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굴복 시키는 나의 그릇(청년사울) (행 9: 9-22)

2013년 3월 8일 금요일 오후 12:25:27


(행 9:9, 개역)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행 9:10, 개역)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행 9:11,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개역)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행 9:13, 개역)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행 9:14, 개역)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행 9:15,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6, 개역)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행 9:17, 개역)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개역)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 9:19, 개역)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행 9:20, 개역)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 9:21, 개역)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행 9:22, 개역)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인간은 저마다의 개인 역사가 있습니다. 즉 주관적인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개인의 역사 속에서 유익이 될만한 것을 뽑아서
인간들은 역사책을 만들어 냅니다. 사회와 국가에 위협이 되지 않는 지혜로써 역사화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좋은것만 뽑아서 말이죠.

즉 개인 역사가 모여서 객관화 시킨다고 해서 객관적인 역사인가? 아니죠.
결국 주관적인 역사인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힘에 의해 수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독도를 놓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독도 하나를 놓고 서로가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을 예로 봅시다. 모든 종교마다 결국 천국을 놓고 서로 자기의 종교가 천국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의 역사를 객관화 시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모든 나라가 그럴정도이니 인간의 개인 역사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개입이 졸지에 생겨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객관적인 지혜라고 그렇게 우겨 본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저 마다의 나라가 우겨본들,
예수님의 개입 앞에서는 비로소 그것이 다 죄악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졸지에 생기게 되는 겁니다.

지금 현재의 4000년의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유대교라는 지혜로 집약할수 있습니다.
이를 더 변이 시킨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신을 빼 버리면 불교가 인간의 지혜의 최고봉입니다. 동양철학은 일종의 처세술 트릭입니다. 나쁜 의도의 트릭이 아닌,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다 부정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부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치유철학 생성철학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해방 시킬수가 없는 겁니다. 반면 서양철학은 동일성입니다. 신과의 합일 하나됨입니다. 플라톤의 재해석 반복인 겁니다. 그래서 신을 개입 시키는 겁니다.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신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구원시키는 신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주 특이한 청년사울이라는 개인의 운명을 가차없게 뒤짚어 엎어버리는 자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대표자이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청년 사울을 말입니다.

분명 어제까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자입니다.
말이 핍박이지 사실은 이대로 갔다가는 유대교가 무너질 판국이기 때문에
그 반대입니다. 핍박자 예수와 그 무리들을 척결하는 겁니다.

누가 더 사회에 위협적입니까?
유대교 입니까? 예수 입니까?청년 사울의 시선에서 봐야 합니다. 누가 종말적입니까? 역사를 무너뜨리는?
사회와 국가와 인간에게서는 예수가 위협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의 기준에서는 인간이 위협적입니다. 마귀의 하수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는 전혀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척결하겠다는 자 곧 청년사울과 같은 자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개독이다 라는 안티만 될 뿐이지
스데반 집사를 죽일정도로 사활을 거는 자는 없습니다.
그 정도이면 자신도 욕하고 있는 개독 보다 더 한 놈이 되어야 하니
누가 자기 얼굴에 침뱉는 짖을 하겠습니까?

결국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과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저 장사하기 위해서
예수 라는 브랜드마크를 이용할 뿐입니다.

청년사울이 스데반집사를 죽일 정도로
또 유대 사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사건이 터진다는 것은

뭔가 제대로 건드렸다는 겁니다. 다급할 정도로 위협적(종말,단절)이다는 겁니다. 소통을 깨뜨리니까요. 성전 말입니다. 성전(몸).

그것을 제대로 건드리지 않았다면 구지 사람을 죽일 정도로 극한 상황으로 몰아갈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아무리 독립운동을 펼치는 여러 당들이 있어도
전혀 로마 사회에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괜히 건들려 본들
그들 독립투사 가족들을 조져 버리면
바로 약화 되기 마련이니 말이죠.

예수님은 그런 로마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위협적입니다.
독립운동도 아니다
성전도 아니다
율법 손아귀 쥠도 아니다.
안식일 지키기도 아니다.

모조리 다 죄다 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기준이길래? 어떤 기준이길래 모조리 다 죄냐 라는 겁니까?.

그런데 더 기가막히는 것은 안 알려 주지롱 라고 끍어대니
아주 그냥 매를 버는 겁니다. 그럼 매로 때리고 치워버리면 될텐데
매 맞는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기여이 죽음까지 몰아가는 것은
사실은 유대인이 아니라
반드시 유대인의 손에 죽겠다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인간은 그저 이런 종말의 인물인 인자를 통한 반작용일 뿐입니다. 기껏 반작용. 대처방안.

왜 예수님은 기여이 유대인의 손에서 죽으실려고 하는 것일까요?
마귀에게 장악당한 것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로마인 그리고 모든 인간인데?
그것을 마치 한 놈만 패겠다는 심뽀로 왜 유대인에게만 그렇게 가혹하게
인간의 악마성을 도출시키는 겁니까?

여기에 바로 사도바울이 당첨이 됩니다.
마치 이것은 다윗을 당첨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왕도 마귀들린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이 아니라 다윗왕을 택하시는 것은 무슨 기준입니까?

그것은 바울도 아니요 다윗도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 겁니다.

오히려 바울도 다윗도 이 예수님의 들러리 로써 작용할 뿐이지
정작 그들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것만을 완성하시고자 예수님은 올인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모든 인간을 장악했기에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사망만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저주는 인간에게 조차 해당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정녕 죽으리라 라는 죽음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은 죽음 축에서 들지 못하는
오로지 죽음은 이 분만의 죽음만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 사망의 권세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곧 마귀에게 장악당한 것은
아무리 유대교 기독교 의 하나님을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
그 자체가 마귀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에 믿어대는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종이란 갇혔다는 뜻이며 그들의 주인이 사망이라는 겁니다.

결국 이런 역사성의 배경을 깔고서 묵시라는 종말은 등장하는 것이니
예수님을 드러내는 위한 배경이였던 겁니다.

사도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믿는자를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할수 있는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은 당연한 겁니다. 맞아죽을짖을 했으니 말이죠.) 권세 권력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 청년사울에 대한 트라우마는 대단했을 겁니다. 가족이나 친지 가장 아끼던 사랑하는자 친구 연인 등이 이 청년 사울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을 목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기세 등등한 청년 사울에 대한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저 도망치기 바쁠겁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이 양쪽 진영에서 졸지에 청년사울은 그 경계선에 비로소 놓이게 됩니다.

어떤 원인도 없이
오로지 주님에게 사로잡힌바 되어서
눈이 멀어 사흘 동안 죽음과 접속하게 됩니다.


종말이란 예수님의 죽음과 접속하게 됩니다.
그 죽음을 온통 온 몸에 뒤짚어 씌움을 당하는 겁니다.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라는 하나님으로 부터의 지독한 미움을 온 몸에 된탕 뒤짚어 씌움당하듯

비로소 역사가 단절 된 채
묵시 속에서만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여 뉘 시니이까

너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가 죽인 예수

나의 살인의지의 죽음권세로 죽인 사망한 예수를 비로소 역사가 단절된채 만난 겁니다.


죽음과 죽음으로써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눈이 멀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 속에서 만나야하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미움 속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청년사울에 대한 열성이 온천하에 자자한데
주님이 아나니아를 눈이 먼 청년사울에게 보내려 하니
당연히 아나니아는 역사적인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청년 사울은 이러 이러 한 자인데요?

그런데 주님 쪽에서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에서 나올수 없는
거꾸로 미래에서 덮쳐오는 묵시 곧 새로운 하늘의 일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파악했던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전혀 의미 없습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사람들을 수천명을 죽인 살인마였다 해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백날 설쳐도 주를 위한 도구 소모품으로써만 활용될 뿐입니다.

그래서 아주 아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처형할수 있는 권세를 지닌 자인데요?
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 사람은 이방의 임금과 유대인에게 내 이름을 전할 나의 그릇이다 나의 소모품이다 라고 말입니다.

아나니아는 그 반전의 계기가 된 거점을 알고싶겠지만
그런거 안 알려줍니다.
그러니 매사가 주님의 이름은 우발적입니다. 즉 불가능입니다.
내 뜻을 접지 [거세] 못하는 이상은 상대적인 말씀 스스로가 하시는 일에는 알 길이 없는 겁니다.


여기서 나의 그릇이다 로 반전 된 계기가 된 것은
우리는 다행히도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곧 찾아오심입니다.

그냥 찾아오심이 아닌 핍박받으시면서, 나에게 저주 받으시면서 찾아와 주심인
죽음으로써 죽음이 찾아온 겁니다.

그러니 바울이든 나든 그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 죽음이 될 때 죽음으로써 찾아오신 겁니다.

죽음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자 이렇다면

아나니아 걱정처럼
이 사울이라는 청년은 위협적인 유대인교인 입니까?(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스데반을 죽인)아니면 도리어 유대인을 굴복 시키는 주님의 이름에 부르신바 된 도구, 주의 자녀입니까?


바로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인 단어

굴복도 아니요
나의 그릇도 아니요
결박 권세도 아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라는 의미가 나오는 겁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구하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는데 졸지에 사도바울은 찾아냄이 되어버림을 위해
소품으로써 동원되는 장기알로써 작용한 겁니다.

그러니 장기알이 뭐가 무섭겠습니까?

도리어 이제 유대교의 충신이였던 사도바울이 역적이 되어서
유대교에 골치 아픈 인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바로 주의 이름 때문이다는 겁니다.

흔히 이방인의 사도라고 바울을 말하지만
정작 이 이사야 65장의 말씀의 성취로써 바울은 이방인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이것이 처음자리입니다. 빈지라. 거절 거세의 빈터에서 참 이스라엘이 그 틈새에서 나오는 겁니다. 처음사랑인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은혜가 덮쳐지듯 말이죠.

그러니 이것을 이방에게도 즉 이방의 임금에게도, 또 유대인에게도 외치는바 될 때에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이런 구조를 종말의 판대기, 배신 이미지 라고 하는 겁니다.
뒤짚어 씌워버리니까

양의 짖만 한 사람에게는 염소 짖만 했다고 뒤짚어 씌워버리고
염소 짖만 했던 사람에게는 양의 짖만 했다고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구조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 비유는 더더욱 해석불가능만으로써 나타나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탕자의 비유 보세요. 아버지의 사랑은 역전으로 팔을 어긋맞게 함이

바로 이 종말성 때문인 겁니다. 단절성.

자 이제 거꾸로 됩니다. 사도바울을 겁내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같은 주의 이름 때문에 졸지에 원수가 친구로 변해 버린 겁니다.

아무런 가치 없어 보이는 [이름] 이라는 기호가도리어 사람을 하루 아침에 재배치를 통해서 장기알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에게서 사도바울이란? 배신자  레알? 레  ~~알  인 겁니다.

주의 이름이 벌린 사건으로써 바울은 배신자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을 굴복 시키는 주의 이름의 무기로 도구로 사용되는 겁니다.

(행 9:22, 개역)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자 이렇게 되면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사울을 죽일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제대로 건드려졌기에 이 위험물 폭탄 무기를 제거해야만 하니까 말이죠.

자 이렇게 복음의 작용 앞에서 인간의 반작용을 유발케 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니
인간은 유한한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작 해 내어야 합니다.
기껏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청년사울도 그러했듯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입니다.

이것을 뒤짚어 씌우는 사건이 바로 성령활동의 사건인
종말 사건입니다.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구 하나 죽이고픈 마음을 가진적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한 것이
어떻게 살인의지로 귀결이 되느냐 말입니다.

이거 연구 해봐야 합니다. 너무 너무 중요하지 않습니까?
수 많은 인재들 다 모여서 이거 한 번 연구 해 봤으면 합니다만
누가 돈 안되는 이 죄 성에 연구할 자 아무도 없을뿐더러
답도 안 나옵니다.

어떤 책 제목이 몇 분 만에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정신과의사의 책 제목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더 심각합니다.
0.03초 만에 살인의지를 표출케 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지독한 편애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일한 것이 없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0.03초만에 그 귀한 목숨값 피로써 용서를 해 주셨듯이

지독한 미움 또한 원인 없는 결과로써 0.03초 만에 살인의지를 뒤짚어 씌우는
진노를 퍼붓는 것이 말씀의 세계인 겁니다.

여기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한 사람 바울이 당첨 되었고
나머지 바리새인은 상대적으로 당첨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주의 이름을 말하기 위한
양 쪽으로 갈려지는 기능으로써 작용한 겁니다.

결국 지독한 편애든 지독한 미움이든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 사람의 행적 경력 마음 됨됨이 등등 아무런 관련 없습니다.

형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 되었고
동생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된 것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던 겁니다.
 
자 지금 주의 이름이 펼치는 기능에 의해서 두 패로 갈려지는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는 죄인 이면서 교회 일 한게 뭐가 죄 냐고 하는 쪽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회일이든 가정 사회 일이든 뭐든지 죄 뿐이였다고 하는 쪽으로 갈려지는 것은

주의 이름이 벌린 결과로써 나누어 진다는 겁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거룩한 일을 했는데 뭐가 죄 냐 라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인데

정작 주의 이름의 개입이 졸지에 그 순간 새로 창조 된
아니 가장 적나라 하게 표현하자면 방금 급조된
뭘 해도 죄 밖에 안 나오군요 라는 자가 꼭 생겨버리니
졸지에 두 개로 이중분절화 되더라 말이죠.

이 근거로 주의 이름이 자신의 일함에 스스로 영광을 받더라 말입니다.

바로 이 속에, 이 거룩에 청년사울이 휘감겨서

후딱 후딱 급조가 되어서 방금전까지만 해도 스데반집사를 죽인 핍박자가
졸지에 나의 그릇이 되어버리는
원인 없는 결과로 나타나 배치 당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을 바리새인들이 노리개로 사용하여 과연 누구의 죄냐 라고 물어 시험했듯이

얼마나 소경을 깔봤으면 노리개로 사용했냐 말이죠.

그런데 역전이 되어 청년사울이 눈 하나 조져 버리니까
사도바울은 꼼짝도 못합니다.

보여야 또 제 2의 스데반 집사를 죽여버릴 것 아닙니까?
그 기세 등등하던 청년 사울 어디갔습니까?

이 만큼 인간은 풀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겁니다.
눈 조져 버리면 급조된 풀과 같고
눈 쫌 뜬다 싶으면 0.03초 만에 스데반 집사 죽일려고 달려들 뿐입니다.

이런 약해빠진 인간을 주의 이름이 나의 그릇으로 삼는다 했을때에
뭘 보고 그릇 삼겠다고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죄입니다.

그 죄입니다.

눈 조져 버리기 진적 까지도 기세 등등하며
예수님을 핍박하겠다는 그 죄

그 죄 조차도 십자가가 그릇으로 삼을 정도로 넉넉한 겁니다.
십자가가 삼아버린 이상 십자가를 취소 시킬만한 인간의 악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인간의 선함이, 거룩한 행함이, 십자가에 덤벼드는 겁니다.

그러든 말든 청년 사울도 꺼꾸러뜨리는 십자가를 본 이상

누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꾈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십자가로부터 굴복 당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구경꺼리가 되었다고 해서
십자가가 취소 되던가요?

오히려 더 넉넉하게 이긴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십자가가 보통 기가 센게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난도질 해 버립니다.

그 십자가의 선봉에 사도바울이 있는 겁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영화였던가요?

너무 끔찍이 아끼던 동생을 보호할려다가
그만 동생 죽었다는 소식에 그 열심히 졸지에 적군의 선봉에 서서 배신자 노릇을 하듯이

십자가는 배신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셔서
예수 핍박자의 선봉자를
도리어 주의 이름을 외치는 선봉자로써 삼아버리는 그릇이 될 때

이것은 인간 개인 사도바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주의 이름이라는 아무것도 아니요
실체도 없어
이미 죽어서 그저 이름 밖에 없는 문자일 뿐이요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가시화 되고
유물화 되듯 사도바울이 그릇으로 작용할 때

그 그릇에 담겨진 주의 이름이 모든 인간의 공포로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청년사울까지 가세하게 되어서
진짜 괴물인 공포는 청년사울이 어제처럼 스데반 집사를 죽인자로써 공포가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
유대인의 굴복 시키는 그릇으로써 나 예수(주의 이름)을 담았다, 휘감겼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공포인 겁니다.

진짜 괴물입니다.

이 공포의 괴물인 십자가의 예수님이야 말로
즉 주의 이름이야 말로

모든 인간의 환상
천국가기
예수믿기
하나님나라 이루기
묵시운동하기
구원이루기

등등의 망상 환상을 깨뜨리는 공포인 겁니다.

이거 깨뜨리지 않는 십자가를 가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참 주의 이름의 그릇이라면
유대인의 환상(메시야사상이나, 선민사상 등등)을 모조리 다 깨뜨려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그 환상을 깨뜨리는 그릇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본인의 환상이 이렇게 깨어졌다 라고 그 당사자로써
범인으로써 포획되어서 나머지 범죄자들은 자수하여 광명찾자 라는 식으로
유대인 속으로 투입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정당성을 외치지 않습니다.
본인이 범죄자 였듯이
지금 범죄자 속으로 다시 투입될 판국에 그딴소리 다 소용없고 먹혀들지도 않는
그저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진짜 사도바울의 입장에서의 오로지 관심사 하나는
십자가로써 저들의 모든 환상을 깨뜨리는 것 뿐입니다.

결국 전쟁 밖에 모르는 십자가에 미친 인간이 된 겁니다.

나에게 전쟁을 제대로 거는 십자가가 아니면 모조리 다 거짓입니다.
십자가의 전쟁만이 나의 거짓된 눈으로 본 환상을 모조리 깨뜨리는 겁니다.
그 십자가 라는 숯불에 눈도 몸도 나도 역겨운 살타는 냄새처럼 지져져 타야
제대로 십자가를 외치는 그릇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짜 십자가의 적은 나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릇입니다.

유대인을 굴복 시키는 나의 그릇 말입니다.

 

주님, 우리는 너무 너무 십자가를 안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휘감겨져서 나의 모든 환상을 깨뜨리고
죽음이라는 그 현실성만 남기고 모조리 다 박살내 주옵소서.
나 라는 환상을 깨뜨리는 그 십자가를 만나는 것
이 죽음과 죽음의 만남만이,
그것이 구원인줄 알게 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