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기 위한 은사 부으시기 (눅 6:12-19)



(눅 6:12,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개역)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4, 개역)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 개역)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눅 6:16, 개역)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눅 6:17, 개역)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눅 6:18, 개역)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눅 6:19, 개역)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욜 2:27, 개역)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은사 곧 능력을 받으면 졸지에 미움받는 오리새끼가 됩니다.


그것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3:9, 개역)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사도됨의 능력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왈가왈가했던 논쟁들을 일소에 말소 시켜 버립니다.


(고후 11:24, 개역)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그것도 단순히 자신의 직분에 관한 변명차원이 아니라
거짓선지자와의 차이성으로써 복음을 위한 의미로써 증거합니다.

이 무슨 배짱일까요? 매 맞고 죽을뻔한 것이 무슨 자랑이냐 말이죠.

바로 약한 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다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같은 말을 합니다.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21, 개역)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러나 그 능력이 바로


사도됨이, 매맞음이, 바로 사도됨의 증거라는 겁니다. 징계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곧 주 되심 때문에 받은 은사라는 겁니다.


(고후 11:25, 개역)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개역)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개역)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개역)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개역)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 11:30, 개역)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의 주 되심이 바로 사도로써 부어지는데

그 사도됨의 증거가 매 맞음이라는 겁니다.


황당하죠?


보통 매 안맞는 상황이 우리가 자신의 직분에 든든함을 느끼지누가 매 맞는 것을 자랑할려고 하겠습니까?
나 미움 받으니까 사도 맞잖아?

누가 매 맞는 상황이 자신의 직분이다 라고 여기면 그거 어떻게 불안해서 버티냐 말이죠.

오기로 버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한계에 부딧히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포기하면 되었을 것을 괜히 버틴거죠.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드디어 사도라는 직분을 12제자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개인 사적인 직분이 아닙니다. 계급승진이 아닙니다.


은사란 하늘에서 내리는 선물로써 그 선물의 의미가 차이성 내기입니다.

거룩이 온 몸에 칭칭 감기게 되는데

그 선물이라는 거룩이 소위 요놈 요놈 내가 찍은 놈이다 라는 겁니다.
그들은 소위 위치라는 자리를 할당받게 되는 겁니다.

곧 응시죠. 자리라고 해 봐야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빈자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없음]의 부재성의 존재 말입니다.
소위 유령처럼 응시의 얼룩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 선물 받은자를 중심으로 해서 두 세계의 대립상황의 구조를

이 땅에 가시화 시키게 되는 겁니다.


결국 선물이란 예수님 쪽에서 마치 마귀에게 내기장기를 걸 듯이

야가 야가 내 선물을 받은자 이다 라고 주님께서 일부러 마귀보란 듯이 자랑하고

먼저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마귀는 아니요! 갸는 그 선물을 선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선물로 여기기는커녕 그 선물을 준 예수님을 원망할 겁니다 라고 합니다.


아니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아뇨 맞다카이


내기할까? 하모요 내기 하십시다.


뭘 걸래? 예수님이 지면 갸를 내 주이소


넌? 아니 예수님이 내기 건 것 아닙니까?


오냐 내기하자 요이 땅


그리고서는 사도라는 선물을, 욥에게 은혜를 부으신것과 같이 선물로 주십니다.


그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중요한 것은 사도 라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잉여 자체가 빈자리입니다. 빈터입니다. 없음이라는 부재성입니다.


그럼 그들이 과연 사도라는 직분을 받을 자격이 되느냐를 살펴 봅시다.


있던 가요? 성경 어디에도

선물을 주시는 분과 그 선물 자체만이 부각이 되지

선물 받은자는 아무리 들따 봐도 선물 받은 자의 모습이 안 보입니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받았는지? 아무리 봐도 없으니

선물을 주시는, 그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설사 답을 들어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수 없는 그야말로 비밀이요 해석불가요

알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요즘 현대철학계에서 여자 아니, [여성성]이라는 선물에 대해서 한참 연구 중입니다.

도통 알수가 없거든요.

그 당사자 여성 조차도 모르는 것이 여자라는 선물이거든요.


기껏 여자들이 연구해 놓은 것이 패미니즘? 여성 주의

남성주의의 억압에 상대적인 여성주의는

여자라는 선물 개념이 아니지요.


제가 생각할때에 여자라는 선물 개념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와 연관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선물이겠지요.


아무튼 각설하고


주님쪽에서 내기를 먼저 마귀에게 거시는데

그 마귀를 끌어당기는 매혹꺼리가 바로 은사라는 선물이다는 겁니다.


즉 선물을 받은자는 졸지에 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더 나은 외설성에 놓이게 됩니다.


참나 사도됨에 오해를 하는 자들에게 사도됨의 증거가

마치 마조히즘 환자도 아니고! 매맞은게 무슨 자랑이라꼬?

자신이 매맞은 증거

그냥 매맞는게 아니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매맞은 증거가

사도됨의 증거라고 내비칩니다.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저들은 스데반 집사를 죽인자가 아니냐고만 따지는데 말이죠.


예수 믿는 우리들을 핍박한 자가 너 사울아니냐 라는 물음에

스데반 집사를 죽인 것도, 너가 바로 그 주동자가 아니냐 라는 물음에


동문서답 엉뚱한 답변을 하는데 오히려 더 이상의 의문, 미흡한 공방이 단번에 말소 됩니다.
더 이상 힐문할 자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얼마나 십자가를 밝히 보여줬으면 입을 함구케 만들어 버리니 말입니다.


즉 이것은 선물 개념을 전쟁 개념과 연관시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사도로 칭하시는 이유는

전쟁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전쟁을 선포한 겁니다.

아니 이상하잖아요

분명 마귀의 3가지 시험을 이겼잖아요

그런데 전쟁이 안 끝났나요?


물론 안 끝났죠. 복음을 비로소 증거하기 전에

마귀의 3가지 시험을 받으신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전쟁을 승리 했다는 선취를 나팔 뿌뿌뿌 불 듯이 선언한 겁니다.


잠시 물러난 마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지만

마귀에게 씌인 바리새인들은 벌떼같이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시험 합니다.


여기에 은사는 이 전쟁에 초대장과 같습니다.

영화구경하러 오세요 초대권 말입니다.


그리고 같이 느낍시다 라는 겁니다.

아마 3D 입체영화 보다 더 심한 4D 5D? 모든 감각을 심지어 무의식까지(터미네이터) 

다 장악하는 그런 십자가D에 참예케 되는 연합케 되는 상황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겁니다.


눈 먼자도, 귀머거리도, 늙은이, 어린아이, 겁쟁이, 용감한 군사도

이 십자가D에서 다 뻥뻥뻥 구멍 뚫혀서 나오게 된 전리품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아바타 말입니다. 그게 인자입니다.


참 희한하죠. 시차적 관점이 다 각각 다 다릅니다.

참예가 될려면 먼저 마귀와의 전쟁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 전쟁이 선행이 되어야 그 뒤에 전리품이 형성이 됩니다.

자 그렇다면 전쟁이 먼저 있고, 그 뒤에 승리가 있어야 하고,

그 뒤에 전리품이 되어야 하고, 그 뒤에 다시 전쟁에 참예가 되고.

뭐 이런 순차적인 흐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순서가 뒤죽 박죽입니다. 역사가 아니라 묵시이기 때문에

역사의 외설성 보다 더 나은 묵시의 외설성으로써

지금 제자들은 사도로써 선물을 받아버립니다.

그럼 뭘 알아야 전쟁을 하든 말든 할 것인데

이 전쟁은 또 희한하게 내가 하는 전쟁이 없습니다.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있습니다.


믄 말이야? 전쟁이 있다는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전쟁이 있었기에 선물이라는 전리품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전쟁이 있지만은 그 전쟁을 내가 하지 못하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만 속했다는 것만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잉여라는 선물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리는 이방민족들이 참으로 희한한 전쟁을 경험케 됩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안하는 것도 아니요?

하면 하고 말면 말아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할려면 전쟁을 해야 하는데

전쟁을 하지 말라고 일부러 전쟁 코 앞에서 할례를 실행하는 겁니다.

전쟁 앞두고 더 신경써야 할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란 남자의 성기 표피를 끊어냄으로써

사실상 그 의미가 남성의 성기를 짤라내는 여자만들기처럼 말입니다.


여자의 성기를 음부라고 표현 또는 자궁이라고 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서 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성기는 없다 라고 합니다.

[없다] 라는 것은 부재성입니다. 남자의 성기만을 성기라고 하지

여성에게는 성기 자체를 없다 라는 부재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뭔가 의미가 있어서 그런 표현을 했겠지요?


그래서 여자란 없다 라는 둥

여자는 남자의 미래 라는 둥

남자의 징후로써의 여자 라는 둥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숨은 진짜 의미는 [남자란 없다] 라는 뜻입니다. 남자 자체는 없다.

참 신기하지요? 화행론의 수수께끼가 그렇게 진행이 됩니다.

남자는 없다를 말하기 위해서, 여자가 이 없음이라는 부재성에 놓이는데

바보 같이 이 남자들은 이 여자를 자꾸 자꾸 자기 이용물로 사용할려고 합니다.

머리 노릇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왕제도의 허상처럼 작용이 되는 겁니다.

그 핑계를 주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제가 선악과 따먹었나이다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또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자꾸 요구하는 겁니다. 율법은 결국 그런식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곧 예수님 죽이기 로 말입니다. 여자를 핑계 삼았듯...


여자도 이 여성성의 비밀에 말려드는 것은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진짜 참된 머리가 오기 전 까지는 그저 육체의 소욕대로 살 뿐인 겁니다.

비로소 새 남편이 왔을때에 전 남편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죽음도 비로소 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죽었는데 무슨 새 남편이 소용이 있노 라고 하겠지만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그 믿음 물론 인간의 믿음 아니지요 예수님 믿음 맞습니다.


새 남편의 믿음 때문에 다시 살아서 이제는 율법이 아닌, 의문이 아닌,

명료한 사랑으로 인해서 남자였던 자들도 꼬추 짤려서 여자가 되고,

여자였던 자들도 과부가 아닌 신부가 되어서

성도라는 신부로써 새 남편만의 영광을 돌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라는 신부 라는 겁니다.

남녀노소 늙은이 젊은이 다 신부가 되는 겁니다.

성령을 부으시니까 말이지요.

사망권세(육의 소욕)를 이기시고, 주와 함께 죽어, 주와 다시 함께 살아새 몸을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죽음에서 승리한 그 증거로써의 전리품입니다.
죄수복을 입은 그 육체에 빨간 피로 특별사면이라는 도색이 쿡 하고 박인 몸

전리품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12제자는 사도로써 선물받게 됩니다.

이제 전쟁에 낑겨서

졸지에 미움받는 미운오리 새끼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되듯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부에 대한 시기가 격렬한 땅의 실체

악마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것이 미움받는 은사입니다.


한마디로 죽어라 라는 소리죠.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 자들이, 은사받은 자입니다.

어차피 죽으니까 말이죠.


어딜 가도 미움받아 죽어야 하거든요.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 그들의 허다한 허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감당 시켰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미움받는 은사를 주신 겁니다.
성전에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집니다.
바리새인은 은사를 조작해 냅니다.
세리는 은사를 받아 졸지에 긍휼만을 바라봅니다.
나야 말로 제대로 미움 곧 심판 받아야 할 자입니다.
그런데 왠 말입니까? 왠 은혜입니까? 주께서 대신 미움받다니?

그 마음 곧 예수의 마음 때문에 바리새인이 지금 한참 자랑중인데안 미워하고 배기겠습니까? 미움의 이중성이 작렬하게 되는 겁니다.

미움받는 은사는 참아라 라는 뜻이 아니라


그에게 감당 시켰다는거 바로 이것만이 명료하다는 겁니다. 딴거 쳐다볼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자를 쳐다보는 세리와, 율법을 지킨 것을 나열하는 자와의 대립은

졸지에 두 세계의 소욕을 보여주는 대표성으로 작용케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안식을 지키는 자들에게 미움받는 자는 안식을 범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그럼 제사장도 안식을 지키는 자들에게 동참해야 하는데

반대로 제사장 아히멜렉은 안식을 범하는 다윗에게 동참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같이 범해 버립니다.


진짜 안식 곧 평화는 진짜 샬롬 전쟁,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은

다윗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전쟁은 육의 전쟁일 뿐입니다. 껍데기만 온갖 이스라엘 문화로 도배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 실상을 더욱더 적나라 하게 한꺼플 벗겨버리는 것에

제사장 아히멜렉의 죽음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즉 죽어라꼬 제사장이 되었던 겁니다. 은사죠. 죽음이라는 은사. 직분의 이중성.


예수님이 지금 안식 논쟁후에 12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교세 확장? 교회 크게 키우기? 제자훈련? 제자들 한 계급 상승 특진?

아니지요 


제사장 아히멜렉처럼 안식일을 범해서 한커플 벗겨내도록 하는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즉 상대적인 소욕의 대립에 의한 성령 부으심입니다.

죽어라 라는 겁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선물로써 우리의 어두운 눈을 비닐 벗겨주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 라는 겁니다. 이미 승리했단다 라고 천사의 얼굴로 죽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던가요?

도리어 사도바울은 말려든 겁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곧 안식은


철학자들이 이런 표현을 하곤 합니다.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결국 자기에게로 온다는 겁니다. 부메랑처럼!

즉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거죠. 결국 수신자가 송신자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돌아 오면 어쩔껀데 라는 것에 대한 답변보다

문제는 돌아오는데 그 화살을 즉 그 부메랑을 다시 되받는 잘 받는 기술을 가지느냐 라는 것이 관건이다는 겁니다.

소위 이것을 자살방지 기술이다는 겁니다.

즉 자살은 자살 맞긴 한데 그 자살을 기가막히게 피하는 기술

부메랑을 잘 받아내는 기술뒤로 잘 빠지는 기술? 얍샵한 기술? 뭐 그런 뻔뻔 등등.

이것으로 인해 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응용하면 안식을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 자신이 화살 쏘듯 부메랑을 날렸습니다.

그럼 그 화살에 제대로 과녁으로 맞혀 예수님께로 되돌아 오는 부메랑 일 때

주렁 주렁 달고 돌아오는 겁니다. 바로 죄인 창녀 강도 소경 문둥병자

한마디로 말해서 안식도 못지키고 그럴 능력도 아예 없는 부재한

그저 아무 이유없이 그저 불쌍히 여겨주시는 이가 없으면

그냥 진노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자들을 주렁 주렁 달고 부메랑이 돌아올때에

그 달린 자에게만 안식의 주인을 만남으로써 안식을 누리는 겁니다.반칙이지요 반칙.


안달리는 놈은 결국 안식일을 지킨 놈들이겠지요.


율법의 취지가 바로 이겁니다. 제 사 계명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죠?
율법을 편지처럼 쏘았습니다.
그 편지에 누가 누가 적히는고 하니 율법을 지킨자들이 아니라 못 지킨자들이 주렁 주렁 적히면서 달립니다.
그리고서는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그 편지에 적혀 주렁 주렁 달린 죄인들에게 피를 뿌립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편지라는 기능은 완수가 됩니다.
아니 제가 반대로 말했나요? 행함책이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래서 그 편지(약속)를 나는 받았다고 희한하게 성령받은자들이 막 자살하듯이 막죽어버리는 겁니다.
죽을려고 환장하듯이 너희가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막 퍼트리고 다니니까

괜히 권력집단들이 우왕좌왕하며 가만히 두지 않고 죽여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꼬 하는 겁니다.
예수 죽이기! 스데반 집사 죽이기! 베드로 죽이기! 사도행전 하면서 나왔죠!!


아니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그런데 자신들이 예수만 죽이면 다 되었다고 한 것이

다시 십자가 사건이 재현 반복 확장 증식되어 다시 벌어지는 겁니다.

죽은 예수님이 살아난냥 다시 증폭이 됩니다.

보이지도 살아있지도 않은 이 이름이

이 이름이라는 부재성이, 이 [없음] 마치 살아 있는냥

도리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은 시체 취급하듯이 다룹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들이 왜 이 이름에 민감해 하는지가 들통납니다.

마귀 자식이라는 겁니다.
웃기죠? 이 이름 소위 기호 아닙니까? 이 기호인 이름 소리를 듣고 보고 함으로써

꿈도 악몽을 꾸고, 심장이 벌떡 벌떡 쪼여오고, 정치 질서가 혼란 스러워 지고?

뭐 예수님을 죽여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오히려 괜히 건드려 더 확장됩니다.


그래서 전쟁이 더욱더 활성화 됩니다.


스데반을 죽입니다.

사울이 말이죠.

죽으면서 사울에게 바톤 터치 합니다.

어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 도리어 바톤을 이어받아서 이제 로마에 까지 증거하니

이 말은 결국 전쟁은 마침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멈추게 하는 것인데? 도리어 생명을 부어버리는 식입니다.

마치 일부러 전쟁꺼리를 더욱더 활성화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피의 도착성 같습니다. 십자가의 도착성


이것을 심각하게 볼게 아니라

마치 부정이 없는,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의 부정

부정의 이중성처럼

마치 만화세계처럼 분명이 낭떨어지에 떨어져 추락해야 하는데

고양이가 꼬마생쥐를 잡을려다 놓쳐서 한 참을 낭떨어지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아차 참 내가 떨어져야지 하고 의식을 하는 순간 떨어지는 겁니다.

그럼 한 참을 지난 뒤에야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만화라써?


이것을 과잉의 과잉이라고 합니다.


불안은 대상과 멀리 떨어져서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어서 불안하다는 겁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3일 이라는 단절성입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졸지에 낭떨어지로 떨어져 결국 불안해 지는 겁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순간을 형성해도 베드로를 물에 빠뜨리시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곧 죽음을 거치지 않는 것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간격을 거치지 않는 것은

다 불안해서 조작해 낼 수밖에 없는 행함 곧 육의 소욕일 뿐이다는 겁니다. 한계점입니다.


괜히 율법을 지켜가 괜히 예수님을 죽이지 못하면 불안해 미치는 겁니다.

율법을 괜히 지켜가 악마를 사수하게 된 셈이니까 말이지요.

율법은 간격을 벌리는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간격을 좁힐려는 수작 때문에 예수님만 보면 불안해 미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항상 전쟁을 할 때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지 내가 하는 전쟁이 아니기에

멀리 떨어져서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단절성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그 선발대 곧 언약궤를 매고, 법궤 혼자 앞장서서 다 물리친 것을

화답으로 찬양만 할 뿐입니다. 뒤에 떨어져서 말이지요.

뺑뺑이만 돌 뿐입니다. 즉 회개 자기 부인만 하는 겁니다.
난 광야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소리만 

그렇게 외치고서는 마지막 날에 딴 소리 합니다.
그런 원망한 자를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죄 용서 하셨습니다. 오 해피 데이

뿌뿌뿌 나팔 부는 희년을 선포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증거궤의 효력 효과를 보아버린 이상 너무 가까이 접근하듯

이 증거궤에 달싹, 바짝 달라붙어서 어찌하든 전쟁에서 이겨볼려고 용을 씁니다.
졸지에 거룩한 전쟁인데? 인간 전쟁도 아니요? 자기 전쟁도 아니요? 하나님 전쟁인데?

이길려는 자기 소욕 곧 행함이 개입하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행함이 아니 우리들의 행함이 다 이런 식입니다.다윗도 뭐 그랬으니 말이죠. 그래서 작살내는 겁니다.


오히려 증거궤가 요놈들 내(증거궤) 뒤에 숨었지롱 블레셋 군사들아

요놈 여기 있다 잡아가 죽여라 라고 증거궤가 배신 때리는 겁니다.


(삼상 4:1, 개역)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삼상 4:2, 개역)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삼상 4:3, 개역)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삼상 4:4, 개역)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삼상 4:5, 개역)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삼상 4:6, 개역)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삼상 4:7, 개역)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삼상 4:8, 개역)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삼상 4:9, 개역)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삼상 4:10, 개역)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삼상 4:11, 개역)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 4:12, 개역)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삼상 4:13, 개역)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 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삼상 4:14, 개역)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삼상 4:15, 개역) 『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삼상 4:16, 개역) 『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 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 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삼상 4:17, 개역)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삼상 4:18, 개역)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삼상 4:19, 개역)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삼상 4:20, 개역)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삼상 4:21, 개역)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삼상 4:22, 개역)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떠나긴요? 저거들만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다윗과 함께하심이 충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 판대기를 뒤짚는 겁니다.

사울왕 중심체제를 갖춘 저들의 이스라엘 판대기를

주님은 여지없이 고집스럽게 안식일을 범하는 다윗중심으로 판대기를 뒤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전체 배재와 상대적인 딸랑 한 명 다윗에게만 함께 하심을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결국 너무 가까이 증거궤에 간 겁니다. 인디아나 존스 영화가 생각나네요.


단절성 곧 만지지도 마라. 괜히 만져가 죽습니다. 소가 몰고가다가 돌뿔에 부딧쳐 덜커덩하고 들썩거릴때에 마침 떨어질려는 법궤를 잡을려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이런 좋은 취지도 죽다니요? 웃사와 법궤가 충돌한 겁니다.

다윗이 죽어야 하는 것을 대신 웃사를 죽이신 겁니다.
왜 만지노 나쁜 사람 나쁜사람 다윗이 화내죠. 나쁜사람!!

사실은 그 죽음의 저주, 심판 때문에 부랴 부랴 법궤 딴데로 유턴 합니다.
감히 빈자리를 자기 쪽에 끌어들여, 함께하심이라는 동행을 조작할려다가

갑자기 유턴하는 겁니다. 그 죽음을 보고 말이죠. 자살 방지 기술입니다.


다윗과의 동행 곧 함께하심은 저주 속에서의 긍휼입니다.

단절 속에서의 연합니다. 그러니 둘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을 중심으로 한 여호와의 함께하심 곧 은사요 선물입니다.
결국 이 단절성 속에서 다윗은 안식일을 지켜, 율법을 지켜, 네 배나 갚도록 집행하라 가 아니라

너야 너, 너가 그 법궤 곧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넌 끝이야 라고

그 끝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는 것입니다.

안식을 비로소 만나니 나는 손 마른 자인 부정한자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 손 마른 팔을 법궤에 넣듯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써 법궤에 담겨져야할 자이다는 겁니다.
함께동행한다는 것 티내야 할자, 조작해서 자랑 할 자가 아니라 말이죠.


이 심판성 이 단절성으로써

그 위에 피 발라 버린다는 겁니다.

심판해서 구원하시지? 죽여서 살리시지?


복줘서 구원하는 법, 살려서 다시 살리는 법은 없습니다.

지 스스로 동행해서 구원되는 법이 없습니다.


웃사의 죽음을 보고 다윗이 원했던 장소로 가는데 아니라

다시 이동합니다. 이 거리두기가 함께하심이지

자기 가까이 두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겁니다.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 6: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8,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개역)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개역)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1, 개역)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저주를 거친 축복이다는 겁니다.

죽음을 거쳐서 살려주시는 은혜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다윗이 법궤로부터 무시 받지 않으면 다윗은 은혜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억수로 억수로 봐 주신 겁니다. 안 타죽도록 말이죠.
근접하면 죽습니다. 여호와의 불입니다. 이용해 먹고픈 마음을 이길수가 없기에

주님 쪽에서 넘어오셔야 합니다. 그 단절성을 말입니다.안 타죽도록 말이지요.


그러니 자기가 자기 스스로 함께하심이라는 동행을 이룰려고 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함께하심을 만들려 낼수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죽음 보세요.

그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은 엘리 가문의 모습이요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즉 사울왕 체제 말입니다.


개방성이라고 여호와의 불을 아무나 만질수 있다고 여긴다는 자체가

이 단절성을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시기가 가득하겠습니까?

그 안식을 시기하는 겁니다.


동행하심, 함께 하심 이라는 그 꼬라지를 눈꼴 시러워서 못 보는 겁니다.


그래서 분기게 못하는 안식은 가짜라고 했습니다.


나도 안식일 지킬줄 안다? 

뭐라꼬요? 여호와의 불(심판성)을 다룰줄 안다고요? 개소리입니다.

두 제사장의 죽음의 차이성을 보세요. 완전 정반대입니다. 두 소욕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과 아히멜렉 제사장의 죽음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처럼 분기케 못하는 은사는 가짜 인 겁니다.

미움을 유발케 못하는 은사를 거짓입니다.


그래서 그 은사를 부어주시니까

졸지에 미워 죽습니다.

이유 없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밉습니다.


소유 싸움 곧 출처 싸움 때문이기입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을 만질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낫게 됩니다.


저번에는 문둥병자 고친 소식이 들리니까 많은 사람이 몰려오니 도망치실때는 언제고 

이제는 만지도록 하시니 귀신들이 떠나 고침을 받게 됩니다.


즉 단절성이라는 성령의 소욕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의 소욕에 좌우 되지 않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행위 하나 하나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행동이요 말씀입니다.

은사가 너도 할 줄 아냐 나도 할 줄 안다 라고 나오면 그 선물과 충돌해야 합니다.
법궤와 즉 여호와 하나님과 충돌하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세요. 가까이 하지 마세요.


이 사도라는 사명을 통해서 이제 악령의 세계에서 제대로 미움받는 판대기를 깔았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단절성의 성령으로 인해서

이 악한 세상을 거치도록, 또 엉터리 약속 민족을 거쳐서, 엉터리 은사 선물을 거쳐서,

엉터리 안식, 엉터리 율법을 거쳐서, 엉터리 함께함, 엉터리 선민, 엉터리 동행을 거쳐서


예수님만이 이루신 십자가의 세계를 그 차이성으로써 그 단절성으로써 격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미흡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동행하심, 함께하심만 다 이루셨다면 된겁니다.


바로 늘 그 엉터리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시는 성령이 아니시면,

그 징계가, 그 미움받도록 구조를 만드시지 않으면, 우리는 인자를 쳐다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오직 목숨까지 내어준 확실한 사랑이 있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허구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눅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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