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의 어머니며, 나의 동생 이냐? (눅 8:16-21)



(눅 8:16,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7, 개역)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눅 8:19, 개역)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눅 8:20, 개역)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눅 8: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마 12:46, 개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 12:47, 개역)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8, 개역)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마 12:49, 개역)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마 12:50, 개역)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인간이란 일단 육의 굴레에서 못 벗어납니다.

만약 벗어난다면 그것은 육의 관계와는 이제 무관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일이 없습니다.
(자 그럼 죽음을 미리 앞당겨 봅시다)


불교에서도 또는 사상가들에게서도 소위 출가라는 의미가
이런 육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함입니다.
왜 굳이 그 굴레를 벗어나고파 할까요?

그 만큼 신경이 쓰이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가벼울 것 같으면 궂이 벗어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짐이 안되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출가 개념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짐들을 더 더 더 짊어지고자 합니다.

무슨 통뼈도 아니고 그 많은 짐을 더 많이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 났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실 정도입니다.


사실은 이 말씀은 상대적인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쉬운 짐이란 있을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모든 인간은 무거운 짐을 져야지만 살도록 되어 있는

갇혀있는 상태를 만든 것이 바로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일부러 우리 인간에게 짐지우고서는 자신에게 맡기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번 주에 어머니랑 교회로 출발하기 직전에 둘이 깔깔거리면서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습니다.


어무이 등에다가 제가 빨대를 꼿는 듯 시늉을 하고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등에 빨대 꼿고서는

쭉~쭉쭉~ 쭉 쭉 살아있네 살아있네 예수님의 피가 살아있네 라고

빨대 빠는 흉내를 낸 겁니다.


그러니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뭐그리 짐들이 많아서 투덜 투덜 거리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부끄 부끄가 되면서

염치 없게도 우리는 예수님 등에 빨 때 꼿아서 빨아먹어야만 살수 있도록 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도착적인 집요한 십자가 사랑인 겁니다.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지난 시간처럼


바로 이 관계성을 말하는 겁니다.


교회가는 길에 아무 책이나 집어들고서 버스안에서 보다가 또 어려운 내용을 하나 발견 했습니다.

뭐야 뭐야 뭐야 !!


범죄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교환 증여다?


아마 과거에는 물론 요즘도 죄를 짖고 난 뒤에 벌금을 내는데

그 벌금이 일종의 교환가치라는 증여(선물)의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인데


거기에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제 3자가 있다는 겁니다.

아마 법관이나, 악마. 또는 제3자로써 얼마든지 있을수 있는 존재를 말하겠지요.

아마 벌금을 규형하는 국가 또는 사회 또는 타자 또는 그 타자란 없다는 실재계 등등


그래서 범죄는 죄를 짖는게 아니라

되돌려주는 반환, 벌금으로 주게되는 교환, 증여라는 겁니다.


죄가 돈이 되는 겁니다. 돈 돈 돈.


즉 범죄 자체가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뭔가를 소통케 한다는 겁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를 보세요

이건 뭐 다섯여인이 제대로 소통을 하기위해

막힌 담을 한방에 뻥 뚫어버리는 겁니다.


제사장은 어서 죄를 가지고 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자신의 기능은 죄를 만나야 발휘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신났을까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죄를 가지고 오라고 하지만,
인간 제사장들은 자꾸 돈 가지고 오라고 아우성 치는 겁니다.


십자가는 이것이 무한 집행 유예라는 계류의 기술 곧 종말에서만 나타난다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의 족보는 이래서 다섯 여인 ~ 에게서 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 다섯 여인의 지혜가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그러니 범죄는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환 증여인 셈입니다.

십자가 속에서만 나올수 있는 발상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돈 가지고 오라는 데
며느리 다말은 죄를 가지고 온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돈이 되길 바랬는데
예수님은 때려죽어도 돈 안주시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라고 가볍게 하십니다.

예수 안에는 금과 은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썩지 않는 것을 주십니다.


(행 3:1, 개역)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개역)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개역)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개역)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개역)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7, 개역)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 3:8, 개역)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행 3:9, 개역)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행 3:10, 개역)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행 3:11, 개역)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행 3:12, 개역)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3, 개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행 3:14, 개역)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행 3:15, 개역)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 3:16, 개역)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가 없는데

죄인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니

죄인 이기 때문에 의사를 제대로 만나는 겁니다.

차라리 소경이였더면 고침 받을텐데
소경이 아니라고 하니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일리가 없는 겁니다.


즉 기능상으로써 짝꿍 공명 정념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곧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입니다.
거룩이 온 몸을 감싸기 때문입니다.
거룩 안하고 싶어도 거룩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불을 등경아래 두거나 그릇으로 덮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저에게 자신의 고민을 틀어놓기도 한 본문입니다.

도통 무슨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겁니다.


당연히 빛이란 위에 두도록 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집에 있는 형관등 백열등 모두다 머리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 일까요? 맞습니다. 빛이란 태양의 기능처럼

위에서 발산함으로써 비추이고자 하는 어두움을 제거하고 들추어내고 물러나게 함으로써

일종의 경계로 분리 작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머리 위로 위치하면 할수록

그 기능은 증폭이 됩니다.


바닷가의 등대도 같은 위치입니다.

등대를 잠수정으로 만들어 바다 밑에 설치하면

수면 위의 배가 무슨 수로 그 등대를 보고 길을 찾겠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게 아니라

도리어 무거운 짐을 더 짐지우는 식이 되는 거죠.


그러니 가볍고 쉽게 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높은 위치에서 빛을 발산해야

어두움 속에 있는 배들이나 인생들이 그 빛으로 길을, 답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관계성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룬 입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갈려고 하니

비집고 나갈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관계에 놓여진 겁니다.

이런 밀집상태에서는 놀랍게도 군중 속의 고독처럼

촘촘한 밀집 상태에서의 감각이 밀리고 밀리는 그 상태를 대중들을 사랑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군중 속에 안도감을 가질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싸우면서 쟁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허 해져

가장 안전 지역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순간에 가장 공허한 고독감을 최고조가 되어 자살을 한다든지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등등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즉 몸이 전혀 내가 원했던 몸이 아니다는 겁니다.

정상에 올라섰고

그 목표점에 다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남들은 지금 부러워서 난리인데

정작 본인은 허해져 버리는 겁니다.

곤고함이 이루 말할수가 없는 겁니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 이유는 자신의 몸이 예수님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몸인줄 모르고

엉뚱한 몸으로써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자꾸 신에게 가차이만 근접해 있으면 된다고 본 겁니다.
결국 신은 커녕 돈이라는 썩는 재물, 썩는 냄새나는 명예,
썩어 비닌내가 온 천지를 뒤덮는 자신의 의로움만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겁니다. 마치 후쿠시마 원전처럼 말입니다.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가까스로 예수님께 다달아
예수님!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했건만

퇴짜 맞는 아주 아주 차갑고도 냉소적인 발언을 듣게 됩니다.


아니 누가 나의 모친이며 나의 형 동생인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자가 아니냐? 


라는 겁니다.


혈족 친족이라는 것은 제 일의 최고의 방어적인 나의 변호장벽입니다. 보호막이요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익관계가 순탄지 않으면 가장 헐뜯고 물어뜯게 되는
무거운 짐 중의 가장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가족입니다.
오죽 하면 원수지간 입니까?

명리학에서는 상극이라고 하던가 하지요.
심지어 부부 지간도 상극이라고 하니 
적과의 동침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런 무거운 짐을 다 혼자 다 짐지겠다는 냥

그 혈족인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이 무슨 배짱인지, 무슨 똥뼈도 아니고 말야?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지킬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전혀 무거운 짐을 질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셈이겠지요.

그럼 예수님은 결국 꼼수를 부린 것이겠지요?


맞잖아요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지킬자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입이 아무리 수천억 억 억 개가 있어도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 이왕 한 번 뒤짚어 엎은 것

더 한 번 전복시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쪽에서 말씀을 지켜서 우리에게 그 말씀을 다 이루어 완료한 그 선물을 우리에게

아무런 값도 없이 공짜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애초부터 없는 상태로 태어난

그 관계성에 놓여진 것이다는 겁니다.


이것의 성령의 소욕으로써 알게된 새로운 관계성이고


그 성령의 소욕이 규정하는 육의 규정은

아무리 아무리 가볍게 살려고 노력해도

무거울 수밖에 없는 짐을 지는 것이 육적인 관계의 이익관계이다는 겁니다.


결국 마귀를 드러내고 자 하는 삶입니다.

마귀 라고 하면 추상적이고

어떤 구체적인 인물이라서 싫어하겠지만

정작 그 마귀를 잘개 잘개 깨부수어서 가루처럼 만들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어넣으면

그것을 자아 라고 할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도 몇몇이 눈치를 채서 무자아를 백날 추구해도

오히려 연기를 하고 있고, 짐만 더더욱 늘어날 뿐입니다.


처음부터 마련된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누가 나의 동생이냐? 라는

새로운 관계성은

결국 그 이전의 육적 관계성, 혈통적 관계성을 지적하면서

단절로써 두 세계의 소유성을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할례란 꼬추 끝을 짤라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백날 손으로 짤라내 보세요

마음판의 할례는 손이 닿기는 닿냐 말입니다.

불가능성의 영역을 말하기 위해서

손으로 하는 할례인 그 그림자를 먼저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실체를 못보는 이상 백날 그림자 들따 본들 의미 없는 겁니다.

그림자라는 화살표(몽학선생)를 따라 실체를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불가능성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지나 개나 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십자가가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십자가 본인이 자신의 믿음을 펼치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바울 죽이기처럼

매일 매일 족쇄채워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이건 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는 말이 왠지 거짓말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무거운 짐이요 무거운 족쇄인데 말이지요.


결국 오늘 본문도 사실상 족쇄채우겠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무거운 짐이 가벼워 졌던가요?

베드로가 무거운 짐을 덜게 되던가요?

아니지요?


갑자기 삼손처럼 힘이 세게 되니까

가벼워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수수께끼 비밀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진짜 어머니를 어머니로 안 모시겠다
아니 전혀 새로운 관계성을 맺겠다
네 좋다 좋습니다만
그럼 왜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관계를 맺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족쇄가 아니고 뭐냐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결과가 좋으면 인간은 참 잘했습니다 라고 그냥 넘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겁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자신 만만이 너무 너무 충만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너희가 날 사랑한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삼손이 비로소 눈알 뽑히고 머리카락 다 짤리니까

무거운 짐을 벗게 되는 겁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러니 죽는다 죽는다 라고 자꾸 하니까 싫어하시는데

사실상 죽음 보다 제일 가벼운, 그 무거운 짐을 벗는 길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죽음이라는 공포를 두려워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또 이래 말하니까

어떤 놈이 너 집 주소 불러봐라 당장 찾아가서 너를 잔인하게 죽여주마 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놈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즉 사랑이 없었으면

살인이라는 본인도 감당 못할 짖을 기여이 하겠다는 겁니다.


죽으면 사라지니까 의미가 없겠지만

남아 있는 본인은 그 얼마나 무거운 짐을 간따나 무거운데 더 큰 짐을 왜 지냐? 말이지요.

도망쳐야죠. 죄책감 견뎌내야죠. 주변 모든 육적인 관계가 돌변하지요.

본인도 본인이 감당이 안되어서 자살할려고 하겠지요.


화나는 거야 1초도 안걸리니까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정작 그 결과는 엄청난 겁니다.


그러니 언어나 말에 속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가 들어간 숙주들의 모습인 겁니다.


사랑이 없기에 두려워서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관계성을 들추어내는 식으로써

씨뿌리는 비유는 너는 누구와 관계된 자냐, 땅의 속성이 뭐냐 이듯이

너의 주인은 누구냐를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관계성으로써 증거되는 복음입니다.


저 쪽에서의 살기는 살기 축에도 끼이지 못합니다.

이 쪽이 더 살기가 넘치기에 얼마나 냉냉한지 이루 말 할수 없을 정도인 겁니다.


누가 내 어미요 내 형제냐?


이 말은 너희가 나 보다 어미를 사랑하거나

형제를 사랑한다면 내게 합당치 않다 라는 겁니다.


오직 새롭게 예수님의 피로써 맺어진 관계만 따지겠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 때문에
새로운 피 가족의 재편성 때문에

갈라짐과 분리되는 작업으로써 사건들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즉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나를 제대로 지옥 보낼줄 모르는 예수는 가짜다 라는 겁니다.


이것보다 관계성을 제대로 표현한 말이 없다고 저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관계성을 말할 때

나는 제대로 구원 시켜주는 자가 진짜 예수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나를 제대로 심판 할 줄 모르는 예수는 가짜다 라는 말이 더 관계성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진짜 어머니요 진짜 형제지간의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 왜 예수님 보다 어미인 나를 왜 더 좋아하느냐 라고 다구칩니다.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눈에 보이지만 

예수님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어머니 먼저 챙기는 것이 맞잖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나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인연 끊자 라고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나오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얼마나 살벌한 표현입니까?


너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넌 죽은 거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역할인 겁니다.


동생도 형도

주변은 친인척은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 부부 지간에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면
이것은 매일 매일 그야 말로 전쟁이 되겠지요?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보다 더 심합니다.


자!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진짜로 이렇게 행하는 자들이 막생깁니다.


과연 실천하라는 말일까요?


이 말을 빌미로 삼아서 사기치는 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함의 문제로 빠져버리면

미친놈들이 한둘이가 나타나는게 아닙니다.

그러니 성화론도 웃기는 놈들이지만

막살기를 실천하겠다는 놈도 일종의 같은 성화론자들과 같은 놈들입니다.

막살기는 실천의 행함 문제가 아니라,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자기 주인들 드러내는 의미로써의 관계적인 의미 입니다.

실천하는 본인에게 결국 관심가게 되는 줄을 모르고 하는 짖이니까 자꾸 실천할려고 하는 겁니다.


너희는 안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냥 막살던 대로 막살아라 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막사는게 아니라

원래 그냥 했던 대로 말입니다.


관계성은 나의 행동의 변화성으로써 바뀌어지는게 아닙니다.


그러면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관계성이 달라집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둘다 다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겠다는 것이 불교 아닙니까? 불교는 행동이 아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러니 마음으로 하겠다고 합니다. 웃기죠. 어차피 둘 다 불가능한데

마음판의 할례를 기여이 시도를 하겠다는 심뽀 자체가 강퍅함입니다.

손 할례가 아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마음판의 할례를 시도하겠다는 거죠.


주님 안 속습니다.


할례 개념은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는 겁니다.

내 쪽에서는 안 적도 없고, 시도한 적도 없고,

뭔지도 모르면서

갑자기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육의 생식기를 다 짤라내 버리는 겁니다.


그럼 그 단절 속에서는 일체 생산력은 전무하게 됩니다.

바울 죽이기 처럼 바울 보세요 맨날 족쇄 채워지고 몸은 쇠사슬에 메이고 말입니다.
죽은자와 방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임신한적 없는 태에서 무수한 자녀가 별과 같이 되며

도리어 많은 자녀를 낳은 태는 무자하게 된다는


이 상황까지 가야 진짜 할례개념이니


과연 불교에서 마음판의 할례를 행함으로써

아무 연고 없는 무죄한 자들이 졸지에 많은 자식을 다 잃어버리고

죽게 되었을 때 짐이 가볍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더 무거워져진 겁니까?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아니 이 짖을 자꾸 기독교라는 종교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벌리고 있습니다.

불교가 하는 짖을 말입니다.


수태치 못한 자가 해산하지 못한 배와 젖을 먹여본적이 없는 젖이 더 복도다 라는 상황이 다 이루어져야 할례완성입니다.


마음판의 할례란 이런 의미입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냐?


이런 상황까지 간 여성만이 진짜 어머니 아닙니까?

도대체 이런 여성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다 누락 되어야지요.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어머니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단 한사람도 형제가 없습니다.


이 단절성 속에서


어 어 어 전혀 다른 새어머니가 보입니다.

어 어 어 전혀 다른 심판 속에서 나타난 형제가 보입니다 


라고 외치게 되는 겁니다.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 자 만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겁니다.


불 속에서, 심판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어머니와 형제만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입니다.


자 그렇다고 또 자기가 불 피워서 그 불 속에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심판 속에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심판이 없는데?

다 가짜 불이요, 다 가짜 심판일 뿐인데?

왜 쓸데 없는 짖을 하느냐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다 조건 갖추기 이지요.


관계성이란 무조건입니다.


육의 관계성은 자아라는 나를 기준으로 한 이익관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서 태어난 자의 관계성은 

예수님의 피를 기준으로 한 성령의 소유성입니다.


그런 예수 안에서는 내 어미요 내 형제인 겁니다.


그런데 이 예수 안을 우리 육이 감지를 하지 못하기에

그냥 사시면 됩니다.


괜히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나의 형제로 삼아서 퍼줄 것 다 퍼주다가

속아넘어간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러니 목사들이 자꾸 등쳐먹는 겁니다.


결국 그것도 이익관계였던 겁니다.

그러니 그냥 이익관계로 사세요

새삼스럽게 이익관계로 안 살겠다고 우기지 말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취지는

관계성을 내 쪽에서 만들어 낼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이전의 육의 관계로써는 이 쪽 세계로 잇기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우짜라꼬?  내 어머니 여기 있는데 !!!


두 어머니가 생긴겁니까?

아니면 어머니가 없다는 소리입니까?


예수님이 말씀을 다 완성하심으로써 새로운 가족의 관계성이 형성되는

새기준이 생겼다는 겁니다.


새기준의 관계성

이 자체가 생겼다는 자체가

예수님께서 나와 관계성을 맺겠다는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주님의 고집이다는 겁니다.


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있제? 내한테 맡겨라 라는 겁니다.


저 며느리가 나의 짐이고요, 말 디기 안 듣는 내 아들이 무거운 짐입니다

오냐 내게 맡겨라 내가 처리하마 아주 아주 가볍게 하마


라고 주님이 어떻게 하는가 봤더니


아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며느리도 죽여 버립니다.


그 죽은 며느리가 세상에나 나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골치 아픈 나의 아들은 내가 되어버린 겁니다.


즉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아주 아주 가볍게 하셨습니다.


아주 엽기적이지요?

당황하셨나요?

분명히 며느리의 시아버지 였는데, 며느리의 남편이 되었으니 많이 놀라셨지요.

저도 망나니 아들의 아버지였는데, 그 망나니 아들이 제가 될 줄을 미쳐 몰라서 많이 놀랐습니다. 



이것이 할례 개념입니다.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는 겁니다.


탕자 만들기, 죄인 만들기. 죄인 중의 괴수 만들기 라는 주님의 숙제 입니다.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이게 되나?


기독교의 악마성이 바로 이겁니다.

이해가능하고

실천가능성으로 바꾼다는 것

그것으로 자꾸 세뇌를 시키는 겁니다.
그 핑계가 자꾸 교회유지라는 말로, 의미로, 등쳐먹겠다는 겁니다.


복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단 한 개도 없습니다.

하지 마세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할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요 기쁜소식이요 복입니다.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니까

오죽 안되니까

자꾸 손 대는 겁니다.


견디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들입니다.


제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니 목사말 듣는 놈들을 보면

그야말로 마귀가 들려도 한 참 들렸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다 쫏아내더라 말입니다.


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도 안듣는 인간이

목사말에는 끔뻑 넘어가는지

도통 이해가 안됩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저도 거짓되고

다 거짓된 겁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한 관계성이 아닌

육으로 맺어진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꿔 맺은 관계성을 추구했기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더 큰 육적인 관계 맺겠다고 가족을 만들고 있으니

단단히 귀신 씌인거죠.


모래 하나에다 수천 모래를 모아 본들 맨 마찬가지로 모래일 뿐입니다.

그렇게 많이 모은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온 쓰레기 땜에 그 악취로 인해 무거운 짐만 더 늘어갈 뿐입니다.

그 버릇, 그대로 육적인 강퍅함을 더 더 더 드러낼 뿐입니다.


빛은 나의 머리 위에 높이 위치해 있습니다.

내가 손으로 닿을수 있는 빛은 나의 손에 놀아나는 빛이기에

언제든지 자기마음대로 그릇으로 덮을수 있습니다. 수평관계 입니다.


진짜 빛은 내가 손 댈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수직관계 입니다.

내 손으로 조작이 불가능한 빛이야 말로

나의 어두움을 제대로 비출줄 아는 진짜 빛입니다.

나의 빛나는 모습을 비추는 빛은 악마의 조작물입니다. 그런 신들 말입니다.
나의 어두움을 제대로 콕 찝어낼줄 아는 빛이라야 제대로 된 빛입니다.

(요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내가 맺고자 하는 관계성을 일일이 다 짤라버립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그랬습니다.

내가 원하는 관계성을 형성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가장 싫어했던 자, 가장 미워 죽겠는자를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위치에 놓게 하시는

주님의 가볍게 하심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싶어도, 가볍게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나 돌아갈래가 안되는 겁니다. 너무 너무 가벼워져 버린 겁니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는

며느리 다말 덕분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들어가게 된게 아닙니다.
그런 혈통 다 짤렸습니다. 며느리 다말 ~~ 에게서 말이지요.

아니 사랑하는 아내 다말  ~~ 에게서 말미암아 말입니다.

선민이라서 가 아닌, 그러면 할례가 아니라

육적으로 운좋게 태어난 것이지요.


바로 그 운 좋음 곧 선민사상 선택설 그것을 자기 힘으로 유지할려고 하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작살이 난 겁니다.

왜 쓸데 없는 무거운 짐을 지느냐 말입니다.

몽땅 뻬앗겨서

가볍게 된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부조리 방식 때문에 산 겁니다.


혹부리 괜히 달고 있는 것을

도깨비 방망이 라는 부조리 때문에

씨앗이라는 부조리 때문에


아주 아주 가볍게 혹부리를 때게 된 겁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른 혹부리가 그거 흉내내다가

쭐꾸덕 미끄러져서

혹이 도리어 두 개 달게 된 것이지요.


감히 텅빈 간격의 영역을 매꾸어 넣을려고 하다니

보이지 않는 비워있는 영역을 왜 손댈려고 합니까?


빛은 머리 위해서

빛 스스로가 알아서 합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그 빛을 가지고

비추고 싶은 곳만 비출수 없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그래 봤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더 지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규정한 어두움을 백날 들추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 죽여본들

그것은 교환 가치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어서 고인 물이라는 것을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

두려움에서 비롯된 율법의 돌삐를 든 것일 뿐입니다.


정작 본인이 그 빛에 비추임을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졌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보다 더 한 죄인으로써

도리어 잡혀야 할 죄인 중의 괴수이어여 합니다.
잡혀야 할 판국인데? 도리어 잡겠다니 말이 됩니까?

주님의 용서에 감히 감히 슬퍼할 시간도 없이 기뻐 뛰며 노래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돌 삐 들 시간이 어디있나요?

지금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기 바쁜 판국인데


그야말로 페스티발 잔치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자가 많이 빵조각을 덮썩 찢으면서

감사하게 먹습니다. 먹방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막먹고 막마시는 먹방 말입니다.


오늘도 어머니랑 제가 키득 키득 웃으면서

배꼽잡았습니다.


예수님 등에 빨 때 꼿아서

뻔뻔스럽게 엄마 젖 빨고 있는 젖먹이처럼

어머니께서 예수님 피가 이렇게 맛 있을줄 몰랐다고 말입니다.











잠시만요, 하나님 언니! 사과 하고 가세요 (눅 8: 1-18)

2013/09/06 14:37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잠시만요, 하나님 언니! 사과 하고 가세요 (눅 8: 1-18)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씨앗 비유



(눅 8:1, 개역)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눅 8:2, 개역)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눅 8:3, 개역)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4, 개역)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8:5, 개역)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눅 8:6, 개역)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 8:7, 개역)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눅 8: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8:9, 개역)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눅 8:10, 개역)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눅 8:11, 개역)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2, 개역)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 8:13, 개역)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 8:14, 개역)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눅 8:15, 개역)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16,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7, 개역)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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