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 못할 말씀 (눅 7: 1-10)


두 발로 걸어 들어오는 말씀


(눅 7:1, 개역)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눅 7:2, 개역)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눅 7:3, 개역)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눅 7:4, 개역)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눅 7:5, 개역)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눅 7:6, 개역)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7:7, 개역)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 7:8, 개역)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 7:9,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눅 7:10, 개역)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이란 그저 웃기는 비웃음의 내용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이 걸어온다고 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 두 발이 달렸나요?

이것은 결국 모든 기준은 인간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데 문제는 항상 예수님 곧 말씀인데

모든 기준이 인간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구지 그 틈을 비집고 기준을 엎어버리겠다는 겁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니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 부터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현대인에게서는 자기 가족 외에는 사랑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즉 이 말은 자기 신체에만 지독스럽게 사랑합니다. 남의 몸을 사랑하다뇨?

의사도 돈 없는 환자는 안고칩니다. 무슨 자선사업할려고 의사 자격증 땃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지위를 높여주는 직원을 사랑할 뿐입니다. 철저하게 조건적입니다.

아니 누가 현대에 주종관계를 따집니까? 노사관계는 어디까지나 철저한 계약적 이윤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해 예수님께 간다는 겁니다.
누가? 백부장이!! 누구를? 자기 종을!!

오늘날에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는 겁니다.

가족이 아프면 모를까?

그저 부려먹는 종일 뿐인데 누가 사랑합니까?

사랑해도 뭔가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렇게 뻔뻔스럽게 기록된 이유는

바로 관계성을 때려죽어도 말하겠다는 겁니다. 즉 판뒤짚기입니다.

관계성은 종말에서 그 빛을 발합니다.


마침 지난 글을 적는 와중에 형님댁이 와서 

마태복음 25장의 종말의 세 가지 비유를 나누었습니다.


초반부터 비틀어지는 겁니다. 배운거랑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니 그 말도 틀리지가 않은 듯 계속 듣는 겁니다.

몇 년전만 해도 반발이 아주 심했는데

요즘 왜 그런지 오히려 제가 낯설어서 이 분위기를 우짜면 좋은지 모를정도입니다.


열처녀 비유도 준비를 해야 신랑이 왔을 때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왜 그럼 종말을 말하는데 그런 비유를 합니까? 종말때 말고도 준비할게 많은데?


종말이란 한 쪽은 일방적으로 지독한 편애하는 관계성이요

다른 한 쪽은 일방적으로 지독한 편증(증오)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관계 즉 어떤 관계인가를 드러내는게 종말입니다.


어느 한 쪽만의 성격만 드러내는게 아닙니다.

반드시 지독한 증오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편애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귐이라는 관계성입니다. 두 소욕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에 준비를 자신 쪽에서 하냐 못하냐의 여부가 아니다는 겁니다.

편애와 편증은 그야말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의 여부를 드러내지

행함의 여부에 달린 것이면 얼마든지 바꿀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종말이 드러내는 겁니다. 사귐으로써 말입니다. 일방적인 편애로써 ...


그래서 마음먹기 나름이다 라는 형님의 말에 제가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그런 의미가 아님을 말했습니다.

처음듣는냥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면서 반박을 하고픈데 반박할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의해 홀린듯한 그저 찝찝한 표정들만 짖고 있는 겁니다. 마치 사기당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죠.


그런데 사귐이라는 그 풍부함이 십자가의 용서와 종말의 만남을 직통으로 연결하기에

그저 고마움을 느끼는 겁니다. 뭘 하라는 게 없으니 말입니다.

이유 없이 감사한 거죠. 이유가 생기면 그 감사란 조건이 되며

언제 그 조건이 사라질까 불안 불안할 것 아니겠습니까?


종말의 첫 번째 비유는 열처녀 비유인데 얼마나 어리석은 다섯처녀인지

아직 신랑이 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신랑과 함께 있는냥 사귐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신랑이 얼마나 뿅가게 만들어 놨으면 그럴까요?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지혜롭다는 겁니다.
누가? 누가 일방적으로 해석합니까? 지금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슬기롭다고 일방적으로 뒤짚습니다.
어리석은 다섯처녀는 슬기롭기 싫어도 슬기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편파사랑이거든요. 편파사귐.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처녀입니다.


반대로 똑똑한 다섯처녀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똑똑하나요? 미련스럽게 미리 기다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독자적이다는 겁니다. 구지 사귐 조차도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있어야 하지? 있으면 하고!! 지금은 없으니 안하는 겁니다. 없는데 우찌 합니까 라는 식입니다.

즉 이 말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까이 오면 사귐이 성사되는 조건이 되지

오지도 않았는데 사귐을 가질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얼마나 똑똑합니까? 합리적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미련한 다섯처녀이다는 겁니다. 왜? 종말에는 팔을 어긋맞게 하는 겁니다.


똑똑한 마냥 그 때 되면 준비해서 등불을 켜면 됩니다.

침 외설적이지요!. 오면 사귀지, 지금 없으면 안사귄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외설적인 것이 바로 유비쿼터입니다. 삐삐처럼 도착적입니다. 휴대폰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가장 중요합니다. 문제는 신랑이 일부러 비켜온다는 겁니다.
인간의 준비성을 비켜서 말입니다. 언제든지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사귐을 마치 자기 쪽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불가능하기에 사귐입니다.

사귐이 가능하면 그것은 사귐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그런 여건을 비켜가면서 오는 방법이 바로 신랑의 오심인 종말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도둑같이 온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두 주인을 드러내는 의미가 종말입니다.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미련스럽게 매일 매일 기름 준비하고 등불 준비하는 그런 삶을 살아라 라는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사귐이란 주님 쪽에서의 일방적인 편파성이요 배타성인 단절이지요. 


이것이 관계성이기에 내 쪽에서 우에 우에 할 입장이 전혀 못되는 겁니다.

즉 사랑의 관계는 이상스럽게 저쪽의 관계성도 드러내는 겁니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시간에 말했듯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편애와 편증의 두 대립을 통해서 보면 쉽습니다.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써 시아버지 유다는 약속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약속에 소유 당해야 할 인간이 도리어 약속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이유는

본인이 모태신앙이라는 거죠. 민족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언약도 그러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여기에 흡집을 내는 겁니다.


딱 하나 마음에 안드는게 저 며느리 다말입니다.

사랑하는 맏아들이 죽게 됩니다.

둘째 오난을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 주게 됩니다.

오난은 어차피 재산이 나의 것이 되지 않고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자식의 것이 되는데 미쳤다고 결혼합니까? 미쳤나요 자식 낳게?

누구 좋으라고? 남 좋은 일을 말라꼬 합니까? 그래서 땅에 설정을 합니다.


(창 38:8, 개역)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창 38:9, 개역)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창 38:10, 개역)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그래서 죽여버립니다.

즉 편증, 지독한 증오의 미움이 배경으로 깔리는 겁니다.


사실은 오난을 바로 즉사 시켜버림으로써
실상은 시아버지 유다가 그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시아버지 유다가 이 저주를 자신은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말했지요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구원의 장치, 약속의 장치를 소유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러니 며느리 다말이 가장 적격한 핑계꺼리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방인 여자이니 당연히 모든 죄악을 뒤짚어 씌워도 무방한 겁니다.
약속이 없는 자인데 뭔들 못 뒤짚어 씌우겠습니까?

그런데 며느리 다말의 시선은 시아버지의 유다의 약속관이 엉터리임이 보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을 불구덩이에 집어 넣은게 아닙니다.

다말의 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시아버지 유다를 불구덩이에 넣은 겁니다.

그러니 다말이 그를 건져야 하는 겁니다.

건지는 방법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겁니다.

거짓의 역능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모든 사람들은 다말을 불 속에 화형시키는 그 법 제도로 인헤

다말이 불 속에 넣는다고 보고 있지만


정작 며느리 다말은 사귐의 시선에서 시아버지 유다가 불 속에 타들어가게 될 판국임에

건져내어야 하는 겁니다. 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함은 오로지 사귐 때문입니다.

종말을 대비하는 것은 사귐 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용서인 십자가 뿐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종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장사말아먹을줄 뻔히 알면서

오로지 사귐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장사를 하는 겁니다.


악한 종은 끝까지 독자적입니다. 사귐보다 주인이 엄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윤을 남기지 못할바에 원금을 되돌려주겠다는 것만 의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이 바로 이 이자에 대해서 따지는 겁니다.
잉여라는 선물 자체가 주체가 되어 잉여가 잉여를 낳도록 되어 있는데
그 사귐이라는 선물을 땅에 묻었다는 자체가 독자적이다는 겁니다.


장사를 잘해서 잉여금 이자가 남는게 아닙니다.

종말에서의 잉여란 용서의 사랑 곧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잉여만이 잉여를 낳습니다.
장사 말아먹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귐 자체가 이미 항상 잉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첫 번째 비유든 두 번째 비유든 종말에서의 유일한 선물은 잉여성(사귐이라는 무조건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유없이 남게 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유 있는 잉여를 원하는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로 그 원인이 자신이라는 주체에 달렸다는 겁니다. 마음 먹기 달렸다는 겁니다. 이 외설성에 더 나은 외설성이 바로 편애 입니다.
잉여가 잉여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외설적이며 도착적입니까?
선물을 말하니까 형수가 "어! 도련님 경제 공부했나?"

형수요 잉여라는 은행 [이자]가 경제에만 있는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잉여 곧 선물입니다.

은혜 없이는 살수 없도록 했는데

은혜 없이도 잘 살 수 있게 된게 마귀세상입니다.

현실이 어디 그러나?

물론 그렇게 보는 현실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종말에는 모두 다 배신할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종말에는 배신해야 합니다. 형수도 가족을 위해 언제든지 배신때렸듯이 말입니다.


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예수님 곧 종말입니다.

종말만 쳐다 보고 나머지는 다 배신 때려도 됩니다.

왜 배신하냐고 따지면 너도 이 종말만 쳐다 보라 라고 하면 됩니다.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괜히 쓸데없이 교회 쳐다 보다 파도에 휩쓸려 가지말고


종말의 반석은 예수님 뿐입니다.


목사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교회도 아니며 돈도 아닙니다.


그럼 뭐 밖에 없습니까? 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신 분은 예수님 뿐이니

딴거 쳐다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 일방적 사귐이

누가 봐도 양이였던 자가 졸지에 종말에서는 염소가 되어버리고

누가 봐도 염소였던 자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귐 곧 관계성 때문에 양이 되는 겁니다.

종말은 그렇게 판을 뒤짚는 겁니다.


누가 봐도 성경말씀을 잘 지킨 바리새인 곧 존경받는 자는

염소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워버리고


누가 봐도 매국도 세리는 말씀도 안 지킬뿐만 아니라 손가락질 받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양이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움 당하는 종말의 두 소유성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에 백부장은 이 사귐의 관계성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종을 고치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겁니다.


그런데 그가 당신은 이 일을 위해 이 일을 하심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눅 7:4, 개역)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당신이 찾는 죄인이요 환자이다는 겁니다.

즉 당신이야 말로 의사 아닙니까 라는 겁니다.


건강한자 필요 없고, 의인은 필요 없지요!  왜 당신은 구원자요 의사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찾아왔으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서는 고쳐달라고 했으면 그 환자에게 보여주도록 의사를 안으로 들여와야 하는데


이 백부장이 당신이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그럼 무슨 수로 고치냐 말이지요.

여기서 저는 야히로의 딸 이야기랑 반대가 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눅 8:41, 개역)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눅 8:42, 개역)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시공간을 주님은 무시해 버리는데 있어서 야이로가 놀라자빠집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시공간을 초월하라고 아예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구지 이동하실 필요없이 말씀만 하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왜? 관계성 때문입니다.

그러니 충분한 거리가 멀찍히 떨어져 있어도 그 관계성은 그 단절 속에서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주님이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사오니 그냥 말씀만 하옵소서

저의 종들이 다 듣고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저도 공무원으로써 종이 아닙니까? 종이니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저는 여기서 겸손떠는 모습을 보는게 아니라

관계성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종이기에 주인을 어떻게 섬기는지 알기에

자신의 종도 주인으로써 어떻게 사랑하는지 안다는 겁니다.


그런 관계성을 예수님이라는 주인을 만나서

그 새주인과의 관계성이 지금 어떤지를 아예 뻔뻔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처음 만났는데도 이런 판국이니

얼마나 제대로 된 종을 주님께서 만났습니까?

그러니 주님이 이만한 믿음은 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또또또 이 본문을 교회 일 시켜먹을려고 사기를 치는데 많이들 이용하지만

정작 이용한다는 자체가 사귐이라는 관계성이 없다 라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노동을 강요하는 겁니까?

충성 봉사를 요구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관계성이 없기에 그것만 이용해 먹을려는 겁니다.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백부장은 처음 만난 예수님을 자신이 종의 병을 고쳐달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마치 이방인에게 주의 이름이 불려지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이방인 맞습니다.

주가 뭔지도 모르는, 성경 말씀도 전혀 모르는 이방인 맞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알고 주의 이름이 뭔지를 아는 이스라엘백성은 예수님을 주 라고 부르던가요?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벡부장이 주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유대인에게서는 주의 이름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겁니다.


네 네 네 맞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외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신바 되지 않았습니다.


어 그런데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주의 이름을

왜 개같은 이방여자가 부르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주여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꽁꼬물로 먹고 살지 않습니까?


이 내용이 바로 종말에서의 소유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곧 단절성입니다. 할례죠 할례.


끊침 당해야 할 자는 오히려 주님의 주의 주 되심을 보게 되는데

오히려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이미 소유했다는 자들에게는 전혀 주의 주 되심이 되지 않는 겁니다. 당연히 딴 주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두 주인의 소유성을 드러내는데 이들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바로 종말성 곧 단절성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 곳 마다 이런 분리가 벌어지는 겁니다. 종말성이라는 단절이 벌어지는 겁니다.

단절이란 쪼개지더라 라는 거죠. 두 패거리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그럼 다들 말합니다. 아 야들은 이방인이니까 진노의 패에

쟈들은 유대인이니까 긍휼의 패에 놓여지게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쪼개지지 않은 할례 곧 마음판의 할례가 되지 않는 마음이다는 겁니다.

종말은 아무도 예상 못합니다. 그 예상을 다 비켜가는 겁니다.


종말이라는 할례가 임하게 되니까 곧 선물이지요. 잉여죠 잉여

이방인이 긍휼의 패에 놓여지게 되고

유대인이 진노의 패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지금 사복음서를 보면요 희한하게도 이방인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나 자기백성에게 왔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환영 안하던 것 뿐이던가요? 미워하고 죽이고자 합니다.


이상하게 양들이 다 염소 같이 예수님이라는 소자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소취급만 받았던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너무 너무 이상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에게 늘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손가락질 받는 교회안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의 판대기에서 벌어지는 거룩성 곧 거룩이 임하는 선물로써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백부장은 차마 벌벌벌 떨면서 이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감당이 불감당이라

벌벌벌 떨면서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을 철저하게 종 취급하라고 합니다.


주인이 생겼으니 당연히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뭐 저렇게 까지 오바를 하느냐? 그저 요셉의 아들 뿐이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시선입니다.


비정상은 백부장입니다. 아무도 그를 벌벌벌 떨면서 까지

심판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말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안 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유일한 심판주를, 종말의 주인을 본 겁니다.

어리석은 다섯처녀처럼 미련스럽게 이 심판주를 영접합니다.
감당하지도 못할걸 뻔히 알면서도 그 사귐 때문에 영접하는 겁니다.
영접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그 뜨거운 불가능한 용서를 주께서 먼저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 같은 사랑 .....

이것이 종말에서의 슬기로운 다섯처녀의 모습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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