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문을 여심과 그리고 닫으심 (행 14: 8-18)


(행 14:19, 개역)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 14:20, 개역)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행 14:21, 개역)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행 14:22, 개역)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3, 개역)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행 14:24, 개역)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행 14:25, 개역)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행 14:26, 개역)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행 14:27, 개역)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행 14:28, 개역)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주로 사람들이 자기 의견이랑 정반대가 된다면

그 정반대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이미 갈라졌으니 더 이상의 쓸데없는 소모전은 그만두자

충분히 그 경계선이 갈라졌고 그 거리의 간격은 충분하다 라는 차원에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궤변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즉 굳이 더 이상 싸우지 않더라도 그 싸움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는 차원에서

하나의 기호처럼 작용하는게 너는 궤변적이야

물론 그 상대방도 이 쪽에게 너야 말로 궤변적이다 라고 합니다.


궤변 즉 거짓을 참인 것처럼 말한다 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너는 이단이다 끝만 틀렸다면 다 틀린거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갈라졌다, 사이가 벌어졌다. 이제는 모호한 입장이 아니라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썩일수 없는 연합이 불가능한, 소통의 단절성이 제대로 표출되었다 라는 의미에서
그 모호함이 사라진 것에서 볼때에 명료하다는 겁니다.


즉 상대적으로 두 개로 명료해 졌으니까 말이지요.

하나는 하나인데 하나 아닌 것 같고, 둘 같은데 둘도 아닌 것 같고,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 개방해 보세요 소통해 보세요?

더욱더 모호해지지요. 더 뒤썩여지니까 말입니다.

단절성이어야 말로 명료함을 제대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궤변 즉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출처가 다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두 소욕으로 갈라지니

그 소욕의 출처가 다름을 드러내는 겁니다.


성령의 일이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주의 주 되심을 출처가 아니다면 갈라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냥 주가 아닙니다.

주의 주 되심입니다.


주가 주 스스로를 쳐서 주를 날려버립니다.

날려버린 그 주의 자리에 다시 주가 갱신 되듯이 나타나는 빈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빈자리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즉 갱신을 위한 파기 이다는 겁니다.


새옷을 위한 헌옷 찢기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헌옷을 사수하기 위해서 새옷이 찢김당하는 식입니다.


저들에게서 그것이 헌옷을 사수한 것이라 착각하겠지만

도리어 그것이 바로 헌옷을 파기하는 방식입니다.


새옷은 찢겨서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새옷이 새옷 값을 하기 위해서

분명히 찢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찢겨지지 않는 겁니다.


헌옷에게는 진짜 궤변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헌옷의 시각에서는 불에 집어 넣으면 새옷이라고 우겨도

불에 집어 넣어보면 압니다. 타 버리니까 말이지요.

그런에 새옷이 얼마나 진짜 새옷이면

그렇게 헌옷으로부터 찢김 당하고

불태워짐을 당했으면

헌옷이 옳아야 하는데

도리어 타지 않고 다시 살아난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 앞에서의 며느리 다말이 그랬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왕 앞에서의 포로 유대인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 앞에서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단 2:45, 개역)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단 2:46, 개역)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단 2:47, 개역)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그 속에 바로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즉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했다싶이

유대인에게서는 다른 신이란 없습니다.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다고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민족과 그들의 신을 항상 붙이십니다.


다른 신이 없다고 외쳤던

아니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그 유대인에게서

결국 다른 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그들 말마따나)

그 다른 신이 오히려 이방인에게서가 아니라

도리어 유대인 속에 까까득 함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신은 죽었다 라고는 예로 자주 언급했습니다.


몇 년 전에 유대인과 주변민족과의 다툼을 다룬 다큐 형식의 영화를 봤는데요

최근 상황 곧 5-6년 전 상황을 다루고 있던데요

첫장면이 폭탄테러로 시작되는 겁니다. 늘 수시로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여러 장면 중에 화가난 앵그리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할 때

우리는 유일신이지 삼위일체 따위는 안 믿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독교들도 이단이라고 합니다.


화가 난다 화가나.


즉 화를 내는 것이 인간의 참된 내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무엇때문에 화를 내는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진의를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이단이라는 주장에 이것은 섞일수 없는 서로가 서로를 궤변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궤변에 개방을 외치는 곧 소통을 외치는 기독교들은

저들이 화내는 그 원인인 궤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이웃사랑 실천력이라는 오기와 신념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둘다 똑같죠.

자기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억지로 끄집어낸 희생과 이웃사랑과 사랑도 이런 깡패식의 도착성입니다. 

미저리(Misery) 1990


요즘은 2013년 지금은 오디션 프로그램 한방으로 일단 대중들은 하나로 소통할 수가 있습니다.

스마트폰 때문에 독재정치가 무너지는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지요.

문제는 정치권과 종교권력자들에게는 그들의 신 곧 힘을 없애버리지 못하는 이상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 그다지 호락호락 하지 않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더 큰 신이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스마트 폰 커뮤니케이션 신 말입니다.

보급만 시켜 버리면, 네트워크 망만 연결 되면 눈이 밝아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경계선이 무너지면 얼마나 모호해 지겠습니까?

경계선이 있다는 것이 종교적인 신념을 더욱더 굳건하게 해 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를 다루신 성령의 활동상에서

13장부터 바울과 그 일행을 다루시는 성령의 활동상이 오늘 본문에도 나타나는데요

여러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되지만 주로 세 지역을 중심으로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특히 이고니온에서 명료하게 갈라지는 현상과
그로인해 도망친 곳이 루스드라인데 거기서는 또 반대로 바울을 우상 섬기듯해서 옷을 찢음과

이제는 다시 이고니온에서 드디어 죽었구나 시체를 쓰레기 장에 버리는 그런 모습으로써

지역이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즉 뭔가 지역을 언급하시면서 그 지역에 가서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려

그 땅의 속성을 씨뿌리는 비유처럼 들추어내시는 것은

자주 언급했듯 출처라는 두 소욕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리게 되면 그 속성들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돌짝밭인지. 길가인지, 가시밭인지, 좋은밭인지





http://blog.daum.net/soon0515/17239160



씨뿌리는 비유는 좋은 밭이 되자 라는 취지가 아니지요?

씨앗이 감추어진 속성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지를 통해서 그 진의를 드러내는 겁니다.

곧 출처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씨앗만이 그렇게 땅의 숨은 속성을 드러내듯

십자가의 복음만이 그 사람의 출처를 드러내는 겁니다.

결국 복음증거는 소위 선교로 포교활동하는 땅따먹기가 아닙니다.

그 반대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찾기입니다.


위에서 다니엘서를 언급했는데요


모든 신들 위의 신

모든 왕들 위의 왕

(단 2:47, 개역)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이게 말이 안됩니다.

신은 단 하나 유일신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입장에서 기독교는 이단 맞습니다.

삼위일체 삼신을 믿으니까 말이지요

백날 그 삼위일체가 하나 이다 라고 변명해도 안 통합니다.

하나면 하나이지

삼위 라면 가면, 또는 위 자리라는 속성을 말해도

결국은 하나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 본인들도 헷갈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리로 묶어버린다고 교리교육으로 사기를 쳐본들

모호할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본인들도 시편에서도 자주 나오듯

만왕의 왕

만유의 주

모든 신들 위의 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처음자리에서 봐야 비로소 보이겠지요

즉 이방인과 싸워봐야 그들의 신들을 격침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을 본다는 겁니다.

결국 다른 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신을 일부러 만들어서

그 우상을 짤라버린다는 겁니다.


즉 주의 주 되심이란

주를 유대인들이 안 믿는게 아니라 믿는데

그 믿음을 짤라서 또 믿음이 나올수 있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믿음의 문을 여신다고 한 겁니다.


믿음이란 뭔가 가로막혀 있는 그 단절성의 문을 열고 온다는 겁니다.


방금 전에 어머니께서 에스겔서를 읽으시다가 웃으시는 겁니다.

왜요 어머니?

아니 잘못은 백성이 잘못했는데

에스겔이 벌받네?


맞습니다 어머니 그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겔 4:4, 개역)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 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겔 4:5, 개역)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겔 4:6, 개역)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 일이 일 년이니라』

(겔 4:7, 개역)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

(겔 4:8, 개역)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겔 4:9, 개역)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떡을 만들어 네 모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에 먹되』

(겔 4:10, 개역) 『너는 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 중씩 때를 따라 먹고』

(겔 4:11, 개역) 『물도 힌 육분 일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겔 4:12, 개역)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아니 오늘날 지혜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물어보세요

남의 죄를 남이 대신 짊어 질수가 있는지?

무슨 죄가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갈수 있는 세균 덩어리입니까?

왜 이리 말도 안되는 소리를 성경이 말할까요?


죄는 내가 지었으면 그 죄가 이리 저리 이동이 안되는 겁니다.

아니 죄도 사실 말이 안되지요

얼마나 추상적입니까?

사랑만 추상적인게 아니라 말이지요.

누군가를 고치거나 낫도록 했다. 치료했다.

그런데 다시 아팠다? 그럼 고친게 맞나요? 하루동안은 괜찮아졌으니 나은거다?

얼마나 모호합니까?


인간들이 재고 있는 자의 척도도 모호한 가운데


성경말씀은 아예 더 극단적으로 모호합니다.


올해 초부터 어머니랑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제사장이 제일 좋아하는게 죄를 가지고 오너라 라는 겁니다.

유럽 속담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들 얼굴은 파랗게 된다고 합니다.

죄를 가지고 오면 비로소 제사장의 제사장기능을 발휘하는 겁니다.

죄를 가지고 오면 너무 좋아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를 안수를 하고 양을 뭐 머리에 대고 

죄가 전가 되고 하는 그런 행동들이 얼마나 웃깁니까?


아니 그런다고 죄가 전가 됩니까?


이동하는 죄면 그게 죄 맞습니까?


죄가 그렇게 호락 호락 하게 이동이 되냐 말이지요?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그림자이다 라는 차원이다는 겁니다.

즉 진짜 실체는 따로 있다는 이유에서 그림자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도 말이 안되지요?


그럼 실상은 뭔데?


왜 에스겔 선지자가 옆으로 눕고 (좌로 390일)

또 반대로 돌아 누워  (우로 40일)


북이스라엘의 죄 390년, 남유다 죄 40년


인분! 사람 똥으로 땔감 삼아서 밥 지어먹고

수염을 깍아 몇분의 몇 바람에 날리고 


왜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느냐 말이지요.

어머니 처참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참선지자의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죄는 남이 지어놓고

그 죄의 벌은 딴 사람이 받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 쪽에서 문을 여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얼마나 뻔뻔한지 주님께 되돌아 오는 자는

바깥에 싸돌아 다닌 자이지 (다윗)

주님과 이스라엘과 함께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사울)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옵니까?

맏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까?

아니 맏아들이 아버지 밖의 나간적이 있어야 돌아오든지 말든지 하죠?


자 그렇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자 입니까?

아버지께서 마음의 문을 누구에게 열어주었습니까?

나간 놈입니까? 안에 있는 놈입니까?

나가야 문을 열어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죄를 지은 놈이

병이 든 자가


의사를 찾지


죄가 없는 의인에게 무슨 구원자가 필요하며

병든 적도 없는 건강한자에게 의사가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기업이 없는 고아에게만 아버지라는 기업이 필요한 겁니다.


즉 기능적으로 볼 때 말입니다.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볼 때 말이죠.
예수님 자신의 기능을, 성령의 기능과 동일하게 증거하고 계시는 겁니다.

소욕이라는 출처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주님께 다가가 문을 여는게 아니라 (인간 숙제)

주님 쪽에서 문을 열어주시는 방식이 바로


죄인만들기입니다.(예수님 숙제)


말로만 죄인 만들기 라고 할때에

인간은 자기가 할 줄 아는 죄만 지을려고 합니다.

자신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죄는 지을 줄 모릅니다.

곧 살인입니다.


무식하게 골프 치는게 죄가 아니라

그 골프 채로 사람을 죽여봐야 우리 연변에서는 죄라고 하는 겁니다.

7번 방에 선물에서 사형깜이 되어야 후덜덜 다리를 굽힙니다.

잡범은 죄도 아닙니다.


아니 느부갓네살 왕이 뭐가 아쉬워서 천하의 권력을 다 쥔자가

다니엘에게 절을 합니까?


이유는 다니엘을 보고 믿음이 생겨서도 아닙니다.(느부갓네살 왕이)

오히려 다니엘에게 7번방선물처럼

다니엘이 도로 믿게 되는 판대기 라는 겁니다.
다니엘에게 믿음의 문을 여시는 겁니다.


와? 내가 이방나라에 포로 잡혀가 와서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는데 왜 자꾸 다른 신이 있는냥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방신을 붙여서 곧 마귀를 붙여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왔는데

여기 이 지옥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시네?


모든 신 위에 계신 신 맞구나 라고

이방인이 외치는 것을 보고 본인이 은혜 받는 겁니다.


본인이 이스라엘이다 라고 우기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방인의 자리 곧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그 처음자리에서

이방인이 외치듯 모든 신 위에 신이라고 외쳐야 하고

모든 왕 중의 왕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밖으로 나와야, 이방나라의 왕들을 격어야, 모든 왕 중의 왕 이라고 할 것 아닙니까?

얼마나 꼼꼼한 가카 이십니까?

다니엘 죽이기를 저들이 행해야, 그 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날것 아닙니까?
불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예수님은 불 속에서만 있는데?


온실에서 단 한번도 밖에 나가본적 없이

이방나라 접해 본적, 더군다나 세계 최고의 왕, 다른 이방나라 왕 접해 본적 없이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느부갓네살 왕이 절을 해야 그 고백을 듣게 되는 겁니다.

자신이 할 고백을 말입니다.


어차피 우리 이방인은 또 금새 달라져서 또 죽일려고 하겠지만요


매맞는 미쁜은사가 선물로 주어지겠지만 그것이 도리어 미쁘심입니다.


이방나라에 포로 잡혀 갔냐?

네 잡혀 갔습니다.

거기에도 내가 없더냐? 

아뇨 계십니다.

내가 거기서 보통 신이더냐? 그저 잡신일 뿐이더냐?

아뇨 최고의 신입니다. 모든 신 중의 신입니다.

그것을 누가 고백하던? 유대인이냐?

아뇨? 이방인이 도리어 외칩디다.


마치 이것은 지독하게 말 안듣는 이스라엘을

나라 전체를 날려버려서라도

사랑 곧 도착적인 지독한 사랑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 이스라엘 신부와 여호와 하나님의 신랑 관계는

어떤 누구도 끊을수 없다는 주님 쪽에서의 문 여심이 있다는 겁니다.


이 문 여심 때문에 이스라엘은 포로 당해야만 하는 겁니다.


인간은 지 좀 기분 좋거나 환경이 괜찮으면 자기 쪽에서 다가가 문열겠다고하고

또 환경이 나쁘면 하나님 없다고 바로 바로 식상해 해버리는

그야 말로 각기 제길로 가는 양일 뿐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도착적입니까?


그러나 사랑은 그에게 담당 시키는 겁니다. 저들의 모든 허물을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도착적인 사랑의 대상물로 취급당하는 겁니다.

자신들의 도착성도 이 분의 도착성 앞에서는 뻔대기 앞의 주름 일 뿐입니다.


마치 중국 어떤 족속에 마누라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을 작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그 족속의 여자들이 발이 작게 되고

또 그 작은 발로 도망쳐 본들 멀리 못 도망치는것처럼


주님 쪽에서 사랑이 바로 그런 식입니다.
문을 여시고자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곧 반대로 문을 여심을 더더욱 증대를 위해 

문을 닫고자 하는 쪽도 반드시 우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문을 이제 열게 되면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하늘의 것이 땅으로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정해진 묵시대로 땅은 이제 주의 주 되심을 위해 그 속성들이

낱낱이 공개될 뿐입니다.


그러니 너가 해석한 그 주를 짤라 버리고 (그 주는 가짜야)

내(주님 자신) 쪽에서의 주의 주 되심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주의 이중성 말입니다.


아 그러니


이 이방나라에서 도리어 모든 신 위의 신이라고

신의 이중성으로, 그것도 전 세계의 최고의 왕인 느부갓네살 왕 당사자가

그렇게 외치는 겁니다. 만왕의 왕이라고.


그래서 시편에서 다윗 본인이 원수의 자리에서 외친 그 노래가

만왕의 왕이다는 겁니다.

왕의 이중성인데

내가 알던 왕 짤렸다는 겁니다. 그 왕이 아니라

상상도 못 하던 내가 믿던 가짜 왕 보다 더 높은 왕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진짜 왕 앞에서 내가 세운 자기를 위한 우상 하나님

조작해 낸 가짜 예수님을 짤려야 한다는 겁니다. 진짜가 나타났기에

이것이 주의 주 되심

주의 이중성

십자가의 이중성 이다는 겁니다.


용서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준데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용서를 결국은 내 쪽으로 끌어당기니까?

그것을 짤라버리는 용서의 용서 

즉 용서의 이중성인

용서의 왕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내가 내 사적인 용서의 왕으로

결국은 내 유익으로 만들어 해석했는데

그런 해석을 훨씬 뛰어넘어서

나의 용서의 왕 조차도 날려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더욱더 풍부한 용서의 대왕이니

결국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뻔뻔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런 살인죄를 저질러도 그에게 담당 시키시니까 말이지요.


입이 있어도 함구케 만드니 그야말로 잠잠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일행은 자신의 경험담을 간증하듯이 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분이다 라는 겁니다.

명료한 단절성을 보여준 분이다는 겁니다.


이고니온에서 철처하게 가려낼 것 가려내고 갈라서게 할 것 철두철미하게 갈라서게 하는

바로 그런 믿음의 여심과 닫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씀인

주의 주 되심을 보여주더라 라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명료한 경계선 긋기에 자신들은 바로 미쁜은사를 받은자로써

미끼 노릇을 톡톡하게 격게 되는

매맞은 구경꺼리일 뿐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죄인 중의 괴수 만드심이요 (죄인의 이중성)
이 쪽 패와 저 쪽 패로 가르시는

비방받는 표적으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다 라는 겁니다.


성령이 직접 활동하시기 까지는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까지는


마치 농사 지을 때 땅을 한번 뒤엎어 보듯이

이 땅의 속성을 아무도 뒤짚어 엎어 보는 자가 없어서

분명한 단절성 곧 경계선이 모호했지만


이제는 십자가의 영으로 인해

가는 곳 마다 그 경계선을 긋는 땅 뒤짚기가 벌어진다는 겁니다.


사도가 가는 곳 마다 땅이 뒤짚어 지는 겁니다.

성도가 가는 곳 마다 땅이 뒤짚어 지는 겁니다.

성령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짚지 못하는 성령은 가짜이겠지요.

그러니 문의 열고 닫음이 없습니다.


문 밖에 있어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열어주심과 닫힘이 있을텐데


누구 하나 땅을 뒤짚는 자가 없기에

밖인지 안인지?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지? 

왜 여시지? 어 왜 닫으시지 라는


문이라는 기준이 없는 겁니다.


문이 있어야 그 경계선인 문을 기준으로 해서 안과 밖


들어옴과 나감! 열어주심과 닫음이라는 기준이 생기는 겁니다.


이들 사도들에게 했듯


오늘도 성령의 일하심은

매일 매일 문을 제시합니다.

어제까지의 문은 파기 하고

새로운 오늘의 문으로 갱신하셔서


이 문을 기준으로 해서 안 과 밖

열어주심과 닫음


바로 이런 단절성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라는 문(모태,처음자리,빈터)을 열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내 쪽에서의 그 어떤 의미있는 가치도

다 무가치한 벌레먹는 썩은것일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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