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를 지키는 바울 (행 16: 1- 5)

할례를 범했다가 또 다시 할례를 지키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울???



(행 16:1, 개역)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행 16:2, 개역)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 16:3, 개역)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4, 개역)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 16:5, 개역)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지난 시간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심하게 다투어서 갈라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갈라섰다고 하니 영원히 헤어진것이냐? 아닙니다.


오히려 두 패로 나누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더 증폭이 된 것입니다. 복음의 자작극입니다.
복음을 위한 조치로써 복음이 그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서 확장시킨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성격으로 인해서 이거나,

또는 인간의 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이들의 성격, 실수 등등을 그대로 가지고서 활용하시는 차원인 겁니다.

그러니 복음에는 전혀 지장이 되거나

걸림돌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복음이 그들에게 장애물로 작용할 뿐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은 사도라고 해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괜히 사도로 삼으신게 아닌거죠.

믄 실수를 해도, 믄 일이 벌어져도
성령을 선물 받은자에게는 복음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이상
전혀 문제꺼리가 될 수 있는 것들이 없음을
도리어 이들 사도들을 통한 문제발생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를 보십시오.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툴툴 털고 또 염치 없게도 뻔뻔스럽게

아무일도 없었는냥 그대로 진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참 뻔뻔하지요.


이방인과 함께 손으로 먹는 것에 얼마나 거리껴 했나요?

오죽하면 환상으로 나타나서

괘안타 묵으라

안괘안습니다.

괘안타카이 묵으라카이


실랑이를 꼭 3번 이상 거쳐야만 겨우 말 듣지 않습니까?

얼마나 고집이 셉니까?


즉 복음은 이런 상황을 거리낌없이 그냥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고집이 세든 말든 주님 쪽에서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내용마저도 고스란히 다 담겨져서 사귐을 주님이 당당히 외치시는 듯

버젖이 성경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정도로 쎄다 라는 겁니다. 눈 녹듯이 녹습니다.


그러니 성격 바꾸겠다고, 또 지난날의 습관을 바꾸겠다고 할게 아니라

이런 것 마저도 주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바꾸면 오히려 더 골치 아픕니다.

지적 받을 꺼리 없는 인간 만들어서 뭐 하게요?

저거 바꾼다고 쪽팔리지 않을까요?고집센거 고친다고

어차피 마귀를 이길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귀 이겨서 뭐 하게요?

그럼 말라꼬 주님이 있습니까?

마귀까지 다 이겨버리는 인간인데?


그러니 성화론자들이 얼마나 사람을 위선자로 만드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렇다고 정당화 하라는 소리입니까? 방종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 놓이면 누구든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황 하셨어요?

당황 하시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닥치게 되면 그냥 저절로 내 속성이 튀어나오지만

그것 조차도 주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미쁘십니까? 든든합니까?

실로암 소경이 자신의 소경됨을 정당화했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활용하신 겁니다.

안식일 범하기 라고 하니까 일부러 그 글을 핑계로 삼아서 나 주일성수 안한다라고!!!

아니 언제는 그럼 했나요? 원래 안했던 겁니다.
그러니 자꾸 독자적인 겁니다.

사귐의 의미를 일부러 뺄려고 몸부림 치듯이 말입니다.

안식일 범하기 자체가 저들의 안식일 지키기라는 외설성을 고발하는 차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안식일 지키기 뒤에 숨어버리면 전혀 안들킬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악마성을 드러낸 겁니다.
믿음의 노선인 사귐의 의미이지
나의 행동을 정당화 하라는 취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막사세요 !! ( 또 헷갈리시나요? 사귐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최고의 뒷담까는 험담꾼 사도바울을 주님은 그 성질 바꾸어서 사용하시는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 모양 그대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몇년 전 이근호목사의 강의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형사 가제트는 형사가 아니라 오히려 말썽만 일으키고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조카가 그 뒷수습을 다 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가제트는 그냥 자기 성깔 그대로 막삽니다.

그렇지만 사건은 다 해결합니다.


왜? 조카와 강아지가 다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게, 숨어서 우렁각시처럼 성령께서 다 일하시고서는

그 사건해결의 영광(선물)은 가제트가 다 받는 겁니다.

그것을 더 영광스럽게 조카와 강아지는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사귐성, 관계성
즉 성령의 소유성에 마귀는 비로소 화가난다 화가나 앵그리 귀신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런 의미의 내용이 지젝의 책에서도 나옵니다.


가제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리 아무리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이다는 겁니다.
쥐 뿔도 아는 것이 없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빈터 빈공간을 그냥 그대로 누릴 뿐입니다.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행할게 전혀 없습니다.

이 외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때에 우리가 그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외칠때에
다시 그런 우리를 보시면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중중첩과 동시에 이중전복 뒤집기입니다.

스데반집사도 성령이 충만하여 얼굴이 천사와 같았을때에

청년사울 즉 사도바울의 선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스데반집사를 죽일때에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말입니다.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모르잉, 알지 못하잉,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행 6:15, 개역)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7:55, 개역)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개역)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개역)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개역)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개역)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무시험 합격이고 앞으로도 무시험 합격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를 뿐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입니다.)


뒤에서 숨어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이미 완료된채로 일하시는 성령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부딧힘들은 전혀 문제꺼리가 되지 않는 겁니다.


문제꺼리로 본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가제트의 행동을 보는 것은 마치 자신의 행동 또한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제트처럼 완료된 선물만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못보니까 가제트의 흠만 보이게 되니

도리어 자신의 들보를 동시적으로 못 보고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벌리신 소유싸움이다는 겁니다.

내가 용서 했는데 왜 니가 시비거느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말이 안되는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용서 했다는 자체가 시비걸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소유싸움이기에


두 소유의 주체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체를 일자 또는 존재인데

자꾸 우리가 주체가 되어버리니까? 내 존재를 봐버리니까!

이 소유 싸움에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그런 스데반 집사를 미끼로 삼으시고 말입니다.


결국은 주체 싸움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부딧힘을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또 선물 받는
곧 은혜를 누리게 되는 상황에 즐거움이 되는 겁니다.


와 이렇게도 또 사랑하시나? 감당이 불감당이네? 라는 감격만이 넘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지난 시간의 내용도 주체싸움이다는 겁니다.

주체가 예수님의 마음 곧 예수님의 영, 성령이다는 겁니다.


그 주체가 있기에 형사 가제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될 필요가 없고, 내가 다 알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주체의 대상물이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 아시는 주님이라는 주체로부터 알려주시는 것을 받는대상이 된 객체,
이것이 마귀가 미치고 환장하는 사귐이라는 관계성입니다. 소유성입니다.


허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의 배려로 인한 선물만 가득 받을 뿐입니다.

그 선물만이 남아있기에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우리는 늘 사건을 저지르고 망칠 뿐이지만

뒤에서 숨어서 주님은 그 사건을 늘 해결하심으로써 선물만이 빈 공터로 남겨두시는 겁니다.

그 빈터가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또 용서 받았구나 라고 말이죠.

이게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나오는 의미입니다. 루터의 영향을 받은 괴테.
이것을 몇년전에 중고등부에서 데스노트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면서 써먹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마귀는 그 빈 공터를 견디질 못합니다.

데스노트이니 마귀가 송사하고자 하는 자의 이름을 마구 마구 써먹고마 안달이 났습니다.

그 빈공백을 기여이 매꾸어 넣을려고 하다 보니

십자가라는 빈 공터를 십자가지식으로 가득 채우다 보니 (십자가를 십자가지식으로 빈공터채우기)

그 범인이 결국 성령의 소유로 인한 허당 가제트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미 항산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괜히 선악의 법적 권력을 다 쥐워버린 마귀는
강요된 선택에 의해 법을 휘두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가제트를 도저히 용서 못하는 겁니다.
내 돈 띠먹고 도망친 백데나리온 훔친놈!!! 이 놈 잡아라!!
미끼를 덮썩 물죠.

아무것도 알지 못해서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그런 우리들을

마귀는 늘 송사하기 바쁘게 율법의 올무에 집어넣습니다.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합니다.
조사하면 다 나와 !!


그러나 주님은 미리 우리에게 그런 외설에 더 더 더 나은 외설로 우리를 계류(검문 검색)해
죄인 만들어 사랑해 버리심으로써 (나쁜 남자죠)

법을 범하는 안식일 범하기를 예수님께서 시범조교로써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법 지키기를 계속 할 것이냐?

아니면 법 어기는 더 외설적인 사랑을 할 것이냐? 


이 두 갈래만이 있는 두 소욕만을 남겨버리신 겁니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오늘 본문은 더 외설적이게도

복음증거라는 외설성 때문에

할례를 범하는게 아니라 할례를 지키는 겁니다.


반칙이지요? 언제는 할례 어기기, 할례 범하기를 하라고 해 놓고서는 

이제는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


마가라는 요한을 기여이 때려죽어도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사도 바나바와 대판 싸움으로써 갈라지게 되고서는

오히려 그 계기로 인해 디모데를 사도바울은 편애함으로써 데리고 가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는 훨씬 나약한 자입니다. 칭찬받는 사람이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중간에 힘들어서 하루에도 12번 돌아갈려고 할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데리고 갈려고 합니다.


더 건강한 자는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 도리어 걸리적 거릴수 밖에 없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를 데리고 가고자
앞의 일들이 벌어졌던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도움이 되고자 데리고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모데를 도와줘야할 판국인

사도바울이 늘 신경써야 할 자입니다.

어쩌면 방해가 될 수 있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출발부터 디모데 자체가 이런 허물이 많다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보여주는 중첩성이 바로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 즉 그리스사람인데

데리고 가는데 있어서 발생하는 할례문제입니다.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시행하는 겁니다.


왜 말썽이 난다고 생각했느냐 하면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서 

동네사람들이 유대인이라 이미 저들 나름대로의 율법관에 의해서

할례받지 않는 사람을 데리고 가니

그것은 디모데 아버지 때문인 비거룩한 자들 때문이다 라는 것으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시행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왜 사도바울은 왜 이랬다 저랬다 하나?

율법의 할례를 거부했다가 이제는 도리어 행하고 지키느냐 라는 문제로 보고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자신이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는 상황에

할례 문제로 그 가정을 그 동네 유대인들이 가만히 두겠습니까?

슬데없는 사소한 일들은 남겨둘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로지 복음증거가 더 심각하기에

그런 일들은 아예 미연의 방지를 하는 겁니다.


마치 제가 얼마전에 만난 제 친구에게 했던 말처럼

6.25 한국 전쟁때

북한 장교가 어떤 교회에 들어가 목사와 성도들을 잡아놓고서는

예수님의 얼굴 사진을 짖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안 밟으면 죽여버리겠다 라는 언포에


목사가 제일 먼저 나서서 교인들 여러분 이 사진 지근 지근 밟으세요 라고

목사 본인이 시범을 보여주면서 지근 지근 밟으니까

성도들이 다 예수님의 사진을 밟고 지나가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임기응변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참에 예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아무도 없음을

그 순간 설교를 하듯 시범적으로 보여주듯 설교를 하며 지근 지근 밟는 거죠.


물론 살아남는 것이 복음적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죽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에 하고싶은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뇌과학에서 이미 뇌가 결정한대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리 행동이 뇌의 결정 보다 앞서서 나타난다고
그것을 증명해 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가의 장비와 컴퓨터의 계산이 필요했을까요?

성경은 이미 미리 다 이야기 했는데 말입니다.

그냥 사세요 바로 자유입니다.


막사세요

지근 지근 예수님의 얼굴 사진을, 그림을 밟아버려서
또는 안 밟아서 북한공산당에게 총살당해 죽어도

그것은 순교가 아닙니다. 그냥 개죽음입니다.


분명히 밟고자 정조준해서 밟았는데 바람이 불어서 사진이 옮겨졌다!! 아뿔사 !!.
그래서 총살당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일찍 제대했으니 말입니다.
알고보면 처음부터 코메디이지 않습니까? 웃으면서 가면 됩니다.


어제였나?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도 어머니께서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래도 나무래고 저래도 나무래고

이렇게 해도 올라가면서 조패고

저렇게 해도 내려가면서 조팸 당하도록 하고


도대체 우짜라는 건지?


그것은 이스라엘 멸망 자체가 이미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본인들은 이것이 안 받아들여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적용시킨다고 해 보세요

당연히 안 받아들이죠.


그런데 어머니!!  주님이 이래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식을 삶아 먹도록 되어 있다.


에이 무슨 소리 합니까?

설마 자기 자식을 삶아먹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허 먹는다 카이


어허 안먹는다 카이


어허 아직 배부르구나 너희는 너희 자식을 잡아먹도록 되어 있다.


아뿔사 설마 설마 했는데!!!



어머니! 우리가 이렇게 이런 내용을 나누었잖아요


그런데 어떤 먹방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 난 것이 바로


너희는 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


어허 무슨 소리 합니까? 우리가 식인종입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허!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5, 개역)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6, 개역)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7,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너무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 하니까

그 동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푼 기적으로 보고 따라왔는데,

갑자기 우수수 다 빠져서 되돌아 가버리는 겁니다.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 가니까


예수님은 믄 말도 못하도록 아예 더 외설적이게

제자들에게도, 왜!!! 너희들도 가지 왜?


제자들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실족복음입니다.



자 이제 결론으로 

지난 글에 할례를 범하라 하고 했습니다.
이것을 명령어로 듣기는 자에게는 행함의 문제로만 보이지

믿음의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이 모순처럼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여야만 합니다.

행함의 문제로 보이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할례를 범하라 캐놓고서는 오늘은 다시 할례를 지켜라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그러나 믿음의 문제로 보이는자 즉 행함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 자는
전혀 모순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배려가 보일 뿐입니다.

일종의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히스테리 처럼 이랬다 저랬다로 보이겠지요.
그런데 이 히스테리라는 여성성이 바로 더 더 더 나은 외설성인 사랑 곧 사귐이다는 겁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유대인 동네에서 그들 부모가 격게 될 일들이

괜히 복음에 거리끼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로써

사소한 것들은 일괄처리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약골 디모데를 데리고 가는데 있어서

사도바울에게 걸리적 거리는 방해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도바울로 인해서 그는 곧 디모데는 도움을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바울은 도움받을 자는 찾는게 아니라 도리어 도움 주고자 하는 겁니다.
사귐의 관계를 보여주는 셈입니다.

마가라는 요한은 그저 일적인 관계였던 거죠.

예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령받는자는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를 찾는자가 아니라

성령이 주시고자 하는, 그냥 받기만 하는 자를 찾는 겁니다.
디모데야 말로 사도바울의 짝꿍이 될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위한 것이였음을 처음부터 그랬었었었다는 겁니다.

백부장의 믿음에서의 시간 문제와, 회당장 야이로의 딸 사건의 시간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먼저 앞서서 일하셨기에 그 결과물 곧 원인없는 결과만을 누릴 뿐입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시간이 이랬다 저랬다 지멋대로 처럼 보이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랬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벌리신 일이였던 겁니다. 주님의 시간인 겁니다.
실로암 소경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일로 인해 교회의 수효가 많아졌다 라고

모순 된 행동인데 교회의 수효가 많아졌다 라고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복음의 확장성을 이야기함은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라

복음이 이렇게 풍성하다라는 겁니다.

그 어떤 허물도 다 감당한다는 겁니다.
사귐이니 말이지요.

갈라졌는데, 심하게 다투었는데 더 풍성하다뇨!!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사도 베드로도 손으로 먹는 것이 얼마나 역겨워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지금 복음을 증거하는 상황에서 부딧히는 문제꺼리로 벌어졌을 때

그것이 전혀 심각하지 않음을

그래서 환상에서 보따리가 나타나 묵으라 카이

안묵을랍니다 라고 옥신 각신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인에게 할례를 범해라 안식일을 범해라 라고 생전처음듣는 소리를 해버리면

또 그것이 또 법으로 평생들려온 자들에게는 또 한가지의 법으로 하나 더 추가해져 들려올 뿐이지

전혀 사귐으로 들려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조차도 법이 되지 않도록 사도 바울은 할례를 행했던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굳세게 되었다고 합니다.

(행 16:5, 개역)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고전 9:19, 개역)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개역)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1, 개역)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2, 개역)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3, 개역)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고전 9:24, 개역)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고전 9:25, 개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6, 개역)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27, 개역)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그래서 결국은 이 살과 피를 먹이기 위한 복음을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내 살과 피를 먹어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가 먹지 못합니까?

나는 이미 항상 죄인입니다 라는 자에게는

이것이 행함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로써 그 정도로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랑으로 보일텐데

행함의 문제로 봐 버리면

내가 미쳤냐? 식인종이 되게?

그런 엽기적인 짖을 해서

평생 범죄자가 되어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 바에

예수를 등지고 사는게 낫지 않느냐?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수 있는 자는

지금 그 순간 죄인이 되는 자가 아니라

이미 항상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살수 없는 자입니다.

믿음의 문제였던 겁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은 놓치지 않고 깊숙이 파고들고 오시는 겁니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깊이 파고들어 오시고서는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참으로 뻔뻔한 자만이 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주님을 괜히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공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공명 곧 울림통

소리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짝궁입니다. 신랑 신부의 관계인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행함의 문제로 보는 자는

예수님을 등질 수밖에 없기에

독자적일 뿐입니다.

평생 죄책감이 되는 짖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뭐 눈에는 뭐 밖에 안보인다고

법의 눈에는 법적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대담하게 믿음의 노선으로 파고들어오신 주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 겁니다.
후비고 비집고 들어와서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신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만을 들이대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흔적으로 인해 우리는 종말의 노선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이 불편한 십자가만이 제대로 된 사랑만을 보여주는

가장 가장 노골적인 배신의 배신인

법이라는 외설 보다, 더 나은 사귐이라는 외설성임을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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