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가 흔들어대는 예수님의 출처 (눅 4: 1-13)


(눅 3:23, 개역)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눅 3:24, 개역)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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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38, 개역)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눅 4:1,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2, 개역)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 4:3, 개역)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눅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눅 4:5, 개역)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눅 4:6, 개역)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눅 4:8,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 4:9, 개역)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눅 4:10, 개역)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눅 4:11, 개역)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눅 4:1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눅 4:13, 개역)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맞기는 맞냐?

마귀가 묻는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라고 묻는 것은

너 예수의 출처가 우리가 아는 그 출처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예수의 출처를 의심하고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의 출처를 도리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곧 선악을 아는 하나님 되어버린 선악나무다.


인간의 출처는 하나님이 아니라 곧 마귀다. 선악이다. 은혜가 아니라 법이다.

물론 마귀가 예수님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듯 바로 마귀 자신이 하나님의 출처이다고 하듯
인간은 마귀처럼 인간의 출처가 하나님의 출처이다 라고 우기는 식이다.


마귀는 인간의 노력(하나님이 되고자, 영웅)으로 이룬 부산물로써의 신앙 곧 신을 주장한다.


적어도 신이라면 이러 이러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적어도 이러 이러한 자 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런 마귀의 주장에 어느 누구도 반발할 자가 없다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지 않는가?

곧 모든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고 신앙하며 이런 것들을 바라는 것은

마귀가 간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 어떤 인간도 예외가 되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만이 반발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 동안의 구약에도 나오지도 않던 마귀의 속내를

속시원하게 밝히고 있다.


즉 예수님이 마귀의 출처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이 기정사실화 된 법에 예외가 없는데

예수님은 그 법을 보란 듯이 위법스럽게 어겨버린다.


이것이 바로 자유다. 즉 복음 기쁜소식 희년 은혜의 날이다.


마귀가 고소하고 송사하는 그 위법성에 예수님은 거침없이 하이킥 하듯 그 위법성에서 보란 듯이 자유하신다.
이것이 막사신다는 모습의 자유성이다.


자유라는 진리는 이런 과잉된 제스쳐에서 온다.
이 오바액션은 법 보다 위법적인 사랑에 올인하는 무모함이다.


얼마나 자유하시면 그 위법성에 당당하게 뛰어드신다.
(일부러 주님은 안식일에 안식을 어기듯이 바리새인 코 앞에서 안식일에 일 하신다.
마치 구약에 사울왕이 지켜보는 시선의 영역에서 보란 듯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버리듯이 말이다.
이 얼마나 막 사는 모습인가?)


마귀는 법을 남이 아닌 하나님이 규정했는데 그 하나님이 그 법을 위반할 리가 없다는 주장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법을 보란 듯이 위반해 버린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깨뜨리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위반해 버린다.


이런 예수님의 이상한 행동(과잉된 제스쳐)인 곧 믿음(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 어리석은 지혜)에


자 이렇게되면 마귀가 더욱더 날뛰게 된다.

마귀는 승산 없는 게임에는 절대로 안나서는 법이다.


넘어져야 가치가 있다.

이미 넘어진 자들은 하등 가치가 없다.


가치가 있는 것에 마귀는 자신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처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어 버린다.


곧 몸을 치는 것이다. 욥을 치듯이.


이 출처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못 박기이다.육의 단절이다.


기껏 마귀가 하는 짖은 육의 보존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이 허락한 선악의 육이라는 선물을 거두어 가버리는 것이다.
십자가 조차도 지식화 시켜버리고 법화 시켜버리면 그의 출처는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떠들어 대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출처가 하나님이다 라고

그 허리의 출처를 주장한다면

마귀가 과연 가만히 두겠는가?


이런 마귀를 이길자가 없다.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권력이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부으시면(남녀노소) 이 출처(성령) 때문에

죽어도 상관없는 그 어리석은 십자가의 사랑에 족하는 것이다.


이 출처가 바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조건 용서하는

처음사랑이다.


이 처음사랑을 마귀만이 의식한다. 즉 아무도 의식 안한다.
십자가는 예수님만 의식한다. 그래서 마귀는 이 십자가를 어찌하던지 변질 시킨다.

은혜로 모든 허물을 덮고자 단번에 흘리시는 피라는 생명은 손 대지 못한다. 막지 못한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피다.


적어도 의식을 할려면

그 처음자리의 출처에 함께 있었던 자라야 의식을 한다.


인간이 어떻게 창세전으로 돌아갈수가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어떻게 유한 적인 존재가 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없었던 존재하기 전의 비존재 세계에 있을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마귀만이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마귀도 모르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


바로 이 처음자리에 대한 공격 곧 흔들기가 바로 마귀가 이 분이 참되신 메시아다 라는 반증으로 작용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이 마귀라는 피조물 또한 동원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마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이 알았음에도 배제가 된,

그 처음자리라는 처소를 예수님은 감히 건방지게 위법스럽게 마련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성령이라는 원인 없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어지는 용서라는 사랑의 사귐을

예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출처인 그 처음자리

창세전의 존재 이전의 비존재였던 그 처음자리를

예비하시고자 창세전이라는 그 시간을 전복 시키고

공간마저도 전복시키시고자

십자가라는 처음자리를 지금 이 순간 이 지옥의 나라, 마귀의 나라, 인간의 나라에

못 박아 버렸다.


이 균열로 인해 그 틈새에서 처음자리라는 처소 곧 성령의 시대가

신나는 종말로써 펼쳐짐으로써


내적 할례자가(성령으로 인한 마음판에 할례 : 외부인이 할례 곧 심판하는 육의 단절, 끊어냄)

그 틈새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십자가가 마련한 성령이라는 모태이다. 그 처소를 마련하셨다.


그러나 그에 반해 반드시 외적할례자(손할례: 인간이 인간을 끊어내는, 육인 자기가 육을 끊어내는)가
성령세례(처음사랑)을 시기하는 자로써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다.


왜 예수님 자신이 부으신 성령 곧 새언약을 부각 시키는 주의 주 되심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다.
얼마나 제대로 된 사랑이면 저들이 반응을 하겠는가 말이다.


바리새인(외적할례)이 성전에서 외적인 껍데기를 나열한다.
십일조를 드리며,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며, 봉사 충성 전도 선교 등등
그야말로 똥덩어리 배설물을 온 몸에 칭칭 감아서 나열한다.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러나 세리(내적할례 : 십자가라는 처음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난 죄인)는
성전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다.
뭘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그래서 쳐다볼 것은 오로지 처음자리 밖에 안되는,

그 긍휼을 바라보고 있다. 즉 단절성을 제대로 격는 것이다.
이 간격을 실감하면서 그 간격이라는 빈공터(불가능성)를 누리게 된다.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 봐도 외적할례자(율법지키는자)는 외적으로 표식이 분명하지만
내적할례자는 아무리 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이 없다.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꺼리가 없다.
이 부재성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로 작용하는 것이다.


즉 그 불가능한(아무리 봐도 죄인: 의인의 구석은 단 하나도 없음) 긍휼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가능한 것만 나열한다.


성전이란 기도하는 집 하나님의 집이다.

성령의 전인 성도는 이런 무능의 자리 곧 처음자리를, 그 출처만을 뻔뻔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뻔뻔스럽게 감사하면서 막먹어버린다.


이것이 얼마나 불법적으로 보이겠는가? 

바리새인은 주의 살과 피를 감히 먹을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자신의 몸을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막굴릴수가 없다.
마귀의 눈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시험합격만 챙겨먹는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악마들인 것이니 이들을 송사하는 몫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지금도 또한 동일하다.

마귀(바리새인)의 주장은 인간을 위해 긍휼(십자가의 용서)이 동원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자기를 위한 예수 곧 우상)
세리(무능)를 앞세우는 예수님은 그 반대로 긍휼 때문에 인간이 동원되는 판국이다는 것이다.

즉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다. 이 사랑에 일체 양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격을 벌린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열이 되고 난 뒤

곧 예수님의 허리 곧 출처 반차(계열,반열,순차,차례,순서)는 하나님이다.


곧 희년의 완성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의 아버지요 신랑이요 임금은 예수님이다.


마귀는 희년 곧 기쁜날 은혜의 날의 완성은 적어도 이런 하나님이여야 한다는

인간들에게 전제된 곧 마귀가 심어버린 하나님의 조건에 부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이런 조건으로 

적어도 성도는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둥

예수는 이러 이러 해야한다는 둥

목사는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둥

예수 믿었다면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둥 등등의 주장과 같다.


그럴꺼면 말라꼬 성령이라는 처소를 예비 했겠는가?

그 조건만 구색으로 갖추어 버리면 대중은 좋아할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오늘날 대중은

교회에 가든, 절간에 가든, 그 어떤 사회 조직에 가든

심지어 최소의 단위인 가정에 가든

또는 가족이 없는 고아에게도 친구 속에 가든


이런 조건들은 놀랍게도 작용한다.

적어도 인간 됨됨의 조건이요

적어도 하나님 됨됨이의 조건이다.


고아에게는 기업이 없기 때문에 고아 취급받는다. 죽은자 취급 받아야 한다.

곧 경제다.


경제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어린아이에게 무슨 돈으로 따지냐  얼라일 뿐인데? 라고 하지만

아버지라는 든든한 기업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짖밟아도 아무도 욕할자 없다. 보호자가 없는데 뭘?


즉 모든 인간들이 다 하나씩 옆구에 차고 있는 하나님을(보호자:기업)

고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나서서 나무래줄 자가 없다.


이 부재성으로써 마귀는 고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말로만 메시아 하나님이라고 하지 말고

믿음만 있다고 하고서는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약 2:14, 개역)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개역)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약 2:17, 개역)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개역)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 2:19, 개역)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귀가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에 근거해서 증거한다.


그러나 고아에게 돌을 떡 덩어리로 만들어 그 배고픔을 배불려 주어야 할 것 아닌가?

기업이 없는 인간은, 곧 고아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조건이 아예 없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이 조건에 맞지 않는 자는 버림받아도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데 마귀가 변호하고 나선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눅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그것은 육이라는 것이다.

즉 고아란 고아 자신을 위해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아를 위해 희년이라는 은혜의 날,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을 위해, 희년을 위해, 기업을 위해, 은혜를 위해 고아가 있는 것이다.

고아가 동원이 되는 것이다.


즉 기쁨이 새롭게 고아 라는 죄인을 창조하시겠다는 것이다.


마귀는 거꾸로 해석하는 거짓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약자를 보호해야하는 것이 율법이 아니냐 라고 마귀가 주장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율법을 강화 하신다.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 약자를 동원한 것이다.

사람을 위해 사람이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게 아니라
말씀을 위해 사람은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무능을 위해 전능이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을 위해 무능이 동원이 되는 것이다.
그야 말로 무능은 무능이다.

모세에게 나타난 상한심령 곧 온유를 위해 구스여인이 동원이 되는데
이 무능(구스여인)을 무능(모세 누가 미리암)이 핍박한다.
가난한 자를 가난한 자가 더욱더 싫어하기 마련이다.

왜? 새롭게 창조된 막쪄낸 무능이 무능이지(알수 없는 해석불가?)
어제까지의 무능은 도리어 방금 창조된 새무능을 시기하도록 되어 있다. 해석불가이기에.

어제의 탕자는 오늘 새롭게 창조된 탕자(죄인 중의 괴수)를 싫어하기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 새롭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롭기에 미움을 저절로 이유없이 유발한다.
곧 창조는 비밀이다. 창조론을 저마다 믿고 있는 자들에게서 오늘의 새창조는 창조론자들에게는 거부대상이 된다.

새롭게 악마를 규정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물이 상대적으로 창조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창조를 위해 피조물과의 차이가 나타나듯이.

매일 매일 죄인을 새롭게 창조한다.


사물이 곧 떡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떡을 위해 인간이 동원이 되는 것이다. 곧 말씀을 위해 사람은 동원이 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인간은 무시 속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처음자리요, 처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떡이 동원 되어 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감사에 인간이 동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세계요 곧 비밀 되신 예수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말씀에 의해 떡도 사람도 배치 된 것이다. 사물은 그것을 아는데 왜 인간은 거꾸로 생각하느냐 이다.


마귀는 자신의 공격성으로(말씀 거부) 도리어 들통나게 되었다.
괜히 건드렸어 괜히 건드렸어 ~~~~~~


바로 바로 바꿔버리며 그 변신에 두 번째 말씀 공격을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한다.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다.


(눅 4:5, 개역)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눅 4:6, 개역)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님의 가치를 높여주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마귀는 예수님 마저도 자신의 방식으로 그 가치를 높여주겠다고 나서는지?

마귀의 노력이 가상하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의 가치를 높여줄테니 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라고 나온다.


맞다. 우리는 마귀에게 갇혀 버렸다.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정치적인 조건이다.

정치란 간택의 문제라고 한다.


곧 섬김이다.


(눅 4:6, 개역)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원하는 자에게 준다는 간택 곧 선택에 대한 문제는

그 정도로 섬기겠다는 임금의 선택에 의해 간택 되는 것이다.

너가 그런 왕이 되어라

나에게 절하면 그런 왕이 되도록 해 주마 라고 마귀가 나온다.


예수 너야 말로 내가 보기에 가장 섬기는 일을 잘하는 임금 답다

내가 너를 임금 삼아 줄테니

모든 천하 만국을 나 마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것

너가 나에게 절하면 나는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주겠다.

나의 간택을 받아 들여라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눅 4:8,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섬김이란 정치는 주 너의 하나님께만 나온다는 것이지

너가 하나님께 받았다고 나오는게 아니다는 것이다.


즉 선택 곧 구원은 주께 나오니

구원은 칼이나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시 37:39, 개역)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욘 2:1, 개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욘 2:2, 개역)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욘 2:3,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4,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욘 2:5, 개역)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욘 2:6, 개역)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욘 2:7, 개역)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욘 2:8, 개역)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욘 2:9, 개역)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주님의 섬김은 환란 곧 전쟁때에 비로소 보인다.

구원은 오직 환란 때에 누구로부터 오는지?

그 질투하심이 맹렬하기에

감히 칼 방패 따위가

여호와의 질투 곧 사랑을 대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섬김을 이미 있는데 이 섬김을 누가 막을수 있는가? 선물인데?

딴 섬김을 구하겠다는 자체가

섬김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한(우상) 섬김만이 섬김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즉 주님의 섬김 때문에 곧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들이 동원이 되지

인간들을 섬기기 위해서 예수님이 동원된다는 등의 주장을 마귀가 하는 것이다.


예수 너도 칼과 창(방패), 금과 은을 받아야지 하나님을 섬기지
(모든 것을 받았으니 모든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

그 권력을 받아 구원자라는 임금, 메시아라는 구원자의 노릇을 할수 있다. 절하라.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마귀가 대신해서 콕 찝어서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맞다 우리는 예수님께 늘 이런 기도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독을 달라고 해서 독 주는 부모 없다고 하신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금과 은 없어도, 칼과 창 없어도

다만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라 라고 하신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째로 흔들어대는 그 출처흔들기 곧 처음자리 흔들기는


(눅 4:9, 개역)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눅 4:10, 개역)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눅 4:11, 개역)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성전 꼭대에서 뛰어내려라 라는 것이다.

유명한 가스펠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너를 상치 않게 하시며 라는 노래를 부르며 마귀가 다가온다.

오늘 설교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너 사랑 받는다메?

그 사랑 받는지 안받는지 우리에게 보여달라. 

사랑받으면 뛰어내려도 안다칠꺼고

사랑안받으면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안 받쳐 줄꺼 아니냐


독일 담배회사의 유명한 광고 문구

많이 피면 해롭습니다. 라는 말 자체가

오기를 작동케 만들어 버리니

해로운줄 알지만 나는 그래도 피워버린다 라고

광고 문구의 속임수에 말려드는 것이다.


즉 종교성(기적)인데 너가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면서?

진짜 너를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바람 피워 보면 알 것 아니냐?

용서해주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고

용서 안해주면 남편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야 라고


그녀를 시기하는 동네 아낙들, 친인척들, 학교 여동창들, 교회 여전도회 집사들이

자꾸 자꾸 꼬득이는 것이다.


이렇게 과부처럼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 과부로 취급당하지 말고

시험해 보라고 주변에서 들들 뽁듯이 뽁아댄다.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눅 11:30, 개역)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라는 악마소굴이다.

아무도 여기서 못 빠져나온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눅 4:1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나에게 선한 분인지 아니면 악한 분인지?

아니면 내가 주님에게 선한 자인지? 나는 악한자인지?


간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자꾸 연민케 만들지 말고 (자기를 뒤돌아 보는 자기를 쳐다보지 말고)

미쁘신(그런 나를 아예 밟아버리시는 든든함과 안정감) 주님의 피 흘리심만 보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타작 마당이 정해졌는데 누가 꾀더냐?


그런 것들은 종말의 심판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여호와의 불을 통과하지도 못할 것이다.

금이나 은도 종말때에 나를 건지지도 못하는 돌덩어리일 뿐이고

내 힘과 능으로 봉사하고 섬겼던 것들도 사도바울이 말하길 배설물일 뿐이며

창과 방패가 임금의 자리를 높여주는 것이 임금답게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구원이 아니라

마지막 종말때의 전쟁(영적전쟁) 때에는 창과 방패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고장난 고철일 뿐이다.


마귀가 흔들어대는 예수님의 처음자리는 흔든다고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출처로 인해 도리어 흔들림 당할 판국임을


마귀가 흔들려다가 도리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실 정도로

성경말씀은 미쁘시게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다.


그 정도로 질투가 강한 주님의 사랑이니


걱정 말아라 이다.

(합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주께서 보좌에 좌정하신다는 증거가 땅이 요동함이듯
땅이 흔들림은 주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땅은 떨도록 되어 있다.

(시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습 3:17, 개역)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미쁘신 주님을 우리에게 주셨다.
마귀가 이기지 못하는 이미 승리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주셨다.
그저 용서 받는 것 밖에 없다. 7 곱하기 70의 무한대 용서 말이다.

우리가 대상물로 삼을수 없고

도리어 이 미쁜 주님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이 사랑으로 밀어 붙이신다.


주님은 처음자리인 십자가만으로 다 이루셨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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