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이 세대 (눅 7:24-35)



(눅 7:24, 개역)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눅 7:25,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눅 7:26,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눅 7:27,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눅 7:29, 개역)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눅 7:30, 개역)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3, 개역) 『침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선지자로써 요한이 앞서 왔다고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요한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합니다.


바로 세례를 언급합니다.

이 세례를 이 세대 사람들은 받지 않으려 했다는 겁니다.


세례는 단절을 통한 연합입니다.

단절이 없는데 어떻게 연합하겠습니까? 즉 어떻게 사귐이 있겠습니까?
(구약으로 치면 이 세례는 할례입니다. 육의 차단이 없다면 여호와의 전쟁의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출애굽때에 심판이라는 저주 속에서 구원합니다. 홍해로 인해 가로막힌 차단이
졸지에 구원이 되는 홍해가 갈라짐은, 바로 마귀가 강퍅케 되는 바짝 뒤쫏아옴을 통해서
실현이 되는 겁니다. 악마들의 이스라엘 죽이기가 없다면, 여호와의 이스라엘 구원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 세례인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마귀 보란듯이 죄인 만들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짝꿍처럼 이 세례요한이 나를 위해서 앞서 왔다고 하시면서

세례요한과 세례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자기자신을 언급하시면서 세례요한이 나를 위해 증거한 자다 라고 하심이

누가 들으면 참으로 뻔뻔스럽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공명이라는 짝꿍 개념이라면

이 말은 뻔뻔스럽다기 보다는 참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짝꿍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세례를 연합이라고 해석합니다. 바로 연합으로 갈수 없습니다. 뭔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을 보세요

철저한 단절 때문에 세례요한의 세례가 언급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그 세대에 흔하게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던 메시아사상을

오히려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듯 광야에서 따로 판짜기를 한 겁니다.

기존의 판을 거부하면서 따로 판을 짜니까

이 세례요한에 대한 대접이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곧 유대인들이,
이 세례요한을 싫어했다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 세대 사람들의 성향이 어떠했는가를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뭔가 반대급부를 추구했기에 당연히 싫어할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눅 7:27,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눅 7:29, 개역)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눅 7:30, 개역)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첫 번째로 광야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도시사람들에게는 농촌이라는 귀농해서 살아갈수 있는 여유의 공간도 아닌

광야라는 사막은 아예 죽음 그 자체의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철저한 단절의 단절입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 단절의 단절인 죽음의 공간에 무엇 때문에 광야에 갔더냐? 무엇을 볼려고 광야에 갔더냐?

라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눅 7:24, 개역)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눅 7:25,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눅 7:26,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바로 광야라는 단절의 단절 곧 죽음이라는 종말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없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도 없고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도 없습니다.


광야는 바로 선지자가 있는 곳입니다.

종말 속이기 때문입니다.


저런 자는 반대로 종말 속에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살기 원하는 왕궁에 있는 자입니다.


광야라는 종말에는 예술적인 감응이 있는 흔들리는 갈대라는 영화의 한 장면도 없고

부드러운 옷도 없고, 화려한 옷도 사치스러운 왕궁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광야에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거짓선지자와 복음이 아닌 가짜 메시아 사상은 어디 있겠습니까?


즉 선지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자 두 번째로 이 세대의 성향을 들추어내는 의미가 뭔지 볼까요?

첫 번째 이 세대의 성향은 광야가 아니다는 점입니다. 고로 선지자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이 광야의 선지자가 행하는 일 곧 세례를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곧 세례를 싫어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이 세례를 기뻐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매국노

일본앞잡이 바로 세리입니다.
그리고 백성으로 부터 외면 당하는 백성
곧 유대인이라는 마귀자녀로 부터 끊침바 된 주님의 자녀인 나그네입니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성전(율법)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볼때 전혀 돈 안되는 자들입니다.
즉 죽은자입니다. 저주받은자 입니다. 지옥백성입니다. 죄인들입니다.
정작 본인들이 지옥자녀이면서 말입니다.


광야라는 종말과 잘 어울리죠?
설마 화려한 옷과 사치스러운 왕궁의 사람이

광야라는 종말이 베푸는, 배치시키는 세리라는 죄인을 좋아라 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절로 거리두기가 생겨나는 거죠.


그래서 세례란
"나는 죄인이기에 단절된 부정한 자입니다.

제발 고쳐주옵소서 깨끗하게 해 주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단절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닌 의인이 뭐가 아쉬워서 세례를 받겠습니까?

이미 단절이 아닌 개방이 된 자인데
단절된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외칠 리가 없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십자가를 쳐다보겠습니까?
십자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입니다.
나 하나님께 저주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라고 십자가를 쳐다볼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교회라는 성전은 하나님께 축복받을려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여!!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 조를 드리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겁니다.

세례를 받을 이유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이유 전혀 없습니다.



세 번째로 이 세대의 사람들의 성향이 바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대한 판단을 세례요한을 통해서

이 세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서

낱낱이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금식을 하면서 즉 애곡을 하니까

같이 울기는커녕

금식을 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

미쳤다고 취급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쳤구나 세례요한 !!! 왜 쓸데 없이 광야에 우리가 가야 하며

왜 쓸데 없이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거룩의 장치, 구원의 장치들이
몇백배 몇천배나 많은데!!!


여기에 한술 더떠 예수님이라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며 하니까

즉 세례요한의 연장선상에서 즉 선지자 노선에서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반대로 일종의 피리를 불면서 춤을 추니까
먹고 마시니까


저들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들 곧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먹기를 절대로 탐하지 않고

포도주를 즐기지 않으며 즉 술취하지 않으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절대로 될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적대시 한다는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선상에 놓여졌음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거룩하고,
예수님을, 저 봐라 봐라 술쳐먹고, 저 봐라 봐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비거룩한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적대시 한다는 것

즉 예수님의 별명과 반대됨으로써

자신들이 옳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막살기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저들은 이렇게 별명을 붙여버리는 겁니다.
제대로 낚인 거죠. 덮썩 미끼를 문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무모할 정도로
오히려 지혜는 자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옳다 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옳다라고 자신들을 주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옳지않다에 놓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옳지 않다에 놓여진 그 예수님이 이런 배치성이 자신이 하심으로 인해 바로 옳았다
라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반전의 반전입니다.

반드시 맞물리도록 하시면서 말입니다.
마귀를 끌어들일줄 모르는 복음은 가짜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 마나한 소리입니다. 당연히 자기 자녀에게는 옳다함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 마나한 소리가 아주 아주 무시무시한 두렵고 떨리는 소리가 되는 겁니다.

기여이 불 속이라는 종말 속에 집어 넣어서 진위를 가려보자 라는 겁니다.
불에서 다 타 버리고 남는 것 곧 잔여물이라는 잉여만을 통해서 가려보자 라는 겁니다.
얼마나 도발적입니까? 하늘에서 준 자가 진짜로 최종적으로 남을테니 말입니다.


춘향전의 이몽룡이가 거지행세 하니까 별명을 붙였는데

그 별명이 도리어 이몽룡의 성향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겁니다.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셈입니다.


종말을 건드렸으니 뼈도 안 남을 정도로 작살이 나야할 판국이니 말입니다.

이것을 유사복음(플라톤주의:삼위일체)와 차이나는 상사원리(니체주의)라고 합니다.

유사는 이미지의 모방을 추구하기에 동일성 철학인, 진리맞냐 라는 문제를 따지고, 즉 이성주의입니다, 
학문하는 자들 곧 진리를 찾는 자들입니다.

상사는 이미지 하나로 여러 복제를 하기에 창조적인 리좀놀이가 된다는 겁니다. 즉 감각주의입니다.
시뮬라크르 놀이로써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곧 창조 맞냐 라는 문제를 따집니다. 예술가죠.

거짓의 거짓으로써 마귀를 끌여들여 새로운 창조성을 드러내니 말입니다.
곧 심판성, 단절성, 해체성 말입니다.



자 세 번째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오히려 몰라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못 보는데,

정작 알고보면 귀를 막는 식으로 눈을 막는 식으로

듣기는 소리를 못 듣도록 하는 방식으로, 벽을 세워버리는 식으로,
피리 소리가 안들리니 춤도 못 추는 거죠.

보기는 보아도 못 보도록 가로막는 방해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애곡 소리가 안들리니 같이 울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은 보고 싶어도 못 보고

듣고 싶어도 못보는

춤추고 싶어도 세례요한 쪽에서 울어 버리고

이제는 울려고 하니까 예수님 쪽에서 춤추는 식이다는 겁니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인 종말이라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네 번째는 뭔고 하니


(눅 7:26, 개역)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눅 7:27,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눅 7:28,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 보다 큰 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 보다 크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먹거나, 이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세대의 성향이다는 겁니다.


당연하겠지요

위의 첫째에서 세 번째까지의 내용 조차도 단절된 판국에
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라는

여자가 낳은 자를 알아볼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위의 세가지는 한마디로 이 네번째로 요약이 됩니다.


기호철학인지? 차이철학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차이철학(니체계열)에서는 여자를 진리로 보고 있는데

기호철학에서는 여자라는 의미는 아예 없다 라는 없음으로 취급한다는 겁니다.
아! 구조주의이군요.

둘다 같은 소리인데,

문자 라는 기호 자체가 남성성이기에 여성을 위한 언어 자체는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텅빈 공터]로써만

또는 [없음]으로만

미끄러짐의 방식으로만

부재로써 존재한다는 겁니다.

부재가 비존재인데

부재로써 존재한다? 그럼 존재한다는 말이야?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양자물리학에서도 이렇게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언어 문자는 남성의 시스템 문자이지

말랑 말랑 미끄러지는 사라지는 언어가 아니다는 겁니다.

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없는 문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큰 이가 세례요한인데

이 세례요한을 알아 볼수 있는 자가 없는 겁니다.


알았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알면 뭐합니까?

허망하게 바로 정치적인 죽음을 유도해서 바로 죽어버리는데 말입니다.


그럼 말라꼬 세례요한이 태어난 겁니까?

죽어버리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무대 배경이 되기 위해서

자신은 퍼뜩 퍼뜩 무대 뒤로 퇴장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누락 그 자체요, 없음 그 자체요 그냥 그대로 부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무대이지

나는 그 분을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선지자는 광야에서만 볼수 있습니다.

그런 광야의 선지자 자체가 종말성인데 단절의 단절인데

이 단절의 단절인 종말성 보다 더 무서운

진짜베기 종말의 실체

종말의 주체

세례요한 자신은 그저 종말의 그림자일 뿐

진짜 종말의 실체가 왔다고

바로 뒤로 빠져버리는 그 누락성을 통해서

단절의 단절이 더 심각하게 더 깊게 단절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언어라는 소통의 세계에서

남성적인 언어만이 소통될수 있는 살길이요 돈벌이요 흐름을 탈수 있는 생존의 방식인데


졸지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가 세례요한인데

이 보다 더 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남자가 낳은 자들은 이제는 다 죽었다고 복창해야 할 판국인

종말의 실체 주체 주인공이 떳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세례요한도 아이고 눈 부셔 라고 할 정도로

무대 뒤로 누락되면서 빠져버리는 겁니다.


이제 이 세대는

세례요한을 감당하는게 아니라

세례요한도 감당이 불감당인 판국에


이제는, 이 세대 사람들은,

종말 그 자체인 예수님을 감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세례요한은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사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벌벌 떨까요? 애곡할까요?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호산나 라고 춤추며 노래 할까요?


시끄럽다고 소동을 잠재울려고 경찰을 부르고 있으니 얼마나 웃깁니까?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졸지에 분노로 가득하게 만드는 겁니다. 참 기가막힌 작전입니다.
젖먹이의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마 21:8, 개역)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0,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마 21:11, 개역)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러니 오죽 시시하게 보였으면 별명 붙였겠냐 말입니다.

참 제대로 별명을 붙였습니다.

즉 별명을 붙였다는 것은

자신들과의 구별성 분리성 차별성을 말하는 겁니다.

즉 이런 예수와 짝꿍이 되지 않음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전혀 심각하게 보이지 않기에, 시시하게 봤기에 별명을 붙이는 겁니다.
도리어 판결을 당해야 할 판국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즉 자기들 스스로가 남성의 언어에 빠져서

종말을 자처하는 식입니다.

그 말 자체가 예수님을 못 알아 보았다는 증거인 겁니다.


해석 불가요 

수수께끼를 풀수 없는 겁니다.
빈 공터이니 우찌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겨우 해석한 꼬라지가 바로 별명입니다.
그러니 또 바로 미끄러지는 겁니다.
해석해 본들 바로 도망치듯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이 되니 말입니다.
상사의 원리처럼, 시뮬라크르 놀이처럼 말입니다.


차라리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친구 당하는 자리인

세리와 죄인의 자리에 놓여졌다면

수수께끼는 그야말로 아주 아주 신나는 놀이가 되는 겁니다.

죄인이 되면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석하겠다는 자체가 말려드는 겁니다.


왜!! 몰라도 됩니다. 다 알려주시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사귐입니다. 공명, 정념의 관계성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나고 즐겁고 춤이 저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호산나 호산나 라고 춤추며 노래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놀이가 되니까 신나고 즐거운 겁니다.


수수께끼가 문제가 되면 전혀 춤이 안나오는 겁니다.

즐겁지도 않고요
모르는데! 못 푸는데! 어찌 춤이 나오며 신이 나겠습니까?


답을 알게 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다 알려주는 사귐 때문에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는 즐거운 놀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우리교회의 마스코트 태민이가 다가와서

자기의 조그마한 손에 휴지조각을 움켜쥐고서는

어느 손에 있을까요? 라고 나를 상대로 해서 놀이를 하는 겁니다.


저는 참 재미없게도 다 맞춰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태민이가 다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태민이는 내가 이겼고 자기가 졌으면서도 재미있다고

"아이고!!" 하면서 뒤로 나자빠지듯이 웃고 웃는 겁니다.

얼마나 저도 기쁘던지


지가 백날 그 조그마한 손으로 "어느 손에 있게요" 라고 해도

다 알 수밖에 없도록 태민이가 다 알려주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술쇼이지만

왜 춤 출 수밖에 없고

왜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는 고 하니

그 속에서 사귐이 있었기에 기쁘고 기쁜겁니다.

그래서 다가옴이 없다면 공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귐이 없기에 즐겁지도 않는 겁니다.

백날 독자적으로 놀아본들 기쁨이 생길수가 있을까요?

태민이가 사귈려고 놀이로써 다가온거지
문제 풀어라고, 숙제하라고 온게 아니거든요. 그저 놀려고 한 겁니다.

결국 광야라는 종말의 불 속이란 사귐 때문에 있는 겁니다.

선지자란 결국 사귐 때문에 있는 겁니다.

같이 춤추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같이 애곡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서 춤을 춥니다.

아주 신났습니다.
아마 지루박!!, 트위스트, 탱고, 디스코, 손가락을 하늘로 향해 찌르고 찔렀을겁니다.


도대체 누구랑 손 잡고 춤을 추고 있기에!

오히려 불 바깥이 전혀 이 알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모습을 보고서

해석이 안되어서 뚝뚝 뚝뚝 끊어진 단절성을 격게 되는 겁니다.

불속에 타 죽어라고!! 단절 되어라고!! 집어넣었는데
도리어 불 바깥이 단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비유란 이런 식입니다. 다 통용되는 의미를 도리어 해석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을 오히려 가장 소통이 잘 되는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도록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그런 식입니다.


자 그럼 왜 광야에서 선지자를 보러 가는 겁니까?

맞습니다. 사귀기 위해서
동시에 다들 떨어뜨릴려고 단절시킴으로써 사귀는 겁니다.


니랑 내랑, 니캉 내캉 단 둘이만 놀자 라는 겁니다.

딴 놈은 떨어뜨리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순서상 어느것이 먼저가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미 경계선인 기준은 십자가라는 종말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광야란 십자가의 경계선으로써 기준 삼아 분리시키는 겁니다.

광야교회란 떨어뜨리기 입니다.



자 이 세대의 사람의 성향은 뭘까요? 다시 정리해보면,


1. 선지자가 없다. 즉 종말이 없다. 종말을 대비 할 수가 없다. 반석이 없다. 종말의 집짖기가 없다.

종말과의 사귐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종말 속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겁니다.


2. 세례를 싫어한다. 즉 이 말은 종말이 사귀고자 오는 것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미쳤냐? 십자가가 날 용서할 정도가 될려면

나는 최극도의 살인마, 강도라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 때문에 내가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이라는 인자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식인종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니 십자가라는 세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화려한 옷을 끊을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부드러운 옷을 끊을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옷이란 몸이죠.

사치스러운 왕궁의 삶을 끊을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단절 될 수 있는 능력을 붓지 않는 겁니다.

아니 그럼 말이 그렇지 누가 종말과 사귀고 싶어 합니까?
그러나 성령 곧 종말의 영을 받은 자는 사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이라는 악마성입니다. 악마의 숙주가 된 몸인 육체입니다.


3.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 이신전심의 반대 상황이다는 겁니다.


전혀 안통합니다. 물과 기름입니다. 단절성입니다.

이것은 주님 쪽에서 그렇게 오셨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을 대하는 태도를 근거로 해서 말입니다.


세레요한이 막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죽음 조차 이 세대의 성향을 한데 묶는 묶음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4. 위의 것들도 막 뒤짚어 씌우는 방식인데

이것은 아예 불가능 속의 불가능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바로 단절 속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육의 차단입니다. 영으로 태어난 분입니다.

그럼 남자의 후손은 자연스럽게 구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영적인 일에
아무리 영적으로 가면을 쓴 바리새인 곧 신앙 중의 신앙인으로 존경을 받는 자 일지라도
육의 대표성에 놓여지게 되는 기가막힌 재료로 활용이 될 뿐인 겁니다.


즉 여자의 후손에 대한 반응은 남자의 후손으로써의 반응으로써

이 세대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성향을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우짜라는 거지?
이건 뭐 어쩔수 없잖아 라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죠.

육이니까 들통날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소경이였다면 보게 됨을 당할텐데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는 말씀이 정당한 겁니다.

지혜는 자신이 하신 일로 옳다함을 받는 겁니다.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런 일방적인 선언이 맞다 라는 겁니다.

억울한게 아니라

종말 속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인데

도저히 종말 속이라는 인식이 남자의 후손에게서는 나올수 없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빈 공터의 언어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언어이기에

국어 문법에도 안 맞고,

그런 언어가 들려지면 방언이다는 겁니다. 딴나라 말이다는 거죠.
배울수도 없어요

단절로써만 통용되는 언어이기에
행함의 언어 세계에 믿음이 침투한 겁니다.

죽었구나 복창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소통의 세계인 바벨탑 언어세계에, 방언인 십자가 언어가 차단시키는 방식입니다.
육의 세계에, 영이 침략했으니 말이죠.


이것도 말이 안되죠, 단절로써만 통용되는 언어?


단절이면 단절이지, 단절인데 통용이 되는 단절이라니?
그러니 여성성을 예로 든 겁니다. 기호학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입니다.


이상 이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이 세대에 속함으로써

왜 선지자를 보러 광야에 나가지 않는지? (다른 구원의 장치들이 억수로 많음, 없다면 또 몰라)

선지자도 없고

선지자를 만날려고도 하지 않는지


그러니 당연히 세레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즉 죄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로소이다.

나는 의인이다는 거죠. (의인이 되게 하는 장치들로 넘쳐나는데 왜 구지?)

그런 세상에 우리는 갇혀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에 갇힌게 아니라
믿음이 너무 너무 많은 세상에 갇혀버린 겁니다.
구원의 장치들도 넘쳐나는 세상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써 해방케 하는 그 희년나팔 소리에

춤출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노래 부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있는데 뭘?


모조리 다 뱀의 후손인 남자의 후손 뿐이기에

여자가 낳은 자를 이 썩여있는 와중에 어찌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모래 사장에서 모래알 보다 더 작은 진주 찾기입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외쳐할 것은 오히려 이 쪽 

남자의 후손 쪽

광야의 반대 쪽인 왕궁 쪽

예수님께 별명을 붙이는 쪽

세레를 반대하는 쪽이


오히려 우리는 단절 되었습니다 라고 외쳐야 할 판국입니다.
이 억수로 많은, 수 많은 구원장치들, 믿음 장치들이 다 가짜임을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들이 단절의 단절, 종말을 외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작전 입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못하도록 소음으로만 들리도록

애곡하여도 전혀 울음이 나지 않는 노래로만 들리도록 하는


중간에 뭔가가 있어서


왜곡, 굴절이 되어버린 상황!!


이것이 바로 이 세대라는 성향인

악마성입니다.


이 악마성과 맞물려서
복음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도록 하는 방식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방식으로써

종말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철저한 섬기심입니다.
죽기까지 복종 순종하심으로써

끝까지 사랑하시는 십자가라는 기준을 세우심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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