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 받았다라고 말하는 참람죄와 죽음보다 강한 사랑(눅 5:17-26)




(눅 5:17, 개역)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눅 5:18, 개역)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눅 5:19, 개역)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개역)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개역)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개역)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개역)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개역)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언어란 일종의 규칙을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언어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인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며칠전에 했습니다.


이사야 26장을 읽으시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시면서


(사 26:13,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사 26:14, 개역)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였음이니이다』


이 부분을 저에게 묻는 겁니다.


전에, 올 겨울이였던가? 작년인가? 니체와 철학을 볼때였는데, 강이아빠랑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배꼽잡았었는데요.한번은 [신은 죽었다] 라는 의미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했던 말이 기억이 나서 이 이사야 내용을 보고 웃었던 겁니다.


내용인 즉슨 니체가 한 말인데

한번은 여러 신들이 있는데 갑자기 한 신이 이런 주장을 모든 신이 있는 가운데 외쳤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나만 신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다른 신들이 어떻게 신이 죽느냐? 신이 죽으면 그것은 애초부터 신이 아니였다 라고 하도 웃어워서 배꼽잡다가 너무 웃어워서 신들이 다 죽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너만 신이냐? 유일신이란 없단다. 그럼 니가 보고 있는 이 신들은 뭐냐? 우리가 신이 아니고 뭐냐? 아이고 웃껴라)


이야기를 듣고 그때 어머니께서 얼마나 웃으셨는지?

그래서인지 이사야 26장의 구절을 보고 그 내용이 생각이 났는가 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이


(출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되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신은 한 분 뿐이다 라고 여호와 하나님 본인이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 주장을 스스로 틀리게 주장합니다.


한 분 뿐이면 구지 [나 외에] 라는 주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신은 원래 없기에 구지 다른 신을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야 내가 니 애미다. 하모요 누가 뭐랍디까? 

야야 내가 니 애미라니깐? 어무이 걱정 마이소 날 낳으신 분은 어무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쪽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일부러

오히려 더욱더 강조하듯이 다른 신들은 없는데 너는 다른 신을 믿지 말고 나만 믿어라 라고

의도적으로 다른 신을 없다고 하시고서는, 다른 신이 있다는 식으로 강조를 하시는 겁니다.

내가 니 앱이다. 빠라 빠라 빠라 밤.


이것을 도착성이라고 합니다.


사랑이긴 사랑인데 폭력적이다는 겁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음부같이 시기와 질투적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지옥같은 질투가 아니면 가짜 사랑이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죽은 신들을 일부러 깔아 놓습니다.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는 우상을 말입니다.
가짜 하나님을 말이죠. 거짓선지자들을요. 마귀를 깔아놓는 겁니다.


빛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어두운 죽은 시체와 같은 허수아비 우상들을 하나님 스스로가 주변 배경으로 깔아 놓는 겁니다.


빛 스스로의 영광을 스스로 높이고자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6장에


(사 26:13,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사 26:14, 개역)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였음이니이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주 외에 다른 주]가 원래 없습니다.

[그들은 죽었다] 아니 언제는 살아 있었던적 있나요?

[또 다시 살지 못하겠고] 아니 산적도 없었으니 죽었던 적도 없고 죽었던적도 없으니 다시 살 리가 만무하잖아요?

[사망하였은즉] 산 적이 없다니깐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있어야 일어나든 주저앉든 하지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없는데 벌해 본든, 멸망시켜 본들 의미 없잖아요? 있어야 심판하죠?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였음이니이다] 있어야 저장 메모리에서 삭제를 시키던가 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라고 십계명이라는 거룩한 계명을 주시는 것은


이미 십계명 전문에 너희를 애굽 왕에서 빼내어 냈다는 그 무시 무시한 사건을 전제로 깔고 하기 때문에


(출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말이, 말이 때려죽어도 안되는 것 맞지만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 자신만은 맞고

그에 의해 뽑힘 당한 이스라엘에게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심지어 출애굽기 1장에서 19장 곧 20장의 십계명이 나오기 전까지 할애가 된 내용은

애굽나라를 작살내는 재앙으로 곧 심판, 종말로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 딴 민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스라엘민족 만큼은 이 말도 안되는 소리에 소위 언약 곧 믿음의 약속이 그들을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인 못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여호와 라는 신은 곧 전쟁의 신은

사랑이라는 확실성을 전쟁 곧 폭력성으로써 제대로 보여준 겁니다.

이것 보다 확실한 것이 없거든요.

소멸성이 아니면 불의 기능은 의미 없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불에 타야할 땔깜을 깔아놓아야 불의 기능을 보여줄 것 아니겠습니까?


즉 불의 시선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불 바깥의 시선에서는 무조건 이유없이 틀린 말이지만
불 속에서의 시선에서는 무조건 이유없이 맞는 말입니다.
사건 속에서 보는 시선, 즉 심판 속에서의 시선에서는 이스라엘이 부인 못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사건의 흔적이 딴 민족에게는 없지만 그들만큼은 있듯이
할례라는 약속의 흔적도 그런것 처럼, 육의 차단이라는 사건의 흔적이 있는 겁니다.


열가지 재앙 곧 심판으로 종말을 제대로 펼쳐보이는 것 보다 더욱더 확실한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너희들 지옥(애굽) 사랑하지? 오냐 지옥(세상) 보다 더한 질투로 그 지옥(육의 출처)을 없애주마
라고 다가온 사랑이다는 겁니다. 잔혹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사야 26장을 통해서 미리 완료된 이스라엘나라를 뿌뿌뿌 나팔 불 듯이 노래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사야 끝 부분에 가면 그 이스라엘 나라가

육적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이방인들 곧 주의 이름을 단 한번도 부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우상만 섬기던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방인이 졸지에 이스라엘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럼 누가 시기를 합니까?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이스라엘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둔 적이 없습니다.


즉 아이고 하나님요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지 누가 어떤 신이 있다고 합디까

신은 원래 하나 밖에 없는 다른 신들이 있을수 있습니까?

다른 신들이 있어야 다른 신들을 죽이든 말든 할게 아닙니까?

라고 이스라엘이 이런 마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랑방구 끼듯이 아부하듯 그럼요 그럼요 하나님은 한 분 뿐입니다.

다른 모든 신들을 죽여버리시고, 심판하시고, 멸절시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며,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심판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그런데 이 외침은 다른 민족은 외칠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이스라엘만이 외칠수 있는 발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이 다 탈락 당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배신 당한겁니까?

누가 배신 당한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배신 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끝부분에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이방인으로 그 이스라엘의 자리를 다 채워버렸기 때문에

구원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구원 받은 셈입니다.


마치 이사야서는 누가복음과 같고 완료성을 미리 선포해서 그 완료를 증거하는(희년) 사도행전과 같습니다. 성령행전 말입니다.


도착적 곧 폭력적인 사랑에 의한 그 대상만 바뀌듯이(육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방인으로)

이사야서도 그런 식입니다. 임마누엘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사야 26장을 보면 웃기게도(너무 너무 말이 안되게도) 마치 승리의 나팔, 완료의 나팔을 뿌뿌뿌 불고서,

또 마치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미 이겨놓고서 

비로소

비로소 이제야 복음을 선포하시듯

이사야 26장은 미리 갈라먹기를 해 놓고서 쳐들어가는 가나안 전쟁과 같은 희년선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외쳤던 이스라엘이 정작 


다른 신들이 죽었다고 선언한 이스라엘이 다른 신만 찾는 겁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광야교회에서 나 돌아갈래 라고 하듯이 애굽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라는 겁니다.

아니 애굽을 멸망시켰고

그들 말 마따나 애굽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여이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기억이 삭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을 복원, 복구시키는 것은

애굽사람이 아닌 정작 이스라엘 사람이다는 겁니다.


삭제 시키는 재주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다는 겁니다.(이스라엘은 대표성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동일합니다.)


그 이유는 광야(교회)라는 실재성에서의 그 하나님이 도저히 마음에 두기 싫어서

멸절하고 사라져 버린 그 과거의 기억을 무슨수를 써서라도 복구 시키고 싶은 겁니다.


그 정도로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질투의 사랑이

도저히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잔혹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인줄 미쳐 몰랐다는 겁니다.


문제는 견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도착적인 사랑이 아니면

나는 그 정도 안될 놈이기 때문이다는 의식을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누릴수가 없는 겁니다.


오죽 하면 다윗도 안되기 때문에

성령으로 그 선악의식을 주님의 도착적인 질투의 사랑으로 삭제해야

1급 살인자도 구원이 되니까 말이죠.


그 정도로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 속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그 마음을

반드시 피로써만 지우겠다는 고집입니다.


이 고집은 원수에게만 딱 맞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닌 


적당한 죄인에게는 그 고집이 안 맞으니

청함을 받은 자는 광야(교회)에서 다 탈락 시키는 겁니다.

택함을 받은 자는 적기 때문입니다.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즉 사랑은 희소성으로써 그 가치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음부와 같이 잔혹스럽기 짝이 없는 질투와 시기의 불같은 사랑 말입니다. 

거의 스토커죠. 사이코 패쓰 죠.


때려죽어도 죄를 가지고서는 천국 안들여 보내겠다.
내 손에서 그 죄라는 암덩어리 반드시 치료하겠다 라는 의사가 칼(메스)을 들고 달려드는 겁니다.
갈때까지 간 말기 암 환자만이 그 의사가 감사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 자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바로 그런 예수님에게 시비를 겁니다.


아니 지가 뭔데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느냐?

너 예수는 기적만 행하라 라니깐?

병만 고치면 될 것이지

지가 뭔데 죄사함 받았다고

감히 하나님만 외칠수 있는 그 발언을 하느냐?

참람하다.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너가 하나님이냐?


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아 참 나는 하나님이 아니지] 라는 반응이 저절로 나와 스스로 물러서겠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노리고 바리새인과 교법사가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물러설줄 알았던 예수님은 안 물러서는 겁니다.

옳지 도리어 이것이 빛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인 겁니다.


마치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치는 유일신처럼 말입니다.


그럼 안 죽어야하는게 신인데 그 말을 듣고 배꼽잡고 너무 웃다가 다 죽은 겁니다.


되래 묻습니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서 걸어라 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쉬우냐?


(눅 5:19, 개역)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눅 5:20, 개역)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5:21,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눅 5:22, 개역)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둘 다 불가능성입니다.


그렇다면 그 불가능속에 갇혀 버린 입장에서

예수님은 그 기능 때문에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자 라고 표현하신 겁니다.

인자란 마치 신은 죽었다 라는 표현처럼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다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아니 건방지게 지도 인간, 나도 인간 그런데 니가 뭔데 나 보고 인간이 아니다 라고 하느냐?

그런 판단은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하실 말인데 참람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것이 쉬우냐 라는 물음에

죄 사함이 쉽습니다.

아니 일어나 걸어라가 쉽습니다 라고

어떤 것을 택하든 그러니까 너는 인간이 아니냐 라는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바퀴 머리가 더 돌아가는 바리새인은 답을 안하지요?


답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눅 5:21,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미 이 속에 자신들이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 라는 생뚱맞은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것 같은 용어로 들이대시는 겁니다. 즉 심판성입니다. 여호와의 불입니다. 아무나 무시해 버리는 그 인자입니다. 싫어버린바 된 인자 말입니다.


(눅 5:22, 개역)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눅 5:23, 개역)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24, 개역)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눅 5:25, 개역)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눅 5:26, 개역)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지난 시간에 문둥병자와 제사장의 관계성을 이야기했듯

인자가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실려고

중풍병자를 주님의 믿음으로 지붕뚫고 오도록 하신 겁니다. 주님이 하신 조치입니다. 자작극.

여기에 마귀의 주장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라 라고

바리새인과 교법사가 반드시 참관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없으면 안됩니다. 사랑이 질투성 곧 도착성 즉 음부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일부러 음부를 끌어와야 합니다. 적들을 일부러 맹글어서라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곧 죄사함입니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입니다.


아니 주가 굳이 주 되심을 꼭 주장해야 합니까?

주장 안해도 주는 주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주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 증거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래서 주 스스로가 주 되심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의 주 되심이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착적입니다. 일부러 적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이 왜 주의 주 되심을 못 외치느냐? 바로 마귀를 끌어들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배치 못합니다. 그럴 능력도 없구요. 그래서 행함을 모두 거부하는 겁니다.


인자가 왜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지를 마귀를 끌어들여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마귀를 끌어들여서 어떻게 죄 사하는 권세를 펼치셨나요?


결과적으로 이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 말 마따나 그냥 병고치고 일어나서 걸어나갔을 뿐이지 않았잖습니까?


그런데 뭘 마귀를 끌어들이고, 적을 일부러 만들어내고, 괜히 참람죄를 만들어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예수님은 인자 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인자는 나무에 달려야 한다는 겁니다.

즉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너희들은 마귀에게서 벗어나는 죄사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료된다는 겁니다.


참람죄 곧 죄사함 받았다는 죄사하는 권세는 십자가에 달리는 인자만이 사망권세를 이기시는 겁니다.  


여기에 걸려라 걸려라 딱 걸렸다 라고 바리새인들이 걸려드는 겁니다.

그들이 참람죄로 걸어야 십자가의 처형이 이루어 지는 겁니다.


그들이 그럼 공로가 있는건가요? 가룟유다가 아니면 십자가에 달려죽지 않으니 가룟유다가 공로가 있는 겁니까? 그들은 강요된 선택에 말려든 겁니다.


이미 항상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작 십자가의 피의 공로에 참예 되지 못합니다.


죄인에게만 죄사함의 권세가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들에게만, 그들의 허물을 인자에게 담당 시키는 겁니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래서 죄사하는 권세를 예수님은 보여주시러 기쁜마음으로 오신 겁니다.


기쁘게 중풍병자를 지붕뚫고 오도록 하시고

기쁘게 적들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야 말로 참람한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사이코 패쓰죠.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는 이 소멸하는 불이 아니면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 불지르러 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


나만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참람하구나 참람하구나 감히 불경스럽게 그런 말을 막 함부러 내 뱉는 막사는 자구나?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눈에만 인간들이 지옥에서 갇혀서 거기서 즐겁게 사이좋게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겁니다. 그 꼴을 못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불질러 버리시는 겁니다. 이 악마의 세상을 불 질러 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불경스러워야 합니다. 지옥을 불 지르니까 말이죠.

그리고 반드시 참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은 결국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을꺼 뻔하니까 말이죠.


달려 죽으러 오신 분은 인자 뿐입니다.


인자만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짜 신은 비웃다가 웃어 죽어야 하듯이

어차피 일어나지도, 다시 살아나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참람하다고 외치는 소리에

더더욱 질투의 불을 증거하는 소재로 삼아야 하듯


반드시 참람해야 하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라는 계명처럼 결국은 그 법이 도리어 살인하라는 말과 같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 이 모순을 무슨 수로 극복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인데?

이 맞물리는 이 둘 사이에

이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무 쉬워서 무시합니다. 잉여라서 무시합니다.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내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인자를 쳐다보는 겁니다.


이것이 나만 여호와다 라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계명을 예수님 스스로가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 예수만이 죄사하는 하나님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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