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찢는 사도 (행 14: 8-18)


(행 14:8, 개역)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행 14:9, 개역)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 14:10, 개역)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행 14:11, 개역)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행 14:12, 개역)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행 14:13, 개역)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 14:14, 개역)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행 14:15, 개역)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행 14:16, 개역)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행 14:17, 개역)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 14:18, 개역)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대신 육체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통 인간은 [너 같은 놈 육체를 찢어버리겠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내가 너 대신 나의 육체를 대신 찢겨야 하겠다 라고 나오면 이것은 뭔가를 넘어섰다는 겁니다.


대부분이 남들에게 너 회개 하라 라고 나옵니다. 그 만큼 그 말은 말하기에는 쉽습니다.

그러나 너를 회개시키기 위해 내가 대신 회개하마 그래서 죽어주마 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미쳤습니까? 내 대신 죽게?


말로만 너 대신 죽어주마 라고 하고, 나이가 들어서 죽게될 쯤에 너 대신 죽는거 맞제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회개가 아니겠지요.


얼마나 다급하게!! 내가 당장 죽어야 겠다 라고 나오는 것일까요?


이것을 누누이 반복해서 말했는데 바로 도착성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다급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 상대방은 전혀 다급함이 없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깜짝 놀라지요? 왜 저렇게 오바를 하냐 말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너가 그렇게 다급하게 죽어야 할 정도로

그것도 내 대신 죽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오바액션을 하느냐? 라는 겁니다.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내가 잘못을 했으면 아니 내가 벌 받아야지?

이거 뭐 잘잘못을 따져서 아 내가 잘못한 것 맞네 라는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바로 바로 급하게 내가 널 위해 죽어야 겠군 이라고 나오면

이것은 뭐 내 잘못을 대신해서 죽는거 맞어?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고

오히려 그런 오바 액션이 상당히 사이코패쓰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피해자가 나와야 가해자였음이라는 판정으로

잘잘못이 드러날때에 아 맞군 내가 큰 실수 큰 잘못을 한 것이 맞구나 

이렇게 나와야 정상인데

이건 뭐 다짜고짜 난 너를 위해 죽어야만 해 라고 다짜고짜 죽을려고 한다면

이것은 회개라는 의미보다, 왠지 자살, 그것도 스스로의 자살이 아닌

너 때문에 자살할 거야 라는 식의 변태적인 도착성에 가깝다 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들은 젊은 남녀가 자기사랑을 안 받아준다는 태도에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때에 가끔 벌어지는 죽음 사건입니다. 너 때문에 자살할 거야?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실상에서는 그런 일들이 그렇게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프로이트 말 마따나 모든 인간의 행동은 성이다 라는 의미에서

아침 저녁 마다 나오는 모든 드라마가 다 여성용 야동이라고, 막장 에로스라고,

개그우먼이 말했듯이

그 질질 끄는 모든 시간들을 한 몇초로 압축해 버리면 저런 변태적인 도착성이 아닌 것이 없겠지요.


자 그러면 회개를 할려면

먼저 잘못 된 것이 드러나야 하고

그 동시적인 가해자가 있어야 하고

그로인한 피해자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판단 곧 판결이 있어야 잘잘못을 따져서

아 이래서 잘못 되었구나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법적인 과정을 복잡하게 거쳐본들 결국은 그것은 외설적인 겁니다.


잘못된 것을 의식하든, 못 의식하든 외설적인 법을 거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바로 이런 법적인 육체에서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 법적인 육체를 확 껍데기 벗기듯 확 벗겨버리는 것이


법적 육체의 외설성 보다 더 외설적인 더 나은 외설성인 바로 사도들의 옷 찢기입니다.


누가 내 대신 죽는다는 것 보다 더 외설적인 것이 없습니다.

나의 법적인 육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개를 못하는 것은 나의 불법성 보다 더 외설적이고 더 불법적인 부조리가 덮치지 않아서 입니다.
충분히 단절 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아직 배 부른 거죠.

잘잘못을 가려서 내가 내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아 그 행동은 잘못 된 것 맞네 라는 의식이 나오기 까지
인간은 상당히 우회적인 것들을 많이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순간만큼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내 잘못인 것 알아도 왠지 감추고 싶고 드러내기 싫다고 여기게 되면

형사 입장에서는 거쳐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증도 잡아야 하고, 탐문조사도 해야하고, 기록 즉 수사일지도 적어야 하고

얼마나 거쳐야 하는 것이 많은지?


그런데 다짜고짜 너 이 행동 때문에 나 당장 너 때문에 죽어야 겠다 라고 나오면

이런 모든 자잴구래한 것들 하나도 거치지 않고 바로 돌직구를 날려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저만 시원하다고 여기는 건가요?


그냥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죽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넙쭉 받아 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화론자들이 궁시렁 궁시렁 거립니다.

그것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러느냐?

교회 질서를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질서고 뭐고 개판 된다.


바로 이 모습이 자잴구래하게 거칠 것을 모두 거치겠다는 거죠.

즉 본인 당사자가 주님이 주시는 것 넙쭉 받아 먹은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사건을 격어야 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그 어떤 접촉점이 없이 다메섹에서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는 그 예수님을 만나야 했던 겁니다.


넙쭉 받아 먹게 되면 궁시렁 거리는 것이 없이

어라? 바로 그렇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운명에 자신도 연합이 되어서

오늘 본문처럼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남의 잘못 때문에 대신 죽어야 한다고 옷을 찢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화론자 즉 행함론자는 타인을 위해서 옷을 찢는 자들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참람죄를 올무를 쳐서 낚아챌려고 할 때

그렇게 옷을 찢는 행위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자신들을 돋보이게 할려면
상대적인 예수님은 더욱더 저주 받아야 마땅함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겁니다.
참 어렵게 옷을 찢지요? 저런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런 온갖 계산을 잘 짜여진 계획에 의해 진행이 되어야 하니

얼마나 머리 싸매고 토론을 했겠습니까?


즉 불안하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무질서 개판 된다는 염려 자체가

시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저 주저함은 오늘 본문의 사도들의 돌직구와 완전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물론 우리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냥 편할대로 생각하는 것이 대세를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것을 알기에 아주 아주 엽기적으로

기준의 틀을 깨면서, 넘어서듯이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돌직구로 승부를 거는 겁니다.


여기에 사람은 당혹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판단할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판단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생사가 달린 자들은 잘못을 한 자들이 아니라

생사를 걸고 나서는 사도들이 지금 더 다급해서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감당이 불감당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대신해서 지금 당장 죽어줄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참 제가 이렇게 문자로 이 문장을 적어놓고도 제가 도리어 당혹스럽습니다.

이 얼마나 살 떨립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이 부분을 앞뒤로 살펴보면

방금전 까지만 해도 사도들은 가는 곳 마다 쫏겨나고

또 방해꾼들이 달려들어서 훼방을 합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행 14:2, 개역)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괜히 조용한 마을에서 괜히 복음이 증거케 되니 

악한 감정들을 멀쩡한 곳에다 유발케 되질 않나


(행 14:4, 개역)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행 14:5, 개역)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기여이 두 패로 나누어지게 되자

이방인과 유대인들과 행정직원들이 이 두 사도를 말도할수 없는 욕을 퍼붓고

돌로 칠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마을에서 평상시 그들이 자주 그런 행동을 보이면 그들은 그런 자리를 늘 의심받게 됩니다.


아니 저런 사람이 덕이 없이 우리 마을을 위한다는 일을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오래 그 자리를 유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생전에 그런 모습을 보인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이 복음에 대해서만 저렇게 유일하게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마을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저렇게 온마음을 다해서 이단자들을 배격하는 겁니다.

아니 도둑놈 강도 적이 쳐들어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되잖습니까?


사도들은 이 땅을 무너뜨리는 자들이니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겁니다.

그 땅에 누가 삽니까?

사랑하는 가족, 하나님께 영광 돌릴수 있는 회당(교회),
주님이 축복을 주셔서 농사 짖고 살수 있도록 한 터전(떠돌이에게 이 터전은 생명터입니다.)
아니 이런 하나님이 주신 허락한 것들을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다 불태워야 하는 것입니까?


분명 사도들은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증거했지만


성령의 소욕의 귀로써는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당연한데


이것이 육의 소욕에서는 그래서 우짜라꼬? 라는
강퍅한 애굽의 바로왕과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더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재산이고 뭐고 다 불태워 버리니까


지금 시작도 안한 판국에 유대인들은 미리 반응을 나타냄이 

그 강퍅성을 드러내더라 라는 겁니다.  

아니 강퍅케 하는 안식처럼 일부러 안식범하기를 

안식(영원한 규례)지키기를 하는 자들 코 앞에서 펼치고 있으니 

이것은 당연히 충돌이요 당연히 누구 하나 뿔에 의해 구멍 뚫히기 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런 판대기 싸움이 그 동네에서 끝나면

이제 종결되는게 아니라

또 숨쉴 틈도 없이

딴 동네에 가서 또 그 판대기를 뒤엎어버리는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이거 뭐 거의 일방적입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주의 이름이 가는 곳 마다

시비 걸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행 14:6, 개역)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여기로 도망와서 


참 희한하지요? 거기서 끝까지 승부를 걸지? 왜 도망왔을까요?

유치하지 않나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소욕이고

지금 성령의 소욕에 의해 사도들은 움직일 뿐이니 사람의 움직임으로 보면 안됩니다.


일부러 동행을 자기 쪽에서 유지하거나, 의도적인 동행을 조작해 낼수가 없음을

웃사가 법궤 떨어질려는 것을 막을려다가 손을 대는 바람에 죽게된 사건을 통해서 살펴봤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일이 인간의 해석에 해석 당하지 않기에

뭔가 단절되듯이 뚝뚝뚝 끊어지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연결점이 없이 사건 자체가 하나의 개별자처럼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즉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행함을 차단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보는 그 믿음이 아니면 이해할 방식이 없습니다.


저들에게는 이 말 자체가 핑계꺼리겠지요. 심심하면 믿음으로만 믿음으로만 이라고 도망친다고.


그러나 문제는 그거 다 알아서 뭐하게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티를 낼려고?

나는 이레도 두 번 금식, 두 번 십일조, 즉 십이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주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할려고?


그런데 도망간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그 미쁘신 선물을 받아야 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계속 남아가 싸움을 펼쳐본들 뭐합니까?

어서 택배선물을 배달하기 바쁘기 때문에 도망가듯 가야 하는 겁니다.

지체 할 수가 없습니다.


띵동 띵동 택배 왔습니다.


(행 14:8, 개역)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여 단 한 번도 걸어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지금 띵똥 띵똥 택배가 왔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단 한 번도 선물 받아본적이 없는 사람이

처음으로 선물을 받아보는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배달원 사도바울과 사도바나바가

선물을 받을수 없을 정도로 문 앞에까지 올수 없는 자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그리고 직접 선물까지 코 앞에, 손에 쥐어주고 뜯어줍니다.

아니 그 선물이 세상에나 그 원수성 그 죄성에 딱 부합이 되는

앉은뱅이를 구멍 뚫어버리는 선물인 겁니다.

선물은 구멍 뚫는 것이 선물입니다.

얼마나 믿음직 스러운지 

딴 사람은 시험들지만

이 앉은뱅이 즉 죄인에게만은 딱 맞는 미쁘신 은사입니다.


곧 앉은 뱅이라는 원수성 부정성을 구멍 뚫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일어나 걷게 되는 거죠.


(행 14:9, 개역)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 14:10, 개역)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자 이 상황을 우리 솔직히 못믿겠다 라고 나와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의사들

정신과 닥터들

내과 외과 그런 사람들 다 나와보라 하세요

믿겨지냐 말이지요?


안 믿겨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 믿겨지는 배경을 깔고서, 믿음이 부어질 때

그때 미쁘신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시험들어야 하는 겁니다.


오직 자신과 상관이 있을때에만 인간은 믿기 싫어도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선물이 아니라 함께하심을 조작하는 겁니다.

그때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다윗이 그래서 법궤를 자기쪽으로 들일려다가 웃사의 죽음을 보고 딴 곳으로 이동을 하듯 말입니다.


억지로 믿는 것은 사랑이 아니거든요.


분명히 나의 죄성과 연관된 믿음의 독자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 나의 믿음과는 무관합니다.


바울이 일방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라고 말이지요.

믿음이 있다는 조건 아래서 준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해석을 붙인 겁니다.

즉 처음부터 주기로 한 겁니다.


이것은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과 겹쳐진 그 중첩성 속에서

판대기로 펼쳐지는 주님의 믿음 곧 눈에 보이지도 만지지도 않는

이 이름, 주의 주 되심이라는 그 활동에 의해


이 앉은 뱅이가 당첨이 되어서 벌어지는 사건인 겁니다.

즉 전제된 것이 저들이 거부했기에 여기서 선물이 베풀어 진다는 겁니다.

항상 걸고 넘어지듯이 펼쳐지는 사건인 겁니다.


지금 누가 오바액션 하고 있습니까?


그 앉은뱅이 입니까?


아니 사실 그 선물의 혜택자 수혜자가 지금 기뻐서 뛰고 춤추고 해야 하는데

이것은 거꾸로 되어서 사도바울이 큰 소리로 오바액션을 더 과잉의 과잉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 앉은뱅이에게 꼿히는게 아니라

응시점이 사도바울에게 꼿히게 됩니다.


자 이렇게 되니

이 사도바울을 소위 중보자로 취급해 버립니다.

요즘 목사들은 자기를 중보자로 봐 달라고 애원하는데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그런 판대기를 다짜고짜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행 14:11, 개역)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행 14:12, 개역)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즉 인간은 해석불가인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수가 없는 겁니다.

소화가 안되어 탈날까 싶어서 변이 시키는 겁니다.

육의 소욕은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바로


(행 14:12, 공동)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주로 설교를 맡아서 한 바울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불렀다.』

(행 14:12, 쉬운) 『그리고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 라고 불렀고, 말하는 일을 주로 하는 바울을 ‘헤르메스’ 라고 불렀습니다.』

(행 14:12, 킹흠정) 『바나바는 주피터라 하고 바울은 주로 말하는 사람이므로 머큐리라 하더라.』

(행 14:12, 현대어) 『그러고는 바나바를 헬라신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설교를 하였다 해서 헤르메스라고 불렀다.』

(행 14:12, 가톨릭)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와 같더라 라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탯줄이 그들과 연결이 되어 있기에


바울은 그것을 끊어버리는 겁니다.

단절성입니다.


그래서 찢어버립니다. 그들의 육체를 대신해서 찢어버리는 겁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누군가 내 대신 심판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내 대신 죽으신 그 분이 나를 찢어도 상관없는

그 연결점이 바로 십자가에서 벌어진다는 겁니다.


찢으신 이가 다시 싸매듯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그들의 연결점의 탯줄을 끊어버리고

그들의 처음자리 출처를 새롭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 받은자들의 일입니다.


그 처음출처인 모태가 누구냐?

바로 옷을 찢는 심판자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겁니다.


제우스는 날 심판할 꺼리도 안되는 놈입니다.

헤메로스는 백날 설교해 본들 나를 제대로 심판할 줄도 모르는 자입니다.


진짜 나를 제대로 단절 시킬 나의 육체를 찢을 심판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옷을 찢으면서 내가 그 분 만났다

어딜 감히 심판할수도 없는 놈들을 거론하느냐?

그런 우상 마귀는 나를 심판 할수 없는

내 죄를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벙어리요 약속도 지킬수도 없는 우상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행 14:13, 개역)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행 14:14, 개역)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행 14:15, 개역)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그래서 제사를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못하도록 합니다.

살아 있다는 신은 

너희들의 이런 죄악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죽어본적도 없는 그런 헛된 우상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를 만류하고서는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다음 사건은 또 돌에 맞아서

유대인들이 보기에도 아 이제 죽었구나

시체 쓰레기 장에 냅따 버리자 라고 버려버립니다.


왜 사도들은 좀 쉬어도 되고

구지 돌삐 맞아 죽을 곳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이

돌삐 안 맞는 곳으로만 가면 안됩니까?


이 얼마나 불편하고 거리끼게 하는 참으로 단절성

즉 그 어떤 접촉성이 없는 복음입니까?


이런식으로 복음을 지금 현재에 증거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좋게하고자 하는 자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목숨 따위에 연연함이 없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도 너무 너무 수고하면서 엇비슷하게 가는 사람은 많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말아라 라고 할 지라도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갈길로 갈 뿐입니다.



우연히 


아주 아주 우연히


그것도 3초


그 순간만 성령으로 인해 외쳐지는 이 다급한 돌직구의 복음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이 앉은뱅이처럼

이 성령이라는 선물을 기뻐하면서


그런 기뻐하는 나 보다

더 오바 하면서 더 큰 소리로 기뻐하는 성령을 보고


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이 탄식으로

나에게 회개가 덮쳤다는 것을


그래서 목숨 따위도 안중에도 없게 해주심을


이런 사도들을 보면서 주의 주되심의 세계의 위력을


누리고 만끽하면서 뻔뻔스럽게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람은 볼게 없습니다.

나 자신도 볼게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 보다 더 큰 것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이

우리에게 돌직구를 날려 버립니다.

그 탄식 앞에서 우리의 육체가 여지 없이 갈기 갈기 찢겨지는

즐겁고 신나는 나의 종말을 빨리 맞이하길 울부짖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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