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다투어 갈라선 바나바와 바울 (행 15:36-41)


진격의 바울



(행 15:36, 개역)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행 15:37, 개역)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개역)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 개역)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개역)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41, 개역)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성경말씀은 도덕책이 아닙니다.

도덕책은 자기도 못 지키는 것을 남에게 짐 지우는 겁니다.

그래서 도덕책이야 말로 외설적입니다.

즉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사랑으로 해버리면 질서고 뭐고 다 개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말씀은 한 술 더 떠 그런 도덕 윤리책 보다 더더더 외설적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외설적인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는 내용 조차도 누락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조차도 주의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패션, 열정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게 되는 원인이 그렇게 명료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즉 바울의 심한 반대 때문입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마가라는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린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이번 동행에는 그 마가라는 요한과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볼게 아니라

복음이 모든 것 보다 최우선적인 일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여기에 바나바가 도리어 반대를 하는 겁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를 위한 방문 자체가

도리어 본인들은 심한 다툼으로 갈라지면서 시작하는 겁니다.
이웃사랑하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때려죽어도 용서 못하겠다는

이런 모순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겁니다.

성령의 취지가 과연 뭘까요?

그럼 형제들의 어떠함에 대한 방문이 일종의 도덕적인 삶? 성화된 삶을 살펴보고자 함일까요?


그렇다면 정작 본인들은 이 심한 다툼의 상황까지 몰고가서는 안됩니다.

만약 너무 극한 상황까지 왔다면 뒤돌아 보고서는
아이구 이러면 안된다 라고 다시 합쳐져야 한다 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여이 갈라서게 됩니다.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말입니다.


단순히 형제들을 돌아보는 차원은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형제들의 삶의 정황에서 벌어진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는 차원의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의미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아무 문제가 없어도 이방인을 취하는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다른 지역의 성도들도 이 문제를 사도들을 통해서 직접 격게 되는 겁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의 문제로써 벌어지도록 일부러 사건을 터트리는 식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박수 엘루마를 사도바울이 총독 서기오 바울이 보는 앞에서 성령으로 통해서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행 13:13, 개역)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 13:1, 개역)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행 13:2, 개역)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 13:3, 개역)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4, 개역)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행 13:5, 개역)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행 13:6, 개역)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행 13:7, 개역)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행 13:8, 개역)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행 13:9, 개역)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10, 개역)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11, 개역)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행 13:12, 개역)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행 13:13, 개역)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 일로 인해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동행하던 마가라는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겁니다.


그 정도로 혹독한 복음증거이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이 그 일로 인해 총독에게 대접을 받거나

또 충분히 쉬면서 앞날의 계획을 세우면서
발걸음 하나 하나를 천천히 옮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슬로우 슬로우~~~~


그런데 바울은 바빠도 너무 바빠 ~~~ 너무 바쁜 겁니다.

결국 이 바울을 뒤 쫏아가는 일 조차도 버거운 겁니다.

종말을 퍼트리는 것이 살려주는 영을 증거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썩고 부패한 세상에 소금을 팍팍 치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문제는 마가라는 요한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문제였던 겁니다.

문제라고 하니까 나쁘다 라는 의미로 말하는게 아니라

그 정도로 바울의 그 다급한 마음에

아무도 그를 뒷받침해 줄 정도로 그 발걸음을 따라 잡을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나쁜 사람, 나쁜사람, 나쁜 바울, 좋은 바울, 이상한 바울인 겁니다.

감당치 못할 일만 골라서 하니 다들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철학자들이 3대 성깔 더러운 최고의 험담꾼으로 세 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아마 소크라테스도 해당되지 싶습니다.

오죽 하면 플라톤이 울었다고 합니다.
제발 선생님! 좀 제발! 죽을 짖만 골라서 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왜! 온동네 돌아다니면서 온통 다 수시고 돌아다니십니까?
제발 좀 고만하이소!!! 마이 무따 아입니까?


첫째로 바그너입니다.


바그너가 남을 험담하는데 얼마나 극심했으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그를 한때 따랐고 존경했던 제자 니체가 질려버릴 정도로 남 헐뜯기에 달인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 바그너의 험담 때문에 정신분석 즉 그 당시에는 정신분석이 없었고

심리학이 있었는데, 바그너 땜에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저러는지 분석을 해야 이유를 알게 되지, 도통 왜 저카는지 알수가 없었다는 거죠.

그 정도로 심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남 헐뜯기의 달인인 최고의 험담꾼은 바로 니체입니다.

하하하 웃기죠 웃기잖아 !!!

아니 ! 니체 자신이 바그너의 험담에 질려버려서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해놓고서는

본인이 정작 또 최고의 험담꾼이 된 겁니다.


그 이유는 철학자든 어떤 인간이든 ,

철학자는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철학을 한답시고 하고 있으니
철학을 사랑하지 않는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하였고,

또 보통 사람들에게는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사는
그런 노예의 근성으로 복수심과 원한만 가득하다 라고 맹렬히 공격 했다고 합니다.
삶의 주인이 될 생각 자체가 없다고 맹렬히 공격합니다. 그런 취지의 험담이다는 겁니다.


바그너는 위의 내용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니체는 충분히 이해가 될만 하죠.
그 정도로 삶 하나 하나를 사랑하고 사랑했다는 취지였던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최고의 험담꾼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철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바울은 "나만 사도다" 라고 할 정도로
제일 마지막에 그것도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사도가 되었지만
(철학자들은 맛디아가 가룟유다를 대신한 사도로 보는게 아니라 사도바울이 가룟유다를 대신한 사도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뻔히 보면서도 말이지요. 아마 그 이유가 있는데 아직 제가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바리새인 자리에서 또는 가룟유다의 자리에서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그런 차이의 철학의 관점에서 본 것 같습니다.)

정작 대선배 사도 베드로를 호통을 쳐서 혼쭐을 낼 정도이니

얼마나 당찹니까?

새파란 젊은 친구가 6,70 정도 되는 아버지뻘, 그것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거침없이 돌직구를 날려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거기에 베드로 조차도 수긍할 정도이니,

얼마나 까칠하고 냉철한지 이루 말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거침이 없는 겁니다.

(또또또 이런 것을 여러 목사 여러 신학자들이 흉내낸다고 어설프게 따라하던데요, 근처라도 제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결국은 성화론 즉 돈 더내라 라는 결론 뿐이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철학자들이 최고의 험담꾼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밤낮없는 행군과 같은 겁니다.
아무리 건강한 자도, 아마 피폐해질 정도로 그 열정이 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죽을려고 환장한 듯, 그런 죽을짖만 골라 골라 골라서 행동하는 겁니다.
실족의 달인이요, 나쁜 사람이요, 좋은 바울이요, 이상한 바울일수 밖에 안보이는 겁니다.


거침없이 돌격하고

쉼도 없고, 멈춤도 없이 오로지 푯대를 향해 앞만 향해가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얼마 못가 지쳐버리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빌 3:13, 개역)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개역)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래서 마가라는 요한이 문제가 아니라 사도바울이 문제이다 라고 저는 언급한 겁니다.
완전히 예수님께 뿅가버린 사람인 겁니다.
진격의 바울입니다.

우리가 요한의 입장이 되어 사도바울을 따라간다고 예상해 보세요

하루도 안되어서 나가 떨어져 나가버리니 요한을 욕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 바나바와 바울의 따로 세우고자 한 이유도 이런 이유인것 같습니다.


결국 이런 문제는 바나바와 바울만의 문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사도들과 무지 무지 많이 부딧히면서
그야말로 그 당시의 교회 문제꺼리의 1호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서 조차 그리 인기있는 사람이 아니였던 겁니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들은 문제꺼리가 저절로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터진 문제도 남의 교회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신들의 문제로써 터지면서 같이 공유하게 됩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마치 유비쿼터스 같은 사건으로써 말입니다.
(결국 신구약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로 터질수 있는 것들을

미리 다 담아 놓은 겁니다. 성령께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터트리고도 남음 입니다.
일부러 이 다툼을 붙이듯이,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나타나는 겁니다. 얼마나 미쁘십니까?

즉 시험 들 짖만 골라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장대 높이 달린 주님 안 쳐다보면

아무리 믿음 좋은 자라도 하루 아침에 무너집니다. 그 다음 너 차례인데! 우짤래?)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문제의 원인이기에 사도바울만 없으면 전혀 문제가 될게 없을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지난시간에 말했듯이

사도바울이 오히려 고마운 이유는

다른 사도들 보다 그런 짐을 오히려 본인이 지는 듯이 보입니다.

언제든지 잠재된 일을 오히려 터트리는 식이고

불난 집에 물을 끼어얹어 불 끄는게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석유기름을 부어 확 불질러 버리는 식입니다. 확대 증식 확장 시킵니다.

구지 문제가 발생되지도 않았는데

어차피 부딧힐 문제로써 잠재된 일이라면

사도바울은 확 터트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뭐가 문제 될 것이 있느냐?
문제 될 것 있으면 언제든지 나오라!  얼른 나와봐!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감당이 안되는 거죠. 뭐 저래 뻔뻔해?

갈구질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를 충분히 알기에 바나바는 그런 취지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려고 한 것이였고


사도바울은 안된다는 겁니다. 결국 갈라 서게 되지만

이것 조차도 주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큰 흐름에서 볼 때에

이들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모이기를 힘쓰며 더욱더 함께 [주의 안] [에수 안] 을 누릴때에

무슨 심뽀인지 주님께서는 안믿는자들을 동원해 핍박을 가해서

예루살렘에서 이들을 확 흩어버리시는 겁니다.


아니 바나바와 바울의 십한 다툼이 있은지 불과 며칠? 몇 개월? 몇 년?도 안되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심한 다툼 조차도 결국 의미가 없었던 겁니다.
그저 앞만 보고 푯대만을 향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미리 보여준 겁니다. 물꼬를 틔여줬으니
흩어지는 것에 섭섭해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죄책감도 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확산 증식 확대가 그 정도로 심각할 정도로 소금뿌리기를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 그 정도로 다급하게 다루어진다는 그 중요성만 남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이 사방에 퍼지는 것이 됩니다.

한데 모여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즐거운데 흩어질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다급한 분은 예수님 본인 당사자 뿐이기에

이 사랑을 확장시키는데 있어서

예루살렘을 흩어버리는 겁니다. 
(또 퍼진다고 하니까? 신사도 운동, 선교, 전도운동, 등의 땅따먹기를 정당화 하는 놈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부동산 확장과 복음은 전혀 무관합니다.)


당황하셨어요? 저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상한 복음입니다. 감당이 안됩니다.

심지어 사도 야고보가 죽게 되고

점점점 죽어나가는 사람이 많게 되니

뿔뿔히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살려고 하니 어쩔수 없는 겁니다.


이런 취지로써 큰 흐름을 본다면

우리가 바나바와 바울의 갈라짐은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큰 흐름의 배경에서 볼때에 이들의 심각하게 다투는 그 다툼 조차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겁니다.

아니 그 방식이 아니면 흩어질려고 하겠습니까?
흩어지기 전에 그 사이에 있었던 이 일이 오히려 고마운 겁니다.

언제든지 잠재되었고, 늘상 벌어질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물꼬를 틔여주니 미리 지나간 그 발자취를 따라서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 자체가 얼마나 모순처럼 보이겠습니까?

단순히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이 둘을 변호 하고파서 말하는게 아니라


복음은 오히려 이 문제를 들추어 내어서

복음 스스로가 얼마나 다급하고

심각함에 있어서 일부러라도 이런 내용을

복음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의도적인 겁니다.


복음이 중요하지 바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중요하지 바나바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중요하지 마가 요한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취지로 바울은 복음이 중요하지 나도 마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 취지를 더욱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은 이 둘을 충돌케 하는 겁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충돌도 동일한 방식입니다.

베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저 소모품일 뿐입니다.


정작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복음이 중요한데

왜 우리들의 시선은 보이는 인간이, 보이는 내가 중요하게 되는 식이 되는가 라는 점에서

성령이 바울을 통해서 오히려 잘 지적해 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와 동시에 바울 본인 조차도 성령을 통해 지적을 받는 판국으로써 바울은 증거하는 겁니다.


개인의 사정을 절대로 봐주지 않는 복음이니

바울의 심정은 일체 양보가 없는 겁니다.


그 정도로 복음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고전 1:1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 1:11, 개역)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 1:12, 개역)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1: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뇨』

(고전 1:14, 개역)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고전 1:15, 개역)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당연히 바나바는 유순하여 인기가 좀 있는 편인데

구지 인기 있냐 없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경에 언급된 대로

바나바파냐 바울파냐 아볼로 파냐 하는 것들이

사람들이란 약해서 그만큼 환경을 탄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물 주는이도 하나요 기르시는 분도 하나이니

정작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가 죽인  예수를 주께서 주가 되게 하셨다는 그 취지에서
그런 사소한 것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기꺼이 나쁜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듯이

성도들에게도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사랑같지 않고 너무 너무 까칠한
너무나도 대하기가 불편하고 상대하기 힘든 사도바울이지만

그 취지와 의미들은 성령으로 인해서 충분히 알게 되는 겁니다.


이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고전 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개역)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전 3:3, 개역)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4, 개역)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전 3:5, 개역)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6, 개역)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개역)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3:8, 개역)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9, 개역)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 3:10, 개역)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개역)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개역)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개역)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개역)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개역)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6,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 개역)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9, 개역)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 3:20, 개역)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21,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2, 개역)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바울이 본인이 원인이 된 듯이 사건이 발생해 놓고서는

정작 본인이 나무래는 투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가막히고 코가막히겠지만

정작 성령을 통해서는

이 사도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혹독하게 삶의 막다른 벼랑끝에서 만났음을 보게 됩니다.

많이 용서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충분히 이런 사도바울을 까칠하고도 까칠한

심하디 심한 험담과 돌직구를 충분히 주의 사랑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예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를 만나자 마자
족치고 다리 걸어 태클로 넘어뜨려 실족케 하는 일만 골라 골라 하시는 겁니다.

제자라고 예외가 되는게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제일 많이 대표로써 얻어터지는 자가 베드로 이지 않습니까?

그랬던 베드로가 이제는 새파랗게 젊은 바울에게 또 얻어터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베드로는 충분히 수용을 하는 겁니다.

즉 베드로는 그 정도로 많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크게 보이기에 자신의 사소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미쁘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남 지적질 잘 하는 사도바울은 좋겠구나 라고 비꼬며 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에게 주님께서 깊숙이 찔러 깊이 박아놓은 사단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니 남 지적질 하는 위치에 서있으니 너는 좋겠구나 라고 비꼬면서 동시에 부럽다고 말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한번 사단의 가시에 같이 깊이 찔려 박혀 보시겠어요? 과연 좋은 위치인지? 부러운 위치인지?


그래서 아무나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마가라는 요한도 나가 떨어져 나가는 판국에

우리일까? 너희일까 보냐!! 라는 식일 정도입니다.


그 다음 너 차례인데?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는데?

이래 말하면 어머니 말 마따나 믄 말도 못 꺼내게 만드는 식입니다.


결국 이런 까칠한 사도바울을, 괴퍅한 사도바울을 세운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까칠한 바울을 세운 겁니다.


오히려 주저 주저 함이 없고

아예 모호한 것이 없이

극과 극으로 선명하고 또렷하게 갈라


제대로된 선? 도주선?을 제대로 그어주는 자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 곁에 있게 해 주신

주님의 열심에 도리어 감사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선이 분명하니 얼마나 시원 시원합니까?


이 선을 경계라고, 일자(거짓의 역량, 웃음, 연기) 라고, 가로지르는 선이라고,
철학자들이 말하곤 합니다만


단순히 물렁 물렁하게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어물쩡 넘어가는

그래서 오히려 미련과 모호함과 어렴풋이한 그런것만 맴돌게 하는게 아니라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잠재되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성경에서 기록될 정도로 터트려 주시니 이 말씀을 보고서는

아 이들도 이런 일들을 격었구나 라고 보게 되니

모호한 것은 싹 사라지게 되고 

오히려 시원 시원하게 명료한, 미완료가 없는 완성임을 보는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시원 시원하게 모호하고 흐릿한 것들은 아예 제대로 단절 시켜주는 그 시원시원함이

제대로 된 배려로써, 우리는 또 한번 성경말씀의 섬김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기초교육부터, 모든 구약의 의미를 주님께서는 제대로 직접 양성하셨던 겁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였습니다. 나만 바리새인이다.

율법에 정통했다고 합니다.

혹독하게 그를 공부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그 현장에서의 모든 행정을 그가 진두지휘를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너무 너무 철저한 사람입니다. 완벽주의자, 그것이 몸에 배인 자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십자가의 사건에 다 활용이 되는 얼마나 외설적인 모습이였습니까만

정작 도리어 그런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기 위함이기에 활용이 되는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바 된 겁니다.


그러니 마귀도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 어디서 굴러온 뼛따귀야 할 정도입니다.

마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다는 겁니다.

왜? 자기들의 최고의 장군이였던 자를

예수님께 빼앗겼기 때문에 당연히 잘 아는 거죠.

그래서 마귀세계도 정통한 바울이요, 십자가의 예수님의 세계도 정통한 바울이기에,

두 세계를 다 아는 자가 사도바울을 주님은 사단의 가시를 깊숙히 박아 못 빼도록 하신 겁니다.

자고치 말라고 말입니다. 그 정도로 사도바울 조차도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피만 완료이기에 주님은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가시 빼주세요 라고 기도해도 안 들어주는 겁니다.

나쁜 에수님이시지요?

그런데 그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좋은 예수님이지요?

너는 약한대서 강함이라고 하십니다. 이상한 예수님이지요? 약한데 어찌 강합니까? 이상하죠. ㅋㅋ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러니 까칠 안하고 싶어도 그에게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 때문에

사적인 견해를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보이는대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울은 그래서 결국은 모두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 조차도 소모품으로 활용되기 위해
자기자신도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겁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도 저주 받아야 한다. 라고 합니다.

(갈 1:7, 개역)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갈 1:8, 개역)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9, 개역)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개역)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2, 개역)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러니 마가라는 요한도 감당이 아예 안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나바는 그러지 말고 데리고 가자 라는 의견도

바울에게는 먹혀 들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심하게 다툰 바나바가 지옥가는 겁니까?

마가라는 요한이 지옥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뒤에 예루살렘 전체를 흩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다툼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데

왜 주님께서는 이 일을 크게 벌리시는 겁니다.


인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오로지 복음이 중요하기에

복음에 의해서 배치된 사건들인 겁니다.
우리는 나 자신도 인간이기에 인간의 일만 크게 보이지만

본인이 천사라고 생각해 보세요

큰 흐름을 보게 되면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복음의 심각성, 중요성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세계는 저 봐라 봐라 봐라 저거들도 형제끼리 다투면서

다른 형제를 돌볼려고 예루살렘에서 파견한단다 얼마나 모순되면서 웃기지 않냐?


라고 이런 마귀만을 보란 듯이 이런 사건들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 주님의 자작극이였음을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따라다닐수 있는 문제인 스데반 죽인 것에 전혀 죄책감은커녕

스데반의 바톤을 이어받아 당당하게 외치는 겁니다. 전혀 따라다니는 문제꺼리가 안되는 겁니다.

그의 과거의 문제는 오히려 복음의 심각성을 외치는데 활력소가 되는 겁니다.

딴 사람 같으면 벌써 나가 떨어졌죠,


예수님이 괜히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번 과거를 묻는듯한 물음을 하시는 겁니까?

영의 세계에서는 육의 과거의 일들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뻔뻔함을 강화시켜주는

성령의 일하심 때문이다는 겁니다. 곧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더 당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더 뻔뻔하고 더 외설적으로 참으로 낯짝 굵게 베드로는 천연덕스럽게

아니 심각하게 예수님에게 답변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아니 주님이 더 잘 알면서 

뻔한 것을 묻냐고 합니다. 

둘 다 못 말라지기요. 못말리는 사랑입니다.
그 정도로 경계선이 된, 심판의 기준이 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죄책감 따위가 경계선으로, 기준으로 될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다른 사람 같아 보세요 죄책감에 벌써 부엉이 바위에서 몇번을 뛰어 내렸을 겁니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아무도 남아 남지 않게 될 겁니다. ㅋㅋㅋ


그러니 오늘 본문처럼 이런 사건을 일부러 다루시는 성령의 일하심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 조차도 주의 주 되심을 위해서 드러나고 나타나야할 문제로써

주님을 다루시는 겁니다. 반드시 다루시는 겁니다.

얼마나 그 섬김이 깊고 놀랍습니까?


전혀 꿀릴 것이 없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

죄수 복을 입고 당당히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는 겁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심판의 기준이지

나의 과거가 나를 죄책감으로 몰고가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엉뚱한 것에 속지 마세요, 나의 죄책감에 속을 이유 전혀 없습니다.

제발 뻔뻔하세요. 제발 당당하세요. 제발 막사세요.
인간의 행동 여부, 나의 잘한 행동, 잘못한 행동은

전혀 심판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엉뚱한 것을 경계로 해서 선을 긋는 짖은 그만하세요.


오로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를 선생으로 둘 필요가 없습니다.

즉 이말은 나를 심판할 자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다시 살아난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명료하게 경계선으로 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분리되는 겁니다.

분리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경계가 제대로 그러졌기 때문에 분리가 일어나는
경계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도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취지로 사도바울이 왜 이렇게 깐깐하게 구는지를 아시게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피 라는 심판의 기준을 던져주는 것이야 말로

저들에게 유일한 소망인 겁니다. 참 사랑입니다.

까라앉는 밑구멍난 타이타닉 배 에서의 유일한 참소망인 겁니다.

구멍난 인생에 심판의 기준을 던져주는 것 보다 더 큰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뭐! 심하지 않냐 구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게 아니냐구요?


그럼 본인이 그 까라앉는 그 거대한 배를 구해보시던가?


그럼 다른 방도가 있으면 말해보던가?


못할 것 같으면 말을 마세요.


그래서 그 불 붙은 무너진 다윗 장막, 구멍난 타이타닉,
불뱀에게 물린 몸뚱아리를 쳐다볼게 아니라

전혀 다른 몸을 쳐다보라 라는 겁니다.

어차피 거들날 몸은 쳐다본다고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냥 헐라, 헐어버리세요.

왜? 우리는 새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허물어 버리는게 낫습니다.

가만히 둬도 어차피 허물어 집니다. 가라앉는 배입니다. 인생입니다.


아무도 다시 세우지 못하는 다윗의 장막을


예수님께서는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도 그 몸을 쳐다봐야할 판국이고

마가 요한도 쳐다봐야할 판국이고

바나바도 쳐다봐야 할 판국이고

베드로도 쳐다봐야할 판국인 겁니다.


감히 사도가 된 몸이라고 내세울수 있는 몸이, 그 몸 앞에서는 없습니다.

그 어떤 사도일지라도...


수제자라고 봐주는게 없습니다.

냉혹합니다.


이런 판국에 우리라고 봐주는 것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이 종말이 심각한 것이지

종말이 주체이지

그 종말이라는 심판 속에 놓여진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저 대상물일 뿐입니다. 종말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짐을 당할 판국일 뿐입니다.

그렇게 마가라는 요한이 단절 되는 것도

심판의 기준이 중요해서 이고

그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가 갈라지는(분리) 것도

심판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고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경계는 없습니다.


그러니 심판 스스로의 자작극이요 종말이 심각한 단절성을 표출한 것이지

인간끼리의 다툼은 전혀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 겁니다.

개인의 사정들이 부딧힌게 아닙니다. 

시간 지나면 어차피 흐지부지할 꺼리를 말라꼬 할 짖이 없어 성경말씀이 일부러 기록했을까요?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복음에 의해 배치되어서 나온 복음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 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주님! 종말의 심각성을, 복음의 심각성을, 복음만이 스스로 증거하고 있지

인간은 그 심각성을 알 리가 없고, 보탬이 아예 안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그저 시시할 뿐인 것으로 성령의 일을 비웃음으로 취급할려고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사건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깊숙이 사단의 가시처럼 이 내용을 깊이 찔러 주심은

그 정도로 십자가의 피가 중요하지

사적인 영역은 없음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섬김이요 배려임을 알게 됩니다.

이 섬김이 아니면 명료한 것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는 의문의 증서에 매여있을 뿐입니다.


이런 육의 한계로 부딧힐 수 밖에 없는 문제들!

어서 빨리 부딧히게 하시고, 잠재된것들 모두 끄내어 드러나게 해 주옵소서.


그것 조차도 주님의 섬기심이요, 그 십자가의 피로

먹보다 더 더 검은 붉은 죄를  흰 눈 같이 깨끗케 덮을 것임을

진홍빛 같은 붉은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하시는

그 섬김을 보도록 우리의 눈을 새롭게 창조해 주옵소서 


비웃음 꺼리로만 일하시는 주님

오해로만 일하시는 주님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녀를 위해 울어라

그 정도로 종말의 심각성을 외치시는 섬김이요 배려인데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며 오해할 뿐입니다.


주님 어서 고쳐주옵소서 빨리 들추어 내어 주시고 빨리 감싸주셔서 

고쳐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 심판의 기준인 십자가의 피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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