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서게 하는 복음 (행 14: 1- 7)


(행 14:1, 개역)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 14:2, 개역)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행 14:3, 개역)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행 14:4, 개역)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행 14:5, 개역)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행 14:6, 개역)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행 14:7, 개역)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지난 시간에 썩음을 당치 않게 하도록 하기 위해 사도가 복음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왜? 말씀이 응했기 때문입니다. 완료적인 차원에서 소금 뿌리기 즉, 끝났다 끝났다 라고

종말을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입니다. 단절성입니다.

그 앞에서 미완료적인 것들이 자꾸 반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대조가 되거든요.

반발한다고 멈추는 완료는 없습니다. 더욱더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욱더 증폭됩니다.


즉 종말이라는 선물을 주시는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 13:32, 개역)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행 13:33, 개역)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행 13:34, 개역)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행 13:35, 개역)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미쁜은사 라고 말입니다. 믿음직 스럽고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다 라는 뜻입니다.

반대말은 시험드는 겁니다. 저것만 가까이 오면 시험드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재수 없다고 소금 뿌리듯.



그런데 그것이 썩음을 당치 않게 한다는 겁니다.


즉 죄인만들기입니다.

미쁜은사란 소위 막살게 하는 겁니다.


즉 지난 시간에도 전제 된 것을 말했잖아요


썩음을 당치 않도록 하는 복음이다.

또 말씀이 응하게 했다 라는 겁니다.


즉 그 말은 전제된 것이 썩어 있다는 것이 전제된 것이다.

말씀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제된 겁니다.


그 배경을 깔고 썩지 않도록 했다는 것은 얼마나 썩어있다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썩음을 당치 않도록 하는 말씀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징계죠. 

사생아와 자녀와의 차이점은 딱하나입니다. 매입니다. 단절성이라는 혹독한 매질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사생아가 비아냥 거리는 것이 바로 자녀에게 매가 있다는 점을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자녀에게서 바로 그 비아냥 거림을 당하는 그 매질이 바로 미쁘심이 되는 겁니다.

사생아는 바로 그 매 때문에 예수 안이라는 십자가 할례 세계에 들어올수가 없습니다.
곧 죽음 속 입니다. 심판 속입니다. 여호와의 불 속 입니다. 소멸하는 불 입니다.
영생이고 구원이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들어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곧 나가 버립니다. 


이 매라는 단절성이 아무리 개방성으로 바꾸고 싶어도 안바꿔지니까 분노하는 겁니다.
불과 물이 자기들 손에 다루어 지지 않으니까 말이지요.
심판 이라는 불편한 거리낌을 아무리 이미지개선으로 친근한 불 친근한 물,
곧 죽음을 친근하게 만들려고 해도
본인들 조차도 이 죽음이라는 심판성, 저주성을 싫어하기는 매 마찬가지 이거든요.


고아와 자녀의 차이

부모 없는 자와 부모 있는 자의 차이는

바로 매입니다.


이 매를 저번에 전도서 12장에 지혜가 뭐냐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지혜란 바로 심판입니다.


매입니다. 매. 곧 십자가 입니다.


즉 미쁜 은사? 믿음직 스럽기 짝이 없는 선물은 바로 매 라는 심판성 곧 단절성입니다.


얼마나 믿음직 스러우면 사생아가 이 매가 겁이나서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올수가 없습니다.
때려죽어도 나무 위에 달린 인자를 쳐다볼수가 없습니다.


상대적이다는 겁니다. 매가 그 기준이 되는 겁니다. 미쁜선물인 매 심판이

바로 둘 사이의 간격을 벌려놓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사생아는 [강요된 선택]인 자유를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미 항상 죄인] 이라는 겁니다.

잘해도 매, 못해도 매

매 맞는 본인 기준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다 라는 그 간섭성이 바로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이미 항상 죄인이기에 소금을 팍팍 뿌리는 겁니다.

넌 원래 썩은 놈이야 라고 말이죠.


그게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사생아가 비웃을만 하죠?

아직도 죄인이냐? 이놈들아. 이제 죄 죄 죄 그만카는 이 쪽 세계로 와 라고 놀려먹습니다.


그런데 이 매라는 심판성이 종말성이 바로 영원히 갈라서게 하는 단절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매 입니까? 단절입니까?


다윗조차도 썩음을 당했다는 겁니다.


(행 13:36, 개역)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 13:37, 개역)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행 13:38,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행 13:39, 개역)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래서 소금을 뿌리는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이 벌어지지 아니하면

의롭게 될 인간은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단절성을 증거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단순히 영생이라는 결여성을 채워야 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결여성을 채워버리면 인간은 졸지에 영웅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본인이 본인에게 반해 버립니다. 자기가 이뻐 죽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저를 심판하소서 저를 떠나소서 라고 나오지 않습니다.

이뻐 죽는 판국에 죽이다니요? 심판하다니요?  안돼죠 안돼.


그래서 자랑치 못하도록 십자가의 지혜는 심판으로만 일관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란 이 두 대표성으로써 그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헬라인은 기적을 소위 구원과 같은 영생이나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 한다는 겁니다. 아니지 참! 유대인 말이죠. 기적이 진리입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소위 지혜를 최고의 영광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이 바로 지혜라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즉 지혜가 곧 진리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것을 육의 자랑으로 취급해서, 육의 소욕이지요

이 둘을 상대적으로 깨뜨리면서 드러난 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걸림돌이요 미련함이 되는 겁니다.

단절케 하는 실족꺼리, 어리석도록 보이는 미련함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말이죠.


이 십자가가 저들 소욕을 갈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구별 구분 분리케 말이죠.

이것이 거룩입니다. 이 거룩을 선물을 주신다는 겁니다.

미쁜 은사 미쁜 선물 말이지요.


그러니 선물 받은 이는 갈라지는 현상을 격게 되는 겁니다.

단절성을 보통 격는게 아닙니다.

친구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심지어 자식도 떠나고

무촌이라고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라 하는 아내도 떠나버립니다.


와이미?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벌리시는 겁니까? 도대체 뭘 원하나요? 케보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인지? 미쁘신 은사인지?

바로 십자가를 주실려고 도착적인 사건 곧 엽기적인 사건을 벌리신 겁니다.

내기 장기 이기실려고 말이지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니

죽었다 복창하는 겁니다.

즉 죽음이 실재적으로 다가올 정도이니

얼마나 미쁘냐 말이지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 갈라지는 겁니다.

헤어지고 떠나고

심지어 자기 건강도 떠납니다.

자기도 자신을 배신 때리고 떠납니다.

차라리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누라가 대신 말해 줍니다.


즉 이 철저한 단절성이 사실상 버림받음이다는 겁니다. 잃어버림이지요.


제가 방금 차라리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말 마누라가 대신 말한다고
어머니께 응용해서 욥기를 말하니까

어머니가 귀가 어두워  아 하나님께 욕하고 죽는다고 라고 잘못 알아 들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아 이거구나


정작 밤새도록 긁고 긁고 건지러워서 아토피를 긁어대니까

정작 아픈 자는 그 아픔 때문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건강한 자는 그 모습이 징글 징글할 정도로 보기 싫어서

빨랑 하나님 저주하고 죽었뿌라 라고 합니다.
죽음이 너와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낫다 라는 최선책이라는 겁니다.


(욥 2:4, 개역)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5, 개역)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6,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 2:7, 개역)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8, 개역)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 2:9, 개역)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런데 정작 누가 죽습니까? 누가 단절 됩니까?

욥의 아내가 단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단절된 욥이 다시 욥의 아내와 자기 친구들과 이들을 다 살려내는 겁니다.

단절된 잃어버림을 아는 자가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잃어버림 곧 단절을 격은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살려내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단절성은 예수님을 보게 하는 취지입니다.


매 맞은 자가 과연 누구이냐? 라는 겁니다.


인간 중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는 사생아 일 뿐입니다.

예수님 보고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 라고 외치는 욥의 아내와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께 죄목을 뒤짚어 씌우고자 십자가에 죽도록 울부짖은 얼마나 도착적이었느냐 말이지요.
그런데 더 나은 도착성인 십자가의 사랑이
그런 나를 용서하겠다고 하니 썃다 마우스 잠잠케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 유대인은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저주요 심판이요 단절성을 격게 되어야 할 판국인데 말이지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선민이면 기적을 받아야지? 왜 매를, 심판을 받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정반대이니까 말이지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는 아이고 이런 스토리 자작극이 너무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겁니다. 도착적 이니까.

성화론 곧 철학의 특징은 결국은 동일성이 아니냐?

왜 차이성을 괜히 벌려가

어차피 합칠 것 왜 쓸데없이 그런 부정의 부정을 펼치느냐?

어차피 긍정이네? 다 좋은게 좋은 방향으로 가야지?

일부러 미련을 거치고, 일부러 어리석음을 거친다는 것이

너무 오바하고 있고, 너무 의도적이다 라는 겁니다. 잉여의 과잉, 과잉의 이중성.

어차피 에로스 드라마는 같은 결론인데! 막장드라마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생명이 지혜이고

미련함 어리석음 십자가(요나의 표적)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그것때문이라면 고난신학 고난철학도 결과적으로는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지 십자가를 거칠필요 없이 바로 결과만 획득하면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니, 십자가를 전부로 주장한다는 자체가 미련하다는 겁니다.
비진리요 이단이다는 거죠.


그래서 이 거리끼는 십자가는 왠만하면 빼자 라는 겁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거든요.

즉 십자가 스스로가 이 걸림돌, 거리끼는 실족성을 얼마나 잘 표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십자가가 최종결과로써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도출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과정으로써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최종목적지이기에

부활을(모든 철학의 목적)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아니 최종목적지가 부활인데 왜 십자가로 되돌아 가느냐 라는 겁니다.

어리석잖아요?

미련하거든요!

다 좋게 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상황을 왜 일부러 파토내느냐 말이죠.

오히려 부활을 위협하는 십자가가 되니까

괜히 공든 탑을 일부러 허물어뜨리는 이 십자가가 졸지에 싫은겁니다.


아니 헬라인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 않나요?

결국은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는

다 좋고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십자가는 가만히 보니까 원수를 사랑했으면 원수는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정신병자들 사이코 패쓰들처럼

원수를 계속 원수 상태로 유지시켜서 십자가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착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배타성 때문에 왜 일부러 욕먹느냐 말이지요.
욕 먹을 만한 것은 빼자 라는 것이 성화론이든 누구든 다 이 동일성 아닙니까?


정 그렇다면 욕하고 죽든지?


헬라인의 지혜는 그야말로 욕먹는 어리석고 미련한 짖들을 인간 스스로 제거하자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매부좋고 누이좋은 지혜라는 겁니다.
수준 높고 고풍스러운 것이 너도 나도 다 에브리 바디 다 좋고 좋은데
왜 유치 찬란한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 만을 주장하냐 말이지요.


결국 단절성이 아닌 개방성 곧 심판성을 빼자 라는 주장입니다.

종말성 단절성을 빼고

이제는 배타성이 아닌 충분히 사랑만 넘치도록 하게 하는 그런 인류애적인 사랑이 될수 있다는 겁니다.
이 가능성을 왜 일부러 반대로 하느냐, 왜 일부러 불가능성으로 만드냐 라는 거죠.


성화론자들(철학자)만 그런가요?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봤듯이 마귀도 그렇게 주장하죠.

오늘날 종교들 다 그렇게 주장하죠. 불교 기독교 유대교 다 이거 아닙니까?
이롭게 하기 홍익인간.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이것이 안식을 인간의 손에서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안식(평화:연합) 조차도 주님은 고집스럽게 안식을 범하면서 안식을 이루시는

십자가의 방식으로만 지혜를 펼치십니다.

왜 어리석냐? 왜 거리끼냐?
안식을 범하지 않고서는 안식을 이룰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조차도 그들의 구원장치를 다 깨뜨리면서 구원하십니다.

구원을 깨며 구원하시는 거죠. 구원 장치 모조리 다 없애버리지 못하면 구원 안됩니다.


누가 봐도 진짜가 가짜 되고

누가 봐도 가짜가 진짜 되는 

그야말로 해석불가가 되는 겁니다.


탕자는 누가 봐도 가짜 인데

맏아들은 누가 봐도 진짜 인데


이방인이 구원 받고

유대인 첫 번째 원 가지는 버리는 겁니다.


하물며 이방인 너희 일까 보냐?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결국 둘 다, 다 버릴수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결국 가능성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애초부터 심판 자체가 처음자리이다는 겁니다.

육의 소욕에 대한 어떠한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매 로만 고집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기적(유대인), 고풍스러운 지혜(헬라인)안 통한다는 겁니다.


죽고자 하면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그야말로 천박하고 유치스러운 매, 심판, 종말 곧 십자가로만 이룬 지혜이다 는 겁니다.


에이 그러면 갈라서지 뭐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갈라서자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정도로

징글 징글 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다는 겁니다.

고난 뿐이다는 겁니다.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갈라서라!

이 심판 곧 하나님의 저주를 통과할 마음이 없으면

니 갈길로 가라는 겁니다.

손해 볼 것 없다는 겁니다.


누가 시기가 가득합니까?

누가 질투가 가득합니까?


사랑입니다. 지옥보다, 죽음보다 더 강한 질투로써의 사랑입니다.


매 만이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인도한게 아닙니다. 지팡이 입니다. 모세도 지팡이 아니면 지옥갈뿐인 죄인입니다.
그 자팡이가 인도하는 곳이 바로 일부러 물없는 곳, 양식 없는곳,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 골라 갑니다.
매 처럼 작용하는 같은원리 입니다.
이 매에 간담이 서늘해 진 자는 기생라합만이 이 매를 기다린 겁니다.


사생아는 아무리 좋은 아빠를 두어도

매가 없다면 그거 가짜 아빠다 라는 티를 스스로 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심판적인 복음이 증거되니


(행 14:5, 개역)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과격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꾼들은 하나님이 치시는 매를 자신들이 자처하면서 매를 댈려고 합니다.
누가 유발케 합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그들을 분노케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반대겠지요.
바울이 기적을 행하니까 도리어 바울을 신이라고 우상숭배 해 버립니다.
그때 바울이 옷을 찢어서 회개를 하며 


버럭 바울


왜 이런 짖을 하느냐 라고 나무래기도 합니다.


참 재미있는 양상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이 사도들을 아예 저주 받은놈 취급해서 낮은 저급으로써 돌로 쳐버릴려고

자신들이 심판자 자리 곧 하나님의 위치에서 심판하고자 합니다.


그 다음 사건은 반대로 이방지역에서 기적이 바울의 일행을 도리어 하나님의 위치로 동격화 시키는 겁니다.


자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이미 항상 죄인]입니다. 뭘 해도 다 죄 입니다.


몰라서 또 알려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에

성령이라는 단절성을 격어야 한다는 겁니다.


둘 다 결국 동일성을 추구하기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지혜로든(이방) 기적이든(유대인) 결국 동일성 추구입니다

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입니다. 가차이...


어딜 자꾸 올려고! 저 멀리 떨어져 있어!
바리새인을 바리케이트로 삼아 못 넘어오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겠다는 겁니다.

그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방식이 바로 단절성으로써 십자가입니다.
죽음 심판 저주 곧 피가 아니고서는 그 넘어오시는 주님을 못 봅니다.


십자가는 완전히  너는 원수이다 라고 규정하시면서 넘어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외치는 십자가를 죽여 없애 버렸는데

또 살아나 내 다리 내 놔라 라고

십자가는 늘 항상 나를 원수의 자리에 되돌려 놓고야 마는 겁니다.


이런 자에게만 이 영원히 갈라서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물과 기름은 썩일수 없는 단절성입니다.


교회도 거부하는 이 성령의 활동을 말입니다. 그 단절성을 감사히 여기는 겁니다.
이 도착적인 지독한 십자가의 사랑을 거치지 않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가짜 하나님입니다. 가짜 교회요 가짜 성도입니다.


이 심판주 예수님만이 진짜면

십자가를 거치지 않는 것들의 내막을 다 보게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갈라서도록 하시는 겁니다.


거리끼게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십자가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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