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예수님나라(사랑)


뺨 맞은 사랑(종말)이 오히려 더 당당한 이유  (눅 6:25-36)



(눅 6:25,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개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7, 개역)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28, 개역)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9, 개역)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눅 6:30, 개역)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눅 6:31, 개역)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2, 개역)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 6:33, 개역)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 6:34, 개역)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 6:35, 개역)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36, 개역)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가능성으로 들리게 되면 이것은 복음을 반대로 본 겁니다.

즉 어떤 성경 말씀 치고 가능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불가능한 것만 나열하고 있습니다.
행하라고 준게 아니다는 겁니다.


구약이라고 무시못하는 이유가 구약 조차도 단 하나도 지킬 가능성이 있는게 아예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켜 버리면 골치 아픕니다.
그 결과는 결국은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로 나타나는 겁니다.
차라리 행하지 않았다면 다 이루신 분을 볼텐데 말입니다.

즉 어떤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말씀 조차도 그 말씀 지킨 자를 지적할수 없도록

말씀 지킨 자는 그 말씀을 소유한, 그래서 더더욱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으로 절제로

자신의 지혜를 관철 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를 밟아버려야 합니다.


욥기서가 참 감사한 이유는

누구든지 밟아버리겠다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욥 마저도...


즉 마귀가 등장하지 않으면
마귀를 내기 장기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래서 그 마귀가 미끼를 물지 않으면,

미끼는 불뱀에게 물리지 아니하면

인간은 쥐뿔도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처음자리, 무능의 자리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랑 곧 예수님과의 대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란 결국 예수님을 위해 등장하고 소멸되는 피조물뿐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를 위한 영광에 참예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이유없이 감사 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뺨 맞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게 되니까

어머니께서 그래도 싫타 라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십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또 힌트를 얻은 것이

어무이 뺨 맞는 것으로 끝날 것 같으면

그저 억지로 참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나라가 뺨 맞는 것으로 끝나던가요? 마조히즘 환자인가요?

원한과 원망을 가득 담은 복수에 가득한 하나님나라인가요?


아닙니다.


그 다음부터 말하기 전에 제가 웃음보가 터져서

어무이도 왜 웃냐고 막 따라 웃습니다.


어무이 춘향전에서 암행어사가 일부러 거지행세를 하니까

소위 권력이 있다는 자들이 특히 임금 빼고 아무도 건드릴수 없는

그 변사또와 그 무리들 속에서

일부러 무시 당하고자 거지행세를 하고 들어갑니다.

얼마나 무시를 하는지

내가 주는 밥이나 먹고 떨어져라 라고

마치 비아냥 거리듯이 긍휼을 베푸는 그 교만들을
묵묵히 암행어사의 신분을 감춘 거지 이몽룡은 병주고 약주고 하는
마치 예수님만 알도록 되어 있는 선악을 자신들이 쥔냥

임금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에게

그 보답으로 시 한수를 적어 답례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천하를 쥔냥 강요된 선택에 마음껏 뺨때리는 그 손들이

벌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뺨 맞고도 뭐그리 당당한지 이몽룡은 더 때려보라고 합니다.

주성치 영화 소림축구였던가요? 쿵푸허슬 이였네요


감히 강호 최고의 고수에게 얻어 터지고 목이 땅에 박혀 얼굴이 보이질 않는 판국에도

끝까지 고수의 심기를 건드리도록 고수에 대항하는 모습이 걸맞지 않게

쪼그마한 나무 조각으로 고수를 머리를 툭 하고 칩니다.

얼마나 기분 나빳을까요? 고수한데 그렇게 덤비다니?

고수를 모욕해도 너무 모욕합니다.


즉 죽어도 당당합니다.

뺨 맞아도 당당합니다.

왜냐? 역전이, 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5:16, 개역)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 15: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8, 개역)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부활의 의미는 반전입니다. 십자가가 끝나지 않다는 것에서 다들 실족케 하는 겁니다.
배신때리기요 부조리라는 겁니다. 누가? 부활이
이 얼마나 마귀를 보란듯이, 마귀만을 의식하는 성령의 선물입니까?

하나님께서 말라꼬 할 짖이 없어서 가장 나약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런데 이 인간들이 저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신을 자기들 손으로 만들어서 우상을 만들어 대기 시작 합니다.
그 뒤로 다들 숨어서 신도 조정합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변사또에게서의 임금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허드렛일 다 뒤짚어 씌우고 자신은 그 마을을 쥐락펴락 하고 있으니

백성을 볼모로 잡고서 임금보란 듯이 쥐락펴락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밀경찰 암행어사 곧 임금의 얼굴을 파견하는데 있어서

거지로 보내는 겁니다.


결국 인간에게서의 신이란 그저 요즘말로 호구일 뿐입니다.

임금을 허수아비로 삼아서 뒤로는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런 변사또 앞에 나타난 거지는 해석불가입니다.

마음껏 때려도 무방한 그 부적격성이 도리어 알리바이로 형성이 됩니다.
늦게서야 눈치를 채고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된다고 얼마나 마귀가 열심이던가요?

그의 숙주인 때리는 놈이 아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계속 때리게 되는 겁니다.

습관이 된 몸이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 겁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더 증거 잡히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몸뚱아리가 지가 알아서 충성하겠다고 나대게 되는 겁니다.
아이고 이 몸뚱아리야 그게 아니야


맞으면 맞을수록 더 당당한 거지입니다.

하하하 반전이 있지롱이라고 그래 때려라 하하하


뭐가 그리 당당할까요?

마조히즘 환자는 맞는 것으로 쾌락을 느끼는데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겠지요.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도착적이고 뻔뻔하며 당당하다는 겁니다.

한 대 맞으면 열대 때릴 것으로 물증을 잡는 유구무언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럼 복수입니까?

아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양반이 복수를?

원수 사랑한다매?

오죽 하면 마귀가 3가지 시험으로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라고 할 정도이니?


복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 아닌 것이 사랑의 자리에 앉는 꼴을 못 보는 겁니다.

거짓을 방치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진짜 사랑은 질투합니다.

지옥의 질투 보다 더 하다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전쟁을 개시합니다. 반대로 마귀는 전쟁없이 평강 평강을 외칩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자 그런 의미에서 결국 사랑 스스로가 이 죽음의 권세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매 맞는 모습으로 온 겁니다.


그리고 변사또에게 사로잡힌 춘향이를 건져내기 위해서라도

그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겁니다.

일종의 함정수사죠. 즉 불법 보다 더 불법입니다.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부정의 부정입니다.


이 불법을 저질러야 빼내는 겁니다. 빼내임을 당한 자가 왜 불법을 저지르냐? 라고 따질수 있나요?


따지는 놈은 오직 마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끝까지 거부하는

아니 거부할수 밖에 없는 그 걸림돌 됨을 도리어 제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귀만이 끝까지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정당하면 정당할수록 더 대들죠!
괜히 법을 쥐도록 하신게 아닙니다.


결국 매맞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결국 마귀보란 듯이입니다.


성경말씀은 결국 마귀잡기 위한 겁니다.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키는 놈들은 한결같이 마귀 밖에 없습니다.

그 애비에 그 자식입니다.


성경말씀은 놀랍게도 어기라고 준 겁니다.

안식을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안식을 범하라고 주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어기면 그게 어기는 겁니까?

이미 어겨왔는데 새삼스럽게 이 말을 듣고 어기겠다고 나서는 놈은

이제까지는 난 안 어겨왔는데 이 말을 한 자 때문에 어기게 되었다고

또 강요된 선택에 말려드는 놈이니

바로 그런 차원에서 성경말씀에 걸려드는 겁니다.
마귀의 숙주임을 들통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어기는 자는 어기는 자신을 쳐다보도록 되어 있지

예수님을 쳐다보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기는 자가 아니라. 어김을 지킬려는 역시나 지키는 자입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을 쳐다본다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어기는 겁니다.

왜? 이루기 위해서


왜 매맞느냐? 마귀 잡기 위해서


성경문자를 지킬려는 자는 마귀 잡기 위해서 뺨 맞지 않습니다.

마귀가 잡힐 위인도 아니요?

마귀한테 도리어 잡혀 있는 인간이 무슨수로 말입니까?


결국 마귀가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의식하는 마귀이기에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마귀이기에

그 마귀보란 듯이 안식을 범하는 겁니다.


마귀가 안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지키는 인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귀들이 안식일 안 지킨다고 예수님에게 대들고 있지 않습니까?

안식일로 건방지게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안식의 주인에게 말입니다.


즉 이것을 안식의 도착성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안식 스스로가 자신의 안식을 부여할 자를 찾아헤매고 있는데

반드시 이 안식을 반발하는 자를 역어서 찾아내는 겁니다.

마치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가 반대로 내버려 둠을 당하는 식으로 분류작업을 펼치시듯 말입니다.


한 명의 문둥병자를 통해서 9명의 문둥병자가

이 요나의 표적의 의미를 드러내는 식으로

표적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표적의 혜택을 받을 자를 찾아내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자살방지 기술이라고 저번에 언급했는데요

화살 곧 부메랑을 던져서 되돌아 올때에

안식을 지키는자는 안식의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니라

안식을 못 지키는 어길 수 밖에 없는 자들이 그 혜택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런 자를 안식이 부메랑처럼 휙휙휙 돌면서 가려내면서 되돌아 오더라 라는 겁니다.


아이구 이 놈이 내가 잃어버렸던 자이구나 라고 되찾는 의미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을 어겨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어기는 것 말고

안식의 주인이 말입니다.

안식의 주인이 안식을 어김으로써 안식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 되심의 포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것이 주의 주 되심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신이 죽었다 라는 의미가 그런 의미로 저번에 언급했습니다.


아니 다른 신이 없는데 자꾸 다른 신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십계명이 그러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스스로가 다른 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결국 처음부터 십계명은 어기라고 주시는 겁니다.

십계명을 어겨야 십계명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여기에 인간은 배제 되는 겁니다.
"돕겠다. 아니면 반발하겠다." 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니 십계명을 어길수 있는 분이 오셔야 하는 겁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유일하게 어길수 있는 분은 사랑 뿐입니다.

외설적인 선악 법 보다 더 나은, 더 외설적인 사랑이 와야 합니다.


그 십계명 당사자 만이 십계명을 어기는 겁니다.

결국 처음부터 십계명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을 겨냥해서 온게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는 주인공 때문에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요

그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곧 사랑이 오기까지는

인간은 죄 아래 갇히게 됨을

십계명을 통해서 더더욱 갇히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십계명의 완성자가 오시면 그 분을 영접하기에 바쁠텐데

문제는 십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졸지에 경쟁자로 보이게 되니

십계명을 어겼다고 죽여 버리는 겁니다.

사울왕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이고 다윗을 죽일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사울왕은 자나깨나 교회 걱정 이스라엘 걱정 하나님 걱정 뿐입니다.

이 이스라엘은 절대로 흩어지면 안된다 하나로 묶여져 있어야 한다고

늘 이스라엘을 사수하기 위한  염려와 걱정으로 자나깨나  교회걱정입니다.


참 대견하지요? 하나님 보다 더 이스라엘을 걱정하고 있으니

이스라엘 왕 값을 하겠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다윗왕은 난 이스라엘 왕 아닙니다 라고

이스라엘이 도리어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깨어지게 됩니다.

안식일을 막 범해 버리고

안식일을 범하도록 제사장이 먹을 것을 일부로 주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만 걱정하고 율법을 걱정하는 사울왕이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 제사장을 죽여버리게 되는

그런 일들이 다윗왕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죽이고 싶어서 미쳐 버리는 겁니다. 안 죽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저 안식일 범한 놈, 반드시 내가 저 놈을 죽여서 더럽혀진 이 안식을 반드시 거룩케 할꺼야!!!


율법을 지키겠다는 사울왕은 정작 이 다윗왕의 막살기로 인해

오로지 저 놈을 죽여야 할텐데, 이스라엘이 저 놈 때문에 개판되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 뿐입니다.

자나 깨난 이스라엘 걱정. 그로인해 나는 이스라엘 왕 답지 않으냐?


그런데 다윗은 진짜 이스라엘 왕인지? 아닌지? 도대체 이스라엘 왕 맞어? 이방나라 왕 아닌가? 
이방나라를 위해 이스라엘과 싸워 이기질 않나?

도통 누구편인지?


자기 멋대로입니다.


율법 지킬 생각은 있는 건지?


자기 자리가 없기에 마음대로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가 있는 사울왕은 저 다윗을 어찌하면 죽일꼬 라는 악령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그 자리가 빈자리입니다.

그 빈공백을 오히려 막살기를 통해서 더더욱 돋보이도록 보이게 되는 겁니다.

아 빈자리 구나? 거리두기요, 그 간격으로 인해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자꾸 그 자리를 앉는 겁니다.

안식을 지켰으니 나 이스라엘 왕 답잖아? 라고

빈자리를 앉은 것을 마치 당연한 줄로 아는 겁니다.
그런데 앉으면 앉을수록, 그 빈자리의 공백을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더 불안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말자" 라고 글을 올렸었는데요

그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는 아무나 앉으면 안됩니다.

도리어 그 빈자리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빈자리의 혜택만 입으면 됩니다.

오히려 그야말로 막사는 원수의 자리에 앉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빈자리가 하는 역할입니다. 안식을 아무나 앉으면 안되니까 말이지요.

안식을 범하는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뭘 믿고 까부는것인지? 안식일날 막 먹습니다. 일부러 안식일 마차서(맞추어서)?

그것도 마귀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코 앞에서 말입니다. 꼭 일부러 더 그럽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은 왜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 너의 제자는 안식일날 도리어 먹고 마시느냐?
저 봐라 봐라  봐라 안식일날 밀 먹는 것 좀 보소, 니 제자 맞제? 맞제? 눈 있나? 봐라 봐라?
안식일 백날 지키면 뭐하겠노? 예수 니 제자는 소고기 사먹겠지?


법을 지킴으로써 자연스레 법을 쥐게 되어 있는 자와

법을 어김으로써 자연스레 법의 자리를 빈자리로 만드는 자와의 대조적인 충돌로써의 두 소욕이라는 출처


그 두 소욕을 제대로 들추어내고 대립시키고 충돌 시키는 겁니다.


누가? 사랑이 말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꾸 인간의 육체 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들추어낼려고 쿡쿡 찌릅니다.

그러면 고름 터지듯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마치 [등에]와 같습니다. 쇠파리


율법 혼자 지키면 지킨 것으로 혼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꼭 율법 안 지킨자를 눈 앞에 지나가도록 하기에

그 놈 잡아야 율법 지킨 나 자신이 의미가 되도록

그 놈을 잡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성전에서 말하듯 말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고도 내 돈 띠먹고 간 놈 기여이 고소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비유는 빈자리를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겁니다.
맞구나 아무나 앉을수 없구나. 쭐꾸덕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빠다 발랏는줄 몰랐던 거죠. 덜커덩...


그러니? 등에와 같이 꼭 눈에 가시와 같이 작용하는 겁니다.

응시가 되며 얼룩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 마귀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저 예수와 그 제자들과 같이 안식을 범하는 자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막사는 놈은 다윗인데 꼭 다윗이 사울왕에게 눈꼴시러움처럼 [등에]로 작용하는 겁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미워 죽습니다.


아 저놈 저놈 저거 가만히 두면 안되는데? 이 이스라엘나라에서 저런 부적격한 놈은 가만히 두면 안되는데?


눈에서 아른 아른 거리는 겁니다. 미워 죽죠 미워 미워.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의 반대입니다. 복 받는 자가 언급이 되었는데

오늘 본문은 저주받는 자가 언급이 됩니다.


즉 상대적으로 대조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저주 받는 내용들이 이상합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저런 것이 복이다고 여기는 것이 저주입니다.


참 희한하지요?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저주로 여기는 것이 복이다 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복으로 여기는 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완전히 성경은 인간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아예 상존 자체를 안하는 식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마귀만을 상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저주가 복이고

복이 저주 입니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입니까?


왜 없음이 있음이고

있음은 없음입니까?


왜 약한 것이 강함이고

강한 것이 약한 것입니까?


십자가의 안경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전도되는 겁니다.

뒤바꿔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귀가 되고

마귀 곧 예수님이 마귀로 규정되었는데 그 마귀가 바로 주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해석은 마귀적이다는 겁니다.


오직 인간의 해석만을 피해가버리는 예수님의 해석만이 옳다 라는 겁니다.

그 해석이 오늘 본문입니다.


칭찬은 저주다. 거짓선지자다. (눅 6:26, 개역)

배부른 것은 주리게 될 것이다. (눅 6:25, 개역) 

웃는 자는 울게 될 것이다. (눅 6:25, 개역)


지난시간의 내용을 모른다 치고

위의 것을 반대로 해 봅시다.


저주 받는 것이 칭찬받는다. 참선지자다.

주리는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우는 자는 웃게 될 것이다.


자 이제 구절을 한번 찾아 볼까요?


저주 받는 것이 칭찬받는다. 참선지자다.

주리는 자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우는 자는 웃게 될 것이다.


(눅 6:21, 개역)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2, 개역)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참 희한하고 신비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실천 가능한 소리입니까?


결국 누구 라는 인물을 겨냥한 것입니다.

지킬려고 하지 마세요.

빈자리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서 아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이루실 분이구나 라고

인자를 쳐다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가만히 서서 말입니다.


가만히 서서 라는 말은

전쟁속이다는 겁니다.

두 소욕의 충돌의 사건이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럼 가만히 서서 누구 라는 인물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그 간격을 자꾸 내가 나서서 매울려고 하면 안되는 겁니다.
너를 위해 싸우는 자를 보라는 겁니다. 빼내시고자 말이지요.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주님이 보이게 되면

그 주님의 적도 보이게 됩니다.

그 적이 다름아닌 나와 똑같은 사고방식이니

결국 나를 원수 삼는 전쟁입니다.

죄인 만들기 전쟁입니다.

도저히 나도 똑같은 사고방식이여서 빠져나올수 없는 불가능성인데
그 불가능성을 주님은 가능케 하십니다. 결국 주님 보라는 취지 입니다.
어떤 식으로 이기시는지 그 과정과 내용을 하나 하나 일일히 자세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자꾸 거꾸로 의인되는 실천행위로 거꾸로 해석(행함으로)을 하게 되니


그런 해석에 자꾸 다윗같은 안식을 범하는 세력이 눈에 아른 아른 거리니

저 마귀같은 다윗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나오게 되는 겁니다.


다윗의 막살기는

빈자리를 보여주는 차원인데 말이지요

곧 자기 부인 입니다. 그 빈자리는 나 아니요 주님이 앉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조차도 앉지 않습니다.
하늘영광 버리고 이 땅에 낮아지셔서 그것도 모잘라 죽기까지 복종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입니다.

그럼 마귀는 미쳐 버립니다. 그 빈자리를 이유없이 매꿀려고 환장합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마귀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겁니다.


다말을 보는 유다의 해석은 아무리 봐도 마귀일 뿐입니다. 다말은 마귀다.

정작 본인이 그 약속의 자리를 덮썩 앉아버려서

마치 기득권을 차지한냥 그 자리를 기정사실화 하고

그 이유로 다말이 더더욱 미웠기 때문입니다. 난 약속의 자녀인데 저 개같은 이방인여자 땜에 ...


차라리 약속의 빈자리를 앉지 않았다면

밉게 안보입니다.


이게 바로 선악을 쥔, 선악과를 따먹은, 법을 쥔

아니 선악에 따먹혀 버린 인간의 참 실상입니다.


이 실상을 예수님이 들추어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여 나야 말로 환자입니다. 제발 고쳐 주옵소서


그런데 그런 다윗이 고쳐달라는 모습을

사울왕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왜? 환자로? 왜? 죄인으로, 왜? 원수로 사느냐 말이지요? 넌 이스라엘 왕이잖아? 나 처럼 말야?


의인으로 건강한자로 이웃으로 살지 못하냐 말이죠. 얼마나 답답해 할까요?


그런데 정작 배신 때리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세리와 죄인과 강도의 친구가 되시니 말이지요?

막사는 놈들과의 친구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최고의 해석자들에게서 도저히 해석불가라서

겨우 해석된 내용입니다.


즉 그 해석 자체가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안친구 안탐식 안포즐 이라는 겁니다.
세리와 죄인과의 노친구 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런 해석을 유도해야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입니다.


최고의 해석자가 아닌 자들은 그냥 양쪽 해석에 해석 당할 뿐입니다.

어치피 마귀들 바리새인에게는 세리 매국노요 창녀요 강도요 죄인일 뿐입니다.

율법 줘도 못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에 당해 버리면 이미 율법의 완성에 무조건 합격이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의 일하심만 쳐다볼 뿐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해석과 다윗의 막살기 당함과의 대조가

수백년 수천년이 지나도 결국 같은 노선 같은 양상으로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열심이 다윗을 뒤로 빼돌려서 무조건 합격 쪽으로 집어 넣었고

주님의 열심이 사울왕을 불쌍히 여겨주심이 없이 어디 한번 율법 지켜보라는 겁니다.

지켜보니 죄만 더 가입하게 되는 겁니다. 미워 죽습니다 죽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뻔뻔스럽게 다윗은 예수님에게 다 뒤짚어 씌웁니다.

어차피 못 지키는 법이기 말입니다.

아 이 율법은 결국 예수님만 하도록 되어 있군요 라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말입니다.


더더욱 마태복음 5장에서는 율법강화인 산상수훈은 아예 접근 불가로써

그야말로 명료한 빈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빈터, 그 빈공백을, 비어 있는 공백 상태로 놔두는 것을 마귀들은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까이 접근하고, 결국은 그 빈자리를 채워버리는 겁니다.


지난달에 제사장 기능에 대해서 어머니랑 나누면서 아주 은혜를 제가 오히려 받았는데요

제사장은 자꾸 죄를 가지고 와야 신나는 겁니다.

죄를 가져오면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태웁니다. 그 역겨운 냄새를

엽기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아 냄새좋다 라고 합니다.


완전 거꾸로죠. 악취가 향기롭다니?


즉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는 마귀만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죄만을 상대로 하기에 그 죄가 태워지는 것을

그 악취가 향기롭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어서 가지고 오너라 라는 겁니다.


자신의 죄 사하는 기능을 기뻐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신났을까요?

아 맞다 죄사하는 참람죄에 대해 글을 썻을 때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아기 엄마는 아기의 똥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이구 똥 잘 쌋네 아이구 냄새 좋다 

이뻐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기가 아닌, 아기가 마치 가정부처럼 

아이구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가 똥삿군요. 미안해요 제가 똥 치울께요?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아기도 아니요, 자기자식도 아닙니다.

그런 피조물은 애초부터 만든적이 없는 피조물이거든요.

사귐의 관계성이 아니라. 노동의 댓가. 선악의 가치를 따지는 행함의 관계성이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짖을 하고

사울왕이 그짖을 하고 있으니


막사는 막똥사는 아기가 미워죽습니다.
다윗이 미워 죽습니다.

나는 지키는데 왜 너는 어기냐?

그래서 예수님 졸졸졸 뒤따라다니면서 제발 율법 지켜라, 안식일 지켜라, 산상수훈 지켜라 라는 것이 마귀고

예수님은 거꾸로 제발 좀 어겨라 어겨라 라고 외치는 겁니다. 똥 싸지 않으면 죽어 라고 말이지요.

이 두 소욕을 이 땅에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벌어졌던 사건 그대로 재현되는 방식입니다.

선악과 나무 생명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이유도 그런 이유로 재현입니다.


결국 마귀만을 겨냥한 겁니다.

출처 싸움입니다.


왜 뺨맞는 예수님 나라일까요?

왜 이번에는 뻔뻔하게 뺨맞고도 더 당당한 예수님 나라일까요?


오로지 마귀 보란 듯이입니다.


즉 사랑만이 그런 일을 벌리기 때문입니다.
이유없이 무조건 [예]가 되는, [아니오]가 없는

그 십자가 사랑만을 밝혀 보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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