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방받는 하나님나라 (눅 6:20-31)


(눅 6:20, 개역)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1, 개역)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눅 6:23, 개역)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4, 개역)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28, 개역)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9, 개역)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눅 6:30, 개역)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눅 6:31, 개역)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는 은사 또는 직분을 주심은 하나님나라 곧 예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이 부분이 마태복음 5장 에서는 팔복과 그리고 이어지는 산상수훈에 해당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다 한결같이 부정적인 의미가 바로 복이 되고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는 저주가 된다는 식입니다.


복이란 소유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유성 곧 출처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 봤습니다.

그럼 그 출처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저주 받는 일을 격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유성을 보여주는 출처가 하나님 나라 곧 예수님이 완성하신 나라라면

우리는 그 상황을 출처를 보여주는 식으로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천국에서 끌어당기는 자면 천국의 삶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고

지옥에서 끌어당기는 자면 지옥의 삷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처인 천국과, 출처인 지옥을 보여주는 삶 말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삶은 뭐냐 라고 했을때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처럼 이런 삶이 천국이라는 출처에서 땡기는 삶이다 라고

천국의 복된 삶이다 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서는 전혀 천국의 복된 삶이 아니다 라고 여겨지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완전 정반대로 저주 받는 것이 오히려 복되다 라고 하고


상대적인 우리가 보기에 복스러워 보이는 그 삶이 저주의 삶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전혀 먹혀들 수 없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자신이 소위 믿음을 강화 시켜서

뺨 맞는 것을 복이다 라고 여겼다치면

정작 자신의 아내와 부모와 형제와 자식들은 너 미쳤구나 라고

가장 가까운 자들로부터 거리두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거리두기를 하는게 아니라

같이 먹고 자고 함께 지내온 가장 가까운 가족 친지 친구 직장 교회 학교 

모조리 거리두기를 시작해 버리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자살하라는 말과 같아 지는 겁니다.

너 이 조직에서 나가주렴 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저주와 함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였던 겁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까지 뒤짚어 씌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성경말씀은 복이다 라고 합니다.

물론 출처인 하나님 나라 때문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출처가 하나님나라가 아닌데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그 상황을 벗어날수가 있습니다.

친화력의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아부하고 무슨 짖으로도 다 하면 사회와 조직은 받아줍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저주의 사건을 다시 재현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를 들이대보면 감사한지? 거부하는지? 계류기술이지요.


그러나 출처가 하나님나라이면 이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다 싶이

출처를 보여주기 위해 동원이 되기에, 아예 미쁜 은사까지 부어주시면서 까지,

철저한 마귀나라와 대조적으로 보여주게 되는 운명의 삶이다는 겁니다.


또 자신이 그런 운명을 의도적으로 할수 있느냐?

그것도 역시 안됩니다.

바리새인 보세요. 평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았다고 자부했고

주변인들도 다 그렇게 알았습니다만

예수님 한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어떤 행동 행함을 기준으로 삼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준 적이 없다는 아주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아니 긍휼을 베푼적이 없는데 무슨수로 저런 선한 행동을 할수 있는가?

한번 끍어봐? 예수님만이 끍어대는 실족하게 만들기 거리끼게 하기를 통해서

바리새인은 비로소 살인의지를 피력하게 됩니다. 유대인 대표가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화론이든 교회에서 충성 봉사 전도 선교 이웃사랑실천이든

십자가를 들이대 보면 역시나 우리의 모습은 악마적인 모습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즉 이런 팔복은 결국은 인간에게서는 나올수 없는 불가능한 겁니다.

저주 받는 것이 복인데 우찌 인간에게서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그야말로 미쁜은사와 같은 선물 받은자에게만 해당됩니다.

곧 성령 그것도 십자가의 영입니다.


미쁜은사가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지만

미쁜은사라는 매(십자가)가 사생아에게는 도리어 시험꺼리가 되기에

자꾸 자꾸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시험꺼리 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걸림돌 거리끼는 불편한 가시와 같을 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십자가 라는 미쁜은사를 거부하고 차단할수 있는 방향으로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주이고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단절 시켜야 합니다.

제목을 뺨 맞는 하나님나라 이다 라고 하니까 아 뺨 맞는 것이 조건이구나 라고

실제로 뺨 맞고자 하는 자학적인 마조히즘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짓선지자가 뺨을 때려도 잘도 대어 주는 구나?

라고 사도바울에게 지적받겠지요?


(고후 11:20, 개역)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그런데 왜 뺨 맞는 하나님나라 라고 했는가?

바로 상대적인 출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출처로 하지 않는 다른 출처를 겨냥한 겁니다.

경계선을 확실하게 선을 긋는 의미인 겁니다.


그럼 지옥은 뺨 맞지 않는다 라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뺨 맞지 않는 조건이 지옥이라는 조건을 이루는 것이 되겠지요!


그것이 아니라 뺨 때리는 입장이 지옥의 출처를 상황이다는 겁니다.

즉 개별적으로 따로 노는 서로다른 출처가 아니라

서로 상대적으로 맞물려 있는 출처이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방해하고 싸우고 있다는

명료한 적대적인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즉 천국 스스로가 이런 상대적인 지옥을 동원해서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구약을 통해서 좀 더 쉽게 이해를 하면

바로 죽은자와 방불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알수가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설교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거짓입니다.

그들을 항상 믿음의 영웅으로 취급해서

교인들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고

종교꾼으로 만들어서 결국 돈 뜯는 삥 뜯는 

자기도 지키지도 못하는 것 남에게 뒤짚어 씌우고

지도 천국에 안들어갈려고 하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겁니다.


즉 복받아서 잘되었지 않았느냐? 천국 갔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

라는 식입니다. 과정을 다 빼버리는 겁니다. 결과만 챙기는 식이지요.


또 성화론(개혁주의)자들은 한번 더 뒤짚어서 사기를 칩니다.

과정을 빼버리는게 아니라 그 과정대로 살아라 라고 합니다.

하여튼 가능성 곧 개방성, 희망을 주고파 안달이 나 있습니다.

한명이라도 놓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천국에 집어 넣고 싶어 하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주인공 쉰들러와 같습니다.


구약에 죽은자와 방불한 자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복받을 만한 조건이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쳐들어와서

자신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립니다.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받아버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인위적으로 자신이 그 약속을 받은자 답게 만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 노력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노력이 바로 하나님나라 곧 약속이라는 출처와 대립되는 상황이기에

아브라함은 인위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그 약속을 이룰려고 노력, 애를 씁니다.

만약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되면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쪽팔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쪽팔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 약속을 성취하는데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쪽팔린다? 박 목사가 생각나네요. 이 양반도 결국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자신을 같은 동질성에 놓았다는 점에서

결국 반대로 해석한 셈입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가상한 노력입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 먹혀드는 겁니다.

당연히 인기 끌죠. 얼마나 대견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가상한 아브라함의 노력을 무참히 짖밟아 버립니다.

오히려 잘 된 겁니다.

왜 이런 것이 단절이 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단절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연달아 주님의 뜻대로 이삭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건지시는 의미가 아브라함의 행함에 대한 철저한 삭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의로 여김을 받은 것에 복이 있다 라고

다윗이 다윗 자신 조차도 그 과정을 밟게 됨으로써 비로써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에 왕으로써 사는게 아니라

왕에게 달라 붙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백성의 입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나그네를 대접하시는 그 섬김 때문에 산다고

막살게 됩니다.


즉 왕이 있다는 증거로써 막사는 겁니다.

독자적인 막살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왕으로써 나는 왕이 아니다 라는 막말을 막하고 다니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왕은 내가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아니 이것을 막산다 라고 하는데, 아니 이것을 이방인에게 말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내에서 외치고 다닌다는 것은

하나마나 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 속에서 하는 이야기 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외쳐야 하는 겁니다.


즉 막산다 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그들 속에서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고 있어 라는 소리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막산다는 말이 졸지에 서로다른 출처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졌다는 의미가 되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런 의미입니다.


서로다른 출처를 보여주기 위한 의미에서 성도는 하나님나라 라는 출처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자라는 겁니다.


소위 죽은자 는

남들이 다 아이를 순풍 순풍 잘 낳는 즉 생산력이 왕성한 가운데서 유독 얼룩진 응시물처럼

혼자서 아이를 못낳는 죽은태와 같은 자입니다.


또 반대로

남들이 아이를 못낳는 그 상황에서 유독 혼자 아이를 순풍 잘 놓는 그런 혼자 톡 튀어나오는 그런 운명의 모습으로써 그 환경에서 밉상받게 되는 겁니다.


이래나 저래나 유독 톡 튀어나오는 존재라는 겁니다.


한번은 티비에서 동물농장이던가?

거기서 고슴도치 형제들이 여러마리 애완용으로 키워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한 마리가 유독 털이 빠지기 시작 하더니

그 다음부터 동질성을 추구하는 형제들 속에서 한 마리가 이질적으로 차이가 나니까

더욱더 아픈 놈을 공격하게 되는 겁니다.


다들 털이 다 있는데 혼자 대머리처럼 털이 빠져있는 놈을 적으로 인식해서

공격하게 되니까 그 털빠지는 고슴도치가 거의 죽게 되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 이질적인 이단을, 조직을 보호차원에서라도 본능적으로 이 병균을 제거해야 하는 겁니다.
본능입니다 본능. 어쩔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래나 저래나 병든 고슴도치는 막살고 싶지 않아도 막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저쪽에서 알아서 출처가 다르다고 거리두기로 밀쳐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조직 곧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즉 이스라엘이란 거룩을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거룩치 못한 자는 나가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내 쪽에서 유지시킬수 있는 거룩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 왕으로써

이스라엘 왕 다윗이 나는 왕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게 됨으로써

즉 사건 때문이지요?(여디디야 사건)

졸지에 이 이스라엘이 두 개의 조각으로 쭉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갈라지게 되니 놀랍게도 그 동안의 숨겨진 상황이 드러나는 겁니다.

한 쪽은 기존의 것인 이스라엘을 사수하는 식으로 패거리가 형성이 되고

또 다른 한 쪽은 기존의 하나님은, 기존의 이스라엘은 가짜다 라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이 되면 뭔가 보여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보이고

무조건 대세는 기존이 이스라엘이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아니 보여야 우위를 쟁탈하든 말든 할 것인데

상대적인 경쟁자 자체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우위를 차지합니까?

그냥 그대로 가는 거죠.


그럼 한 번 물어봅시다.

너거들은 이 기존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누굴 믿는데?

새 하나님이 누군데? 라고 하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 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 전쟁입니다.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아니 예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니깐?

그런데 어떻게 그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이 될수 있느냐?

아떻게 다윗이 다윗 자손에게 주 라고 표현할 수가 있느냐?


유구무언입니다.


육으로도 충분히 믿을수 있는 하나님과(손 할례,육 안식, 바리새인 십이조. 아버지와 동행한 맏아들)

육이 단절된, 육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주님 쪽에서 마련한 믿음 곧 이삭(제물되기)
(마음 할례, 안식 범하기, 세리의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 죄인 중의 괴수)


이 서로 상대적으로 한 이스라엘 내에서 두 개로 갈라지는 겁니다.

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본인도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을 본인이 믿게 되었으니

이게 자기 믿음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마련한 믿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넘어왔기에

이 분명한 이질성, 그 모호한 경계선인 가짜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라(아브라함 약속을 주물딱 가지고 노는게 아니라)

약속이 아브라함을 가지고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부음으로써

그 차이성을 이삭의 제물됨으로써 극대화 시켰기에

이제는 약속의 종이 되어버린, 믿음의 종이 되어버린

믿음이 아브라함을 종부리듯이 부려먹는

그런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즉 막살았다 라는 뜻입니다.

죽은자로써 예수님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죽은자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 잠깐 불임여성으로 살 듯

죽은자 취급받을 뿐이지


바로 그 분이 죽은자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삶으로써 덮쳐진 겁니다.


우리는 그저 이 분을 외면했을 뿐이다는 겁니다.

죽은자로 취급하고 뺨때리고 말입니다.

우리가 뺨 맞는 운명이라는 뜻에서 제목이 저런게 아니라

뺨 맞은 분은 예수님 뿐이다 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모든 인간은 그를 뺨 때린자 즉 가해자인 겁니다.

피해자는 예수님 뿐인 거죠.


그러니 복은 예수님만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복? 팔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뺨 때려놓고? 무슨 복?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본인 만이 받은 복

즉 뺨 맞은 그 복을 우리에게 부으심으로써

다시 그 십자가의 사건이 재현 반복 충만케 된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사건이 만개가 됨으로써

예수님이 받은 그 복이 넘쳐나는 겁니다.


결국 뺨 맞는 행위를 우리가 조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뺨 맞는 분이 누구인가?

그 분이 살아 있다는 뜻에서

뺨 맞는 죽음의 사건이 재현된다는


바로 그 인물을 나타내는 겁니다.

안식도 그 인물을 나타내지 못하면 가짜이듯이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나타내냐? 불가능하죠?

그래서 성령을 부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연관도 없이 멀쩡하던 가정에 불화가 생겨버립니다.

앞뒤 그 원인도 없이 졸지에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가족 끼리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출처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가정에 두 하나님이 졸지에 생겨버리듯 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졸지에 두 패로 나뉘어지는 거죠,

한 쪽은 하나님 중심 선지자

또 다른 한 쪽은 예수님 중심 선지자


하나님과 vs 예수님과의 전쟁이
한 가정안에서, 한 조직, 한 민족, 한 국가, 한 이스라엘 안에서, 한 교회 안에서 
서로의 원수지간으로써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이 벌어진다면 성령의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이다 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한 가정 곧 유대족속 내에서 벌어졌다고 치면

누가복음은 이방인 아닙니까?

어 그런데 이게 결국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두 개로 쪼개기 위함 입니다. 갈라서게 하기 위함 입니다.

이 이방인들이 이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서 다시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식으로 동원이 되며

개입이 되는 겁니다.

그럼 더더욱 개같은 이방인 주제에 유대나라에서 성경말씀을 운운하게 되면

이 갈라짐은 더더욱 모호함이 없이 그 경계가 쫙 쫙 쫙 시원하게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저번에 재 후배가 왜 다윗을 주님께서 이방나라에 피신시켜 이방나라를 돕고

왜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기도록 했는가? 이해가 안된다고 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물 중심 곧 다윗 중심을 통해서 다윗이 거하는 곳이 이스라엘이 되었기에

민족 이스라엘과 다윗이 속한 이방나라와 전쟁을 해서 결국 다윗이 이기는 것이지

이방나라가 이기는게 아닙니다. 

결국 그 이방나라도 다윗을 이용해 먹고 단물빠진다 싶으면 언제든지 뱉어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카이 더욱더 이해가 안되는 거죠. 그들 이방나라도 다윗을 버리기는 매 마찬가지 이거든요.


결국 인물 중심이다는 겁니다. 육 중심, 육의 확대된 민족, 국가 중심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인물이 한명 개인 이니까, 집단 중심이 아니고? 개인 중심이라는 말인가?

아니지요! 그 다윗이 예수 안에 있기에 그 예수 안이 집단적입니다.

겉으로는 딸랑 눈으로 한 명으로만 보이겠지만

지금 판대기 천국집단과 지옥집단과의 대립이기에

보이기는 딸랑 한 명처럼 보일 뿐이다는 겁니다.

이 한 명 조차도 부정성으로 보이는 겁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세워서 여러 어른들이 있는 가운데 정중앙으로 세워둔 후에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출처를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마 18:1, 개역)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2, 개역)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 개역)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개역)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막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눅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눅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즉 상대적으로 어린아이 하나는 집단적으로 보이지 않고 

개인으로 뿐만 아니라, 부정성으로 보이는 겁니다.

왜 뺨 맞는 하나님나라 라고 했는고 하니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저주받고

매맞고


다 한결같이 부정적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옥의 소욕의 무조건 이유없이 반대방향을 말하기 위함이지

그 자체의 독자적인 뺨 맞는 것이 조건이 되는게 아닙니다.


왜 어른이 되고 싶어 하겠습니까? 조직 속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그 조직에서는 자격조건이 안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누락되는 겁니다.


그 배제성이 바로 부적격하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온나 애들은 가라 이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격 조건을 갖추었다는 겁니다.

어른은 온나 라는 겁니다. 반대로 애들은 안돼! 꺼져 라는 겁니다.


적어도 조직의 구성원으로써 뭔가를 맡겨도 된다는 겁니다.


방금 어머니께서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줄 아셨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웃으시면서 혼자 희죽 희죽 거리십니다.


왜 또 웃으십니까?


아니 글쎄 다윗이 말야 얼마나 고집이 센지?

형제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막내 다윗 너가 교만하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어서 이 어른들 싸움에 끼이지 말고 어서 썩 물러가서 집으로 가라


(삼상 17:28, 개역)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 17:28, 쉬운) 『다윗이 군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다윗의 제일 큰형 엘리압이 들었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넌 여기에 왜 왔니? 들에 있는 네 양들은 누구에게 맡겨 놓았니? 건방지고 잘난 체하는 아이야, 넌 지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어. 넌 지금 전쟁 구경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거야.”』


(삼상 17:28, 공동)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그런데 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 바로 젖먹이 전쟁입니다.

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지식도 경험도 연륜도 창도 칼도 방패도 군대도 모조리 다 힘입니다.

왜 헬라인이 지혜를 구합니까? 지혜도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힘에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다 라는 겁니다. 

즉 전혀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로 이 전혀 힘이 되지 않는 젖먹이를 가지고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참혹하지요? 


그러나 그 정도로 인간은 안된다 라는 겁니다. 단절시키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젖먹이를 통해서라도 말이죠.


이 젖먹이가 바로 부정성입니다.


전쟁에 부적격하다는 겁니다.


어린양의 전쟁입니다.


바로 그런 부적격한 방법으로만 전쟁을 곧 소욕싸움을 펼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이다 라는 겁니다.


자격조건 갖춘 것을 일부러 피해 버리시고

전혀 자격조건이 일체 되지 않는 방식으로만 한다는 겁니다.


불임자, 불임여성, 무자식, 고아 과부 나그네, 어린아이,

젖먹이, 문둥병자, 세리, 소경, 창녀


자꾸 이런 부정성 곧 부적격한 자들이 천국이라는 출처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가장 적격으로써 천국 스스로가 천국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럼 그런 조건 갖추면 되겠네? 아니지요

조건 갖추면 또 부적격하겠지요.


상대적으로 인간들이 추구하는 소욕 즉 육의 소욕에 반대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소욕 곧 출처이다 라는 겁니다.


너는 육을 모태라 삼아라

그러든 말든 나는 무조건 너의 반대인 십자가를 모태로 삼겠다 라는 취지인 겁니다.

누가? 천국이가 말입니다.


즉 누구를 말함이지

거기에 동원되는 유물로써 이들이 물건취급당하듯이 동원되지

유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바로 누구? 라는 인물입니다.


그 인물 때문에 오히려 물건 취급 당하는 거죠.


그러니 육의 소욕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유물로 취급받는 자체가 일체 허용불가입니다.

그러니 누구 라는 인물을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능성과 불가능성 세계와의 차이성이요

좁힐수가 없는 명료한 경계로써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갈라서게 하는 복음 이라는 글에서

놀랍게도 인간은 완전 개똥보다 못한 물건 취급받고

그 물건 취급받는 것을 마치 마조히즘 환자처럼 기뻐하듯

사도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니 미쁜 은사 곧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다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바로 이 물건 취급받는 것 때문에 돌아버립니다.


아니 내가 닭이라구?

난 인간이지 왜 닭이야?

왜 내가 세 번 꼬끼오 라고 울어야 해?


어린양은 잡아먹기 위함이고

닭은 잡아먹으면 그만인데

그런 무가치한 물건이 되어야 해?

그런 무가치한 젖먹이가 되어야 해?


이미 눈의 방향이 자기에게로 쏠려 버렸기에

그 미쁜 은사 자체가 시험꺼리가 되는 겁니다.


자 본문에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받게되는

바로 미쁜 은사들 곧 선물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뺨 맞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 때문에

아 뺨 맞는구나


그렇게 되면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는 복이다는 겁니다.


그저 젖먹이 라는 부적격자

어린아이라는 비적격성이 (무능함)


하나님나라 라는 출처를 하나님 나라 스스로가 드러내는데 있어서

동원시키는 하나의 상대적인 의미라는 것


바로 이런 점에서 천국복음은 뺨 맞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뺨 맞음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처럼


그것이 복

곧 복음입니다.


그 구체적인 인물이 바로 복입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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