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거부하는 믿음 (십자가 사랑을 거부하는 십자가의 사랑)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서 다 이룬 율법의 완성인 사랑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제목 부터가 뭔가 이해가 안된다.

믿으라는 소리인지? 믿지 말라는 소리인지?


율법의 행위를 하라고 한 것이 성경이였는데

이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다 라고 성경이 외치고 있다.


믿음에 주목케 만들어버리고서는,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도록 다른 답을 준 적이 없게 하고서는,
그 믿음에 전혀 다른 믿음을 쳐다보라고 한다.


율법에 전 인생을 올인케 만들어버리고서는, 도저히 율법에서 빠져나올수 없도록 다른 거룩을 준 적이 없게 하고서는, 그 율법에 전혀 다른 거룩을 쳐다보라고 한다.

배 배배  배신이야 배신 ㅋㅋㅋㅋㅋ


믿음에 율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내가 문제다. 인간이 문제다. 육이 문제다.

(그런데 뒤에 오는 믿음 때문에 졸지에 핑계거리가 생겨버린다.

아 모조리 다 예수님 때문이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짚어 씌운다.

이 뒤짚어 씌우는 상황을 종말이라고 한다.
자기가 마귀 괴물이면서 괴물을 보고 공포를 느끼는 ....

내부로부터 온 괴물 ....

마귀의 얼굴인 자기자신의 얼굴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나)을 거부(쪼개는 단절)하는 믿음(예수님)으로 보라하신다.

율법을 거부하는 율법의 완성을 보라 하신다.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보라 하신다.

찬양을 거부하는 찬양을 부르라 하신다.

기도를 거부하는 기도(성령의 탄식)을 들으라 하신다.

금식을 거부하는 금식을 누려라 하신다.
회개를 거부하는 회개를 보라 하신다.
눈물을 거부하는 눈물을 보라 하신다.

제사를 거부하는 제사를 드려라 하신다.

섬김을 거부하는 섬김을 받으라 하신다.

봉사를 거부하는 봉사를 행하라 하신다.

교회 다니기를 거부하는 교회

신앙을 포기하는 신앙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  진심으로 ]를 포기하는 신자


즉 그 어떤 것도 나의 대상물이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대상으로 삼을 것들이 단 한 개도 없다 말이다.


도리어 기도로부터 대상물이 되어 기도당하는 것이다.

금식 때려죽어도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금식의 대상물이 되어 금식당하는 것이다.


의심이 너무 너무 많은 천성적으로 의심이가 별명인 자를

졸지에 [믿음이]가 [의심이]를 대상물로 찜하는 바람에
의심이가 믿음이 될 줄 아무도 믿겨지질 않아서 도대체 널 누가 건드렸느냐고 묻는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분을 찾는 것이다.


천하의 겁쟁이가 졸지에 거룩전쟁의 대상물이 되어버리니 기드온의 칼이라는 별명을 받듯

전혀 칼을 쥔적 없는 칼의 부재에 저들이 의식하는 칼을 받게 된다.


오히려 칼을 쥐어버리면 전혀 거룩전쟁이 아니게 되는

인간의 육과 전혀 무관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이 펼치는 마당에

앞의 믿음 아니요, 뒤의 믿음이 옳았다고 외치는 것이 복음이다.


십자가의 사랑이 반드시 인간의 대상물이 되는 환경을 깔아놓고서는

그것을 다시 전복시켜 그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요 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라고

앞 과 뒤의 차이성의 간격을 분명히 또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뒤의 십자가의 사랑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십자가의 사랑을 대상으로 삼아 모든 것을 누려도

뒤의 십자가의 사랑이 오심 앞에서

무용지물 당해야 함을 보여짐으로써

주님 스스로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은 앞에서 한 너희가 펼친 사랑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단다. 뒤에 말이다. 앞 과 뒤 라는 가르는 [여기]라는 졸지에 장소개념이 나온다.
이런 시공간 개념이 땅의 일(사람의 일)과 차이나는 하늘의 일(하나님의 일)이
바로 화목제물로 아들을 보내심으로 차이내시는 것이다.


참 얄밉다. 진작 카지.

여기? 어디? 앞에서 너가 한 사랑과 차이를 두는, 간격을 두는, 단절된,

거절, 거세해 버린,


반드시 뒤에 온 사랑에 있다.


결국 뒤란 말은 앞의 것을 염두한 것이다.

앞의 것은 날라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삭제 당해야 한다.


세례요한은 그가 흥하기 위해서 필연적인 자신의 패함을 외쳤다.


그 정도로 영광 스럽기 때문에

감히 입도 못 띨 정도로 너무 너무 영광스러워

마땅히 누락 당해야 함은 백번 천번 마땅한 천부당 만부당이다.


(요 3:30, 개역)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막 1:7, 개역)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 뒤에 오신 분 때문에 앞서서 총알받이가 된 것이 영광스럽단다.


도저히 감당 못할 일에 참예 된 것이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단다.


이 불가능성(죽음, 심판, 거절, 단절)을 즐기는 것이


믿음을 거부하는 믿음 이라고 감히 건방지게 생각해 본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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