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고에 채워지는 바울


착고에 채워지고 쇠사슬에 매이는 바울 (행 16: 6-26)



(시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행 16:6, 개역)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 16:7, 개역)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행 16:8, 개역)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행 16:9, 개역)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 16:10, 개역)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11, 개역)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행 16:12, 개역)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행 16:13, 개역)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 16:14, 개역)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 16:15, 개역) 『저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행 16:16, 개역)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행 16:17, 개역)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 16:18, 개역)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9, 개역)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행 16:20, 개역)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행 16:21, 개역)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행 16:22, 개역)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행 16:23, 개역)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개역)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행 16:25, 개역)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개역)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먼저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은 성령에 의해 가로막혀 버립니다.


여기서 아시아지역은 동양이 아니라

갈라디아지역 옆과(좌편에), 바다 건너 마케도냐 지역(우편에)의 그 중간 사이에 있습니다.
대표도시로는 에베소입니다.

가로막힌 이유는 아시아에서는 복음으로 인한 충돌이 없기 때문에 바울 죽이기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없다뇨? 복음을 증거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는데요.

믿는자가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요!!!


그것조차도 고정이 된게 아니라
성령께서 우발적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 사도바울을 족쇄 채우고자

아시아행을 가로막아 방향을 돌려 버립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쇠사슬에 몸을 매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치 이것은 마가라는 요한은 때려죽어도 데리고 가지 않고

바울이 직접 반드시 온 수발을 다 해줘야하는 약해빠진 디모데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처럼

성령이 방향성을 우발적으로 꺽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혹이 하나 더 느는 꼴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됩니다.

일부러 늑대소굴에 보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마 10:5, 개역)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7, 개역)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마 10:8, 개역)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9, 개역)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마 10:10, 개역)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마 10:11, 개역)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 10:12, 개역)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 10:13, 개역)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4,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7, 개역)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마 10:18, 개역)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 10:19, 개역)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개역)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 10:21, 개역)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 10:22, 개역)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10:23, 개역)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 10:24, 개역)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 10:25, 개역)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 10:26, 개역)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마 10:2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마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9, 개역)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30, 개역)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마 10:31, 개역)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죄인만을 데리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인만을 찾으러 가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죄가 있는 곳에만 가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최전방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로 성령께서는 이 사도바울의 방향을 확 꺽어버려서

역시나 복음의 최전선의 전투지역에 투입시키는 겁니다.


바로 역시나 유대인들의 의식이 활개치고 있는 곳입니다.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습니다.

유대인과 같은 의식은 구약으로 치면 애굽과 같은 의식입니다.
애굽에서 출 애굽해도,
광야에서 모세는 이 애굽의식을 가진 자들로부터 늘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격게 됩니다.
모세 조차도 성질부려서 바위를 두 번 치게 됩니다.
그러니 모세는 누락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 불쑥 나타나 주여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애굽나라를 멸망 시켜도 그 의식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속에서도 팽배한 겁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니
이 얼마나 뼛속까지 자리 잡은 의식입니까?
그거 주님께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계속 뺑뺑이 돌리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도바울이 방향이 꺽였다는 것은 또 죽으러 가는 곳으로 가게 되도록

방향을 트는 겁니다. 뚝뚝 끊어지는 단절입니다. 
애굽의 의식, 유대인의 의식을 수셔댈려고 간다는 겁니다.
수셔대는 본인 조차도 수셔댐을 당함을 동시에 격는 겁니다.

그러니 멀쩡한 조용한 도시가 졸지에 소동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늘 복음은 인간들의 애매한 그 경계선에 핵미사일을 터트리듯이

그 경계를 건드리는 겁니다.


복음의 적대자가 없는 아시아 쪽이 아니라
사도바울에 대해서 빠삭 하게 잘 아는 마귀의 의식이 팽배한 곳,

나타나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는 그 곳에,

성령께서는 바울을 집어넣습니다.

성령의 바울 죽이기입니다.


곧 마귀들이 벼르고 있는 곳 말입니다. 그래서 두 소욕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 됩니다.

성령이 아시아에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이라고 말입니다.

복음을 못 전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복음을 성령이 막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래서 꺽어서

(행 16:6, 현대인) 『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

(행 16:7, 현대인) 『무시아에 이른 후에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님이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행 16:8, 현대인)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


빙 둘러서 “브루기아 - 갈라디아 그리고 아시아 - 무시아 - 비두니아”로
구석 구석 복음을 전하고자 갈려고 했는데
아시아를 허락지 않음으로


바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갑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도와달라는 환상입니다. 



(행 16:10, 현대인) 『바울이 그 환상을 본 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판단하고 곧 떠날 준비를 하였다.』

(행 16:11, 현대인) 『그 길로 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곧장 사모드라게로 갔다가 다음 날 네압볼리를 거쳐』

(행 16:12, 현대인) 『빌립보로 갔다. 그 곳은 마케도니아의 첫째 가는 도시로서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거기서 머물렀다.』


그래서 곧장 마케도니아로 향했던 겁니다.


마치 발걸음도 세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처럼 (욥 31:4)

며칠 묵는 동안 루디아  라는 옷장사꾼 여인이
바울이 증거하는 말씀에 귀를 열도록 주님께서 조치하셔서 더 며칠을 묵게 됩니다.


그래서 묵는 동안 기도처를 찾는 중에 점치는 여인을 만났는데

이 점쟁이가 자꾸 따라다니면서 

사도바울의 일행을 보고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열어주는 사람들인 하나님의 종들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외치면서 졸졸 몇날 동안 따라다니니
사도바울이 결국은 그 점쟁이 여인에게 다가가 

귀신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 여자에게서 당장 나오라 라고 하니

즉시 귀신이 나오게 됩니다.



(행 16:13, 현대인) 『안식일에 우리는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음직한 성문밖 강가로 나가 거기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행 16:14, 현대인) 『그 자리에는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라는 자색 옷감 장수도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주님은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셨다.』

(행 16:15, 현대인) 『루디아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저를 참된 신자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면서 기어이 우리를 데리고 갔다.』

(행 16:16, 현대인) 『어느 날 우리가 기도처로 가다가 귀신 들린 한 여종을 만났다. 그녀는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다.』

(행 16:17, 현대인) 『여종이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이오.' 하고 외쳤다.』

(행 16:18, 현대인) 『그 여종이 여러 날동안 이렇게 외치며 성가시게 따라다니므로 바울은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여자에게서 당장 나오너라.' 하고 외쳤다. 그러자 귀신이 즉시 그 여자에게서 나왔다.』



자 이 일로 인해 이제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점쟁이 여자가 귀신이 들려 그 동안 점을 쳐서

자기의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일을 그 동안 해왔던 것인데


졸지에 귀신이 나오게 되니

더 이상 점을 치지 않게 되고, 점 치는 일을 하지 않으니 돈 벌게 되는 이익이 발생되지 않는 겁니다.
뚝 단절이 되어버렸고, 폐업 되어 해체되는 문 닫을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이익이 손해로 변했고, 생존의 넉넉함이 졸지에 궁핍으로 메마른 광야가 되어버린 겁니다.
돼지떼가 죽어버림으로 인해 예수님이 그 동네에서 쫏겨나듯이 축산업자들이 분노케 된 사건 말입니다.

그래서 그 점쟁이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일행을 고소하여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고소내용은 당연히 귀신 들린 여자 땜에 이익을 그동안 얻게 되었는데

이제는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소를 하게 되면

자신들이 미친놈 취급받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고소를 합니다.

로마사람으로써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풍습을 가지고서
백성을 선동하는 이상한 종교를 퍼트리고 다닌다고,
그런 풍습을 퍼트리고 다니니 풍기문란 죄로 집어 넣으세요 라는 식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표현으로 바뀌었습니까?
추상적인 의미들이 논리적으로 바뀐 겁니다.
이런 이성적인 것은 결국 외설성입니다.

법적으로 바뀌기 위해서 정작 본심인 저런 내용을 감추어야 먹혀드는 겁니다.


그냥 미워 죽겠습니다 집어넣어 주세요 라고 말하면
말이 안되기에 먹혀들지도 않거든요.

소통이 되는 말을 해야 거래가 성사가 되는 겁니다.
문서에 맞게 문법에 맞게 말이지요.

그것이 언어 아닙니까?

그러니 복음은 누구를 말론하고 복음은 기쁘고 즐거운 은혜 곧 희년이라는 선물을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큰 벌만 받게 됩니다.
소통의 언어이기는 커녕 뚝뚝 뚝 끊어버리는 단절의 언어요 실족케 하는 언어입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해체시키는 언어입니다.


그렇다고 안하겠습니까? 아니 안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히려 두 소욕을 제대로 또렷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년이라는 선물 자체가 소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더욱더 신나게 제대로 된 결과입니다.

맞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면 제대로 저들을 강퍅케 만듭니다.


그래서 늑대소굴에 보냄과 같다는 겁니다.

복음을 수용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반발하는 그 몸부림이 명료하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원수성을 드러내는 복음입니다.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겁니다.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입니다.

즉 졸지에 갈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두 패로 말입니다.


반드시 수용하는 루디아 라는 여인과 또 고침을 받은 귀신 나간 점쟁이와


오히려 귀신이 안들렸는데 귀신들린 점쟁이 여인을 이용해 돈벌이 하던 그 주인들의 악마성을

제대로 건드려서


확 들추어 낸 것이다는 겁니다.


자 이런 희년 곧 포로된 자 자유케 하고, 눌린자를 풀어주며, 눈먼 자를 보게하는
이 복음이 전하게 되니

마귀의 숙주들이 풀려나게 되니까

그들의 주인인 마귀가 발동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복음 증거의 핵심입니다.


마귀들의 발악입니다. 숨어있는 마귀가 드러나는 것이 복음의 진짜 목적입니다.


마귀가 발악하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사건의 목적은 바로 마귀라는 주인을 건드리는 겁니다.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 3:27,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 15:1, 개역)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요 18:12, 개역)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현대인들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런데 제목 보세요 도리어 누가 결박 당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 일로 그의 일행 모두와 함께 결박 당합니다.


본인도 결박 당하는 주제에

우찌 남을 그 결박에서 풀어주겠습니까? 자유케 하며 희년의 은혜를 주겠습니까?

본인이 시험 당하는 판국에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역행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결박을 당하니

빌라도 손에 죽게 되는 죽음을 격게 되니

다들 비웃습니다.


아니 구원 축에도 못 끼이는 전혀 구원이 아닌

구원 근처에도 못가는 웃끼는 구원

말도 안되는 구원

어리석은 구원

미련한 구원

이게 무슨 구원이꼬?

도로 니가 구원이 되어야 하지 않니?


야 신입 예수야! 남 구원 생각말고 니나 구원 받아야 아니 되겠니!!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 19:24, 개역)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것이 바로 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저희를 사하여 달라는 역설적인 구원입니다.

아니 끝까지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 합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언어 입니다. 오직 한 인물의 독단적인 편파적 언어 입니다.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예수님께서 도리어 저들의 구원을 죄용서함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이 구원받았냐 못받았냐? 지옥가냐 안가냐? 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반대로 그 정도로 엉터리 구원관을 마귀가 제대로 심어버린 숙주의 형태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쥐 뿔도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그야 말로 처음부터 원래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현재도 그랬고,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뿐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사도바울 일행도 동일합니다.

결국 이들 조차도 주님의 숙주로써만 움직이고 배치당하는 장기알 뿐이지

그들이 주체가 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욥기에서처럼

두 주인의 내기 싸움에 놓여진 장기알로써 주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빗금친 주체 는 바로 빈공터입니다.


예수님은 이 빗금친 주체라는 빈공터를 다 이루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완료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재창조 하십니다.


기존의 성전재료들도 다 새롭게 재배치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너지고 해체되어 다시 재조립이 되는 겁니다.


전혀 다른 마치 부활한 몸처럼

베드로가 봤던 그 예수님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얼굴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빗금친 주체 또는 대상 소문자 a가 되는 이 십자가를

저들에게 던지면

비로소 숨어있던 마귀들이 발악을 하면서 드러나는 겁니다.
십자가는 소통용이 아니라,
단절용 곧 경계선을 그어 갈라지게 하는

두 소욕의 선을 긋는 겁니다.
그러니 가족이 졸지에 원수지간이 되는 거죠.


마귀 숙주들과 그 주인이 마귀가 비로소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결박시키기입니다. 사도바울을 결박시키는 겁니다.


아니 결박을 풀어 자유케 하는 자들이 도리어 결박을 당하고


남 구원 한다면서 정작 자기는 구원 못하냐 라고 비아냥 거릴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그 십자가의 지헤는


도리어 자유는커녕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식으로 보입니다만


바로 이것이 창조적역행(어리석은 십자가) 바로 참지혜이다는 겁니다.

이 방식이 아니면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자 이렇기 때문에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모든 사람들이

내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니까

어떻게 식인종이 되느냐? 율법을 어길수 없다.
난 식인종 괴물이 되기 싫어 라고 한 자는

다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않습니다.

희년복음이 아니라 실족 복음이니 말입니다.


여기에 더 뻔뻔스럽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왜 너희도 가지 왜? 라고 묻고 있습니다.


제자라고 해서 개인사정 안 봐주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니 결박 당하는 일만 격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결박을 통해서 또 누군가를 살릴려고 했던 겁니다.


바울이 자꾸 죽어나가는 일을 격는 것이

도리어 반대로 누군가가 자꾸 구원받아 살아나가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내 죽을께 너 살아라입니다.


참 죽을 맛일 겁니다만 바울은 오히려 신나는 겁니다.

이렇게 미래를 하나 하나 신나는 종말의 창조를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애굽의식, 유대인의식과 다른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소유하고자하는 성령의 소유성입니다.
십자가의 의식은 나 죽을께 너 살아라 입니다.
그러니 그 살림을 당하는 자는 생존하는게 아니라, 내 대신 죽으신분에 꼿혀 살게 되는 겁니다.
너는 내 운명이 되어버리니, 에수님의 운명이 졸지에 되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착고에 채워짐을 당하고, 우리는 나음을 입고>

이것을 이중중첩 시켜보면
바로 죄수복을 입고서, 자유하는 자, 막 죽는자. 막사는 자 입니다.

(엡 5:30, 개역)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 5:31, 개역)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개역)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니 이 비밀이 크도다 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결국은 다 알게 되니

이제는 사단의 가시까지 푹 심어버리는 겁니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약한 것이 강함이요, 이미 항상 죄인 되게(결박) 하시는 새창조가 은혜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주님이 마련한 그 은혜의 밥상을 막누리고

주님이 부시는 피리에 그냥 몸을 실어서 저절로 춤추게 된다는 겁니다.

누가 그것을 숙제로 춤추겠습니까? 숙제는 오로지 예수님만의 몫입니다.

뒷처리는 그냥 하 e ~~ 카 가 다 알아서 하듯이

성령께서 뒷처리를 다 하시겠다는 겁니다.


가제트 형사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무익한 종일 뿐인데

뒷처리를 성령께서 다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 혜택만을 누린다는 겁니다.
저절로 춤 출 수 밖에 기쁨이 넘치게 되니
우물가의 여인처럼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좋아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나의 죄를 아는 분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개고생은 주님만이 다 알아서 하신 것임을 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숙제 완성입니다.


바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숙제 한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성령이 막으면 막히고

착고를 채우면 채움당하는 것이고

들어가자 마자 풀리면 풀림당하면 되는 것이고

3초만에 풀려나니
착고에 채움 당한게 맞는지 아닌지? 쇠사슬에 몸이 매인지 안매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적은 있는 겁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장난하냐

난 새 됐어 완전히 새 됐어


왜 이 카시는 겁니까?


마귀라는 주인의 외설성 보다 더 더 더 나은 외설성으로써


더 어리석게 결박당하시면서 까지

더 솨사슬에 매이면서 까지

더 십자가의 저주에 못 박히시면서 까지


이 더 나은 순종인 도착성인 외설적인 히스테리를 완성하시고자 했던 겁니다.

즉 마귀 때문입니다.


그래서 늑탈하는 도둑이라고 표현 한 겁니다.


캬 기가막힌 히스테리적인 표현 아닙니까?


히스테리란 포착이 안된다는 겁니다. 이랬다 저랬다.

잡았다 하면 놓쳐버리는 미끄러지는 빈 터 이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족족 모조리 다 실족케 되어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저 주님 쪽에서 다가오심 밖에 없는 겁니다.

행함이라는 외설 보다 더 더 더 외설적인 사귐입니다.


그 방식이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인

결박 당하심의 방식이요

쇠사슬에 매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구원 방식인 겁니다.


바울의 일행이 결박 당함으로써 누군가 나음(자유)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럼 바울이 예수님 입니까?


본인들도 도리어 믿어야 할 판국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았을 뿐입니다.
바울 일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게 없습니다.

믿은것도 없었고, 행한 것도 없었고, 그저 막산 것 밖에 없습니다.
막살수 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막사는게 아니라, 
신령과 진정을 다해서 막살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이미 항상 죄인으로써,

예수의 영이 입은 자들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두 소욕의 두 주인을 드러내게 하시는 성령으로 인한,

감추인 보물인 어리석은 참지혜를 드러내는 십자가라는 창조입니다.



(고후 13:4, 개역)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5, 개역)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6, 개역)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고후 13:7, 개역)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후 13:8, 개역)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9, 개역)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주님 !  우리를 약하게 만드심이 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강한 자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결박하던 자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남아 있는 것은 이미 항상 죄인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 뿐이였습니다.


예수님도 정죄 하시지 않겠다는 그 여인을 죄인 중의 괴수로써 새롭게 창조하셨듯이


저희들 이 십자가의 지혜에 늘 수시로 구멍 뚫혀 빈 터로 남겨주옵소서.


죄인(아무도 해석할 길이 없는 수수께끼로써의 새죄인)으로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할례를 지키는 바울 (행 16: 1- 5)

2013/08/23 18:31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할례를 지키는 바울 (행 16: 1- 5)


할례를 범했다가 또 다시 할례를 지키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바울???



(행 16:1, 개역)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행 16:2, 개역)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행 16:3, 개역)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4, 개역)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행 16:5, 개역)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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