소멸이 불안을 초래 하는 것이다. - 삐딱하게 보기  26p ? 그래서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단절)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근친상간적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반대로 그 대상의 근접성이다. 292)

죽음이 그런 식이다.

할례는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반드시 전쟁을 치르는 그 죽음에서
다시 두 번의 죽음인 할례를 치르라 하신다.

할례(단절)를 단 한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전쟁에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다.

전쟁에 무관한 이 할례가 왜 이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일까?

그것은 두 죽음 사이의 틈새에 있는 거룩이 목적이지
전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엡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보이지도 않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
무슨수로?

죽은자를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고자 죽으러 죽을 전쟁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에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로 아들을 보내심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화목이라는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전쟁은 멈춰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사귐만을 목적으로 전쟁은 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그 틈새(3일이라는 간격)에서 사랑이 다 이루어졌다.

이 사랑을 가지고서 온 세상 구석 구석을 들이대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너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보냈다는
그 사랑만 앞장세우는 것이다. 어깨에 매고서...

바로 이것을 기독교도 유대교도 바리새인도 악마도 금지했던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금지한 이 십자가.
교회도 거부하는 이 십자가.
기독교도 금지한 이 십자가를

유일하게 자랑하는 십자가로 십자가 스스로가 외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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