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하나님 언니! 사과 하고 가세요 (눅 8: 1-18)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씨앗 비유


(눅 8:1, 개역)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 8:2, 개역)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눅 8:3, 개역)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4, 개역)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8:5, 개역)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눅 8:6, 개역)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7, 개역)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눅 8: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8:9, 개역)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눅 8:10, 개역)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눅 8:11, 개역)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2, 개역)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 8:13, 개역)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 8:14, 개역)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눅 8:15, 개역)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16,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7, 개역)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하정우가 주연한 더 테러 라이브 라는 영화를 보면

범인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그러면 자수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의 죄는 결국 대통령과 연관되기에 대통령만 사과하면 자신의 죄는 정당화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 때문이다는 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범인의 시선이 아주 정확했다고 봅니다.

마귀는 맞는 말만 할 뿐입니다.

즉 모든 부조리의 배후에서는 바로 보이지 않는 손 곧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숨어 있지 말고 빨랑 나오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랑 대화 좀 하자 

도대체 왜 이런 부조리를 양산하고 왜 정당화 하는지

그 이유나 좀 들어보자

나도 범인이 되고 싶어서 범인이 된게 아니라

바로 너 하나님이 날 이렇게 범인으로 만들고 있으니

왜 이런식으로 몰고가는지를 그 이유나 들어보자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범인은 이 구조를 늦게서야 제대로 파악한 겁니다.


세상은 왜?

부익부 빈익빈으로 흘러가는가!


세상은 왜?

잘난 놈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 대로 사는가?


세상은 왜?

돈 없는 사람을 싫어하는가?


세상은 왜?

유전 무죄, 무전 유죄 !!!


세상은 왜?

열심히 선하게 하는데 뒤통수만 치는가?


세상은 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기는 가?



이 모든 부조리의 배경 뒤에는 바로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왜 악을 허용하는가?


왜 이렇게 부조리하는데 왜 입다물고 있느냐 말입니다.


제일 마지막 세상은 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다 빼앗기리라 라는 것이 하이라이트 죠. 


씨앗비유 씨뿌리는 비유는

이미 그 자체가 부조리입니다.

사랑 하는 자만 사랑하겠다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양보 없는 전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 안과 예수 밖의 전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안 과 밖의 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인물에 의해

안 과 밖의 경계선이 그어지는 겁니다.


뭘 믿고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 범인의 외설성 곧 자신의 억울함을 대통령 사과, 하나님이 사과만 하면

자수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거짓말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다 아는 사실에 감독은 왜 시선을 응시시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만약 그 범인이 당신의 입장이라면 하는 점이다는 겁니다.


적어도 범인과의 환경과 멀다면, 이 아나운서 곧 중간에 낑겨버린
이 주인공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겁니다.

평상시 늘 떠들어대는 정의 정의 라고 울부짖으면서 그 말로 밥벌이를 했다는

그 주인공의 입장이 당신의 입장이라면
과연 그것이 동떨어진 간격이 먼, 극과 극인 상황일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구조에 관람객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유익관계가 모든 인간의 관계이니까 말입니다.


그 속에서도 부조리의 구조인데

이 부조리의 구조에 범인은 그 경계선 삼팔선에 툭툭 건드리는 겁니다.

범인도 이런 판국인데 말입니다.


기득권자가 계속 더 가질려고 하는 성향구조 때문에

비기득권자는 계속 더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결국 같은 기득권이 되어야만 그 부조리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아니 부조리에서 벗어나는게 아니라 부조리를 이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부조리구조에서는 가해자만 있을 뿐 피해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피해자 라고 우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사과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수수께끼 의문의 증서에 답을 제시하는 방식이

오늘 본문 예수님의 씨앗 비유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 부조리에 대한 답은 한 여인은 비로소 알고

예수님께 자신의 머리로 발을 씻기면 입맞춥니다.


여기에 정의사회실천운동본부 원장 바리새인은 어떻게 부조리의 원천인 죄인을

예수님은 믿음이 크다. 너 구원받았다. 라고


마치 기준인냥 내세우면서


베드로 너, 내가 들어올 때 이 여인처럼 발에 입맞추었냐?


베드로 너, 내가 들어올 때 이 여인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씻었으냐?


베드로 너, 세상은 왜? 내가 들어 올 때 이 여인처럼 나의 온 몸을 감람유로 씻으면서 영접했는가?  

라고 되묻고 있는 겁니다.



단언컨대!!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죄인입니다 라고 예수님이 외치는 소리에


비로소 마귀 바리새인은 선지자 맞긴 맞어 라고 의문을 던지는 겁니다.
내가 알고있는 선지자기준에 영 아니올시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렇게 외칩니다.
잠시만요, 예수님 언니, 내 머리카락으로 발 좀 씻기고 들어가실께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을 예수님은 기념하는 겁니다.


참! 둘 다, 가관입니다.


둘이 뭐하는 짖을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장례 치르는 예행연습을 미리 앞당겨서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런 행동을 한 여인을 예수님은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기념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행동 행함  곧 믿음인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조리 없애라, 부조리를 인정하라가 아니라


오히려 부조리의 부조리로 더 이중화 시키고

부조리를 사과하거나 부조리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는게 아니라


부조리를 더욱더 확산시키고 부조리를 더욱더 부조리 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비유인 씨뿌리는 비유이다는 겁니다.


즉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워하는 자는 때려죽어도 미워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십자가의 용서를 받은 자는 무슨 짖을 해도 사랑받습니다.

이미 사랑하기 작정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막사는 자유가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상대적인 마귀 때문입니다.

마귀는 무조건 댕팡 뒤통수 얻어맞는 것 뿐입니다.


즉 십자가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 자는 무슨 짖을 해도 미움 받습니다.

이미 미워하기로 작정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착하고 선하고 평생을 걸쳐 죄한번 안 짖고 선한 짖만 골라 골라서 해도 지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막살지 못하는 겁니다.


우와 이것 보다 부조리한 것이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이것보다 모순적인게 있으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다 더 명료한 사랑

완벽한 죄인에 대한 용서의 피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그러니 이 양쪽의 상황을 제대로 보여주는 중간에 낑긴 성도가 아니면

이 여인이 아니면

두 소욕을, 두 부조리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겁니다.


단언컨대 이 여인보다 이 보다 더 완벽한 죄인은 없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다 미워하는 이 여인이 용서 받았다면

이 보다 명료한 사랑이 없는 겁니다.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는 사랑이 증명이 된 겁니다.



자 이런 의미로 서두를 던져 놓고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눅 8:1, 개역)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 8:2, 개역)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눅 8:3, 개역)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4, 개역)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의도적으로 여인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1장에 의도적으로 다섯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서 언급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남자의 족보에, 유대인은 여인을 족보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극도로 높입니다. 이웃환대법 약자보호법 시형제결혼법 등등이 율법이기에 율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도 극도로 여성을 높이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섯여인을 여인이 들어갈수 없는 남자의 족보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부조리한 남자족보 유대인 족보에

더 더 더 부조리하게도 이 여인 다섯으로 인해

남자를 모조리 누락시켜 버린다는 점입니다.


강박적(남성) 계보의 외설성에

더 심한 히스테리 계보의 외설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심지어 다윗까지 빼버리는 겁니다.
머슴아 다 누락입니다.
다윗이든 모세든 엘리야이든 누구든 다 말입니다.
지금 누락 되어야 할 판국에

사과 하고 가세요 라고 하니
지금 전체 판대기인 종말구조를 모르고

자신의 개인종말만 자꾸 따지는 겁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아버지께 버림받는 판국에?
예수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고 하는 판국에?

내 종말 땜에 사과하라고?
제사가 순종보다 우선이라고?
번제가 긍휼보다 우선이라고?
먼저 사과하라고?

(막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결국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의 핵심은 다윗빼기입니다.
다윗 탈락이면 다 탈락인 셈입니다.
문자적인 다윗의 자손만 기다리는 판국에 다윗이 탈락이면 다 탈락인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도 마태는 유대인에게 정면 충돌 즉 전면전인 전쟁을 선포하는 겁니다.


딸랑 한명 사도 마태가 이 다섯여자의 족보인 예수님 딸랑 한명만으로 들이댑니다.

유대 전체 역사와 그들 전부를 놓고 전쟁을 펼치고 있으니

이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벌릴수가 없는 겁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일까요?


이 영화의 범인처럼? 부조리를 사과하라는 차원입니까?

아니지요? 그 반대죠.


유대인 너희들은 충분히 부조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어설픈 부조리가 오히려 진짜 충분한 부조리 앞에서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걸림이 되는 이유는 충분히 걸림돌이 되지 못한
어설픈 부조리를 고발하는 차원입니다.
즉 전쟁의 거룩성을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은 무시한 겁니다.


그러니 그 걸림돌로써 이 여인 다섯명이 기록이 됩니다.

그 믿음이라는 걸림돌에 의해 태어난 자

이 다섯여인의 특징이 부조리의 충분성입니다.
믿음이라는 부조리의 충만성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너희들의 평생 걸림돌로써 작용케 된다는 겁니다. 
얼마나 충만합니까? 평생 ~~~~~


우와 마태 무섭죠? 완전히 저들의 마음판에 십자가를 빼도 못하도록 제대로 박아버린 겁니다.
영원한 걸림돌을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참예한 전쟁은 바로 이런 전쟁이였습니다.

신약의 성령의 전쟁입니다.


마태는 초장부터 족보 곧 계보학을 건드렸으니 말입니다. 처음자리 말입니다.


너희들이 기득권을 쥐어놓고서는

충분히 외설적이지 못했다.

어설프게 외설적이였다는 겁니다.


즉 사랑이 없었다는 겁니다.

껍데기 의문의 법인 율법 지키는데 정신팔렸다는 겁니다.

자기 구원이 우상화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마태는 족보로 복음을 시작해서 유대전체 역사에 시비를 걸어서

제대로된 걸림돌, 부딧히는 돌, 거치는 반석을 박아놓고서는

퇴장해 버리는 겁니다.


이 지뢰밭을 유대인들은 무슨수로 제거하겠습니까?

이 보다 더 부조리 할 수 없다 라는 영화제목처럼


뱀 달라고 해서 뱀주는 부모 어디있으며?

전갈 독 달라고 해서 전갈 독 주는 부모 어디있느냐?


하물며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성령이라는 좋은 것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좋은 것으로 보이질 않으니, 십자가의 영이 거치는 음식처럼

박한 식물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살과 피가 박한식물이요 거친 음식이 되듯이 말입니다.


좋은 것 분명히 주었습니다.

줘도 못 먹는 거죠.



그러니 두 소욕의 싸움을 제대로 펼치는 겁니다. 양보 없는 전쟁 맞지요.


여전히 유대인과 지난 시간의 선지자 맞아? 라고 외치는 바리새인과

모든 인간의 성향은


이 구조에서 드러나기를 어설픈 부조리를 정당화하고 합법화 합리화 한다는 겁니다.


그거 벗겨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더 역설적이게 더 더 더 심한 부조리가 오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충분성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이런 율법의 부조리보다 더 심한 부조리로 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이것을 에로스 즉 막장드라마의 사랑입니다.



이 부조리 사랑 때문에

경찰청장의 귀를 구멍내며 터트리고

다리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시민을 붕괴시켜 죽여버리고

억울하게 테러범인과 대통령 사이에 중간에 낑긴 주인공 아나운서가 배치되고


이 사랑 때문에


빌라도 손에 죽어서 제사 제물에 유대인 피가 묻게 되며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억울하게 죽게 되니 도대체 저사람들은 무슨 죄이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본인 조차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아니 누가 피해자냐? 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이시고자 한 배치물인데 말입니다.


나 예수도 하나님 손에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그게 제사 참제사 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 손에 죽으러 왔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런데 이것을 씨뿌리는 비유로써 즉 성적인 에로스의 욕망으로써 지금 나열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밭 되자? 라는 소리는 헛소리 구라죠.

주님께서 씨 뿌림으로써 그 땅의 감추어진 속성을 드러내더라 라는 겁니다.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복음이 말입니다.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렸는데

복음을 받고서도 사랑으로 안 보고 유익의 손익타산으로 따지는 자는

길가에 뿌린 겁니다. 즉 자기 원래 주인인 전남편 마귀가 와서 그 씨앗을 거두어 가버리는 겁니다.


복음을 받고서도 사랑받는 것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자는 역시나 손익타산을 따지기에

얼마 못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해 죽게 되는 겁니다. 돌짝밭이라는 속성이 드러났기에

계속 공급되는 습기 촉촉한 사랑을 매번 손익을 따지기고만 있기에 뿌리가 안내려지는 겁니다.


그 다음 복음을 받고서도 가시 곧 걱정 근심이 함께 자라나기에

뿌리가 아닌 반대로 위로 뻗어나가질 못하는 겁니다. 역시나 사귐의 관계성을 묻는 겁니다.

가시와 여러 잡초들을 외부에서 뽑아주질 않는 겁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 그 당시의 농작법이지만

본인 자체가 걱정 근심을 맹글어 걱정 하기에 함께 크고 있으니

위로 뻗어나갈수가 있겠습니까?



그 다음 복음을 받은 자는 무조건 이유없이 사랑받았기에

이유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하기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이것이 처음사랑입니다. 처음자리였던 겁니다. 빈공간 여성성입니다. 즉 창조성입니다. 생산성, 충분성.


처음자리에서 이미 결정난 겁니다.

아무 이유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목숨을 내어준 겁니다.

전부 다 준 것이고 전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손익관계의 유익을 왜 자꾸 따지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향유를 부인 여인과 상대적인 대조적 인물들인 남정네들
곧 화내는 제자들, 의심하는 바리새인들, 가난한자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이 대조적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자꾸 비싼 향유 비싼 향유 그것을 자꾸 따지는 겁니다.
꼬투리 잡는 겁니다.


안비싸다는 조건이 맞아야, 사랑답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조건 갖추면 꼬투리 안잡을까요? 어차피 잡습니다.


정 비싸다면 땅에 1초만에 허비하지 말고, 몇천만원 허공에 날려버리지 말고

가난한 자에 주는 것이 합당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게 합당할까요?


그것이 외설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위선을 벗겨버리기 위해서

더 더 더 위선적으로 죽음을 기념화 하는

살인을 페스티발 축제와 하는

엽기적인 행위 곧 믿음이라는 외설성 앞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드러내도록 더 거짓으로써 

저들의 악마성을 드러내도록 더 바알 적으로 비추이도록 행동하시는 겁니다.
충분히 외설적이게 말입니다.

저들의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을 정도로 냉소적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비유 보다 차갑고 냉정하고 냉소적이며 무서운 비유는 없는 겁니다.

철저한 단절이 아니면,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아먹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몰라서 몇 번이고 묻고,

몇 번이고 이야기 해줘도 모릅니다.


귀 있는 자만 듣고 눈 있는 자만 듣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철저한 단절성을 말하는 겁니다.

지식으로 알아봤자 소용없습니다. 사건이 닥치면 도루묵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 철저한 단절성에 놓여져야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 귀 없습니다. 귀머거리입니다.

맞습니다 저 눈 없습니다. 소경입니다.


주여 고쳐주옵소서 


단절성 할례입니다.


새 귀와 새 눈을 십자가의 피로 새롭게 지음받은 자 만이 듣고 보는 겁니다.


즉 소유성입니다.


철저하게 두 소욕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백날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 무슨 뚱딴지 요술망치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처럼


어떻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겁니까?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씨앗, 곧 도깨비 방망이, 십자가, 부조리 비유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이유가 없는데, 조건이 없는데 자꾸 조건을 찾겠다고

조건을 정당화 하겠다는 것 자체가 악마적인 겁니다. 이게 성화론이지요.
조건 자체가 없는 것이 사랑이니까, 이 보다 더 한 부조리 적인게 없습니다.

마귀는 그래서 이 십자가 땜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뿌득뿌득 이빨을 가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아무조건 없이 용서하니까

성화론자들이 다시는 죄 짖지 말라고 했으니
맘대로 살면 안된다고 또 조건을 거는 겁니다.


만약 다시 죄 지으면 또 돌삐 들려고 할껀가요?

또 바닥에 쓱쓱 적어야 합니까?

마귀의 세계에서는 무조건이라는 의미가 뭔지모르기에

아니 적개심을 품고 있기에 반드시 조건화 즉 교리화 합니다.
법 없이는 자신을 통재 못하니까 괴물로 변하는 자신을 견딜수가 없기에

여전히 자기만을 쳐다보겠다는 심뽀입니다.

즉 이것이 선악적인 겁니다. 마귀는 때려죽어도 선악만 따지는 겁니다.

원인이 없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무조건이면 절대로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라는 원인 없는 결과, 빈공터, 무조건에
이유 없이 그들은 자기를 그 빈공터를 매울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빈 보좌를 견딜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아니면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질 않습니다.
조건이 아예 없는 사랑이기에 얼마나 외설적인지를
마귀가 돌아버리는 겁니다.
마귀의 심뽀는 또 댓구를 그럼 마음대로 살아라는 말인가?

방종을 정당화하면 개판되는데?


기껏 생각한다는게 그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누가 방종하래? 이미 방종인데?

누가 막살래? 이미 막살고 있으니 그 딴 소리하고 있는데

막사니까 그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용암이 불쑥 나타나 나의 다리를 녹이면서 지나가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온 몸이 쭈뼛 쭈뼛할 정도로 싸늘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큰 감격으로 왜 오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벼락 맞아 죽어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진짜 부조리한 것은 내가 선악을 알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자꾸 하나님의 편에 서서 판단하겠다는 그 자체가 부조리이다는 겁니다.

그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것은 더 심한 부조리인 십자가 뿐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구원용이 아니라 심판용입니다. 부조리의 부조리입니다.

그래야 달려듭니다. 그래야 빠득 빠득 덤벼들고 죽일려고 합니다.

내 속에 이렇게도 살해 의지가 가득한 줄 미쳐 몰랐었다 라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할 정도가

자신을 극도로 미워해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고픈 정도로

자신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정도의 그 악마성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부조리는 부조리가 아닙니다.
나의 부조리 보다 더한 더 나은 부조리가 십자가입니다.

부조리극의 대표주자인 혹부리 영감과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아닙니까?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던 것도 빼앗기는 방식


그것이 다 도깨비 방망이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도깨비 방망이에게 사과 하고 가라는 겁니다.


잠시만요 도깨비 방망이 사과 하고 가실께요?

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 땅의 속성들은 다 이것만 요구하는 겁니다.

날 구원 안해도 괜찮다.

나 지옥 보내도 괜찮다.


다만 그렇게 날 지옥으로 보내는 그 하나님

나에게 사과 한마디만 해 달라


이것이 마귀와 그 숙주인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즉 주님이 만든적이 없는 저들의 처음자리인 선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롭게 이 처음자리를 십자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십자가에서 태어나지 않는 자는 맨날 평생을 살아도 죽어서 지옥에 가도

맨날 사과하라 사과하라 라고만 외치는 겁니다.


도로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인 가해자 주제에


끝까지 지옥에 가서도 피해자 노릇을 하는 겁니다.


과연 피해자 맞을까요?


그래서 잠시만요, 하나님 언니, 사과 하고 가세요 라고 요구할때에

이 말도 안되는 외설성에, 말도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강요된 선택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세상에서 이 말도 못하냐 라고 울부짖을 때에


영화에서는 때려죽어도 안 나옵니다만


성경에서는 그 하나님 진짜로 내려 오십니다.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눈이 어두워서 못보게 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처럼

숨어있는냥

분명히 보이는데 안보이는 잠행자

분명 있으면서도 없고, 분명 없는데도 있는 그런 잠행자처럼


진짜로 와서


여전히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잠행자처럼

무슨소리인지 모르고

보아도 그것이 보고서도 안보이듯이 뭔지 모르고

들어도 그것이 듣고서도 믄 소리인지 전혀 모르는


그래서 십자가가 도통 뭔지를 모르는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십자가 형 집행을 하고서도

전혀 그것이 뭔지 모르는


그런 수수께끼로써


진짜로 왔다가 가 버리는 겁니다.



이제 힐문 할 수가 없습니다.

직접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왔고

너만 모르고 다 아는 식으로 내려왔고


사과하라는 소리에 사과는 할 필요 없이

아예 그 부조리에 자신도 하나님 손에 버림 받도록

내어주신바 된 겁니다.


바로 저런 죄 값을 대신 치르실려고 말입니다.



이제는 이 십자가는 땅의 속성

인간의 속성

악마의 속성


모든 속성이 이 십자가에서 다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만요, 하나님 언니, 사과하세요 라고 할 판국이 아니라

거꾸로 제발 용서해 주세요 라는


역설적인 부조리를 본인의 입에서 외쳐야 할 판국에 놓인 겁니다.


태클걸어 사과하고 가라고 할 판국이 아닙니다.

감히 지금 수천볼트의 전기가 흐르고 있는 판국에 다리걸어서
전기 언니!! 사과하고 가세요 라고 하는 미친놈 없잖아요
그 다리 전기에 한번 감전 당해 봐야 알랑가 몰라?


심판의 불에게 태클걸어, 종말의 심판 언니! 사과하고 가세요?


감히 수천온도의 용암에게 잠시만요 용암언니! 사과하고 가세요 라고 말하는 미친놈이 없지 않습니까?
기여이 사과하고 가라고 다리 걸려고 내어논들 녹습니다

녹아 ~~~스스륵 조용하게 녹습니다. 녹아

주변의 바위 산 돌들도 철 쇳덩어리도 다 녹는 것을 심각하게 못보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니 자꾸 어설픈 부조리를 때문에 다리녹아 버림 판국에 그 딴짖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냥 제대로 녹아져서 다 사라져 봐야 다시는 그 짖을 안하는 겁니다.


진짜 지혜로운 자는 그 심판성을 미리 앞당겨 체험하는 자입니다.

그 단절성을 미리 제대로 격는 겁니다.

제대로 된 부조리를 미리 앞당겨서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의 3가지 비유 마태복음 25장입니다.


어설픈 외설성(부조리)이 아닌

진짜 제대로 된 외설성(부조리)


아직 덜 당황해서 그런 겁니다.

제대로 당황해야만 그 심각성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다짜고짜 향유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장사치르는 의식을 벌리는 겁니다.

입맞추고 발에 뽀뽀하고 껴안고 머리로 발을 씻기고

향유목욕시키고 

이 얼마나 에로스적인 외설 아닙니까?


단언컨대!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에로스입니다.


예수님 계보에 기록된 다섯여인

죽은태 이자 열국의 어마이 사래의 계보 세계라


시아버지 유다의 아내인 며느리 다말

이방여자 룻
12정탐꾼을 숨긴 기생 라합
우리야 장군의 아내인 다윗의 처 이름 뭐더라?

남자를 알지 못하면서 임신하게 된 동정녀 마리아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씨앗 없는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육이라는 부조리에 더 심각하게 부조리한 씨없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데 어떻게 믿음이 됩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용서받습니까?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꼬추짤린 할례 족보입니다. 십자가 족보입니다.

짤렸는데 무슨 개방입니까? 단절이지!!

꼬추 손으로 잘랐냐 안짤랐냐 라는 꼬추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유일한 전복적 사고 말입니다. 전도시키는 십자가 입니다.

개방은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옮겨가겠다는 신체라는 몸을 시공간화 하겠다는 겁니다.

반대로 단절은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옮겨가는 겁니다. 끊어졌는데 더 생산적이다는 겁니다.
죽은자와 방불한 자, 죽은태, 

이들이 죽은자 같으나 산자로써 더 나은 생산력을 보여주더라 라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의 족보입니다.

종말 속에서의 새 생명인 십자가의 충만 말입니다.
그러니 도리어 이 예수님에 의해서 씨앗뿌림 당해 들통나야할 판국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생산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십자가만을 유일한 생명으로 보기에
십자가만 충만케 하겠다는 겁니다. 완전 피 범벅 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는 어설픈 부조리의 인간의 욕망이 아닌

제대로 된 부조리인 외설성인 사랑 곧 성적인 에로스 욕망을 드러내는 겁니다.


즉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을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믿음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보다 더 외설적인 없습니다.


어설프게 똥폼 잡는 식으로 율법 지키겠다는둥,

안식 지키겠다는 둥,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둥,


등등의 것들을 내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뭐 7번 용서하겠다고?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까?

숫자를 세아리고

용서라는 말을 자꾸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자체가


바로 육의 속성입니다.

아마 7번 남을 용서한 자는 억만번 용서를 해도 만족 못합니다.

왜냐?

결국은 예수님이 최종 경쟁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최종 경쟁자가 없어져야

자신의 7번 용서가 의미가 있을테니 말이지요.


이런 악마성을 오늘날 교회가 정당화하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뭐 개방하겠다굽쇼? 솔직하게 돈 달라는 소리를 왜 뒤트는지?

뭐 안 막살겠다 굽쇼? 안 막살테니 돈 달라는 소리 아닙니까?


여전히 왜 지옥에 가야만 할 수 밖에 없는 이 몸에 갇혀있는가를 모르고

그 갇힌 몸에 대조적인 예수님의 몸이 왜 이 땅에 왜 왔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온 겁니다.


쳐다보라는 겁니다. 

개방을 쳐다보고

저들은 다 막살아도 나는 절대로 안막살겠습니다 라는 자신을 다짐을 쳐다볼게 아니라,


그런 어설픈 것, 모호한 것, 사기치는 것, 자꾸 내놓지 말고,

그냥 진짜배기를 보라는 겁니다.


(요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안 쳐다본다는 것은 이미 심판 받았기에 벌써 결정난 사항이라는 겁니다.

너무 너무 자기의 것을 쳐다볼게 많기에 시험에 든 겁니다.


백날 쳐다보세요 미쁜게 단 한 개라도 있는가?

아직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 것들이 자기 주변에 너무 너무 많아서

그거 쳐다볼 시간도 없을 정도로 스케줄이 꽉 잡혀 있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딴 거 볼게 너무 많아서 볼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돌짝밭 가시밭 길가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7번 용서도 할 줄 알고

가난한 자에게 비싼 향유 팔아 나누어줄주 알고

이웃 사랑할 줄 알고

기도 할줄 알고

금식할줄 알고

회개 할줄 알고

예배 찬양 봉사 할줄 알고


그러니 돌짝밭 가시밭 길가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 있는 것 다 빼앗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최종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미워서 그런 짖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본인이 자꾸 사랑할려고 다가가니까 그런 짖을 하는 겁니다.


회개 할 필요가 없는

회개를 포기하는 회개가 다가오면

그냥 쳐다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비유는 비밀입니다.

니캉 내캉 우리 둘만 알자 라는 비밀언어요

딴 사람은 모르는 사귀만의 관계성언어입니다.

십자가의 언어는 모르도록 하는 방언이지

알도록 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개방의 언어가 아닌

단절의 언어로써


이 비밀을 더욱더 비밀화 합니다.
단절입니다. 못 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 아는 비밀이 무슨 비밀입니까?


































선지자 맞아? (눅 7:36-50)

2013/08/29 09:4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선지자 맞아? (눅 7:36-50)



단언컨데!!  이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죄인 입니다.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4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눅 7:41, 개역)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눅 7:50, 개역)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의 특징은 어떻게 하면 소통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은 소통의 달인이며, 사귐의 달인이며, 이웃사랑의 달인들 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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