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과 거짓 선지자 엘루마(박수) (행 13: 1-12)



(행 13:1, 개역)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개역)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개역)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4, 개역)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 13:5, 개역)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행 13:6, 개역)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행 13:7, 개역)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행 13:8, 개역)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행 13:9, 개역)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10, 개역)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11, 개역)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행 13:12, 개역)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먼저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 스스로가 활동함이지

인간의 보탬으로 인해서 활성화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베드로가 주의 이름이 왕성화 되는 것에 일체 도움이 되던가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도리어 베드로가 새롭게 그 주의 이름으로부터 침노 즉 침략당함으로써

베드로는 공 차이듯이 차임을 당함으로써 주의 이름을 새롭게 매일 매일 인식해야 할 판국입니다.


자력으로 믿을 재간이 심지어 사도 베드로에게서 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활동인 겁니다. 그것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사도 라는 겁니다.

결국 오늘날 목사 개념을 가지고서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다는 미명아래 사도와 같이 본다면

완벽하게 정반대의 모습인 겁니다. 즉 은사자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정말 정말 아무것도 한게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다 했다는 것만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라는 부재성입니다.

주의 이름 자체가 부재입니다. 없습니다. 없는데 마치 있는 듯이 활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계적인 언어로 있다고 해야할까요? 없다 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은 그것조차도 일체 우리의 권한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이상스럽게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내 입술이요 평상시대로 내입술을 내가 말해서 늘 내가 재잘 재잘 거렸는데

주의 이름이 즉 보이지도 않는 주의 이름이 떡 하니 나타나면 졸지에 평상시 내 입술이였던 내 입이 지멋대로 움직이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분명히 내 신체에 붙어 있는 내가 주인인 내 입술인데

마치 다른 주인을 만난냥 지 멋대로 주인은 나를 배신 때리고 그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더라는 겁니다. 내 몸에 붙어 있으면서 말이죠.


이것을 철학적으로 분리된 거리감을 느낀다고 표현합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오인 또는 배설(분리)경험 또는 모순을 격는 간격(틈)이라고 합니다.


그냥 우리들이 평상시 쓰는 용어로는 귀신 씌였다 라는 것처럼 뭔가에 씌였다는 겁니다.

내 신체인데 내 신체가 아닌 이질감

분명히 어제까지는 내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자부 했는데 오늘은 전혀 낯설은 주님이니

도통 누구신지 몰라서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거리감 단절성 이라는 겁니다.


성령은 바로 이런 경험을 우리에게 유발케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오인 또는 배설기관(불임여성) 또는 과잉제스처 또는 실수 또는 얼룩(찡그림) 또는 낯설게 하기

또는 성경에서는 이것을 걸림돌, 거리끼게 하는 어리석음, 미련함, 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딧히는 돌입니다.


십자가는 없음 곧 [무]이지, [있음]이라는 생산기관이 아닌, 배설기관입니다.

그래서 두 번 점을 찍습니다. 한 번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점 점 점 


결국 오늘날에 유행했던 모든 성령 운동은 다 사기입니다.

성령 자체가 포착이 불가능한데 마치 바리새인(유대인의 대표성)의 묵시운동처럼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수 있다고 여긴다는 자체가 이미 성령을 훼방하는 겁니다.

생산기관으로 곧 의인으로 출발합니다. 죄인이 아니라......


왜 성령훼방인고 하니 성령을 마치 자신들이 소유한냥 기득권을 쥔냥 놀랍게도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겁니다.
알고보니 성령을 위한 짖은 하나도 없고 교회의 부동산만 확장 시킨 겁니다.

아무리 부동산 확장시켜 본들 주님께서 자본주의를 더욱더 키우시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리어 빚으로 다 변하는 겁니다. 괜히 교회 키워가 다들 파산하는 꼴인 겁니다.


지난 시간의 베드로를 죽일려고 한 헤롯의 모습과 동일한 겁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바로 같은 양상인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동일합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부재성(빈공터)이 활동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마귀의 활동이 동반이 되어야 하는데 마귀의 활동은 놀랍게도 항상 인간의 편이다 라는 믿음을 부재가 아닌 현현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재와 현현의 부딧힘이 되는 거죠.


주님과 마귀의 내기장기에

욥과 욥과 친구들은 실재로 충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본다는 시각성) 누가 오인된 존재입니까? 

욥의 세 친구입니까? 욥입니까?

욥이 하나의 얼룩점으로써 부정함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즉 미련한 자요 어리석은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들은 욥에게 회개 하라 빨리 얼룩을 제거하고 그 부정함을 제거 하라고 하는 겁니다.
즉 욥의 세 친구는 바리새인처럼 충실하게 하나님나라 운동, 회개운동, 묵시운동, 성령운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뭔데?

하여튼 [뭔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곧 부재입니다.


자 그러면 그 말 때문에라도 더욱더 공격받도록 되어 있는겁니다.

말이라도 하지 말지 괜히 말해가 모르겠다고 하니 매를 더 버는 겁니다.


그러면 왠만하면 친구의 충고에 수긍해서 그래 그래 회개하마 라고 나오면

얼마나 누이좋고 매부좋고 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엘로힘 하나님 즉 생산성입니다.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추구하게 되는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 하나님인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게 아니다], [ 뭔지 몰라도 그것은 “아니다” ]라고 [아니요]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욥입니다.


인간은 그런 엘로힘 하나님이라는 바벨탑으로 구원의 문을 열수 없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하나님이요 구원의 문이요 인 겁니다


그럼 뭔데?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욥이 자신의 신체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증거하는 겁니다.


그 신체가 뭡니까? 놀랍게도 졸지에 저주 받은 몸이다는 겁니다. 곧 인자 입니다.

즉 얼룩입니다. 배설기관입니다. 순풍 순풍 여인인 생식기관이 아니라 불임여성(배설기관)입니다.


이것을 죽은자 라고 합니다. 곧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마귀의 시험처럼 그들(고아,과부,나그네)을 먹이고 살리고 백성삼는 지옥백성이 아닌 천국백성 만들어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곧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관데를 보여주기 위해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죽은자(죄인 중의 괴수)가 새롭게 나타나야만 한다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하나님이 아닌 그것이 바로 마귀가 주장하는 우상 메시아,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새롭게 죽은자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부재성입니다. 뭐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돌들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그래서 욥은 졸지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고아 과부 나그네를 대접했다고 자신의 행위를 내세웁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주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욥의 세친구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대접을 똑바로 안했기에 회개하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결국 욥은 이 간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고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이전까지 알던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질적인 하나님이 쳐들어 온 겁니다.

그러면 성령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묵시운동은 도리어 성령훼방짖꺼리 밖에 안되는 겁니다.

내 쪽에서 다가갈려는 짖인 겁니다.


그런 일에 열심히였다보니

이 애매한 고난이 도통 무슨 이유인지를 알길이 없는 겁니다.


그럼 알려주시느냐? 안 알려줍니다.


그래서 도대체 내게서 원하는게 뭡니까 라고 따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케 보이?


도둑놈이 밤에 집으로 문따고 쳐들어와서

물건도 훔치지도 않고

돈도 가지고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도로 변해 빨랑 죽여버리지도 않고


도통 뭘 원하는지 알길이 없는 겁니다. 케 보이


정작 그 도둑은 욥에게 도둑잡아라 라고 고함을 치는 겁니다.

즉 아예 자기 집이라고 주인노릇을 하면서 아예 눌러 앉아버리게 되니

졸지에 집 주인이였던 욥이 도둑놈으로 몰려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경험 당해 본적 있나요? 사람 미칩니다.

몸이 아프면 오히려 잠시 숨 돌릴수도 있겠지요.

고만 해라 마,  마이 무따 아이가 라고 핑계꺼리로 삼을수 있겠지만

욥은 몸이 아프다는 것으로 핑계꺼리 조차 되지 않고 튕겨버립니다.


오로지 다짜고짜 따지는 것은 왜 내집인데 니가 있노? 라고 도둑놈으로 몰아버리는 것 이상으로

아예 쫏아낼려고 자꾸 자꾸 밀치는 겁니다. 적반하장.

개그 투나잇에서 가장 재미있던 코너였는데 말이죠.


욥이 케보이 케보이 라고 외치는 것은 바로 이 경험

적반하장을 당하는 꼴이다는 겁니다.

욥의 세친구가 달려드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카고 있으니

욥은 바로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그 따지는 모습을 자꾸 욥의 세친구들이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기가막히는 거죠.


그래서 중간에 낑겨 버린 꼴이 된 겁니다.



욥 자체가 오인꺼리, 오물꺼리, 배설물(불임여성), 욥을 보기만 해도 다들 찡그리는 찡그림꺼리, 거리끼는 꺼리,


싫어버린바 된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의 주장대로 욥은 가짜다 욥은 마귀다 라고 다들 주장하는 겁니다.

여기에 욥 조차도 가짜로 몰아가는 그 환경에

주님 조차도 욥을 가짜로 몰아감에 어쩔수 없이 등떠밀려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억울하겠지요. 억울하지만 욥은 아 맞아 나는 창조주가 아니지? 라는 충고를 엘리후를 통해서 듣게 됩니다.


주님이 참이라면 즉 창조주라면 넌 피조물이기에 참되신 창조주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너가 거짓에 놓여도 할말 없는 넌 피조물이지 않느냐 라는 것을 수긍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인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막살아 살아~~ 케세라 세라).


왜냐하면 이것이 진짜 회개라서 회개가 아니라

그 길에 예수님이 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성령을 통해서 욥이 보게 되니

더 이상 욥은 자신의 변호를 중단하고

도리어 재를 뿌리며 머리를 땅에 쳐박고 자신은 죽어 마땅함을 보게 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얼룩점 응시점이 된 것이 너무 너무 억울한데

도리어 그런 욥 자신 때문에 예수님이 응시점이 되시는 것을 보고서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입을 함구해버리고 재를 뿌리며 머리를 땅에 쳐박아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신이 똥덩어리 취급받는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니 너무 너무 억울한데

그것만 한번 읽게 되니(스캐너로 독서 되니)


정작 두 번째 스캐너가 쭈우욱 욥을 스캐너 해 버리니

정작 자신은 없고 예수님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똥덩어리의 똥덩어리로 활동하심 앞에서

자신은 가짜 중의 가짜가 됨을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두 점을 찍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죽어 마땅했던 자 였었었었  었 엇 군요 라고  부정의 부정

똥덩어리 중의 똥덩어리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연관이 됩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 다 연관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다가가는 해석이 다 단절당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알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지나개나 다 달려드는 해석으로 오히려 칼 자루를 쥐게 되는 꼴이니

칼을 쓰면 칼로 망하게 되는 겁니다. 헤롯처럼 말입니다.


지난 시간까지의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주님이 얄굿게도 베드로를 꼭 어디에 배치시키는고 하니

마치 공을 차서 그 공을(베드로) 어디로 몰아서 가니

그 공을 나도 차고 싶다 라고 하는 그 반대급부의 세력 앞에서 일부러 깔짝 깔짝 드리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헤롯의 눈에 번뜩이는 거죠. 캬 베드로 저놈 저기에 있네 내가 몰고서 차야지 하는 욕망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을 죽인 자이기 때문에 베드로 쯤이야 그러나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자기를 위한 곧 우상을 위한 허망한 짖에 몰두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기에

베드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기유익꺼리로 활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정작 욥이나 베드로는 죽음의 칼날 위를 걷는 듯이 살얼음판을 누비게 되는 거죠.


어치피 죽을 놈 어차피 죽게될 뿐이니 이것을 역으로 나의 유익으로 어떻게 끌어당기느냐 라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점령하여서 활동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신의 신체에 딱 맞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이 이질적인데 말이죠.


욥은 도리어 자신의 신체에 전혀 맞지 않은 낮설은 주님을 만나게 되어 졸지에 샬롬 샬롬 샬롬 외쳐야할 판국인 겁니다. 어 주님 얼굴을 보고도 안타죽지? 주님을 만나고도 안 죽지? 왜 간밤에 주를 만났는데 안죽는거야? 욥이 잘나서가 아니라 억수로 봐준 긍휼때문인 겁니다. 즉 긍휼이라는 사랑은 너무 너무 무시하고 무시하고 무시했기 때문에 다가옴이지 무시하지 않으면 다가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살벌한 겁니다. 얼마나 무시했으면 봐주느냐 말이죠.


이 낯설음을 아무리 인간의 재주로 믿음으로 열심으로 회개로 익숙하게 만들려고 해도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겁니다. 그냥 그대로 그 낯설음을 즐겨 누리게 될 뿐인 운명인 겁니다.

예수님의 숙제이기 때문에 졸지에 숙제대상인 겁니다.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겁니다. 빈공백의 터를 아무리 내 쪽으로 끌어당길려고 해도

도리어 튕겨버리는 자석인 겁니다. 그 간격의 거리를 둠으로써

너 아니요 내가 옳단다. 라고 거리를 두시는 겁니다.

너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했단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부정의 부정 곧

나를 가짜 취급해 버리고서는 그 가짜에 뛰어드심으로써 그 가짜판대기를 진짜로 만들어 버리는

십자가라는 부정성 곧 십자가라는 가짜성,

십자가라는 오인 오물 스캔들 불법성 등등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반드시 걸려드는고 하니


십자가는 부정성이 아니라 부정의 반대 긍정성이다 라고 하는 자들이 말려들게 됩니다.

십자가는 진짜성

십자가는 오물, 오인, 스캔들 배설물 불법성이 아니라 

십자가는 생명수, 정답, 불륜이 아닌 로맨스, 합법성이다는 겁니다.


이유는 죽음을 거친적이 없고, 마귀를 거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거치고, 마귀를 거친 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십자가가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 자들을 밀쳐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안밀침을 당하는 자가 십자가를 아는자인가?


아니죠 정작 오늘 본문처럼 그리고 지난 시간의 내용처럼

정작 십자가를 아는 자 즉 여기서 안다는 것은 십자가와 고멜이 결혼하듯이

에로스 관계에 놓여진 자 즉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자가 곧 베드로가 곧 에스더가

십자가운동을 펼치는 하만, 성령운동을 펼치는 헤롯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에 몰리는 것이

실재상황이다는 겁니다.


믿는자가 믿는자를 핍박하듯이

십자가가 십자가를 핍박함으로써


비로소 잉여가 태어나는 겁니다.


진리를 오직 과잉된 제스쳐에서 온다 라는 겁니다.


그 틈사이에서 오는 겁니다.


이상하죠


믿는자와 믿는자가 간격이 있다니?


십자가가 십자가와의 간격을 벌리다니?


진리가 진리와의 간격을 벌리게 되니

진리가 오직 오인(비진리)에서 오게 되는 겁니다.


육의 소욕은 이 간격을 일체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은 일관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이 간격만을 또렷하게 벌리는데만 활동하십니다.


왜? 그 육의 소욕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 곧 긍휼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 사람이 성전이라는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장소라는 몸을 바리새인은 일체성 곧 동질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단절성 이질성 차이성 만을 볼 뿐입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누가 의로운 자인가?


즉 의인을 제대로 본 자는 죄인만이 의인을 봅니다.

의인이 자기인데 자기가 왜 의인을 따로 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이미 우상입니다.


오로지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할 뿐입니다.

환자 쪽에서는 병에 대해 무능할 뿐입니다.

의사로부터 잔소리를 듣는 때가 의사가 찾아왔을 때 뿐입니다.

얼마나 무시를 하는지?


그래서 욥은 몸이 망가지는 환자가 되어 눈을 상실해야 비로소 의사를 보게 됩니다.

딴 친구들은 오히려 의사를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된 소경이 된 거죠.


눈이 있어야 의사를 보는데


정작 눈이 있는 자는 의사를 못 보고

오히려 눈이 없어지니 욥은 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몸을 다 망가뜨리는 겁니다.


거룩한 성전이라는 하나님의 집 곧 예수님의 몸과 이질적인 몸으로써 차이성을 격어야

단절성을 격어야 하나님의 집이 집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죄인을 찾아나서는 99마리 양 냅뚜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얼룩양을 찾는 겁니다.


오로지 핸섬양 이쁜양 날씬양 김양 박양 최양 다 내버려두고

얼룩양만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랬듯이 사도바울도 동일한 자들입니다. 곧 죽은자입니다.

여기에 단 한번도 잃어버림을 격은적이 없는 유대인이 이 주의 이름이 퍼치는 것을 보고

얼룩으로 판정하여 그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방해공작을 펴는 겁니다.


이방인 헤롯만이 하는게 아니죠? 유대인도 동일합니다.

이 유대인 거짓선지자 박수는 지금 유대인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즉 우리들 또한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다 이런 반응으로 복음을 방해하는 방해자로 나설 수밖에 없는 활동으로 가득차 있는 열심꾼들이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면 마귀에 사로잡혀 이런 일에 반드시 개입꾼으로써 방해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냐 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주님이 약속하신 선물 곧 성령을 마련하셔야지만 한다는 것은

우리를 무시해도 너무 너무 너 ~~~~~~~~~ 무 무시하는 개무시할 정도로

우리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니고 뭐냐 라는 겁니다.


오늘도 화로다 어제도 화로다 내일도 화로다 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욥은 그 자신이 당해야 마땅한 화로다의 자리 곧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버리니

거기서 허걱 충격을 먹어버려서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충격을 본 겁니다.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간격, 멀리 떨어져 눈도 들지 못하고(소경이니) 

그저 가슴만 치면서(나쁜사람 나쁜사람 화로다 화로다)

제발 나 같은놈 개무시하옵소서 저는 마귀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정작 마귀는 지금 의인이라고 우기는 판국인데?


그러니 개무시 해도 마땅한 천부당만부당 당연한 거고

마귀는 개무시했다가는 난리납니다. 경찰서를 불도져로 밀어버리는 거죠.

주제 파악을 못하나니까 악령이 씌이는 겁니다. 의인을 감히 무시하니 말이죠.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악령이 씌인 겁니다. 가능성 세계입니다.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으로 인한 고백이지 자신이 죄인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능성의 세계입니다.


엘루마는 거짓선지자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있지만 정작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넌 거짓선지자야 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억제하는 노력이라도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왜?

주의 이름은 부재 이기 때문입니다.


없어요


없는데 그 이름을 어떻게 들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는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긴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사도바울과 그 일행들은?


놀랍게도 여기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주의 이름이 성령을 통해서 그 잃어버림을 격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에 의지하여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역시나 잃어버림을 격었기 때문에 역시나 방해를 하는 세력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격는 겁니다.


그래서 간단히 처리합니다.

얼마나 살벌한지


너가 지금 우리를 방해하는게 아니라 복음을 방해하는 구나

곧 주의 이름을 너가 방해를 하는 구나


너는 눈이 멀어서 해를 곧 빛을 못보게 되어 너는 너를 인도할 자를 구걸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저주 조차도 복음적으로 해야 합니다. 에라이 죽어라 가 아니라

넌 날 방해했으니 넌 죽어! 가 아니라

너 같은 놈은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야한다 날 무시했으니!! 가 아니라


빛을 증거했는데 빛을 못 보네?

그럼 빛 없이 한 번 지내보렴 이라고

어두움이 장악했다는 것을 톡톡히 보여주는 모습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도록 하는 겁니다.


즉 방금 방해한 너의 행동이 우발적인게 아니라 너가 날 때부터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죽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임을 미래확정적으로 지옥 곧 어둠이 너를 장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마술을 부린게 아니라

성령으로 본대로 말만 한 것 뿐인 겁니다.


자 이것은

바리새인이 세리와 성전에 들어가서 외치는 모습 그대로

바리새인은 평생을 그리고 지옥에 가든 천국에 가든 자신은 의인이다만을 외치며 사는 자임을

거룩한 장소에서도 외치는 모습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너무 너무 끔찍한 것인 겁니다. 그의 처음자리 곧 출처는 그것 뿐이니

그것을 홀라당 벗겨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서는 그런 소리가 나면 안되니

예수님이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아이구 저런 자가 천국에 가면 끔찍하겠제? 라고 묻는 거죠.


(눅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아예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는 자는 미리 이 땅에서 미리 다 짤라내는 겁니다. 걸러내는 스캐너 쭈우욱 두 번 읽어들이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자신도 부정한 똥물 똥덩어리에 놓여야 하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뛰어드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그 사람에게 예수님 숙제다 라는 불륜 불법을 저질러야 하고?


둘 다 불가능한 겁니다.


간격이 멀어도 너무 먼 겁니다. 그것이 3일의 간격


자 그럼 그 삼일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간격을

사건으로써 다시 재현 반복 무한증식하는 것이


이런 성령이 벌리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성령이 싸움 붙이는 겁니다.



(행 13:6, 개역)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행 13:7, 개역)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행 13:8, 개역)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하나는 지혜로운 사람 서기오 바울이요

또 하나는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 엘루마입니다.


여기서 지혜롭다 라는 이 차이성의 말은

상대적인 거짓되다 라는 거짓 선지자 엘루마와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엘루마 입장에 우리가 서 봅시다.

왜 저 어리석은 십자가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을려고 서기오 바울이 사도바울을 요청하느냐 말이죠?

믿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거 구약에 사마리아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곧 깡통 성전 스룹바벨성전을 지을려고 할 때 얼마나 방해를 했습니까?

그래서 그 역사적인 앙금 원수성이 예수님 당시에도 그대로 표출되기를 사마리아 지역은 일부러 유대인들이 피해서 삥둘러 갑니다.

예수님만이 자유롭습니다. 가로질러 갑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깜작 놀라는 겁니다.

차이나는 유대인이다고 당신은 유대인 아닙니까 라고 다들 놀라는 거죠.


희한하게 누가 줄을 끄었는지 몰라도 그 줄이 예수님의 자유되심을 막을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리 집에 먹고 마시고(삭개오) 죄인과 친구 되시는 겁니다.


동일하게 오늘 본문에 교회 곧 성령의 전이 형성되는 것을 누가 이제는 막습니까?

사마리아 이방인이 막습니까? 아니면 유대인 하나님의 전을 사수하는 유대인이 막습니까?


그래서 원수 라는 표현이 참으로 정당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행 13:9, 개역)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10, 개역)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11, 개역)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표현 하나 하나가 그냥 막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요 주의 바른 길을 굽게하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여기서 마귀자식이야 원래 인간들 다 그렇고

모든 의의 원수요  캬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붓는 식으로

저주란 저주를 다 모아서 퍼붓는 식인데

원수 라고 한 것이 아까 말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성전에 얽힌 문제로 인해 더욱더 돗보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가 원수다 라는 거죠.


그리고 성령은 소통 교통케 하는 겁니다. 즉 막혀있다는 겁니다. 전제가 단절되었기에

그 막힌 담을 헐고서 삥둘러 안가고 거침없이 바로 뚫어서 간다는 겁니다.

즉 아무도 못 허무는 담이 전제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거짓선지자는 더욱더 곤고히 하는 것이고

사도바울은 성령이 지금 불도져로 밀어서

평평하게 했는데 어 이봐라 구불 구불 첩경을 일부러 만드네 라고


아주 아주 복음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이말은 거짓선지자 또한 반드시 비복음적으로만 행동하도록 되어 있지

사적인 행동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증거는

저주를 퍼부어서 에라이 새롭게 저주 받아라 가 아니라

원래 넌 그래 살아왔고 그래 살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으니


그렇게 살아라 라고 단지 너의 끝을 앞당겨서 미리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뭘해도 평평하게 첩경을 깍아 버리는 성령의 일에 너는 뭘해도 첩경을 일부러 만드는 짖만 할테니 오냐 그렇게 살으려므나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그에게 빛으로 인도해 줄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성전의 바리새인처럼 뭘해도 의인되었다는 것만 주장할테니

그래 평생 아니 죽어서도 영원히 의인이다는 것만 주장하며 살아라 라는 겁니다.


이게 진짜 저주입니다. 너 생긴대로 살아라

너 뿌리 대로 살아라

너의 처음자리대로 살아라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욥은 휴 ~~~~~~~~ 하고 시껍했구나 라고 외치는 겁니다.

주변에서 무시해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 주님의 일하심 덕분인 겁니다.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 여기서 우리는 엘루마가 왜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 방해자로 괜히 나서서 소경이 되는 사건을 목격해야 합니까?


복음은 늘 방해받는 운명이구나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복음이 복음 답기 위해서 일부러 방해자를 배치하는 구나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주의 이름은 없습니다. 부재성입니다.

그런데 그 부재성인 없는 자리에 뭔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죽일려고 하고


그 차이나는 다른 하나는 곧 장 죽을 것 같은데 어? 역전이 되어서 헤롯이 죽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을 기능입니다. 주의 이름이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단지 어떤 조그마한 동네에 그저 복음 전할려는 사람과 그 말씀을 들을려고 하는 사람 총독이 사도바울을 부르는데 있어서 그 둘 사이를 방해할려는 자가


그저 일상 속에서 아무 일도 아닌냥 그냥 넘어갈수 있는

늘 비일비재하게 벌어질수 있는 문제일 뿐인데


정작 성경은 그게 아니라 주의 이름이 결부된

천상의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은 끔찍하고 허걱거리지만

이 내용은 별로 허걱거리는 모습이 없어보이는

늘 있는 방해사건이다 라고 보이면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낯설면 하늘의 전쟁이 이 땅에 재현이 되는데

아주 미시적으로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세밀한 음성으로 듣길 듯 말 듯

아무것도 아닌냥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캬 이게 놀래 자빠질 일이다는 겁니다.


천군천사들이 다 동원이 되는 전쟁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과잉제스쳐를 벌립니까?

늘 해오던 짖을 하는 엘루마 입니까?


아예 작정을 한 듯이 오 오놈 잘걸렸네 제대로 한 방 먹어봐라 라고

있는 저주 없는 저주 다 끌어 모아서 퍼붓는데

정작 너는 그 생기대로 하던대로 살았뿌라 라고 앞뒤 안맞는 모순적으로


괜히 과잉적인 오바로 말만 번지르하게 떠벌리는 듯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하늘의 전쟁을 가시화 하는 보일 듯 말 듯 

그러면서 잘 안 비이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너무 너무 과잉된 제스쳐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바 해도 너무 오바한 것이 바로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에게 열매를 내라 하니까 열매를 내지 못하니 저주 받으라 라는 과잉성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점으로 종말이라는 진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야말로 그 표현 말고는 종말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아니 제가 예수님을 일부러 오바하면서 띄우는 것일까요?


종말이란 실제상황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부재성입니다.

없는데 있다고 하니 미친놈 취급받아야 겠지요.


그러나 무화과 나무 저주는 종말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오바에 오바로써 증거하십니다. 그것이 비유입니다. 오바 과잉제스쳐 처럼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기도란 종말 곧 끝을 미리 끌어당기는 겁니다. 종말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한 저주 곧 말라버림 뿐일 정도로 처참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매를 낼수 있는 능력에 자신에게는 없다라는 무능만을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반대로 바리새인은 나 열매 억수로 많으니 저는 의인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종말은 미리 심판을 앞당겨 받는 겁니다. 기도하는 자 곧 회개하는 자는 그 잃어버림을 미리 앞당겨 받는 오인(걸림돌 얼룩) 속에 놓여진 자입니다. 성령이라는 종말의 영으로부터 미리 단절성을 격는 겁니다. 


그러나 종말의 영이 임하지 않는 자는 기도 곧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림을 격은 적이 없기에 자신에게 빛이 되어줄자가 없는 겁니다.

의사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소경으로 살 수밖에 그냥 그대로 사는 겁니다. 전복이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의인인데 뭐!! 그래 그래 너는 의인으로 영원히 살아라 라는 겁니다.


성화론자? 그래 너는 평생 영원히 성화론자로 살아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저 쪽에서 감사하게도 고맙게 시리 그래 너는 평생 영원히 죄인으로 살아라 라고 나오는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구요. 이거 정말인데 ... (다시는 죄인 죄인 카지 마라 라고 왕짜증을 내면서 발악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저들의 주장이 바로 성령의 다양성인데 왜 자꾸 십자가만 주장하냐 라는 겁니다. 딸랑 하나 십자가냐입니다.

이것을 아도르노 라는 철학자는 왜 모든 개인이 똑같은 가상현실을 공유하느냐 라는 겁니다. 다양성이 되지 못하냐입니다. 각 개인들의 선호하는 가상현실을 소유하지 못하냐 라는 겁니다. 이것이 모순이다 라는 겁니다. 매철 p 318 

즉 수많은 꿈은 결국 모든 꿈은 딱 하나입니다. 즉 가인의 제사는 딱 하나입니다. 일치성


곧 주를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꿈 꾸는 꿈입니다. 다른 꿈은 꾼 적이 없습니다. 딱 하나 뿐입니다. 

느부갓네살의 꿈도, 요셉이 풀이한 바로(파라오)왕의 꿈,

모든 인간이 지금도 현재도 과거도 앞으로의 미래도
모조리 다 하나의 꿈인데 바로

예수 죽이기입니다.

은혜(생명)나무 죽이기입니다. 마치 베드로 죽이기처럼 말이죠.]


이게 바로 무화과 나무 저주인 종말의 상황인 겁니다.

너는 원래 그렇게 살았으니 그렇게 살렴 이라는 겁니다.

아쉬울게 없죠.


아쉬운 놈이 우물물을 판다고 죄인만이 의인을 찾는 겁니다.

자신이 의인일 리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봐도 죄인이기에

실로암 소경이 예수님만을 외치는 겁니다.


이 실로암 소경의 과잉 제스쳐에

오히려 본다고 하던 자들이 걸려 넘어져 졸지에 소경이 되어버린 겁니다.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주님 ! 소경인 나의 눈에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도록

저의 눈을 저주해 주옵소서


그 저주가 옳았음만을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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