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망하게 하는 예수님나라 (눅 6:37-42)


죽음 속으로 밀어붙이는 참 감사한 예수님나라



(눅 6:37, 개역)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 6:38, 개역)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9, 개역)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 6:40, 개역)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눅 6:41, 개역)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 6:42, 개역)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성경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눅 13:1, 개역)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 13: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개역)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개역)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빌라도가 악행을 저질러 유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유대인을 살해함으로 제사 제물에 사람 피가 썩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예수님께 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엉뚱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정작 죄를 저지르는 자는 빌라도입니다. 그 악행은 이루 말도 못할 정도 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이야기에서 열외가 되어 버린 듯 빠져버리고

예수님은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희 유대인들은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들 보다 더 나은줄 알아서 살아 있는줄 아느냐 라고
도리어 화살이 유대인들에게 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 편입니까? 빌라도 편입니까? 마귀편입니까?


그 뒤의 이야기는 더 심합니다. 앞의 이야기를 더욱더 굳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중중첩으로 겹겹히 강화 하십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는데 18명이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 18명이, 살아남은 유대인들 수 많은 모든 사람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게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말은 그 다음은 너 차례다 우짤건데? 라는 겁니다.

너는 어떻게 그 죽음에서 벗어날려고 하니? 내일은 너 차례야 너!!!


즉 예수님 본인도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하러 왔다는 식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살펴볼 누가복음 6장의 내용으로

또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율법 강화)의 내용으로 얼마나 교회가 사기를 치는 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늘 이런 사기를 치고 있기에 또 늘 이런 사기를 당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속지말자!! 안 속으면 될것 아니냐?

그럴 재간이 있다면 예수님이 저렇게 나오시면 안되죠!!


마치 성전에서의 유대인 피가 썩인 일에

더더욱 겹쳐진 중첩으로써 마치 율법을 강화하듯이

실로암 망대 사건으로 너희는 죄 없는줄 아느냐 라고 물으시는 이유는


시선 자체가 지금 우리가 보는 그런 환경 속에서의 시선을 거부하시고

정작 닥치지도 않은 그 죽음 또는 심판 또는 저주 또는 그 끝인 종말을 확 땡겨버려서

그 종말의 시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끝을 땡겨와서)

무슨 대화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소통 불가인 단절이 되는 겁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죽은 그 뒤에서 그 시점의 시선에서 대화하자 라는 겁니다.


뭔가 뚝뚝 끊어진 느낌이죠. 말이 안통합니다. 안통해!! 
종말시선입니다. 십자가 대화법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그 사람의 끝 곧 종말, 곧 죽음을 끌어와서 말해 버리면

말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아니 내가 없어진 뒤의 시점에서 대화하자니? 내가 없는데? 무슨 대화를 해?


정그러면 그렇게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에게 좀 맞추어서

주님의 시선이 인간의 시선에 맞도록 좀 낮춰주시면 고맙겠는데


문제는 그러실 의향이 전혀 없으시다는 겁니다.

뱀에게 물렸어요?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쳐다봐!

약주세요 약?  너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봐!
아니 약 달라구요 약?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쳐다봐!
왜 당신 제자는 안식일 안 지키노?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쳐다봐!

빌라도에게 죽임당해 제물에 피가 썩였네요? 너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봐!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도 떨어뜨렸나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이러니 대화가 되나요? 단절 뿐인데?


왜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시는 것일까요?


오히려 “너! 이런 나의 시선에 들어오지 못하면 다 망해” 라고

아예 단정을 내려버립니다. 확고하고 명료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예수님의 시선에 들어갈려면

자신은 살아있다 라는 것 자체를 부정해 버려야 합니다.

물론 부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부인 할 수 있는 성령을 준적 없다고 해 버리면

그것은 부정한게 아니라 자기부인을 지켰다고 우길수 밖에 없을테니 역시나 지킨것이죠.

주님께서 또 깨작 깨작 사람 속을 긁어댈 테니까 실족 안할 자 없다 말이지요.

주여 나 회개 했고 자기부인 했습니다? 또 뭐 부족하나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결국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어차피 망했다는 겁니다.

망했다 망했어 망했군 망했어 시크먼스입니다. 시커멓게 그냥 불에 타도록 불 속에 집어 넣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선 곧 종말의 시선에 들어오지 못하면 다 망한다고 하시면서

그 죽음 속의 시선을 주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무슨 꼬장도 이런 꼬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눈이 있어도 누가 보겠이며, 귀가 있어도 누가 듣겠습니까?
에이 차라리 더러버서 안 본다. 귀를 막고 안들을꺼야 라고 자유의지인 강요된 선택을 하는 겁니다.

오히려 소경만이 보고, 귀머거리만이 듣게 되는 이 예수님나라의 뻔뻔한 소식을 당당하게 하십니다.

정작 건강하고 정상인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시는 겁니다.
아예 못 보고, 못 듣도록 하시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나는 망해야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자에게만 들리는 기쁜소식 십자가 복음입니다.


왜 망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럼 회개하면 이와 같이 망하지 않는 겁니까?

어차피 망합니다.아니 회개 해도 망하나요? 네 망합니다.

회개 하면 안 망한다고 했잖아요???

회개 자체가 죽었구나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안망할려고 지키니까 회개가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항상 망한자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자 말입니다.
그 자에게만 회개가 의미가 있고, 그 자에게만 망하지 않는 복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왜 왜 왜 망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다 이미 죽은 상태이다 라는 겁니다.

(롬 5:12, 개역)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개역)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개역)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개역)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난 살았고(복받았고) 저 사람은 죽었지(저주) 않았습니까 라는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 다음은 너 인데 백날 분류시켜본들 무슨 의미이겠느냐 라는 거죠.
다음이 내 차례인데 무슨 의미죠?
그래서 인간의 시선에서의 죽었다 살았다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 분에 의해서 비로소 진정한 죽음과 생명이 갈려지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너도 망했다 라고 회개를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유일한 산 소망이다는 겁니다.

나에게 너는 이미 죽은자야, 넌 망한 자야 라고 하시는 분이 유일한 산 소망으로써 말입니다.
마지막 아담을 말씀하시는 취지 입니다. 그 마지막 아담이 와야 하지
백날 첫번째 아담에게 속한 자 곧 자기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의미와 소망을 가진다는 자체가
마지막 아담을 무시하는 겁니다. 회개는 마지막 아담만 쳐다보는 겁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그 분에 의해 회개가 일어나는 겁니다. 회개의 영을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다 이루심으로써 처소를 마련하시고
탄식의 영(성령의 전)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회개 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눅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런데 자꾸 옷찢기로 괜히 옷만 배리는 짖만 할 뿐입니다.
인간의 시선에서의 분류가 아닌

진짜 죽음을 가지고 온 진짜 죽으시러 오신 종말의 주인종말을 몰고오신,
죽음 속으로 집어넣으시는 분의 분류작업에 의한 겁니다.


이 단절의 단절, 단절의 이중성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요! 그냥 망하면 되는 겁니다.
즉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왔듯이 이미 죽은자이듯
이제는 한 사람으로 인해  제대로 사는 겁니다.

이 분의 뜻대로만 되는 겁니다.
살고 죽고는 이 분 손에 달린 겁니다.
그래서 죽으러 오신 겁니다. 빌라도 손에.


제가 위에서 교회가 사기를 친다고 언급을 하면서

누가복음 6장의 내용이 얼마나 사기를 치는데 동원이 되는 줄 모릅니다.
그러니 사기에 놀아나도 싸다는 겁니다. 자기 욕심에 결국 넘어갈테니 말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왜? 니가 도로 비판받게 되니까. 

정죄 말라 왜? 니가 도로 정죄 받으니까. 

용서 하라 그럼 너도 용서 받는다.

주라 그러면 넘치도록 받게 된다.

남을 헤아려라 그러면 너도 헤아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특히 불교 곧 종교 중의 최고의 종교인 불교가 그렇게 외치는 것 아닙니까?


어 그런데 성경에도 적혀 있습니다. 같은 의미일까요? 같은 단어와 문장이니까 같나요?


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수 있느냐? 둘 다 빠진다 고 합니다.


또 제자가 선생보다 못하나 온전한 자는 선생과 같다고 합니다.


또 남의 눈의 티를 기가막히게 잘 가려내면서 정작 본인의 눈의 들보, 대들보는 못보느냐?

외식하는 자여 너의 눈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의 티끌도 빼 낸다고 합니다.

이것도 다 각 종교의 경전에 다 있는 소리입니다.

오죽하면 그 유명한 법정? 맞나요? 이름 까먹었는데

그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성경의 산상수훈을 읽다가 너무 너무 감격해서

맨발로 뛰쳐나가 그 마당에서 펄쩍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쯤?

진리를 만나서 기뻤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진리가 여기에도 있네? 아 난 틀린게 아니구나!! 너무 너무 감격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맨발로 펄쩍 펄쩍 어린아이 같이 그 마당을 쉼없이 뛰면서 기뻐했다는 겁니다. 동질성입니다.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 망했구나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이런 내용은 지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도리어 제대로 슬퍼해야 하고 제대로 울어야 하는 겁니다.


불가능 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요 쉽습니다. 너무 쉬워서 무시하지만 말입니다.

망하면 됩니다. 불가능하니까 울어야 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곧 회개입니다.


즉 비판받으면 됩니다.  그 다음 차례 너야 너!!!

정죄 받으면 됩니다.   그 다음 차례 너야 너!!!

늘 남의 눈에 대들보 취급당하면 됩니다.  그 다음 차례 너야 너!!!

내가 소경입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 차례 너야 너!!!

아 나는 망해야 하는 구나를 아는 것이 오히려 더 기뻐 팔짝 팔짝 뛰어야 하는 겁니다.
나를 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해 주시다니!!
나를 망하게 하시는 분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라고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이 그래서 물동이를 던져 버린 겁니다. 동네사람들 내 죄를 심판하는자 나타났어요!.
신나게 어린아이처럼 팔짝 팔짝 뛰는 겁니다. 다윗처럼 바지 벗겨지든 말든 말입니다.

그야 말로 신나는 종말입니다.


말 장난 하냐고요?


사실은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졸지에 두 패거리가 생긴다 라는 겁니다.


케익이 하나가 있다치고, 온모습 그대로 한통 온거 있는데

그것을 두 조각을 낼려면 반드시 칼이 필요합니다.


그 칼로 두 조각를 낼수가 있고

두 조각을 내면 이 쪽과 저 쪽이 갈라지게 되는 분리 분류 구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한 일 때문에 빌라도 라는 칼을 준비하신 겁니다.


즉 두 조각을 내는데 있어서 칼의 역할을 하는 것은

빌라도나 또는 실로암 망대의 무너짐이 그 역할을 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칼입니까? 그래서 사탄의 가시를 빼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푹 찔러버립니다. 자고치 말라고 말입니다. 은혜죠.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빌라도라는 몽둥이가 동원이 되니까

이스라엘 유대인이 빌라도에 의해 살육 당함으로써 제사 제물에 유대인의 피가 썩이게 됨으로
한 쪽은 죽은 사람, 또 다른 한 쪽은 살아남은 사람 으로 분류가 되더라 말이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또 이런 일이 벌어질까봐 예수님께 묻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기준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신의 기준으로 해서 말이지요.

그러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을 겨냥했지만 사실은 우리를 겨냥하신 겁니다.


또 역시나 케익 한통에 중간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니까
두 조각이 나는 겁니다. 깔려 죽은 사람과 안깔려 산 사람.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모든 유대인으로 분류가 되더라 말이지요.
누구 기준으로? 인간 기준으로 말이지요.


바로 이것이 인간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즉 어디까지나 나는 지금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봤고 그 본 것으로써 판단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너의 시선이 엉터리이다 라고 합니다.

넌 살아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죽었다면 너도 죽은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 마저 빌라도에게 죽으시러 왔다는 겁니다.
이중 죽음입니다. 죽음의 확장입니다. 죽음의 반복 말입니다.

판대기 전체의 모습으로 본다는 겁니다.


빌라도에 의해 죽은 사람과 안 죽은 사람으로 분류하지 말고

너도 죽은 사람과 같이, 역시 너도 죽은사람으로 분류 하라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생겼다면 

죽은 사람과 안 죽은 사람으로 분류하지 말고

너도 같이 깔려, 너 역시도 죽은 사람으로 분류하라 라는 겁니다.


비판하지 말라 너도 비판 받는다.

정죄 말라 너도 정죄 받는다.

용서하라 너가 용서 받는다.

대접하라 너도 후히 넘치도록 대접받는다


이 말은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자로 분류되는 그 속에서

차라리 비판받는 죽은자로 너 자신을 죽은자로 취급하라 라는 겁니다.


정죄하는 쪽과 정죄 받는 쪽으로 분류되는 그 속에서

차라리 정죄받는 쪽으로 너 자신을 죽은자 취급하라 라는 겁니다.


뭐 그리 오바하느냐? 비판 안하면 되지! 정죄 안하면 되지!

왜 구지 비판받는 쪽으로, 정죄받는 쪽으로 여김받느냐

그런 말씀의 취지가 아니잖으냐? 라고

다들, 한 똑똑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을 합니다만, 대부분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이 이렇게 사기치죠.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종말의 시선이다 라는 겁니다.예수님 자신이 그 죽음(종말)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죠.


종말에는 아비가 자식을 넘겨 버리고

자식이 아비를 넘겨버리는

아주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저렇게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사람도

그 종말에서는 정작 아무도 장담 못하는

그야말로 내가 내 자신이 그럴줄을 몰랐다 할 정도로

몰림을 당하는 밀어붙이는 종말에 의해 참혹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유신론자처럼 유일신을 믿는다고 빡빡 우겨도

유대인들 보세요 나치 히틀러가 가스실에 집어 넣으니

사랑하는 아내 가족 어린 자식들

부모님이 그 가스실에서 죽었다면

백날 우겨본들 결국은 자발적 무신론자로써 외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안 당했으니 아직 안 들통났을 뿐이지

빌라도를 누가 움직였습니까? 히틀러 누가 움직였습니까?


그런 유대인들이 그랬다면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더했으면 더했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겁니다.
유대인 욕할 입장이 못되지요? 바리새인 욕할 입장 못 되지요?

차라리 바리새인처럼 행동해 보세요

그 마귀가 나 네, 나 네, 나 !
아무리 봐도 내 네, 내 네, 내 맞네, 나 맞구만 이라고 말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나치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니까 살아남은자들이 무신론자로 변했더라!!

예수님 이거 우찌된 일입니까? 그렇게 올곧은 유신론자들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수 있습니까?


예수님 왈

그 다음은 너도 그렇게 변할텐데 우짜지?


즉 남의 일인 줄 아느냐? 너 일이야 너

바로 너 너 너

강도야 사람 살려 ~~~~

너야 너, 너, 너, 너가 강도야 ~~~


오늘 본문을 가지고 얼마나 사기를 치는지

저들만 사기치는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그런 사기를 아예 달고 삽니다.


자꾸 비판 하지 말라고 행함을 가르칩니다.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에서 말이지요.
자기도 못 지키면서 남에게 더 큰 소리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돈까지 줍니다.


아닙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종말에서는 누구든지 다 저렇게 된다는 겁니다.

확 ~~~~~~~~~~ 신을 가집~시다.

누구든지 다 저렇게 됩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제가 확신을 합니다.

저도 저렇게 반드시 변합니다. 변해서 변한게 아니라

원래 그런 자였다 라는 겁니다. 원래 애초부터 말이지요.

그동안 안 들통 났을 뿐이지, 툭 하고 누가 건드리면 비로소 다 들통나는 겁니다.

누구든지 다 저렇습니다.

다음 시간의 열매 개념도 이런 의미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뿌리 곧 처음자리를 뒤바꾸어야 열매가 달라질 것 아니겠습니까?

나무 자체를 갈아엎어버리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이상, 그 나무에 그 열매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귀 자녀일 뿐입니다. 무슨 수로 예수님의 자녀가 됩니까?
그래서 죽어라 망해라입니다. 도끼맨 세례요한이 괜히 한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자리를 예수님 자신의 숙제로 곧 죽음으로 바꾸시겠다 그 일에 일체 양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죽음을 자랑하고 기뻐하느냐 말이죠. 뻔뻔한 사랑 아니면 자랑 못합니다.

남의 들보는 당연히 잘 보일 수밖에 없고요

내 눈의 티는 때려 죽어도 안 보입니다. 비이야 빼든 말든 하는데

남의 들보는 무지 무지 잘 보입니다.


마치 선악나무와 생명나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는 선악나무만 보일 뿐입니다.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 말입니다.

정죄? 제발 정죄 합시다. 그래야 정죄한 자신이 정죄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이것은 누구든지 정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다들 외쳤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은자 다 라고 그렇게 정죄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기를 건드리면 누구든지 인간은 정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죄 하세요. 그래야 자신도 정죄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 것 아니겠습니까?

즉 자신도 자신을 정죄 제발 하세요.

용서 사랑? 하세요.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용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부조리 합니까? 불법을 행하고 있지요.

그래야 자신의 용서를 자랑질 할수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억수로 미워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말고 그냥 미워하세요
어설프게 용서 해 봤자 또 미워질 뿐입니다. 그냥 미워하세요.

괜히 안되는 용서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야 용서 잘하는 자신을, 그런 자랑 스러운 자신을 미워할 것 아니겠습니까?

제발 자기를 미워하세요.


자 이 말은

용서하든 용서 안하든

비판하든 비판 안하든, 비판받든 비판 안 받든

남을 대접하든 대접하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쪽에서 우리 행동의 여부로 갈려지는 두 패거리,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양상은 의미 없다 라는 겁니다.

해도 의미없고 안해도 의미없고. 그래서 딴 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불가능 속에서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너는 마땅히 망해야 할 자임을 아느냐 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 쪽에서 그냥 한 방에 잔탑 삐리리 처럼

기생충 요충 십이지장충 한 번에 그냥 밀어 붙이는 것이 있습니다. 잔탁

그냥 둘 다 죽어라 라는 겁니다. 모조리 죽이는 것이 와야 하는 겁니다.

한 쪽만 죽이면 안됩니다. 다 죽이는 것이 와야 합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 것이 아닌 주제에 왜 사냐 말입니다.
이런 부조리 즉 나의 시선, 나의 말도 안되는 기준이 그런 부조리(불법) 보다

더 부조리인 더 나은 부조리인 새로운 기준이 와야 제대로 갈라내는 겁니다.
더 더 더 말도 안되는 부조리, 불법,
곧 안식일을 어기는 안식의 주인이 와야 합니다.

어설프게 갈라내는 것은,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나의 죄에서 제대로 건져낼자, 나를 위해 제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기준을 이양 당하는 겁니다. 그 분이 시작하셨습니다. 망해라.


판대기 시선으로 봐야 하는데

남의 눈 들보? 내 눈의 티?


그런 사적인(시공간) 판대기는 판대기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묵시의 세계에서는 판대기로 취급 안합니다.


내 눈의 티를 뺏다고요? 웃기지 마세요. 마귀가 비웃습니다. 누굴 속입니까?
이웃 사랑 실천하자고요? 원수를 사랑 하자고요? 어딜 사기를 칩니까?

그 말은 모든 종교가 외치는 거짓입니다. 돈 되거든요.
그 중에 기독교가 제일 심하지 않습니까? 왜 제일 사기를 치고 싶어서 안달일까요?
돈이라는 우상에게 장악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돈에 미쳐있는 자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를 괜히 예수님이 유지시키시는게 아니거든요. 빌라도를 괜히 세우시는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수 있는 자격이 되십니다. 너 망해라 라고 말이지요.


말씀의 취지는 그냥 전체로 하나의 판대기로 본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 하나의 판대기 전체는

그냥 죽어 마땅한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그 속에 놓여진 것 자체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이유없이 기쁜 겁니다.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죽으러 오셨습니다.

아니 그렇게 묻는 나에게 죽임 당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너도 죽으라 망해라 라고 말하실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유일한 산 소망, 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 죽는 분만이 말이지요.


내 눈의 티를 우찌 빼실려구요?

수술실 안 들어가면 못 뺍니다.

그것도 어디 한 두 번 입니까? 매일 매일 생기는데?

매일 매일 수술실 들어가서 그 비용 우찌 감당하실려구?


그런 와중에 비판하기 위해 남의 눈의 들보를 발견한게 아니라

그 사람의 위해서 타인의 들보를 빼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이런 선한 의도를 외면하고

너나 잘 하세요 라고

모세에게 너가 애굽인도 죽였듯이 우리도 죽여 모래에 파 묻을려고 하느냐 라고

하면 우찌 하실래요?


(출 2:11, 개역)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 2:12, 개역)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출 2:13, 개역)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출 2:14, 개역)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자 전체 판대기의 시선을 그럼 무슨 수로 가집니까?

우리는 들을 귀도 없고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볼 눈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라 망했뿌라 라는 겁니다.
모세 보세요 탄로 났다고 도망치잖습니까? 뭐 민족을 구원하겠다고요?

너나 잘 하세요. 남 구원은 커녕 자기 살려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그냥 망하면 됩니다. 내 숙제 아닙니다. 도망 치세요.

이것을 신약에서는 바로의 낯을 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반칙으로 바꿔치기 하시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피했다고, 도망쳤다. 두려워 했다고 하고,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피하지 않았다고, 무서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칙이지요? 즉 허물을 덮었다는 것은 사랑이 벌린 외설성이다는 겁니다.


(히 11:23, 개역)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4, 개역)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개역)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개역)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러니 그냥 막사세요 도망치세요 망하세요 예수님 숙제일 뿐입니다.
사랑이 벌리는 사건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이 소리를 섭하게 듣지 말고

정말로 진지하게 한번 귀 귀울여 보세요

이 말이 얼마나 합당한 소리인지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나

아직 살았다고 우기는 너도 어차피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차이나게, 다르게, 따로 국밥처럼 보지 말고,

같이 보라는 겁니다. 같이. 난 깔려 죽었구나 감사합니다 주여.

좋은 것 곧 살았다를 동질성으로 보지말고, 죽었구나를 동질성으로 보고

살았음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차이성으로 보고,
나는 죽은자 맞구나, 망한자 맞구나로 보는 이 차이성의 단절을 격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망한자로 같이 보는 것이 바로 망하지 않는 길이다는 겁니다.


아니 같이 봐 버리면 망한 거지 우찌 망하지 않는것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불만스러워 하는 그 빌라도의 손에 죽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뿔사 ! 내 입이, 입이 있어도 더 이상 힐문할 자격 조차 없구나 ! 오호라 !!!!


지금 유일한 다른 시선인 예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습니까? 넌 망했다고.

그 자체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말씀인 겁니다. 회개의 영은 주님 손에 달린 겁니다.
나의 기준이 날라갔기 때문에 즐거운 겁니다.
그러니 망해도 망하지 않은 겁니다.
차라리 내 신앙을 포기하시고
나의 살아있음을 포기고, 나의 회개를 포기하는 것이 회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분의 소리를 들었다는 자체가

안 망하는 길이 있다는 유일한 산 소망인 겁니다.

그러면 안 망하는 겁니다.
내 자신에게, 나의 회개에 기대를 거는 것은 죽은 소망일 뿐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안 망하는 길은 뭡니까?


예수님 왈


망하세요 그러면 안 망합니다.


또또또 !! 아니 이것은 더욱더 화나게 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약올리나요?

어떤 교회를 가도 이런 말 장난 하지 않는데, 왜 예수 당신은! ... 자꾸 이러기요!!


입을 삐죽이며 “망하세요 그러면 안망합니다” 이거 뭐 말장난이 아니고 뭡니까?


그런 소리를 어떤 교회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설교하는 목사 봤나요? 없습니다.
교회도 살아남을려고 발악하기 바쁘거든요.

죽은자의 모임이 아니라, 살려고 하는 자들의 모임이다는 겁니다.

즉 아무리 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망해야 한다는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자신을 들따 보세요. 밀까부듯 철저하게 조사해 보세요? 있나?

그 이유가 전혀 내 쪽에서는 그 원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시선에서 거꾸로 올라가 봅시다.


1. 내가 망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최종적인 결론


그럼 그 결론 이전의 내 모습. 

2. 왜 저 사람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었나요? 라고 예수님께 묻는다. 물음.

물음 이전의 원인인 사건

3. 사건, 실로암 망대가 무녀져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뉴스속보입니다.



자 이렇게 시간대를 거꾸로 펼쳐 보았습니다.


결론에서 물음, 물음에서 뉴스속보 사건.

결론 -> 물음 -> 사건


자 이제 왜 내가 이유없이 망해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을 이해가 되십니까?

난 망했다(결론) -> 왜?(물음) -> 실로암 망대가 무녀져서 깔려 죽었기에 (사건)


우리는 이유 없이 무조건 이미 결론 내린 상태에 있는 겁니다.

즉 나는 이유 없이 무조건 망해야 할 이유가 전혀 전혀 없다 라는 겁니다.

이 결론을 우리는 미리 내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판대기를 예수님이 뒤엎어 버리는 겁니다.

너는 이유 없이 무조건 망해야 해 라는 겁니다.


이것은 내 개인의 행동 행동 하나 하나를 따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따지는 것은 바로 나요. 인간들입니다.


바로 그런 시선에서 벗어날수가 없기 때문에

종말이라는 죽음의 불 속에서 그런 껍데기를 다 태워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음 속으로 집어 넣어 보니

세상에나 세상에나 ! 내가 살았다고 여겼던 지금 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죽음의 장소이다는 겁니다. 죽음의 세상에서 아등바등 살아보겠다고 한 겁니다.


오히려 나는 이유 없이 무조건 망하면 안된다고 망하는 곳을 회피했던 그 큰물고기 뱃속이,

그 죽음 속이 도리어 나를 살리는 구원의 장소였다는 겁니다. 나를 저주하는 그 십자가가 말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습니다. 다들 악한 세대가 원하는 기적? 구원 달라고 아우성인데!!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이 말을 듣고 또 고지곳대로 불 피워가 불 속에 뛰어들지 말고 ㅋㅋㅋ
차 안에서 연탄불 피우지 말고 ㅋㅋㅋ


예수님이 마련한 불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불입니다. 심판의 불이요 저주의 불이요 망하는 불이다 라는 겁니다.

그 속에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등떠밀려가 들어가 보니

세상에나 죽지 않고 도리어 살게 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다 라는 겁니다.

회개 곧 자기부인의 장소는 십자가 뿐인 겁니다.

내가 빌라도에게 죽임 당해 성전에서 교회에서 제사 예배드리는 그 제사에 나의 죽음이
나의 피가 제물에 묻어 부정케 되고 나의 충성 봉사가 다 부정케 되는

그런 빌라도 때문에 벌어지는 그 상황에서 나는 벗어날수가 없는 마땅한 죽음인데


그 죽음을, 내 대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죽임당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멀리 동떨어진 2천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벌어진 사건입니다.

빌라도가 지구 끝까지 따라와서 날 죽일려고 합니다

어떻게 벗어나시겠습니까? 2살 밑으로 다 죽였듯이 말입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겁니다. 이 심각성이

그저 남 이야기 하듯 저 사람은 죽고 나는 살았다고 하는 그런 분류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너는 빌라도에게 벌써 죽었 었었 어야 했다는 겁니다.
베드로 너는 마귀가 내놔라고 밀까부듯이 조사하는 그 청구명부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마귀의 요구에 결제싸인을 안하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넌 벌써 넘어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회개하라 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벌써 빌라도에게 죽었다는 겁니다.


(눅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회개 도사들 자기부인 도사들이 있는 유대인 회당도 아니요

불교 스님들의 해탈하자 무자아를 추구하는 절간도 아닌

자기부정이라는 회사까지 차려 전 재산 바치도록 하는 기독교 교회도 아닌


십자가 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장소가, 그 처소가 바로

자기부인을 완료하신 예수님이 계신 장소이다는 겁니다.(하나님의 집인 기도의 장소)

나를 청구하는 빌라도의 손에서 건지기 위해 놀라운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닭이 너 대신 울었기에 아직까지 살아있지, 그 다음 차례 넌데 어떻게 할래 라는 겁니다.


그래서 처소를 예비하신 겁니다. 그 장소에서 우리는 망하고 다시 사는 겁니다.

엉뚱한 데서 망하지 마세요.

특히 교회에서 망한 놈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이처럼 우리는 이미 다 망한 자들입니다.

이미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잖아요.

얼마나 기뻣을까요? 그 처소를 마련해 주셨기에 그 다음 너 차례인데? 라는 의미가
술술 받아지고 믿겨지고 기쁘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미쁘신지!!


그런데 죽은줄도 모르고 있으니까


교회를 만들고 교회를 세워

내 눈의 티를 먼저 빼고 남의 들보를 빼야지 하고 있으니?


이거 완전 코메디죠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과 같은 짖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남을 용서 해 주었으니까 나는 후하게 용서를 받을 거야

넘치도록 받게 될 꺼야? 왜?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의 이조, 매일 매일 회개 하니까!!

성전의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바리새인의 모습이 딱 우리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세우실 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사람을

성령으로 세워서 우리 앞에 들이댑니다.


하필이면 창녀입니다. 하필이면 매국노 세리 입니다.

그런데 이 창녀가 자신의 몸을 팔아 가면서

모은 전 재산인 그 비싼 향유 고급 기름을

단 몇초 만에 예수님의 발을 씻는데 있어서 다 허비를 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머리로 그 더러운 발을 씻으시면서 말이지요.

너무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니 대뜸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줘야지, 왜 땅에 허비를 하느냐 라고 말이지요.


맞잖아요 맞아
적어도 가난한자에게는 못 줄망정, 땅에 허비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문제 아닙니까?
창녀가 평상시 몸을 해프케 하니까, 비싼 향유도 그야말로 해프게 소모하는 겁니다.
지극히 욕먹을 짖만 골라서 하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그런짖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엉뚱한 해석으로 판때기를 뒤집어엎어 버립니다.


이 여자의 행동을 영원히 기념하겠다는 겁니다. 참 뻔뻔하죠? 뻔뻔한 예수님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자

지금 장사 치르는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죽은 시체에 향유 기름을 발라서 무덤에 넣잖아요? 썩지 않도록 말이죠.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이 여자를 족쳐야 합니다.
아마 옷을 찢고 회개한답시고 난리 칠 겁니다.

아니 족치고 싶은데 주님께서 알 수 없는 해석불가의 말씀 곧 영원히 이 여인을 기념하겠다 라는 말 때문에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 뿐인 것이지. 속으로는 부글 부글 끓습니다. 즉 너무 쇼킹한 해석 땜에 주춤한 겁니다.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해져서 말이지요. 총 맞은 것 처럼


장사하는 것을 미리 보여줬다는 의미면 더욱더 이 여자를 아예 돌삐 들어서 쳐 죽여야 하는 겁니다.


문제는 항상 예수님이듯이

아니 그런 행동이면 더욱더 나무래는 것이 정상인데

도리어 칭찬, 아주 아주 극 칭찬

그것도 모잘라서 영원히 기념까지 할 정도로 말씀에 기록이 된 겁니다.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종말의 시선 곧 죽음 속에서, 심판 속에서, 저주 속에서 봐야 왜 기념하는 줄 아는 겁니다.


기록하면 뭐합니까? 지금 교회에서 이것으로 또 사기를 칩니다.

저 여인은 전 재산을 내 놓는데 너희들은 뭐하냐 라고 사기를 치는데 이용이 되지요?
또 당하는 놈은 뭡니까? 수요가 있으니 공급되는 거죠. 대중이 원하니까 거짓선지자가 활성화 되는 겁니다.


아니 왜 이런 현상일 뿐인데


왜 극 칭찬하시는 것일까요?


그 여인의 행동이 중요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죽으러 왔다 라는 이 사실이 

바로 모든 시선을 뒤엎어 버린다는 것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겁니다.
넌 비판 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 다음 너도 비판 받게돼! 이제 우짤래? 너 차례인데!

그 다음 너 차례야! 너? 넌 데 우찌할래?
불뱀에게 너도 물리는데? 너도 이미 물렸어!!
즉 회개하라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쳐다보라 곧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겁니다.


우리는 빌라도에게 다 잡혀 죽어야할 입장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 기준이 서지 아니하면 무슨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지금도 마귀를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여인의 행동이 참으로 기념할 수밖에 없는 극칭찬 최고의 칭찬깜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이 죽음 말고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너무 너무 많은데, 즐거움, 소망, 기쁨이 어디 한둘입니까?


졸지에 이 죽음이 그 모든 소망을 다 태워버리면서

나만 쳐다봐 라고 시기와 질투를 작동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희망은 단절되어버리고

유일한 희망은 나는 죽어 마땅함을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라고


내가 망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정 사실화 된 유일한 희망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인은 모든 것을 허비해 가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난 빌라도에게 죽은 여자입니다. 저를 살릴 길은 예수님의 죽음 뿐입니다. 라고요

모세도 변화산에서 나타나, 예수님! 제발 죽어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옵소서.

저는 불뱀에게 물린 자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자신도 못 들어간 그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난 이미 항상 죄인인 불뱀에게서 벗어날수 없는 자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다급한지 제발 별세해 주세요 별세, 십자가 져 주세요 주여. 자신이 그래서 두번 괜히 쳤다는 것을 아는 거죠.
주여 저 물에 빠졌습니다. 건져 주세요. 얼마나 다급합니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나 12제자의 시선은 정반대이지요. 빌라도에게 안 죽었고, 살아 남았다는 겁니다.
도리어 이 자들은 이 향유부은 여인을 죽일려고 하는 판국입니다.
돌삐 든 자들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즉 그 만큼 여유가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돌삐를 들 정도로, 남의 눈의 들보를 볼 정도로.


난 죽었고 예수님만 산 분이다? 나 아니요 주님만 옳았습니다? 라고 향유부은 여인과  대조가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겠습니까?


나의 소망이 전부 다 날라가야 예수님의 죽음이 유일한 산 소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무슨 수로? 그냥 막 사세요.


이것이 바로 불 속에서의 시선입니다.

종말 속에서의 시선입니다.


낮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돌삐 들고 쳐 죽일려고 하는 자들이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가 밤에는 바로 그 여인을 오늘밤 나의 육체의 소망, 죽은 소망, 육의 소욕을 채울려고 이용할려고 달려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놓고 또 멀쩡하게 낮에는 그 여자를 돌삐 쳐죽일려고 합니다. 또 그래놓고 또 밤 되면 달라지고 ....


이것이 바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 달라고 하는 이유와 같은 사고방식인 겁니다.

(막 10:4, 개역)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막 10:5,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마 19:3, 개역)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9: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 19:5, 개역)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9:6, 개역)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 19:7, 개역)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 19: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마 19: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19:10,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마 19:12, 개역)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더러운 여자랑 못 살겠다는 거죠. 바람피운 여자와 이혼하겠다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는 더 더러운데 말입니다. 그래서 땅에 뭐라 뭐라 쓰니까 돌삐든 남자들이 단 한명도 남지 않는 겁니다.

그런 더 더러운 너희들을 고멜처럼 끝까지 사랑하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왔는데 말입니다.


(마 19:16, 개역)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 19:1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8, 개역)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마 19:19, 개역)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19:20, 개역)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또 형수에게 장가가는 문제로 시시비비를 따지는 모습. 마 22장
예수님의 동문서답, 갑자기 부활논쟁으로?

즉 사랑은 없으면서 율법은 지킬려고 아등바등, 죽음도 이기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미 죽어있는 불뱀에게 물린 모습. 첫번째 아담 안에 갇힌 겁니다.


여자 라고 다를 것 같나요?

낮에는 아이구 예수 청년 안됐다 쯧쯧쯧 하고 졸졸졸 따라 다닙니다.

예수님이 휙 하고 뒤돌아 보시면서 아이구 너희들이 더 안됐다

나를 위해 우는 것 같지만

정작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어라

아이구 안됐다 안됐어 라고


누가 누구를 더 걱정하고 있습니까?


낮에는 십자가 지고 가시는 예수님 졸졸졸 따라다니면 혀를 쯧쯧거리지만

정작 밤에는 즉 어두 컴컴한 종말에는
그런 안됐다는 청년 예수와, 전혀 다른, 전혀 같지 않은 자신의 자녀를 보고 흐믓해 하다가

갑자기 장자의 죽음처럼 종말이 닥치니까 이건 뭐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보다 더 심한
땅의 요동치고 처참한 종말이 닥치게 되니 비로소 예수님이 쯧쯧쯧 너희 아들 안됐다 쯧쯧이라는
그 말씀이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을 격게 되는 겁니다.
내 아들 보다 더 불쌍한 아들이 없을 정도로 그 종말에서 불타 죽더라 말이지요.

빌라도가 내 아들을 다 죽이더라 말이지요. 마귀가 말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이듯이, 또 2살 밑으로 아기를 다 잡아 죽이는 헤롯처럼 말입니다.


낮에는 예수님 졸졸 따라다니면 놀려먹는 듯한 그렇다고 십자가를 질것도 아니면서 울고 불며 쯧쯧쯧 하던데

이제는 예수님이 더욱더 졸졸 따라다니면서 아이고 아이고 니 아들 우야노? 쯧쯧쯧


낮에는 예수님 졸졸 따라다니면서 바리새인이 제발 율법 지켜라 제발 좀 지켜라
밤에는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제발 좀 안식 어겨라 제발 좀 막살아라,
이 불법을 행하는 외식하는 자들아!!


날 위해 울지 말고 너 아들 너 자녀를 위해 울라, 그 다음 너 차례다.
십자가는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 다음 너야? 십자가 지는 자가 너 라니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가, 그 다음 너야 너!!


수태한 여자는 저주 받고, 오히려 해산하지 못한 여자는 복 받네 쯧쯧쯧

이라고 너거 아들 우야노 우야노 라고 놀려먹듯이 한마디 하시는 겁니다.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여자에게서의 유일한 희망이요 전부인 것은 아들인데

아들이 있는 여자는 저주 받고

아들이 없는 해산하지 못하고 잉태치 못한 여자가 복받고


그 복받음이 말도 안되게 어찌 남편도 없이 

잉태치 못한 여자가 잉태한 여자 보다 더 많은 자녀로 복받는다고 하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죽은태가 복이다는 겁니다.
열국의 어머니라고 얼마나 주변에서 놀려먹었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어지간히 꼴 좋다! 그래서 답답해서 그 비웃음에서 벗어나고파서 놓은게 이스마엘 계집종 자녀입니다.
그러나 종말은 그 비웃음을 웃음으로, 죽은 태를 복의 태로,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은 종말의 시선입니다. 육의 시선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이기에 해석 불가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행함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믿음의 시선에서는 말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잉태치 못한 여자가, 죽은태가, 망한자가, 불임여성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불 속에서 곧 종말 속에서 오히려 더 복 받는 모습인데
원래 복덩이 이니까 말이지요. 

곧 약속의 자녀 이삭처럼 말입니다.

육의 소욕의 단절을 보여주는 자녀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제사는 이 단절성을 격는 겁니다.


그러나 도리어 잉태를 잘하는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은

정작 불 속에서는 종이처럼 활활 타 버려서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 겁니다.
땅에 속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여자가 낳은 자녀가 아닌 계집종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사귐이 없고 지키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댓가만 노립니다. 행한것 외에는 내 세울게 없습니다.

난 살았고 넌 죽었다.

그러나 사랑은 지키는게 없구요 사귐 뿐입니다. 그래서 죽으러 온 겁니다. 나 죽고 너 살아라.

가정부 계집종과 사랑하는 아내 즉 자유하는 여자와의 차이점입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인 자녀도 그러합니다.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불에 타 버릴 그런 아이를 낳아서 뭐하게 뭐하게 라고 예수님이

수태치 못한자가 더 복되도다 라고 놀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 손에 죽으시러 오신 겁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지금 죽으러 가시는데 있어서 신나신 겁니다.

즐거운 종말이요 신나는 심판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신 겁니다.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신나게 죽으러 가시는데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면서 쯧쯧쯧 안됐구나 안됐어

누구 아들인지 참 안되었구나 청년 이라고 하니

또 주여 안됩니다. 라고 베드로가 막을려고 하니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구나.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예수님이 도리어 너거 아들이 더 불쌍하구나 쯧 쯧 쯧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선물이지(사귐=매=십자가용서), 지킴(가정부=사생아=사람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5:16, 개역)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선물 자체가 완료성입니다. 선물 답게 만들려고 내 마음에 안든다고 뜯어고칠수 없습니다.
자꾸 나의 마음에 드는 선물로 만들려고 사울 왕은 자꾸 손을 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빈자리에 자꾸 앉듯.


제가 이 이야기를 어머니께 하면서

끝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비 오지 않게 기도했는줄 아십니까?


(약 5:17, 개역)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약 5:18, 개역)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왜 6번도 아닌 꼭 7번 그 똥물에 문둥병 환자 나아만 장군은 몸을 담궈야 합니까?


왜!! 850명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그 제사에


엘리야 딱 한 명은 비아냥 거리면서 저들의 행동에 반대로

장작 나무에 물 뿌리고 합니까? 불이 그래가 붙겠습니까?


(왕상 18:25, 개역)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왕상 18:26, 개역)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 18:27, 개역)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왕상 18:28, 개역)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 18:29, 개역)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왕상 18:30, 개역)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왕상 18:31, 개역)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왕상 18:32, 개역)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개역)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개역)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왕상 18:35, 개역)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왕상 18:36, 개역)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왕상 18:37, 개역)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왕상 18:38, 개역)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9, 개역)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왕상 18:40, 개역)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왕상 18:41, 개역)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2, 개역)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왕상 18:43, 개역)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왕상 18:44, 개역)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왕상 18:45, 개역)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왕상 18:46, 개역)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7번 똥물에 담그고, 7번 사환에게 왔다리 갔다리 하게 하고

왜 3년 6개월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느냐 하면은


(왕상 18:43, 개역)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왕상 18:44, 개역)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바로 철저한 단절속에 집어넣기 위함입니다. 단절의 단절, 단절의 이중성.

너는 나을 자격 없다는 겁니다.

너는 망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넌 죽은 자 이다.
불뱀에게 물려 넌 이미 죽었음을 기정사실화 하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3년 6개월이라는 처음자리를 교체 하시는 분이다는 겁니다.
빌라도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너희들을 빼내고자 대신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죽음의 자리입니다. 그 죽은태가 산 자 곧 이삭을 낳게 하기 위해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는 겁니다. 무에서 유요, 불가능에서 가능케 하신 겁니다.

십자가는 넌 죽었어, 

마귀 불뱀에게 물려 이미 죽은자야 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정사실화인자에게만 즉 이미 항상 죄인에게만
그 자리가 자신의 처음자리 곧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유없이 사랑해주신

처음자리 첫사랑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3년 6개월의 죽음의 자리가

비가 내리는 풍요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수태치 못한자가 많은 자녀를 낳게 되는 열국의 어미의 모태인 겁니다. 십자가죠.

곧 바로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때(묵시, 계시완료)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이 기념한 그 죽음의 장사를 치르는 일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접붙임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는데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심에 있어서

자꾸 예수님의 죽음에 접붙이는 이유와 같습니다. 처음자리 모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망하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망하는 길이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 속으로 집어 넣기입니다.
빈터 만들기입니다. 그 빈터인 십자가 라는 모태에서 우리가 태어나는 겁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죽은태에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 이삭처럼 말입니다.
육의 단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약속의 자녀가 태어납니까?


이것이 바로 처음자리입니다.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죽음의 자리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고아 과부 나그네를 왜 고치지 않느냐고 마귀는 예수님께 따집니다.

고아에게 돌을 떡덩이 되게 하라

과부에게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사랑받는 기적을 보여라 왕따시키지 말고 보여라 기적을 보여라 사랑한다는 증거물을 보여라

나그네에게 온 천하 만국을 가진 능력의 왕으로써 나그네를 섬겨라


예수님은 노 라고 외면 하십니다.빈터를 채울려고 오신게 아닙니다.


왜? 즉 그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아가 고아를 괴롭힙니다.

과부가 과부를 죽입니다.

나그네가 나그네를 쫏아냅니다.

형수에게 장가갈려는 자 없습니다. 시형제결혼법.

왜? 난 안 죽었거든요.

미쳤나요? 나랑 지금 연애하는 이쁜 사랑하는 여자를 냅뚜고, 죽은형의 아내에게 장가 가게?
시아버지 유다가 미쳤습니까? 막내아들을 저 개같은 이방인 여자 다말에게 주게?
내 아들들 다 저 여자 땜에 죽게 되는 판국에, 시형제 결혼법이든 뭐든 때려죽어도 줄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줘야 한다굽쇼? 너 한 번 당해 봐라? 그 소리가 나오는지? 누구도 장담 못합니다.
나이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나는데?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하게?
결국 지는 더 나은 비합리적인 쌍태를 낳아 "그가 나 보다 옳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창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죽은 자에게만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이웃환대법이 성취됩니다.

바로 예수님이 고멜같은 우리 곧 죽은자에게 장가오실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지킬수가 없는 시형제 결혼법을 이루실려고 말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고아 과부 나그네였던 자들이 돌삐를 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쳐 죽일려고 하고

밤에는 그런 여인을 찾아 헤매면서 잠자리를 하고자 비싼향유값 보다 더한 값을 쳐 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그 돈을 땅에 허비한다고 발끈하며 옷을 찢을때는 언제고?
정작 그런 자신의 밤의 모습을 통해서 자기 죄로인해, 그 육체 곧 옷은 안 찢는 겁니다.
미쳤습니까? 아까운 내 옷 찢게?
나의 육을 찢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애초부터 말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바로 이렇게 빌라도의 청구에 의해 죽어 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단절의 이중성인 죽음의 죽음

곧 종말의 종말로써 우리에게 들이대시면서 밀어 붙이십니다.


망하고 죽어라 라는 겁니다.


그래야 산다는 겁니다. 저쪽의 관계성이 끊어져야 이 쪽 세계의 관계성이 맺어지는 겁니다.
양다리 못 걸치는 겁니다. 다들 이거 시도하는 것이 성화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단절, 망함, 저주, 죽음 이것이 유일한 산 소망인 십자가입니다.


아무에게도 씨알도 먹히지도 않는 말을 하시는 겁니다.


비판하지 말라 라고 나오는 오늘 본문은 너 죽은자다 라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거든!!
죽은자 찾지 말고 본인이 죽으면 됩니다. 망하면 됩니다.

회개하는자 찾겠다고 하지 말고, 본인이 회개하면 됩니다. 

주여 나 죄인 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마땅히 죽어 망해야 할 자임을 아는 자에게는

이 말씀이 능력이요 산 소망이요 즐거운 종말인 겁니다.


행함 곧 지킴의 세계가 아닌

믿음의 세계 곧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불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덮쳐진

그 종말의 세계에서 말입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기도란 허다한 죄, 모든 허물을 덮는 묵시 속 곧 종말 속에서만

죽음 속에서만 펼쳐지는 예수님의 놀라운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간절히 간절히 엘리야는 비 오지 않기를 기도한 겁니다.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약 5:20, 개역)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를 죽음 속으로 종말 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간절히 간절히 놀라운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제발 제발 제발 막 살아라 라고 말입니다.


그 죽어야 하는 심판의 길이

마땅이 죽고 망해야 하는 그 길이 유일한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에게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잡혀 죽어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잡혀 죽으십니다.
모든 허물을 덮는 이 회개가 넘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십자가의 용서 말입니다.


그 빈터를 완료하신 겁니다.


다 이루었도다.


(요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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