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집 짖기 (눅 6:43-49)



(눅 6:43, 개역)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눅 6:44, 개역)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눅 6:45, 개역)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 6:46, 개역)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6:47, 개역)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눅 6:48, 개역)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눅 6:49, 개역)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인간에게 그 코에 생기를 집어넣으니까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니 틀렸군요 인간 아닌,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 그 코에 생기를 집어넣으니까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 2: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라는 말이 뭔가 해서 여러 번역본을 봤습니다.

(창 2:7, 바른)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생령』

(창 2:7, 새번역)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히, '아다마' ㉢히, '아담'』

(창 2:7, 공동)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창 2:7, 쉬운) 『그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창 2:7, 킹흠정)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 2:7, 한글킹)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창 2:7, 현대인)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티끌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산 존재가 되었다.』

(창 2:7, 현대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창 2:7, 가톨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즉 산영이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존재. 그렇다면 마지막 아담과의 차이점은

살려주는 영이다는 차이점입니다.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즉 그냥 살아가는 인간과 달리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으로써
십자가의 부활의 의미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내 죄를 위해 죽어주신 분은, 대신 심판받으신 분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살려주는 영을 받은 자는 바로 이 일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 말입니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그 생기가 빠져나가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창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육체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일백이십년 정도 안에 다 죽는다는 겁니다.

죽는 육체는 주님께서 만든적이 없는 인간이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저 주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지요?

아니 난 너 만든적 없는데?

아니 인간 만들지 않았나요?

내가 인간을 만든적이 없어!!

만들었다면 나의 피조물인데 그들 조차도 나는 피조물이 아니다, 나의 창조주가 아니다 라고 하잖아

오히려 그들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다 라고 자신을 칭하지 않니?

즉 너도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거구


참 이상하죠? 뭔가 간격이 벌어져도 보통 벌어진게 아닙니다.

철저한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육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육체이니 죽고요 죽으니 일백이십 정도로 제한된 한계 선이 그어진 겁니다.

불합격품이다는 겁니다. 단지 폐기처분하는 시간만 남아있을 뿐인데

그것을 인간들은 좋아라 라고 [삶이 있다]고, [살아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너 차례인데" 라는 말이 이해가 좀 되시겠습니까?


우야다가 우연히 운 좋게 폐기처분하러 컨베이터 벨트에 올려져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기 직전에
과학을 발전시켜 인간의 수명을 천년가까이 아니 천년 넘게 수명을 늘려버렸다고 칩시다.
이것을 묵시운동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시간마저 극복하는 ...

거봐 거봐 우리 인간이 신의 심판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잖아 대단하지 않니?라고 좋아라 할 때
갑자기 컨베리터벨트 속도를 확 높여버려서 천년이 하루 같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과연 과학에서 조차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그 희망은 JM 절망으로 뒤바껴 버리는 겁니다.

무슨 꼬장도 이런 꼬장이 없습니다. 무슨 심뽀인지? 그 다음 너 차례 맞거든!!


문제는 육체가 됨이라를 피할수 없도록 했는데

인간이 그 결핍성을 [네 맞습니다 육체일 뿐입니다] 라고 충분히 단절성을 보여줘야 할 것을

자꾸 결핍성을 극복할려고 천년 만년 살수 있는 기술을 지혜를 지식을 추구하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물론 성경지식도 그런 하나의 방식입니다.

바리새인이 왜 몰래 밤에 찾아왔겠습니까?

바로 우리 모습 아닙니까? 그 기술만 확보하면 로또 맞은 것 이니까 말이지요.

그만큼 그 결핍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육체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다시 태어나라입니다.
말이 다시 태어나라 이지, 곧 그 말은 죽어라 라는 소리 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섭섭한 소리가 아니라
그 다음 너 차례다 라는 소리가 섭섭한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든든하고 미쁜 견고하고 안정적인 소리 곧 선물이다는 겁니다.
왜? 나도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나도 빌라도 에게 죽임당하러 왔다는 겁니다.
허걱 이 얼마나 미쁘신 소리 입니까?


(요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요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즉 이 거듭 이라는 말을 니고데모는 아니 무슨수로? 라고 질문하며 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의 원인에 따른 결과 즉 행함에 대한 문제에

내 쪽에서의 숙제, 즉 결과적으로 결핍을 채우는데에서의 숙제풀이 수수께끼의 풀이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보고 있기에 그 거듭이라는 이중성, 태어남의 이중성의 의미를 알수가 없었던 겁니다.
내가 원인이 되는 숙제에서, 원인이 될수 없는 나 라는 설정으로 다시태어나라고 하시니 무슨 소리냐 라는 거죠.


그것은 결국 자신 혼자만의 문제요 숙제풀이요 지식습득 기술추구 였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독단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고방식에 관계성이라는 의미로 화답합니다.

그러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관계성이란 태어남의 생명에 있어서 그 생명덩어리가 혼자 불쑥 튀어나오는게 아니라

모태 라는 그 근원의 자리에서 나온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결국 태어나게 했던 그 처음자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처음자리인 모태와 그 결과물로써의 생명 덩어리의 관계성 말입니다.
그렇다면 관계성이란 넌 이미 항상 죄인인 죽은자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바꾸는 자의 개입이 있다는 겁니다.
또 죄인에게는 구원자가, 환자에게는 의사가 ...
그러니 건강한 의인에게는 의사와 구원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관계성을 말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여전히 독자적입니다. 즉 니고데모가 우리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육체인데 어떻게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수가 있습니까?

두 번 모태에서 들락날락 해야 합니까?


(요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즉 니고데모는 끝까지 이성적 합리적 논리적으로 예수님의 답변을 그렇게 이해 해석하는 겁니다.
이성 논리 합리성이란 원인 있는 결과요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하라 라는 겁니다.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자 라고.

이성에서 이성, 논리에서 논리, 합리성에서 합리성으로의 방식이 바로 육에서 육으로 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가 되지 않는 겁니다.

(롬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9, 개역)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끝까지 원인에 따른 결과로 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그런 것이 바로 육체임을 지적하시면서

반드시 그 육체의 대조적인 영의 살려주는 영의 시선에서 말씀하십니다. 곧 관계성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 곧 피조물이 될수 없다는 겁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너 지금 피조물 아니야? 독자적인 흙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었던 그 처음자리로 인한

그 관계성 즉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그 관계성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요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결국 인간이란 창조주가 없는 존재이다는 겁니다. 처음자리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것을 관계성의 표현에서 육체 또는 흙이라고 합니다.


그냥 흙인데! 라는 것이 예수님의 시선이고
인간 곧 니고데모의 시선은 흙도 도 닦고,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잘 하고 성경을 배우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밤에 몰래 온 것이구요.


그래서 그 개방성에 예수님은 단절을 더더욱 구체화 하는 겁니다.

너의 외설성에 더 나은 외설성으로

그럼 모태에 두 번 들어갔다 나올수 있겠니? 이 말이 얼마나 외설적이니

그런데 나는 그런 너의 외설적인 물음과 대답에 더 나은 외설적인 발언을 하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너 지옥이야


물과 성령?


그래 물과 성령


다시 부연 설명해주리?


(요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은 임의로 바람이 불 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렇다 라는 겁니다.

임의적이다는 겁니다. 포착 불가, 그 원인을 알수 없듯이 나타난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우발적이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는 그 원인이 바람 잡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즉 관계성 그것도 성령과 물로 인한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그 성령과 물은 심판이라는 종말성입니다.

할례 곧 세례의 의미로써의 물은

마치 홍해를 물세례로 단절의 단절을 보여주듯이

물로 할례 할 줄 아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는 겁니다.

저쪽 당시 최고의 나라 애굽을 작살내고 그들에게서 빼내어 단절시킴으로써 세례를 베푼 겁니다.

애굽과의 단절 입니다. 육의 단절입니다. 그 불가능성 속에서 끄집어내어
종말과 심판 속에서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겁니다.

마치 마음판의 할례와 같습니다.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입니다.

그래서 그림자로써 손할례를 뒤에 보여준 겁니다. 율법 이전에 홍해사건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그 홍해사건 조차, 물세례 조차 종말성에서 보는 겁니다.

일종의 경험화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시 재현불가입니다.

경험은 노동 곧 행함으로 다시 재현할 수가 있지만

종말은 재현불가이기에 행함으로 나타낼수가 있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믿음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행함의 재현이 아닌, 믿음의 재현으로써 꼭 전쟁 전에 할례하는 겁니다.

행함의 재현은 원인에 따른 결과이기에 지식축적 믿음축적 기술축적 힘축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재현은 원인없는 결과이기에 관계성을 저들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반대로 힘빼기입니다. 일부러 전쟁 전에 칼과 방패의 힘이 아닌

주님의 용서로만 승리하는 겁니다. 그것이 할례라는 육의 단절 차단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어 전쟁에서 졌다? 칼 없니 방패 없니로 따지는게 아니라 힘없었니가 아니라
바지 내려 로 확인하는 겁니다. 어 이 놈이 안했네 로 전쟁졌다는 결과를 보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짖입니까? 행함에서는 나올수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십자가의 재현은 행함으로써의 재현이 아니라

믿음으로써의 재현입니다. 힘 축적의 반대가 되는 식입니다. 경험쌓기 자체가 안됩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을 차곡 차곡 쌓겠다? 고 하니

그런 심뽀로써 우리들은 니고데모처럼 예수님께 다가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차곡 차곡 쌓은 가상하고 기특한 노력을 와르르 무너뜨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서는 더 실제적인 문제를 맞딱뜨리게 하십니다.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지금 그거 차곡 차곡 쌓아서 뭐 할래 라는 겁니다.

종말 속으로 집어 넣는 겁니다.

관계성을 보자 라는 겁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처럼

항상 잃어버린 자에 대한 출생의 비밀은 항상 한 쪽 반지와 또 반쪽의 다른 반지

그래서 그 반지, 목걸이가 드디어 만나서 그 반쪽과 반쪽을 결합시켰을때에

해피앤딩으로 끝나는데요


그 약속의 반지가 보증이 되는 겁니다.

즉 관계성입니다. 너가 잃어버린 자식이 맞느냐? 네 맞습니다.

반쪽짜리 반지 또는 목걸이로 그 물증들을 끼워 맞춰보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 자가 이렇다는 겁니다.

내가 창세전에 반쪽 약속을 그 사람에게 심었고

나도 십자가에 죽어서 그 반쪽짜리 반지인 약속을 다 이루었다.


자 이제 내가 심은 성령 곧 약속을 내놔라


여기에 니고데모의 답변은 어찌 그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창세전으로 올라가 버리면 반칙입니다.

땅에서의 숙제를 하늘의 숙제로 취급해 버리면 반칙입니다.


(요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요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은 어디까지나 땅의 인간들 숙제인데

우찌 하늘의 숙제로써

하늘이 직접 내려와 숙제를 하시는 겁니까?


여기에 예수님이 대답은 관계성 사랑이다는 겁니다.


내가 사랑이라는 이 관계성 때문에 직접 내려왔다 우짤래?

이 단절 곧 인자가,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나 인자도 들려야 한단다.


왜요 왜요? 모태 곧 거듭나게 할려고 모태 만들려고

성령이라는 처소를 만들려고 말이다.

그래야 거듭날 것 아니냐?


이런 땅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사건 십자가의 사건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데

우찌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기나 하겠니?


이 증거(반쪽 반지)를 본 사람 곧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자가 들렸는데 그 인자를 믿는 자는 영생 곧 살려주시는 자의 영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인자의 숙제 곧 인자가 들리느냐 안들리느냐가 관건이지
니 쪽에서 행하는 숙제는 백날 해 봐라 되나 라는 겁니다.


왜? 관계성이기에...

반쪽 반지가 졸지에 임의로 성령으로 인해 생겨버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 그 반쪽짜리 반지를 끼워맞출수 있는

빈자리를(십자가) 마련하시고, 거기서 끼워맞추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없는 자는 쭐꾸덕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주님은 아쉬운게 없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반쪽반지(약속)을 받지 못한 자는 그 결혼 반지를, 종말 반지, 약속 반지가

처음부터 약속이 심겨지지 않은 사람인 겁니다.

그 심겨진 것을 확인코자 둘로 확쪼개어서(할례) 끄집어내어 끼워맞춰보는 거죠 뭐.

요있네!! 창세전에 내가 심갔는 것. 요 있지롱!!


(마 15:11, 개역)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2, 개역)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마 15: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 15:14, 개역)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22: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10, 개역)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양자물리학에서 원인 없는 결과를 발견하고서는

도대체 우리가 아는게 뭐인가? 인간은 쥐뿔도 아는게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즉 미세 현미경으로 기여이 눈으로 접하고서는 그 경험에 의해 나온 겁니다.

이것을 이미 수천년전에 소크라테스가 어느 문구를 보고 읽은 겁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결국 처음부터 원인 없는 결과로써

관계성만을 쳐다봐야할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이미 항상 죄인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인을 만들어 버리면 그 원인을 만든 주인공인 자신을 잊어버릴수가 없게 되고
없애면 없앨수록 더욱더 생생하게 되어버리니

그 원인을 [있음] 이라는 자신의 존재와 결부시켜버립니다.

유일한 결핍채우기 방법입니다. 자유의지죠. 그런데 이것이 사실상 강요된 선택이라는 겁니다.

왜? 마귀의 숙주이기에 그 원인을 이유없이 기여이 자신에게 두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의 존재성 이전에 확정시켜버리는 겁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처음자리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물과 성령으로
겹겨듭 불가능성만 중첩되어 있을 뿐입니다.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이중성,

확정 시켜 놓고서는 인자가 장대 높이 달려 버리니까

오히려 그 육체된 증거가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겁니다.


불편한 십자가요 거리낌이요 걸림돌이요

미련함이요 어리석음이다는 겁니다.


왜? 원인을 나에게 둘려는 그 취지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것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거리끼게 걸림이 되는 실족케 하는 모습으로,
또 미련하고 어리석음으로만 일관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노리고 겨냥해서 온 겁니다. 육은 때려죽어도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또 역시나 육 조차도 때때옷, 색동옷은 때려죽어도 용납못하겠다는 겁니다.
편파복음 배타복음 단절복음은 용납못하겠다

그래서 보편복음 수용복음 개방복음이 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겁니다.


바로 니고데모와 같은 우리의 모습은 이래나 저래나 색동옷 거부입니다.

그리스도의 옷 거부입니다.

사울왕처럼 받은 완료성 선물을 기여이 자기 입맛에 개조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손을 댄 이상 더 이상 선물이 아닌 겁니다.


선물이란 선물에 복속되는 것이지. 선물이 그 사람에게 복속 되는게 아닙니다.


마치 선물의 잉여성이 곧 선물의 폭력성인데 이것이 바로 이미 항상 죄인이라는

사랑의 도착성인 겁니다. 얼마나 배타적이고 외설적인지

기존의 배타성 외설성은 그 축에도 끼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죽음보다 부조리 한게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합니다. 더 부조리 하다는 겁니다.


그 시기가 아니면 그 질투가 아니면

지옥에서 건짐 받을자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관계성의 차단인 겁니다.

물질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연결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소통불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은 소통이다는 겁니다.

단절되었던 끊어진 선을 다시 잇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들락 날락 주고 받고 하는 겁니다.

그 주고 받음이 바로 임의적이다는 겁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반대로 원인 없이 주고 받는 결과 곧 선물이다는 겁니다.

그냥 살려주는 영의 선물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개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주도권 즉 주체인 [선물]에 의해 복속 되어버린 겁니다.

그 선물이 도리어 나를 자꾸 개조 합니다.

아 이래서 주님께서 죽으셨구나 라고 자꾸 나의 생각들을 뜯어 고치는 겁니다.
얼마나 선물이 폭력적이면, 도착적이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해놓고서는 나중에는 여자가 된다고 합니다.
개조 당한 겁니다. 관계성 때문입니다.
해석하는 돌삐를 드는 법의 집행자인 존재가 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 돌삐에 맞아야 하지만 도리어 다른 해석자의 혜택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을 누리는 겁니다.

(창 3:1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내가 받은 선물이 내 마음에 안든다고 개조하거나 물릴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선물 중의 최고의 선물이 바로

매 회초리입니다.


사생아가 아니다는 그 증거 보다 더한 증거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매를 대시는 겁니다. 최고의 선물입니다. 선물 중의 선물. 선물의 이중성입니다.


최고의 약속의 반지입니다. 관계성을 이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무와 열매의 관계성입니다.

성화론자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본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최고로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또 철학자들도 좋아하는 내용입니다.


왜 그럴까요?

보이는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보고 듣고 말하는 그 주체가 결국엔 나 이다는 겁니다.
해석당하는게 선물이 아니라, 해석하겠다는 주체가 나 인 겁니다.


원인이 나로 출발하면 결국 이 관계성을 맺는 것도 나를 원인으로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취지는 바로 그것을 염두하시고서

그 반대로 원인이 없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너는 무화과 열매라고 우기는데? 내가 보니 넌 가시나무에서 태어났어 라고

우리가 두고픈 원인을 자꾸 우리가 원치 않는 나무에다가 뒤짚어 씌우는

아주 아주 불편하고 거리끼는 내용이 이 본문이다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모르고 오히려 이 본문이야 말로 성화론자들이 아주 아주 자신만만해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정작 그 반대인데? 그 다음 너 차례다 라는 뜻인데?


(마 7:15, 개역)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6, 개역)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개역)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개역)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개역)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개역)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개역)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5,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마 7:26, 개역)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 7:27, 개역)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마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장에서 이 내용을 다루심에 있어서 그 대상은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에서는 이 내용의 대상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까지

즉 모든 인간에게 그 범위를 넓혀 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단절성의 확대가 되는 겁니다. 증식 증폭 확장입니다.

곧 종말이 모든 인간의 영역 구석 구석까지 다 침투하는 방식입니다.


유대인도 못 지키는 판국에 왜 예수님은 이방인까지 확대시키는 겁니까?

성화론자들 좋아라 하는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겠죠. 그렇다고 무자아 원인없는 결과라고 말하는 불교 좋아라고?

그것도 아니겠죠. 자아 없음으로 출발한다는 불교해석도

결국 자아 없음이 아니라 자아 없음을 말하는 자아가 있다는 식입니다.



(눅 6:47, 새번역)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눅 6:47, 공동)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다.』

(눅 6:47, 킹흠정) 『내게 나아와 내 말들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지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리니』

(눅 6:47, 한글킹)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누구와 같은가를 너희에게 보여 주리라.』

(눅 6:47, 현대인)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과 같다.』

(눅 6:47, 현대어)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튼튼히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물결이 그 집에 밀어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 튼튼히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눅 6:47, 가톨릭)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눅 6:47, 개역)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 누구와 같은가 라는 부분이 헷갈려서 번역본을 올려 보았는데

아 이런 사람이 바로 나의 말과 들은 것을 행하는 자이다 라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

밑의 48절부터 나오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종말의 집 짖는 자입니다.

불 속에 집어넣어도 불에 타지 않는 집을 짖는 자

집이라 카면 결국 인간의 몸이지요

불 속에 들어가도 안 타죽는 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몸


이것을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그 유명한 종말의 세가지 비유입니다.

1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미련한 다섯처녀 비유

2 그 다음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인데 워낙 엉터리로 통용되고 있는 해석이 많습니다.

3 세 번째로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 


이 종말의 세가지 비유에서 종말의 집 짖는자의 의미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난시간처럼 관계성을 바로 종말 곧 심판과 죽음에 관계성을 둔 겁니다.

그러니 원인이 없다는 겁니다.


불교에서처럼 무자아를 추구하니까 원인 없는게 아니냐 라고 우기는데

그렇다면 그 종말의 사건 속으로 무자아라고 외치는 그 자아를 집어넣어 보자 라는 겁니다.

[없음]의 [없음]이지, [없음] 이라고 우겨본들 그것이 [없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관계성 때문에 원래 [없음]입니다.


그런데 독자적으로 없음이라는 무자아를 추구하니까

나야 말로 그 나무에 그 열매 아니냐 라고

이거 무지 무지 성경에서 언급됩니다 바로

성전에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나야 말로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자 맞지 않습니까?

십의 이조, 이레에 금식, 충성 봉사


그런데 저 세리는 뭡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주심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도리어 종말에 말려든 모습이다는 겁니다.


말려들었다고 하니까 자꾸 어감이 좋지 않아 종교꾼들이 무지 싫어하는데요

주님은 올무를 치시는 분입니다. 실족케 하기의 달인입니다.


자꾸 예수님을 억지로 선하게 보는 척 하지 맙시다.

즉 자신을 선하게 볼려고 하니까 그것이 원인이 되니 예수님도 자기처럼 억지로 선하게 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등에와 같습니다. 톡 쏘아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바닥을 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보아왔던 그런 시선을 날려 버리시고 새롭게 보라는 겁니다.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니까 뿅하고 가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물 위로 걷게 만드신 분이 이번에는 반대로 물에 빠뜨려 죽여버립니다.
그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내가 알던 그 분 맞나요?

전혀 낯설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경험은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도 말입니다.
새롭게 믿어야 할 판국입니다. 사건이 재배치 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 전의 해석이 바르고 옳았어도 짤라내버리고 새롭게 보라는 겁니다.

늘 새롭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관계성 때문입니다. 원인 없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 때문에 그 이 전의 것을 날려 버려도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의 예수님도 버려야 하는 겁니다.

오늘 전혀 다른 모습의 낯설은 예수님을 주님은 준비하신 겁니다.

그러니 선물이지요. 잠식하는 겁니다. 그 낯설은 새로운 선물에

매일 매일 내가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뀌는 겁니다.

선물이 주도권을 쥐고 있기에 말입니다.

남자로 평생 살았는데 졸지에 선물이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아들로써 바벨론 포로 당합니다. 그래서 헨델과 크레텔처럼 돌아올 것을 염두하고서 표식을 하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응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여자가 되어서 돌아오는 겁니다.

이것이 단절 할례입니다.


단절의 단절로써 선물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단절의 선물로써만 소통하는 겁니다.


그 선물 받는 재미만 누리는 것 뿐입니다.


왓 우먼 원츠? 라는 영화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졸지에 번개를 맞아서 우연히 여자들만의 속으로 하는 말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저 그 영화 보고 무지 무지 부러웠습니다. 도통 알수 없는 것이 여자들 마음이거든요.


도통 알수 없는 것이 잉여의 마음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루에도 수십번 왔다리 갔다리


마치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은 여성을 든든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 바로

종말때에도 쓰러지지 않고, 바람 불어도 끄덕 없고,

홍수가 나도, 비바람이 불어도, 천둥 번개가 쳐도,

무너지지 않는 집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반석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양 같이 각 기 제 길로 가버리지만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그에게 감당시키신다는 그 종말성 그 단절성만은

든든하게 미쁘시게 변함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취지의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다 라고


열매로 알리라 라고, 얼마나 성화론자들이 자부심있게 외칩니까?


그런데 진짜 열매 맞나요? 최고의 관계성 바로 매 라는 회초리를 들어봅시다.


어 그런데 열매로 알리라 라고 외치던 그 놈들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갔을까요?


자 이런 의미에서 매를 드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종말을 부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가짜는 다 도망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도망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망 갈곳 조차 없도록 하신 그 관계성 만이

그를 붙잡는 겁니다.
열명의 문둥병자 중에 한 사람에게 너도 왜 가지 왜? 갈데가 없어요!!
이것을 주님의 자작극으로써 펼치시는데 주께서 여기 계시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임의로 부는 변덕이 죽끌 듯 변하는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붙잡는 그 관계성


바로 죽음보다 강한 그 사랑만이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넘쳐 흐르는 겁니다.


열매 억지로 맺을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성깔대로 사세요


염소는 양의 행동만을 했다고 우깁니다. 바리새인이지요. 알곡이다고 우기는 우리들 처럼 말입니다.


아니 언제 예수님께서 목말랐고 굶주렸고 언제 헐벗었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그거 전문가인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소자 한데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와 이거 완전 반칙이지요.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염소로 취급받는 양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 주고, 목 말랐을 때 마실 것 주고, 헐벌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구나?


아니 언제예? 나는 내 자식 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인데 설마 나 아닌데 잘못 보신것 아닙니까? 
전 그렇게 한 적도 없습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와 이런 일방적인 해석이 어디있겠습니까? 바로 종말의 해석이 이런 식입니다. 편파해석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뒤짚어 씌우는 것
오히려 저쪽은 행했는데 한적 없다고 뒤짚어 씌우는 그 뻔뻔스러운 종말이의 해석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는 방식


결국 주님 손에 달린 숙제입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숙제 떠 넘겨버리는 그 뻔뻔함


이것이 종말 사고입니다. 관계성입니다. 이 숙제 하실려고 온거 아닙니까? 라고 뻔뻔하게

자기 숙제 주님에게 미루어 버리는 것, 떠 넘겨 버리는 것


오히려 자기 숙제 했다고 자부하는 열매로 알리라 라고 외치는 자들에게

주님의 숙제는 꼭 숙제 못한 놈을 대조시켜서 종말을 가시화 풍성케 하는 증식 확대를 펼치십니다.


[열매로 알리라]가 내 숙제로 보이십니까?

그냥 막사세요 예수님께 뻔뻔스럽게 떠 넘기세요

변화산에서 참으로 뻔뻔하게 율법의 대표자 모세는 자기도 단 한개도 못한 율법지키기를

예수님께 떠 넘길려고 갑자기 시공간을 초월해서 등장합니다.


예수님! 제발 별세해 주세요.


이것 보다 더 든든한 미쁘심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이런 믿음 있으면 나오보라고요


바로 관계성인 사귐(사랑)입니다. 뻔뻔스러움의 역능 ...


며느리 다말(기생 라합)의 뻔뻔스러운(거짓말) 역능이

시아버지 유다의 엉터리 약속관(외설성)을 깨뜨리면서 더 나은 단절성(외설성)인 종말로 밀어붙입니다.(충성종 악한종 비유)

바로 사랑입니다. 간담이 서늘해서 40년 가까이 기다리고 기다려온 사랑입니다.(열처녀비유-사귐 관계성))

나의 민족 나의 국가 나의 모든 소유 조차도 다 불로 태우는 사랑입니다. 배신때리기 입니다.(양 염소 비유 원인없는 결과)


그 사랑 보다 더 명료한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는 겁니다.


나 마저도 다 태워버리는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만이 죽음도 너끈히 이기는 반석같은 미쁜 든든한 종말 속에서의 집입니다.

십자가라는 뻔뻔스럽고 미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

바로 그 몸이 우리가 쳐다 봐야할 나무에 달려 들리는 인자라는 몸(집)입니다. 종말의 집입니다.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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